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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도서관의 아버지, 박봉석(朴奉石) 선생
이철교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각 분야에 걸쳐 참으로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특히 주요 유형문화재의 6~7할을 보유한 불교계의 물적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물적 피해뿐만 아니라 인적 피해 또한 결코 적지 아니하였다.
개전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의 인민군은 이른바 ‘모시기 공작’을 개시하여, 상해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한 국회의원과 정당·사회단체의 저명 인사, 종교·문화·예술계의 주요 인물들을 차례로 연행·체포하여 북으로 끌고 갔다.
이 때에 납북된 불교계의 주요 인사 중에는 유성갑(柳聖甲―국회의원·범어사), 허영호(許永鎬―국회의원·범어사), 정준모(鄭駿謨―문교부 고등교육 국장 역임·백양사), 백석기(白碩基―서울시 학무국장·옥천사), 양외득(楊外得―전남 건설국장·범어사), 박봉석(朴奉石―국립도서관 부관장·표충사), 박윤진(朴允進―동국대 교수·봉은사), 이부열(李富烈―동국대 강사·화엄사), 최말도(崔末道―마산중 교장·통도사), 천하룡(千河龍―불교신문사 사장·봉은사), 장도환(張道煥―월간 불교사 사장·쌍계사)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수십 명의 승려가 피살되었다.
이들 가운데 특히 박봉석은 스스로 사문임을 자처했으나, 불교인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오히려 도서관인으로 기억되고 있는 분이다. 도서관계에서는 그를 미국 도서관의 아버지 멜빌 듀이(Melvil Dewey, 1851~ 1931)에 견주어, ‘한국의 멜빌 듀이’ 또는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로 부르는 이들도 있다.
문학·체육 등 재기 고루 갖춘, 스승 복을 지닌 사람
선생은 1905년 8월 22일 경남 밀양군 밀양읍 삼문동 342번지에서 밀성(密城)이 본관인 아버지 근실(根實)과 어머니 김분이(金分伊)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떠한 연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려서부터 재약산(載藥山) 표충사(表忠寺―당시 주지 金德月)와 인연을 맺은 선생은, 1921년 밀양공립보통학교를 마친 뒤에 스님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상경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입학하였으며, 1927년 동교를 졸업하고 귀향하여 향리에서 표충보통학교 교원으로 1년간 근무하였다.
그때 마침 불교계에서 수년간에 걸친 분규를 타결하고 하나로 뭉쳐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결성하고, 불교 인재의 양성을 위하여 불교전수학교를 세워 신입생을 모집하자 또 다시 상경하여 입학하니, 1928년 4월 선생의 나이 24세였다. 이 때에 함께 입학한 학생은 강유문(姜裕文), 박영희(朴映熙), 박윤진, 정두석(鄭斗石), 조명기(趙明基) 등 40명이었는데, 대부분이 사비생(寺費生)인 승려이고 약간의 속인이 섞여 있었다.
선생은 입학 직후 김기수(金基守) 여사와 결혼하여 살림을 차리니, 생활은 한껏 쪼들릴 수밖에 없었으나, 아내의 따뜻한 내조에 힘입어 1931년 3월, 그사이 승격된 중앙불교전문학교 본과 제1회 졸업생으로 학업을 마쳤다.
재학 중에는 문학에 관심을 두어 교지인 일광(一光)에 ‘옛날의 꿈’·‘가을삼제(三題)’·‘금붕어’·‘여중잔편(旅中殘片)’ 등의 시를 발표한 선생은 어려운 살림에서도 책을 많이 사 읽었다. 운동도 좋아하여 교우회 체육부 간사를 3년 동안 줄곧 맡았으며, 축구선수로서 시합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에는 교장인 만암(曼庵) 송종헌(宋宗憲)을 비롯하여 포광(包光) 김영수(金映遂),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김법린(金法麟), 정인보(鄭寅普), 홍명희(洪命熹), 최남선(崔南善), 강전준웅(江田俊雄) 등 학덕을 두루 갖춘 분들이 교수 또는 강사로서 교육과 훈도에 정성을 다하고 있었으니, 선생은 실로 스승의 복을 지녔다 할 것이며, 뒷날 대성한 도서관학 및 불교서지학의 기틀도 이 때에 이루어졌다 할 것이다.
