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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묘행무주 원문보기 글쓴이: 묘하
청담스님의 금강경 강설 - 62
청담스님이 함께 정화운동에 참여할 것을
간절히 권유했지만 성철스님은 산중 수행승으로 남았다.
그것은 이 땅에 선풍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청담스님이 그릇을 제조했다면
성철스님은 그 내용물을 만들었음이었다.
정화운동 기간에 두문불출했던
성철스님을 두고 여기저기서 시비를 걸어올 때
이를 막아준 이도 청담스님이었다.”
[說 義]
배움도 얻음도 없다
세간에서는 국민학교로부터 대학을 나와서 결혼을 하고 사회에
진출(進出)하는 개체성장(個體成長)이 확실히 있습니다.
그래서 졸업한 학교가 있고 배운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을
평생토록 기억하여 이용을 해야 하는 소득(所得)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법(佛法)을 배우는 것은 불법의 맨 첫자부터,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부터 배울 것도 없고 수도할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무소득(無所得)을 목표로 합니다.
제구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에서 말한 소승불교의
수다원(須陀洹) . 사다함(斯陀含) . 아나함(阿那含) . 아라한(阿羅漢)이
다 내가 「아라한」이란 생각이 없고 맨 처음부터 불교의 원리를
배워서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미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최면(催眠)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강제최면(强制催眠)하는
정도까지만 돼도 내 정신이 통일되어 있거니 하는 관념(觀念)이 없습니다.
정신통일이 되어 있지만
통일된 줄도 모르고 있고 그런 생각 가질 필요도 없고 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가르치는 사람도 아무것도 배울 것 없고
깨달을 것도 미할 것도 없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선지식(善知識)이나 보살이나 부처님도 다 그런 사상(思想)입니다.
완전한 대성자(大聖者)가 되기 전에는 감기 몸살이 들면 쌍화탕(雙和湯)이라도
먹어야 하고 병원에 가야겠구나 하지만 쌍화탕 먹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건강하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듯이
불법 배우는 것도 육체가 무슨 소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래의 마음자리 그대로가 부처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자는 것이 목표입니다.
나머지는 다 허튼 소리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해라 하는 것도 부득이 해서
다른 종교에서 처럼 천당(天堂)에 가서 늘 편안하게 살려고
하나님에게 어기지 않고 늘 복종(服從)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지도자의 부하(部下)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모르던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마음자리 그대로가 곧 진리이니
이 자리를 깨달아야 하겠다는 것을 확인할 때
비로소 불교 믿는 냄새도 나고
불교 믿는 신도이며 참다운 신행(信行)이고 그렇습니다.
금강경의 원리를 들어서 배운 그때부터,
공(空)의 도리(道理)를 증득(證得)해 놓은 그때부터 이런 경계가 나타납니다.
앞으로 금강경을 얼마를 더 배우더라도
우리가 배운 것은 남길 것 없는 것을 배우니까 남겨 놓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남길 것 없는 그 자리가 빨리 증득되지 않으니
이젠 듣는게 주장(主張)이지만 쓸데 없는 것 자꾸 듣는 것이고
간직할 것 하나도 없고 지식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견성(見性)해서 성불(成佛)한 뒤에만 그런 것이 아니고
견성성불(見性成佛)하기 전에도 아무것도 소득(所得)이 없는 것을 배우고
법(法)을 줄 것도 없고 애초에 주고 받고 얻어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보리 존자께서 실로 얻은 바 법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피장부아장부(彼丈夫我丈夫)
피장부아장부(彼丈夫我丈夫),
너도 대장부고 나도 대장부니 피차 똑 같은 부처자리인데
어쩌다 같은 사람끼리 한 사람은
곡차(穀茶) 잔이나 먹어서 비틀거리는 것 붙들어 주는 턱입니다.
술이 취해서 부처와 중생이 똑같은 자리,
똑똑하게 아는 그 바탕이 흐뭇해진 것 뿐입니다.
