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燕雀)은 도무지 봉황(鳳凰)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소백산국립공원 에리어이면서도 일주문엔 ‘태백산 부석사’라 되어있는 까닭을...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있으면서도 궂이 태백산을 끌어온 속뜻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고 궂이 봉황산을 입산통제구간으로 꽁꽁 묶은 까닭도... (아마도 고찰 부석사를 재난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 아닐까 추측해볼 뿐...) 천상과 지상을 오르내리는 봉황은 천손족(天孫族)을 상징하는 새라 감히 연작따위가 범하진 못할 것.
한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이 휘어지면서 버려논 자투리 지능선. 그 지능선 끄트머리 봉황산 자락에 부석사가 있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종 종찰인 부석사(浮石寺)는 국보를 비롯한 문화재가 산재한 고찰이다.
소백산 비로봉 국망봉을 지나고 고치 마구령 두 고개를 지나면 갈곶산에서 봉황산 갈림길을 만난다. 수림에 가려 주변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봉황산과 고찰 부석사가 손짓을 한다. 입산통제구간으로 묶이면서 오랜 세월 이어져온 봉황의 귀품은 이미 절하되었다. 나아가 그 고귀한 이름마저도 잊혀져가고 만다.
작년 딱 이맘때는 선달산<☞ http://blog.daum.net/bok-hyun/585>을 올랐다. 오늘처럼 생달에서 출발하여 보부상들의 고갯길인 박달령에서 오전약수로 하산했었다. 그때는 박달령 옛길과 오전약수가 주요 산행주제였다면 오늘은 고찰 부석사 탐방이 주요 테마다. 어프로치를 달리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기웃거려 보았지만 여의치않아 작년과 같이 생달에서 오르기로 하였다. 모처럼 토요일날 시행하는 산행이라 모든 제반사정이 조심스러웠다.
코스: 생달-늦은목이재-갈곳산-봉황산-부석사-주차장 (4시간)
백두대간은 소백산(국망봉)에서 구인사 가는 신선봉을 좌로 흘러보내고 고치령,마구령을 지나면...
봉황산 갈림길인 갈곳산에 올라선다. 갈곶산에서 백두대간을 버리고 우로 90도를 꺾어 한갖진 지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갈아타면 봉황산을 만나고 그 봉황산 자락에 고찰 부석사가 자리한다. 갈곶산에서 좌로 90도 틀어 이어가면 선달산을 지나 박달령 옥돌봉 도래기재를 지나...
태백산(부소봉)에 닿는다. 양백지간(兩白之間)이란 지리적 위치가 이렇듯 소백산과 태백산의 사이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
오전약수로 진입하면서 좌로 보이는 물야저수지가 끝날 즈음 상운사(舊 용운사)와 생달 사기점 안내판이 좌측으로 길을 안내한다. 봉룡사 안내판도 함께 있다. 90도를 넘게 핸들을 좌측으로 꺾은 우리 버스는 물야저수지를 좌측 옆구리로 낀 채 생달로 들어간다. 정면으로 백두대간 선달산능선이 하얗게 눈옷을 입은 채 그 위용을 드러낸다. 우리 버스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작년에 댔던 그 주차장(물야저수지 상류지점)에 닿는다. 채비를 차린 후 안내도를 일별하고... 진행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오전2리(생달)정류장. 백두대간의 위용이 사뭇 위압적이다. 우측 사잇길은 그냥 흘러보내고 줄곧 상운사를 가리키는 곳으로 곧장 들어간다. .계속 직진하여... 상운사로 간다. 수다원도 우로 흘러보내고... 신선골도 우로 흘러보내고...
주목산장도 우로 흘깃 곁눈질한 뒤... 곧장 임도를 올라야만 실질적 들머리인 이 지점에 닿는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아이젠을 차는 등 실질 산행준비를 마친다. 안내도와... 마루금길 이정표가... 안내하는 데로 20여 분 눈길을 밟고 가면 ... 늦은목이재에 닿는다.