특히 학창 시절에 의기가 투합하는 친구 조명기를 만나니 이들은 뒤에 평생의 지기(知己)가 되어 신라찬술불서서목(新羅撰述佛書書目)의 작성(1942), 해인사사간장경판(海印寺寺刊藏經板)의 조사(1943), 원효대사전집(元曉大師全集) 간행(1949~50) 등의 사업을 함께 추진하게 된다.
일본인 앞지른 승진, 불교서지학 등 본격 연구
선생은 불전(佛傳)을 졸업하자마자 뜻한 바 있어 조선총독부도서관(현 국립중앙도서관)에 고원(雇員)으로 취직하여 도서관인으로서의 생애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때 조명기 또한 모교인 불전에서 새로 발족한 도서관의 직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선생은 취직 이래 1945년 해방 때까지 약 15년 동안 고서(古書)의 분류(分類)와 편목(編目) 업무에 종사하였다. 뒷날 해방된 조국에서 국립도서관 관장이 되어 부관장인 선생과 함께 도서관 건설에 매진하게 되는 이재욱(李在郁)도 같은 해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하고 촉탁(囑託)으로 들어와 같은 업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선생은 도서관에 들어간 지 8년만인 1939년 3월 일본 문부성(文部省) 공립도서관 사서검정시험(公立圖書館司書檢定試驗)에 합격하고 그 1년 뒤에는 도서관 서열 10위에 오른다. 다시 2년 뒤인 1942년에는 적산수웅(荻山秀雄) 관장, 이재욱 부관장에 이어서 80여명의 직원 중 3위로 뛰어올랐다. 8·15 광복 때까지 문부성 공립도서관 사서검정시험에 합격한 한국인은 1937년에 합격한 최장수(崔長秀)와 선생 두 분 뿐이었다. 이렇게 일본인들까지 앞지른 빠른 승진은 그가 얼마나 직무에 충실하며 연구하고 노력하는 사람인가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선생은 조선총독부 도서관에 근무하는 중에 불교서지학과 도서관학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조선(朝鮮)>, 조선총독부 도서관보인 <문헌보국(文獻報國)>, 조선도서관 연구회지인 <조선지도서관(朝鮮之圖書館)> 및 <불교(佛敎)> 등의 간행물에 연구 논문과 도서 해제 등을 부지런히 발표하였으니, 그 대강을 연대에 따라 정리하기로 한다.
1933~34년 ‘고려대장경판의 연구’(<조선> 제190~195호 연재)
1934년 ‘의천(義天) 속장(續藏)의 현존본(現存本)에 대하여’(<조선지도서관> 3권 6호)
‘고려장(高麗藏) 고종판(高宗板)의 전래고’(<조선지도서관> 4권 3호)
1936년 ‘경전 전수소고’(<문헌보국> 2권 4호)
1938년 ‘대장경 목록과 그 분류’(<문헌보국> 4권 8호)
1940~44년 ‘청구승전보람(靑丘僧傳寶覽)’(<불교> 신제 21~56호 연재)
1940년 ‘대장(大藏)의 명칭 유래와 그 통섭(統攝)’(<불교> 신제 25호), ‘법륜변(法輪辨)’(<불교> 신제 27호)
1942년 ‘신라찬술불서서목에 대하여’(<문헌보국> 8권 6·7 합호)
1944년 ‘가야산 해인사 경판에 대하여’(<문헌보국> 10권 3-4호 연재)
‘조계종(曹溪宗)의 근본이념’(<불교> 신제 58호)
‘해동총림지어담(海東叢林紙魚譚)(<불교> 신제 59호)
‘의천과 신평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불교> 신 제61호)
이밖에도 1940년경에 개성에서 새로 설립된 중경문고(中京文庫)의 장서를 정리하기 위하여 편찬한 ‘조선공공도서관 분류표 사안(私案)’과 ‘불조삼경주(佛祖三經註)’ ‘영가진각선사증도가(永嘉眞覺禪師證道歌)’ ‘진실주집(眞實珠集)’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 등의 해제가 있다.