학문이다 지식이다 과학이다 종교다 하고 따지고 배우고 연구하며
내가 어떻게 하든지 남보다 잘 살아야겠다는 생존경쟁심으로 머리를 짜내고
잠을 안 자고 온갖 꾀를 내어 별별 짓을 다 하지만 이런 것은 다 그릇된
착각(錯覺)이고 지식의 장애라는 뜻으로 번뇌장(煩惱障) . 소지장(所知障)이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一切) 아는 것을
다 포기(抛棄)해서 지식을 초월했으므로
산이 높다는 생각 없이 산을 보고
쇠가 돌이나 나무보다 무겁다는 관념(觀念)이 없이
일체의 지식 . 망상을 다 초월해 버리고 나면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것을
다 초월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러면서 그것이 우주 전체(宇宙全體)인
자기 본래의 마음 자리를 깨치고 보면
먼 데 것도 아니고 가까운 데 것도 아니고 전체가 환히 다 드러난 것입니다.
요새 물리학(物理學) . 화학(化學) . 천문학(天文學)등의
과학(科學)이 환상(幻想)이거나 과거(過去)에만 있고
지금은 없는 것이거나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눈으로 볼 수 없고 증명(證明)할 수 없는 학문이 아니듯이,
우리 마음자리를 깨친 경계도 그와 같이 사무쳐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부처님은 과거사(過去事)를 다 아신다고 신통(神通)이라고 하지만
성불(成佛)하고 보면 사실은 본래 그런 것 뿐이고
모든 착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어서 종소리가 깡깡이다 땡땡이다 하고
듣는 그런 업을 해탈(解脫)했기 때문에 전에는
과거를 과거인 줄 알고 봤던 것인데 이제 보니 항상 목전지사(目前之事)입니다.
비유하면 어린 아이들에게 하나에 둘을 더하면
몇 개냐고 물으면 한 . 둘 꼽아 보고서야 셋인 줄 알고
어른들도 좀 복잡한 계산은 수학적인 지식을 빌어서 알게 되지만
부처님은 항상 나타나 있으니까 연구하고 셈을 해서 아시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를 분별하지 않고 즉각으로 아는 무분별지(無分別智)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일을 알되 더 잘 알고 종소리를 듣되 과거 중생인 때 듣던
땡땡 강강으로 들을 줄도 아시고 또 일체 중생이 그런식으로 듣고 있는 줄도 아십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강강으로 들으면 그렇게 들리기도 하고
그리고 강강 땡땡을 초월해서 종소리의 실상(實相)을
들으실 줄 아시는 것이 부처님이 우리보다 우월(優越)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꿈 가운데 들어가서도 자유하고 꼭 꿈 같이
꿈 사람하고 중생의 살림살이를 차리시기도 합니다.
예컨데 석가여래가 범부중생이 볼 때엔
밥 먹고 오줌 누고 대변 보고 저녁때면 잠자고 다 합니다.
그렇지만 도가 높은 보살님들이 볼 때는
부처님은 음식을 잡수신 일 없고 육신으로 부처님을 보는 것이
아니므로 부처님이 오신다 가신다 주무신다 그런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불보살님의 경지에서는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것이 한낱 환상(幻想)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과거사(過去事)를 알고 부처님이
신통(神通)하다고 하지만 성불(成佛)하고 보면 신통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에게는 현실 세계가 실재(實在)해 있는 것 같고
육도세계(六道世界)에 윤회(輪廻)하는 것이
사실인 듯 하지만 실상은 우리가 꿈속에서 천당(天堂)갔다,
지옥(地獄) 갔다, 돌아다니는 것이고 참말로 간 것이 아닙니다.
최면술(催眠術)에 걸린 사람이 몸뚱이는 가만히 앉아서
동경 갔다 왔다 하고 꿈을 꿀 때에도 몸뚱이는 가만히 놓아 두고
비행기를 타거나 날개를 붙여서 돌아 다니지만
전부 거짓말이고 꿈을 깨고나면 다 허사(虛事)입니다.