십자로인 늦은목이재의 우측 1.9km지점에 선달산이 있어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을 것. 안내판은 소백산(죽령-연화보에비로봉-국망봉-고치령-마구령-갈곳산-늦은목이재) 전 구간의 백두대간길이 표시되어 있다. 입산시간을 제한하고... 탐방로 안내도... 소백산 ㄸ바람을 아시는가? 오른쪽 소백산자락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은 귓볼이 얼얼하다. -----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 리 돌아서서 육십 리는 가기로 했소. ------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삼수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山' <김소월> 늦은목이와 갈곳산이 1km거리이니 반 쯤 올라온 셈. 갈곳산에 올라섰다. 백두대간은 오른쪽 90도를 꺾어 마구령과 고치령으로 휘어져 가고 우리는 이정표 뒤로 금줄(?)을 넘는다. 좌측 잡목사이로 백두대간의 헌걸찬 마루금이 보이는데... 이 마루금은 태백산을 향하고 있다. 중앙에 뽕긋한 봉은 옥돌봉이 아닌감? 내리막 양지바른 곳에서 점심보따리를 풀었다. 산친구가 부어주는 독한 술 한 잔으로 언 몸에 온기를 불어 넣는다. 헬기장을 지나 봉황산에 닿는다. 봉황산은 정상석은 물론이고 이렇다할 표식이 전무하다. (※ 봉황산에선 오른쪽으로 내려서야 한다.) 다만 무덤의 봉분만한 봉우리에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을 뿐. 남향이라 눈은 차츰 없어지더니... 30분이 걸리지 않아... 부석사 자인당으로 내려선다. 석조위로 입산금지 금줄이 쳐져있다. 자인당(慈忍堂)과 응진전(應眞殿)이 나란히 있다. 두 건물 모두 20세기 초에 중건된 것으로 3칸 맞배집의 간략한 모습이다. 3칸 규모, 직선적인 맞배지붕, 막쌓기를 한 기단의 모습, 기둥 위에만 공포를 배열한 주심포 형태의 구조,그리고 정면 양 옆칸의 붙박이 창문까지,조사당 건물과 닮아 있다.
조사당은 고려 때인 1377년의 작품으로 두 건물과는 500~600년 차이가 있다. 모양은 흉내를 내도 기술과 감각은 시대에 따라 달라 질 수 밖에 없다. 구조 형식상 익공계에 속하는 이 건물들은 조사당의 규범적인 주심포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유명한 조사당 건물을 닮음으로써 참배의 흐름을 최종 장소까지 연속되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보물 제1636호인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 (榮州 浮石寺 石造釋迦如來坐像)' 자인당에는 거의 같은 규모의 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2구는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이며, 1구는 항마촉지인의 석가모니불의 도상특징을 보여준다. 이들 삼존 중 비로자나불 2구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20호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으로 지정되었다. 자인당에 이미 보물로 지정된 두 구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는 이 석조여래좌상은 동그란 얼굴, 항마촉지인의 수인과 꽃문양이 조각된 승각기,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인 옷주름의 표현, 높은 삼단대좌에 부조된 향로와 7사자, 합장 한 보살상 등에서 통일신라 9세기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거의 훼손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삼단대좌와 불상은 다소 장식화 경향을 보이는 통일신라 9세기의 전형양식을 보여주고 있고, 보물 제220호와 같은 사지에 유존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삼불(삼신불)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인당 응진전(應眞殿)은 자인당과 함께 거의 일렬로 남향하여 일곽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1976년에 번와 보수하였다. 이 건물의 공포에서 20세기 초에 유행한 장식적인 익공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는 내부에 석고로 만든 석가삼존불과 고졸한 십육나한상이 안치되어 있다. 응진전 우측 뒷편에 있는 단하각(丹霞閣)은 1칸짜리 맞배집으로 작은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나한이란 불제자가 이를 수 있는 최고의 단계를 말하며, 여기 모신 나한상은 단하소불이라고도 불리는데, 단하스님이라는 유명한 불제자이다. 나는 단하각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지 못했는데, 단하소불의 손에 생쥐가 쥐어져 있다고 한다. 정면에 걸린 현판의 '단하'가 무엇을 뜻하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자료사진> 옛날부터 부석사의 봉황산에 생쥐가 많아 봉황의 알을 야금야금 깨어 먹는다 해서 단하각을 짓고 손에 생쥐를 든 단하소불을 모셨다고 한다. 그 후로 생쥐가 봉황의 알을 해치지 못했다고 전한다. 국보 제19호인 영주 부석사 조사당 (榮州 浮石寺 祖師堂)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키 작은 나무 하나가 ‘철창’에 갇혔다. 사찰이 가두었다. 잔혹하게도 철창 속에서 물 한 방울 얻어 마시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 그 곳에는 비 한 방울, 이슬 한 방울도 닿지 않으며 물을 주는 사람도 없어 인간의 손길과 자연의 은혜를 입어 본 적이 없다. 오로지 그냥, 스스로 척박함을 이기고 살아남아야 했고 또 살아남았다. 딱딱한 처마에서 1300여 년을. 영주 봉황산 부석사 선비화(禪扉花) 이야기다. 의상대사(義湘大師ㆍ625~702)가 지팡이를 꽂아 자랐다는 나무다. 덕을 쌓은 수행자가 가졌던 ‘대사의 지팡이’를 얼마나 갖고 싶었던지 이 나무 줄기를 잘라갔다. 순간의 욕망을 채운 그는 훗날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또 이 잎을 닳여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득남을 간절히 원했던 아낙들이 줄지어 잎을 훑어가면서 이 작은 나무의 수난은 끝이 없었다. 관절염에도 좋다 하여 ‘노린’ 사람들 또한 많았다. 딱딱하게 굳은 처마의 지붕아래서 자라니 비와 이슬 한 모금도 구경 못했는데 이 나무는 잘 살고 있다. 누가 물을 주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낮엔 해가 벗이 되어 줬고 밤엔 달빛이 동무되어줬을 뿐이다.