중앙불전 졸업생 24명과 조선불교 부흥을 서원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 불교계는 동년 10월에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일제의 사찰령과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산 태고사법 및 31본산 말사법을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새로운 교헌(敎憲)을 제정할 것을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1946년 5월 조선불교교헌을 제정·공포하여, 중앙에는 총무원을 두고 지방의 각 도에는 교무원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괄하게 되었다.
한편 청년불교도들은 친일불교의 청산과 교단의 혁신 및 대중불교의 실현을 주장하며 혁신단체를 결성하니, ‘중앙불교청년동맹’·‘불교청년당’·‘혁명불교도동맹’·‘조선불교혁신회’ 등이 바로 이들이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1946년 3월 유성갑·백석기 등과 함께 불교청년당 결성을 주도했으며, 1947년에는 장상봉(張祥鳳)·곽서순(郭西淳)·이부열 등과 더불어 혁명적 의지를 지닌 지식층 불교 청년을 모아 혁명불교도동맹을 조직하여 불교 혁신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선생은, 이미 1931년 3월 중앙불교전문학교 제1회 졸업생 24명과 함께 ‘2958회’(서기 1931년은 불기 2958년임)를 조직하고 조선불교를 위한 큰 일꾼이 될 것을 다짐한 바 있었다.
특히 선생이 주도적 역할을 한 혁명불교도동맹에서는 주장한다.
1. 진정한 수도자만이 승니(僧尼)의 권한을 가지자.
2. 사원을 일반에게 개방하자.
3. 사유토지(寺有土地)는 전부 국가사업에 제공하자.
4. 불건전한 포교당을 숙청(肅淸)하자.
5. 본존(本尊)은 석가불(釋迦佛)만 승봉하자.
6. 승니는 생업(生業)에 근로하자.
7. 의식(儀式)은 극히 간소화하되 엄숙히 하자.
이러한 강령 이래 의식연구부·세포조직부·교정연구부·사회사업부의 4개 분과를 두었으며, 부대사업으로 여성교육을 위한 국화여자전문학관(國華女子專門學館)을 설립하여, 1946년 9월 24일 120명의 신입생과 더불어 개교식을 거행하니, 교장은 선생이 직접 맡았으며, 학감에 이부열, 국문학과장에 곽서순, 문화과장에 정두석이었다.
불교혁신 총연맹 결성하고 <대중불교>지 발행
1946년 12월 3일 선학원(禪學院)에 모인 조선불교 선리참구원을 비롯한 불교 청년당·혁명불교도연맹·불교여성총동맹·조선불교혁신회·선우(禪友)부인회·재남이북(在南以北)승려회 등 혁신 7단체의 대표들은 ‘불교혁신총연맹’을 결성하였으며, 1947년 1월 1일에는 기관지인 <대중불교>를 창간하니, 선생은 그 편집을 맡아 창간사를 썼다. 이 글에는 선생의 불교관과 당시의 혁신 분위기가 십분 실려 있기에 전문을 옮기고자 한다.
“부처님의 본원(本願)은 일체중생을 남김없이 건지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교화의 대상이 인종이나 성별이나 또는 어떤 일부 계급을 한정치 않고 항상 대중을 본위로 삼는 것이다. 승가야(僧伽耶)란 대중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하여 부처님을 받드는 대중이 화합하여 정진하는 곳에 어느 민족 어느 국가를 물론하고 그 문화가 약진하며 그 국토가 정화(淨化)·미화(美化)하였다.