조신대사(調信大師)가 잠깐 동안의 꿈속에서
팔십년을 살았듯이 과거(過去)니 미래(未來)니
하는 것도 사실로 있는 과거 . 미래가 아니라 지금의 현재입니다.
불이 꺼져도 눈으로 깜깜하게 어두운 것을 보고
불이 켜져도 환하게 밝은 광명을 보는 것이니
어두운 때나 밝은 때나 보는 눈은 변동이 없고,
이 마음자리는 볼 때나 안 볼 때나 변하지 않습니다.
중생들은 미래 것은 모르고 과거의 기억(記憶)은 희미해져서
망각(忘却)해야 되는 것은 번뇌망상(煩惱妄想)으로 경계를 치고
그 틈바구니에 끼여 있기 때문에 망상 그것만이 나인 줄 알고
깨끗하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한 본체(本體)가 있다고 여간
설명해 줘 봐도 좀체로 인정(認定)할 생각을 내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망상이 어떤 자체가 있어서 능동적(能動的)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러는 것이고 마음의 본체가 그러는 것입니다.
마치 파도(波濤)와 물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물의 움직임이 파도고
파도 자체가 물이듯이 실상 망상도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이 착각(錯覺)을 한 것이 망상일 뿐
마음을 다 정리해 놓고 보아도 그전 마음 그대로입니다.
산은 높은 그대로 있고 물도 깊은 그대로이며 성불(成佛)을 해도 항상 그대로입니다.
가령 우리가 중생살이 꿈속 . 생사대몽(生死大夢) . 천당(天堂) .
지옥(地獄)으로 돌아 다녔지만 그것이 참말로 돌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마치 최면술에 걸린아이가 그 몸뚱이는 가만히 두고 꿈속에서 모양으로
비행기를 탔거나 날개를 붙여 가지고 동경을 갔다 왔다 하지만
그리고 본인도 그런줄 알지만 꿈을 깨 보면 그것이 전부 거짓말이고
전혀 허사이듯이 우리의 천당 . 지옥의 중생놀음 이것도 역시
최면술에 걸려 가지고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조신대사(調信大師)가 눈 뻔히 뜨고 80년을 꿈 가운데 있었듯이
중생의 생멸심으로 과거니 미래니 하지만 과거사(過去事)라고 하는 것이
실제의 과거가 아니라 알고 보면 곧 현재고 미래도 그런 것입니다.
억만년 전의 과거가 지금이고 몇 만겁을 지낸 미래도 역시 현재입니다
(亙萬古而長今 歷千劫而不古). 그러니까 우리가 듣기에는
타심통(他心通)이니 숙명통(宿命通)이니 하지만
그게 타심통도 아니고 숙명통도 아니고
오직 항상 눈앞에 있는 목전지사(目前之事)입니다.
그러면서 분별(分別)이 아니고 망상(妄想)이 아닙니다.
흔히들 체(體)니 용(用)이니 하는 개념(槪念) 때문에
잘못 생각하기 쉬운데 체와 용이 둘이 아닙니다.
우리 눈은 아까 불이 꺼져도 어두운 것을 보고 있고
불이 켜져도 밝아진 것을 보고 있으니
어두운 때나 밝은 때나 보는 눈은 변동이 없고
항상 상주(常住)하듯이 볼 때나 안 볼 때나 이 마음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본래가 혼란도 아닌 가운데 혼란을 일으켜
가지고 혼란이지만 본체(本體)인 내가 그러는 것이지
망상 자체가 따로 있어서 독자적(獨自的)으로 그러지는 못합니다.
마치 파도와 물이 본래부터 그 본체가 다른 것이 아니라
물이 움직이는 것이 파도고
물과 파도가 둘이 아닌데 우리가 착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착각을 떼어 버리고 마음을 다 정리해 놓고 보면
그때도 산은 높은 그대로 있고, 물은 깊은 그대로 있어서
성불을 해 놓은 뒤에도 피장부아장부(피장부아장부)의
본래 면목 알 줄 아는 성품은 그대로입니다.
