<마의> 백광현 뒷이야기 63 - 백광현의 개복 수술에 대해
화요일 49회 방송의 수술 장면은 좀 쎄긴 쎘다.
처음 대본을 볼 때에도 '이번 회는 의학 에피가 좀 쎄다!' 싶었고
'아, 이거 연출이 어느 정도로 되려나...' 싶은 생각이 그 다음 들었으니깐.
글이 아닌 눈으로, 화면으로 막상 보니 과연 놀라왔다.
사극에서 등장할 수 있는 모든 충격적인 설정이 총집합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일단 환자부터가 최고로 쎈 분이다.
영통교의 거렁뱅이도 아니고, 여염 집 아낙네도 아니고, 사대부 집 정승이어도 놀랄 판인데
조선 땅에서 최고로 귀하신 분인 임금님이 환자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더욱 충격이었다.
게다가 환부가 팔다리도 아니고 장기가 모여있는 복부였다.
이 복부를 열어젖히고 수술을 한다는 것은 정말 놀랄 노자였다.
그 뿐인가? 개복을 하고서 대장을 주물럭거리고
임금님 목구멍에 호스를 넣고서 파란색 물을 주입한 후에
대장의 터진 곳을 쥐어 짜면서 찾는 장면 또한 아... 정말 쎘다.
공중파 TV에서 지금까지 등장한 사극의 그 어떤 장면보다 강하고 쎈 설정이었다.
화요일날 밤에는 나도 충격...
수요일날 아침에는 여기저기 기사와 댓글 보고서 화딱지가 막 나고...
수요일날 밤에는 왠지 좀 웃기고...
목요일날이 되니 이제 정신이 들었다. 이거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구나!
얼른 진실 관계를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요일이 아님에도 글을 쓴다.
의문점 1> 실존인물 백광현이 정말 개복 수술을 했나?
가장 많이 드는 의문점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자, 몇 가지 기록을 가져와 보겠다.
이건 백광현이 한 처녀의 병을 치료한 기록이다.
번역 : 처녀가 복부에 병이 들엇는데 여러 달이 되도록 침과 약이 효과가 없었다.
(중략)
종침(腫鍼)으로 배꼽 옆을 째고서 곡침(曲鍼)으로 길이가 1자(30cm) 정도 되는
흰색의 벌레를 끄집어 내었다.
여기서 종침(腫鍼)이란 단어부터 좀 살펴 보자.
침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지금 한의원에 쓰는 침은 아주 가는 호침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여러 종류의 침을 썼다. 그 중 종침이란 종기를 쨀 때 쓰던 침이다.
이 종침의 모양과 용도에 대한 기록이 있어서 가져와 본다.
색칠이 된 부분 위주로 보면 된다.
조선에서 쓰던 종침에는 크기에 따라 대중소가 있다는 것이고
그 중 대종침은 너비 5푼, 길이 5촌이라는 것이다.
지금 단위로 환산하면 너비 1.5cm, 길이 15cm 이다.
흔히 쓰는 15센티 자를 세로로 반 쪼갠 정도 크기라고 상상하면 된다.
상상하기 힘들까봐 실제 유물로 남겨져 있는 것을 또 가져와 본다.
사진 출처 : 한독의약박물관
이렇게 생긴 것이 종침이다. 백광현이 위의 처녀를 치료하기 위해 쓴 침은
바로 이렇게 생긴 침이라는 것이다. 지금 한의원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가는 호침이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곡침(曲鍼)은 또 뭘까? 갈고리처럼 끝이 굽은 침이다.
그런 침도 또 있단 말인가? 있다! 내가 여기 증거를 제시한다.
사진 출처 : 개인이 소장한 유물이다. 이 사진은 퍼가지 마시기를 부탁한다.
실제 유물로 남겨져 있는 갈고리 모양의 침이다.
백광현이 위의 종침으로 어느 처녀의 배를 짼 후에 위의 곡침으로 30센티 길이의
괴이한 물체를 끄집어 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실존인물 백광현이 개복을 한 것인가, 안 한 것인가?
또 한 가지 사례를 더 가져와 보겠다.
번역 : 우측 하복부가 찌르듯이 아팠는데 한 달 가량을 의사들이 치료해도 효과가 없었다.