우리 나·려(羅麗)의 찬란한 문화와 그 통일 대업이 오로지 불교의 힘이 아니었으며, 국난(國難)이 있는 때마다 민중의 선두에 나선 이가 우리 선덕(先德)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법구생폐(法久生弊)로 우리 교단도 지금에 와서는 여지없이 부패한 일 이루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에 우리는 현 교단을 혁신하여 대중불교를 건설하기로 나섰노라.
우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대중에 있다.
교화(敎化)는 깊고 좁은 것보다 옅더라도 넓은 것을 취하리라. 넓기만 하면 자연 깊은 곳도 있게 된다. 넓은 태평양에는 옅은 곳도 적지 않다. 대중불교가 서는 날에야 대혜(大慧)·대력(大力)이 나게 된다.
법문(法門)이 심심미묘하다고 해서 신비하거나 기이한 것이 불법이 아니다. 운수반시(運水搬柴)하는 이외에 무슨 별법(別法)이 따로 있으랴. 누구나 믿게 되고 어디서나 어느 때나 할 수 있는 평범성과 보편성을 가진 것이 불조(佛祖)의 정법(正法)이다.
우리는 교화의 모든 방편과 온갖 형식이 될 수 있는 한 현대화하여 간소화하고 생활화하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전 생활을 불교화 할 수 있고, 이 강산의 전 국토를 불국화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정(敎政) 운영의 문호는 사부대중(四部大衆)에게 다 같이 개방하여 전 교도 각자로 하여금 호법(護法)의 책임을 분담케 하리라.
이로부터 송풍나월(松風蘿月)에서 독각자리(獨覺自利)하던 소승행(小乘行)을 청산하고, 홍진세파(紅塵世波)에 뛰어들어 수순중생(隨順衆生) 해가면서 몰아이타(沒我利他)하는 대승법(大乘法)을 행하리라.
그러나 그 한편에 계정혜(戒定慧)를 애써 닦는 참다운 승단(僧團)이 한층 뚜렷이 출현할 것은 물론이다.
구업(口業)으로만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부르지 말고, 발고여락(拔苦與樂)하는 사섭법(四攝法)을 신업(身業)으로 실행하자.
그리하여 세간과 출세간이 둘 아닌 묘법(妙法)으로 암흑과 고통 없는 광명국토를 세우자.
일체 평등한 정법으로 진여(眞如) 무차별한 균등사회를 만들자.
그래서 이 작은 기관지로써 독선적이고 봉건적인 현 교단을 분쇄하는 원자탄으로 삼으며, 새 나라의 초석(礎石)이 되고 새 세계의 지침(指針)이 될 대중불교 건설하는 여의주(如意珠)도 지어보려 한다.”
해방과 함께 국립도서관 개관, 조선도서관 학교 설립
그러나 선생은 불교의 일에 매달릴 수만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도서관계가 불교계보다도 더욱 선생을 필요로 했다고 해야 옳으리라. 선생은 해방과 동시에, 조선총독부도서관 부관장에 취임하여 일본인으로부터 업무를 완전히 접수하는 작업과, 전쟁 중에 개성으로 소개(疏開)되었던 장서를 무사히 이관하는 작업, 그리고 도서관을 한국인으로 재조직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이미 대구로 낙향한 이재욱을 강권하다시피 하여 관장으로 추대하고 1945년 10월 15일 새 국가의 국립도서관으로 개관하게 하였다.
또한 해방에 따른 도서관계의 일시적 동요와 혼란을 도서관인의 단결을 통하여 무사히 넘기고자 조선도서관협회를 조직하여 그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광복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었으나, 우리의 손으로 건설해야 할 조국에는 모든 분야에 걸쳐 숙련된 일꾼이 없어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인재난(人材難)은 도서관계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었다.