체와 용은 둘이 아니다(體用不二)
그러므로 혜(慧)는 일체 생각을 내지도 않고 작용(作用)을 내지 못하는 자리지만
용(用)을 일으키면 온갖 것이 중생과 같을 수 있다는 것이 체용(體用)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금강경 말씀하시기 전
법공(法空)을 말씀한 때는 그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소위 우리 자성을 항상 참되고 불변한다고 해서 진여(眞如)라고 하는데
이 진여가 허공처럼 영원 불변하는 진여도 있고 또 현상계(現象界)의 인연을 따라서
용을 일으키는 진여도 있어서 대승시교(大乘始敎)에 들어오면 두 가지로 말합니다만
그런데 지금 금강경 설명(說明)하실 때만 해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금강경의 경지(境地)는 관조반야(觀照般若) . 실상반야(實相般若)가 둘인 듯 해도
실상은 하나이어서 관조반야가 내내 실상반야고 실상반야가 그대로 관조반야다.
물이 곧 파도고 파도가 곧 물이다.
체니 용이니 가리려고 하면
이미 불교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게 금강경의 특색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무분별지(無分別智)로 분별없이 아시고
과거사(過去事)도 미래사(未來事)도 분별없이 아시고
중생을 제도하시는 것도 분별 없이 제도하십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견성(見性)하는 그날부터
종일설이 미진설(終日說而未盡說)로
하루종일 말을 해도 말한 것이 아니다.
견성을 하고 나면 무슨 색안경을 끼고 어떤 조건으로
무엇을 하지않고 다만 무심한 마음으로 무심 중에서 말을 하고
듣고 하므로 마치 바람소리와 물소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둘이다 셋이다 하는 것도 앞에 나타나니까 무심히 알지
우리 모양으로 어떤 선입주견(先入主見)을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거울에 물건이 비치는 것과 같은데 가만히 그림만 비치는게 아니라
일체 동작을 우리와 같이 하는 것은 움직임이 곧 움직임이 아닌 때문입니다.
꿈속에서 움직였다는 것이 꿈 밖에 가면 사실 아무것도 아닌 전혀 거짓말이듯이
사실로 가도 간 것이 아니고 와도 온 것이 아니고
가도 오도 안했다고 해도 가도 오도 안 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아까 그 최면술에 걸린애가 동경을 왔다갔다 했지만 안 갔다 해도
말이 안 되고, 안 간 걸로 간 거고 ,간 걸로 안 간 거와 같이 부처님의 지경(地境)은
이런 부사의경계(不思議境界) 이어서 체니 용이니를 가지고 비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야경, 금강경 전에는 체와 용을 나누어서
일체를 망상이라 하고
심지어는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도 망상이라 봅니다.
그러나 대승종교(大乘宗敎)인
법화경(法華經) 열반경(涅槃經) 화엄경(華嚴經)에
들어가면 체용이 둘이아닌
수즉파 파즉수(水卽波波卽水)로
물이 곧 물결이고 물결이 곧 물인 도리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무심하기 때문에 무심 자체(無心自體)의
본 마음이 아무 생각이 없어서 미한 것도 아니고
깨친 것도 아닌 한 생각도 없는 그 자리에서 49년간 설법도 하고
또 인도에만 나타나셨다 하지만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시어
색구경천(色究竟天)에 노사나불(盧舍那佛)도
석가여래(釋迦如來)의 화신(化身)이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석가여래께서는 한생각 까딱해 보신 일이 없습니다.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무분별(無分別) 그 자체가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설법을 하고 제도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녹음기나 라디오와 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종일 일해도 괴로운 줄 모르고 피로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 모양 체용(體用)이 다르다면 하는 일이 힘들고 괴로움이 따를겁니다.
사실은 중생들도 체용(體用)이 다르지 않고
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되는 셈입니다.