공이 진찰한 후 말하기를 '이는 충(蟲)으로 인한 병이다. 담(痰)이 막히고 변하여
통증을 일으키는 것이다.' 하고서
마침내 종침(腫鍼)으로 째고 곡침(曲鍼)으로 한 마리의 벌레를 꺼내니
형체가 크고 길이가 1자(30cm) 가량 되었다.
이 역시 어느 여인을 치료한 사례이다. 치료 방식은 위와 비슷하다.
하복부의 어느 곳을 종침으로 째고 곡침으로 괴물체를 끄집어 내었다.
그렇다면 실존인물 백광현은 개복을 한 것인가, 안 한 것인가?
이 정도 증거라면 백광현이 사람의 배를 가르는 개복(開腹)을 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나?
한 10센티는 절개해서 열어 제껴서 대장소장을 주물럭거려야 개복이 아니냐고?
실존인물 백광현은 정말 그랬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가 의사 초기 시절에는 '침술이 지나치게 맹렬하여 사람을 죽였다'고 전해진다.
(用鍼過猛 或至殺人 용침과맹 혹지살인)
도대체 사람을 죽일 정도로 맹렬한 침술이었다면 어느 정도를 어떻게 찌르고 쨌단 말인가?
오장육부를 찌른 것일까? 혈관을 잘라서 지혈이 안 되었던 것일까?
구체적으로 기록이 없으니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가 초기에 경험이 일천했을 때에 사람이 죽을 정도로 과도한 침습을 했단 얘기이다.
그러면서 어디를 얼마나 길게 혹은 얼마나 깊게 째고 자르고 찔러야
'살인'이 아닌 '치료'가 되는지 알아갔을 것이다.
어느 정도로 깊이, 어느 정도로 길게 침을 사용해야
조선 시대라는 환경에서 수혈이라는 보조 장치가 없이
환자를 죽이지 않고 살리는 그런 치료를 할 수 있는지
자신 만의 '개복 수술 프로토콜'을 개발했을 것이다.
그 개복의 길이나 깊이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거기까지 적혀있지는 않다.
하지만 위의 사진처럼 종침으로 복부를 찔러서 곡침으로 복부 내의 어떤 괴물체를 찍어내기 위해
최소한의 시야가 확보될 수 있는 절개의 길이가 얼마 쯤일까 생각해 보니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5센티 내외는 절개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건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견해이다. 이보다 더 짧았을 수도 있고 더 길었을 수도 있다.
답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인선왕후의 뒷목을 12센티 절개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3센티에서 10센티 범위가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참고로 조선 시대에는 기생충 질환이 많았던 것 같다.
기생충이 몸에서 살고 있으면 사람 몸의 조직을 뚫고 다니며 장부를 이동하고
심지어는 뇌에까지도 이동한다.
위의 사례는 환자의 몸 속에 기생하는 30센티 길이의 어떤 기생충을
복부를 절개하고서 꺼낸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의문점 2> 조선 시대에 장 봉합이 가능했나?
임금님의 터진 장을 꿰매는 장면 또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실존인물 백광현이 장을 봉합했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전국민이 다 아는 한의학 의서인 동의보감를 위시하여 몇 군데 의서에
칼에 찔러 잘려나간 장을 봉합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쇠붙이에 상해서 장이 끊어졌을 때에는 상처의 깊이를 보아야 죽겠는가 살겠는가를 알 수 있다.
끊어진 장의 한끝만 보이면 이을 수 없다.
(중략) 끊어진 장의 양끝이 다 보이면 빨리 이어야 하는데 봉합하는 방법대로 끊어진 장을
꿰맨 다음 닭볏의 피를 발라서 기운이 새지 않게 하고 빨리 밀어 넣어야 한다."
물론 장이 끊어진 것을 이을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의사가 많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저 손 놓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 이름이 일일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칼에 찔려 장이 잘려서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고자 한 의사들이 있지 않았을까?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엄청난 수의 외상환자를 치료해야 했다.
이렇게 전쟁을 겪으면서 외상 치료에 대한 치료 기술이 발달했으리라고 본다.
그게 시대적인 필요였으니까.
물론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이 장 봉합이지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조선 시대에 이런 정도의 능력이라면 대단한 의사인 것은 사실이다.
마의 49회 편에서는 그러한 능력을 드라마 속의 백광현에게 부여한 것이다.
의문점 3> 물을 목구멍으로 부어서 터진 장 부위를 찾아내는 방법이 있었나?
사실 이건 의서의 기록을 작가팀에서 응용한 것이다.