선생은 이재욱 관장과 협의하여 인재 양성을 위한 국립(國立)의 도서관학교 설립을 서둘러 1946년 4월 1일 20명의 학생과 함께 6개월 과정의 조선도서관학교(뒤에 국립도서관학교로 개칭)를 개교하고, 교수를 겸직하면서 도서분류법 및 실습, 동양서 목록법 및 실습, 도서관학 개론 등의 과목을 강의하니, 이는 전체 시간의 반 이상을 선생이 담당한 것이다.
국립도서관학교는 6·25동란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5회에 걸쳐 총 7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이들이 각급 도서관 발전의 중추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도서관에서 도서를 정리함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구가 둘 있으니, 그 하나는 분류표요, 다른 하나는 목록규칙이다. 해방되기 전까지 각급 도서관은 대부분 일본인에 의해서 일본 위주로 편찬된 분류표와 목록규칙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조국에서는 새 시대에 부응하며 또 한국적인 분류표와 목록규칙이 필요하였다. 이에 선생은 국립도서관 부관장, 국립도서관학교 교수, 도서수호·문헌수집위원회 위원장·조선도서관협회 위원장(1947년 4월 총회 때 이재욱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전무이사를 맡음), 건국준비위원회 문화시설 전문위원, 법률도서 이관대책위원회 위원장, 동국대학 강사, 국화여자전문학관 교장, 조선서지학회 상무위원 그리고 불교청년단·혁명불교도동맹·불교혁신총연맹의 일 등 그야말로 1인 10역의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는 한편, 1946년 4월에는 <동서편목법(東西編目法)>을, 동년 7월에는 <동서도서분류표(東西圖書分類表)>를 편찬하여 강의용 프린트본으로 간행하고, 1947년 10월에는 <조선십진분류표(朝鮮十進分類表)>를, 1948년 10월에는 <조선동서편목규칙(朝鮮東書編目規則)>을 편찬하여 간행하였다.
이재욱은 조선십진분류표 서문에서 “이 신분류표는 암야(暗夜)의 태양(太陽), 사막(砂漠)의 녹지(綠地)”라고 경의를 표하였으며, 조선동서편목규칙 서문에서는 ‘편자가 반 4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긍한 실무를 통해서 거둔 풍부한 경험과 끊임없는 연핵으로 얻은 확실한 이론을 기초로 해서 성서(成書)’하였다고 보증하며 추장하였다.
한때 전국 공공도서관에서 채용한 분류표의 71%, 대학 도서관에서 채용한 분류표의 35%까지 차지했던 조선십진분류표는 저자의 납북과 이로 인하여 개정작업이 이어질 수 없었던 점 및 서구 도서관학의 도입에 따른 DDC의 보급 확대, 그리고 KDC의 제정 등의 이유로 그 과도기적 사명을 다한 채 소멸되었으며, <조선도서편목규칙> 또한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였다.
선생은 국립도서관 부관장으로 재직하는 5년 동안 끊임없이 분류표의 통일과 1군 1관의 실현, 그리고 도서관을 통한 평생교육을 주장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
선생은 1945년 7월 13일 아침 9시 35분, 자택에서 북한 내무성 정보국 요원들에 의하여 피납되었다.(같은 시기에 이재욱도 피납되었다) 슬하에 7남 1녀를 두었으나, 2남과 3남·4남은 일찍 여의었으며, 부인은 1973년에 이산의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필명(筆名)으로 출신 본사가 자리한 재약산에서 따온 재약산인(載藥山人)을 즐겨 사용했으며, 때로는 박화(朴華)·박꽃으로 쓰기도 하였다.
이철교(李哲敎)
1969년 졸업. 74년 군종법사로 전역하고 76년 민족문화추진위 국역연수원을 수료하였다. 85년부터 동국대 중앙도서관 열람과장, 사서과장 등 역임하며 불교서지학자로 공헌하였다. 저서로는 선학사전(禪學辭典), 선문촬요(禪門撮要) 등이 있으며, 특히 봉은사본말사지, 한국불교논저목록의 편찬은 큰 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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