중생들의 마음의 본 바탕자리는 무심(無心)이니까 무심 자체(自體)가
천당업(天堂業)을 지녀가지고 천당생각을 내면 천당이 나타나고
부처님 역시 천당 생각하면 천당이 나타납니다.
다만 중생은 그것에 속고 부처님은 속지 않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무심경계(無心境界)에서는
체용(體用)이 둘이 아니므로 생각이 움직여도
무심히 움직인 것이어서 움직인 게 아닙니다.
마치 물이 일어나고 꺼지고 해도 물의 본성질에는 아무 변동이 없듯이
이 무심히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체용이 둘이 아닌 구경(究竟)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부처님뿐 아니라 중생들이
제가 몰라서 그렇지 중생들 자신도 본래는 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모든 개념이 다 떨어진 근본 자체이고
그야말로 나 하나뿐이므로 대 자유한 것이며,
이 자리는 생각해 볼 수도 없는 부사의경계(不思議境界)인데
체용(體用)을 가르는 따위는 용납(容納)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十代弟子)를 비롯한
큰 비구승들이 유마거사(維摩居士)에게 가서 모두 한 방망이씩 맞는 것도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체용불이(體用不二)의 도리를 보이는 대문(大文)입니다.
아란존자(阿難尊者)께서 참기름을 얻으러 갔다가
마침 유마거사의 집으로 가게 됐는데
유마거사는 「그것을 무엇하려고 하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등에 종기가 나셔서 기름을 발라 드리려고 합니다.」
라고 그랬습니다. 부처님의 몸은
해탈공신(解脫空身)이고 환신(幻身)이라서
부스럼같이 보이지만 사실 부수럼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본래 꿈이니까 시방제불(十方諸佛)이 꿈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했음을 보이시기 위해 중생과 똑같이 그러하신 것입니다.
본래 환(幻)의 존재고 망(妄)의 존재인데
우리는 육신을 참말로 있는 물질적 과학적인 실재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갖 나쁜 업(業)의 버릇을 정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했다는 소리가 본래 면목을 증득했다는 말인 동시에 환(幻)을 증득했다,
삼계가 환임을 체득(體得)했다는 뜻으로 증득제환(證得諸幻)이라 그럽니다.
이렇게 완전한 환이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거리낄 게 없으며
돼도 안 된 것이고 안된 것이 된거고 되고 안된 것도 없고,
그러면서 그것이 말과 이론이 다 끊어진 자리가
무심체(無心體)이고 불보살의 마음자리입니다.
부처님이 어떻다 하지만 사실 우리도 그 무심체가
움직이는 대로 지옥으로도 되고 천당도 나타나고
사생육도(四生六道)가 다 나타나고
그러면서 거기 딴 개념을 하나 더 가진 것 그게 중생의 허물입니다.
주관 . 객관이 따로 있고 육체가 나인줄 알고
개나 소나 사람이나 중생 노릇 밖에 못하는 허물,
그것은 사실 그런게 아닌데 잘못 안 허물입니다.
돌이 돌도 되고 쇠도 되고 사람도 되고 세계도 되고 공간도 되고,
허공도 온갖 게 다 되는 데 이 돌은 부셔 봐도 돌가루일 뿐
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 뿐입니다.
꿈속에 있는 바윗돌이 무거워서 들지 못할 것이라는 관념 때문에 못드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이렇게 망념(妄念) . 착각(錯覺) 때문에 모든 것에 걸려 있고
마음대로 안 되지만 사실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내가 마음대로 안 되도록 해 놓은 것이고 사물에 얽혀 있는 것도
부자유한 것도 내가 부자유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므로
결국은 마음대로 되고 있는 셈 입니다. 그러니 한쪽 신통은 얻은 셈이 됩니다.
이렇게 한 쪽 신통만 고집하다
도리어 구속당하는 중생의 허물을 벗어나는 비밀방법은 오직 한 길
무심(無心)뿐이니 인간은 모든 생각 비울 것 밖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 전체를 쓰지 못하고
한쪽 신통만을 고집해서 도리어 구속을 당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