목을 칼에 찔려서 기도 혹은 식도가 잘렸을 때 이를 봉합한 후
과연 봉합이 잘 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할 때 환자로 하여금 물을 마시게 한다.
만약 봉합한 식도에서 물이 새어 나오지 않는다면 잘 봉합이 완료된 것이고,
그렇지 않고 물이 잘려진 식도 부위에서 새어 나온다면 꼼꼼히 봉합이 안 된 것이다.
"무릇 목구멍을 찔린 경우 실로 안쪽의 후관을 먼저 봉합한 후 바깥쪽의 후관을 이어서 봉합하고
봉혈약을 쓴다. (중략) 만약 후결의 상처가 심각하고 연후가 끊어졌으면 치료할 수 없다.
후결 아래의 식후관이 끊어졌다면 물을 줘보아서 창자로 들어가면 치료할 수 있고
밖으로 나오면 치료할 수 없다."
"스스로 목을 벤 것을 치료하는 법 : 어떤 사람이 도적을 잡다가 그만 분하여
자기 목구멍을 베어버려 피가 솟구쳐 나왔다. 상백피로 봉합한 후에 시험 삼아 물을 마시게 하니
물이 흘러 나오기에 그 빈틈을 봉합하였다. 사람들이 죽겠구나 말하였다.
석회를 따뜻한 물에 개어 바르고 궁귀탕 십여첩을 내복하니 수십일 만에 나았다."
이 방법을 대장이 터진 부위를 찾아내기 위해 물을 먹이는 것으로 응용한 것이다.
잘려진 식도도 봉합하는데 잘려진 장도 봉합할 수 있지 않았겠나?
뒷이야기의 뒷이야기 1>
저는 의사학(醫史學)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실 관계 여부를 잘 따지기도 합니다.
이러저러한 주장을 하려면 주장의 근거가 되는 역사 속의 기록을 반드시 제시해야 하죠.
하지만 드라마는 좀 다르더군요. 기본적인 것은 사실에 근거하되
거기에서 좀 더 과장이 들어가야 '스토리'가 만들어지더군요.
드라마가 논문은 아니니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대본도 이미 과장이 들어가는 데다가 연출에서 또 과장이 들어가므로
결과적으로 화면에서 보여지는 장면이 그 어떤 사전 지식도 없는 시청자의 눈에는
그야말로 황당무계해질 수 있겠구나 싶어요.
처음에는 49회 방송이 왜 이렇게 쎄게 대본과 연출이 되었을까 싶긴 했는데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히려 잘 된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역사 의식 운운하는 기사에 달린 댓글의 갯수를 보니 지금까지 마의에 관한 그 어떤 기사보다
댓글의 수가 많더군요. 엄청 나더군요. 예상대로 주로 악플이었고요. ㅎㅎ
왜 노이즈 마케팅을 하는지 이번에 확실히 체감을 했네요.
현종 임금께서 실제로 그런 식의 개복 수술을 받았다고 믿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백광현이 현종의 배를 가르고 장을 주물럭거렸다고 믿는 분은 설마 없겠죠?
하지만 이렇게 쎄고 과장되고 충격적인 수술 장면이 방영됨으로써
'한의학에 과연 개복 수술이 있었나?' & '한의학에 과연 장 봉합이 있었나?' 라는 것에 대한
엄청난 호기심과 의구심이 생긴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마의> 관계자 분들에게 이런 분란(?)을 일으켜 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 듯 싶어요.
결과적으로 마의 49회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최고로 재미있었습니다.
뒷이야기의 뒷이야기 2>
한분한분 소중하신 제 블로그 방문자님들!
이 글의 내용에 동의하신다면... 이 글 블로그 링크 좀 많이 퍼트려 주세요.
http://blog.daum.net/shbang98/154
마의의 수술장면들이 좀 과장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허무맹랑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얘기들이 나올 것에 대비해서 이 블로그를 만든 것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마의를 욕하는 네티즌을 만나게 된다면 제 블로그 링크 좀 많이 퍼트려 주시기를 엎드려 당부드립니다.
드라마 <마의> 주인공 백광현은 실제로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의 행적을 찾아 조선의 기록을 다 뒤졌다.
그의 놀라왔던 의술과 환자를 사랑했던 마음과
임금에 대한 충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의 이야기를 도저히 그냥 묻어둘 수가 없었기에 글을 썼다.
《조선 최고의 외과의사 백광현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