전해오는 말이 1300여년 지났다는건데 그럼에도 나무는 고목이 아니다. 그저 손가락 굵기다. 키도 170cm 정도다. 누가 이 나무를 1300년 살아온 나무라고 믿을까. “이 나무가 뿌리를 내려 살아나면 국운이 흥할 것이다. 나무가 살면 내가 죽지않고 살아있느니라” 라고 했다. 그 나무가 지금까지도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증언한 사람이 있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다.
“擢玉森森依寺門 (탁옥삼삼의사문) / 僧言卓錫化靈根 (승언탁석화령근) 스님이 말하길 지팡이가 신비하게 뿌리 내린 것이라 하네 / 지팡이 끝머리에 저절로 조계수가 생기니 / 비와 이슬의 은혜를 조금도 입지 않았네” 그의 시가 이 나무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퇴계 선생이 이곳 풍기군수로 부임한 때가 1548~1549년이니 이때 부석사에 들러 시를 지었다면 460여년 전에 이미 지금의 우리와 똑 같은 심정으로 바라보았고 그 기록을 시로 남겼다.
처마 내밀기를 길게하기 위해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취현암(醉玄庵)은 역시 맞배지붕으로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 취현암 현판 내려서면 부석사 삼층석탑과 무량수전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보물 제249호인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榮州 浮石寺 三層石塔)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 석탑은 법당(무량수전)의 동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국보 제18호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無量壽殿) 현판은 공민왕의 글씨라고 전한다. 국보 제17호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앞 石燈)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한다.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전형적인 8각 기둥형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돌을 얹어놓았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지붕돌도 역시 8각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4각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기둥을 받치고 있다. .무량수전의 건축미가 돋보이는 곡선의 아름다움. 무량수전 좌측에 전설의 부석(浮石 뜬돌)이 있다. .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갔을 때(661년) 양주(陽州)에서 병을 얻어 양주성 수위장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때 그의 딸 선묘(善妙)낭자가 의상에게 연정을 갖게 되었는데, 의상의 나이 37, 선묘의 나이 17살쯤이지만 의상은 법도로 대하여 제자로 삼았다. 선묘낭자의 정성으로 몸이 완쾌된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에서 10년을 공부하고 671년 뱃길로 급거 귀국길에 오르면서 선묘낭자를 만나지 못하였다. 뒤늦게 선묘는 비단 선물을 챙겨 산동성(山東省) 해안으로 달려갔으나 의상이 탄 배는 떠나간 뒤였다. 들고 있던 선물을 의상의 배를 향해 던지니 해풍이 크게 일어나면서 던진 선물이 의상이 탄 배 안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자신도 용이 되게 축원을 하고 바다로 몸을 던지니 과연 용으로 변해 의상의 배를 호위해 무사히 배가 신라에 닿았고,당나라의 침입도 막아낼 수 있었다.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아래 위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뜬 돌(浮石)임을 알 수 있다”라고 기록하였으니 비과학적 신비주의의 극치라할 만하다. 신라로 온 선묘낭자는 다시 의상의 꿈에 나타나 500명의 이교도들을 제압할 방법을 일러주었다. 다음날 아침 의상은 선묘낭자가 시키는 대로 지팡이를 한 번 두들기니 커다란 바위가 공중에 떠올랐다 내려앉았다. 용으로 화신한 선묘낭자가 들어올린 것이다. 이를 두 번, 세 번 이어서 반복하자 겁먹은 이교도들이 일제히 의상대사에게 무릎을 꿇고 함께 절을 짓는데 앞장섰다. 안양루(安養樓) 중수기(重修記)엔 이렇게 적혀있다. "몸을 바람난간에 의지하니 무한강산(無限江山)이 발 아래 다투어 달리고,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니 넓고 넓은 건곤(乾坤)이 가슴속으로 거두어들어오니 가람의 승경(勝景)이 이와같음은 없더라." 촬영금지라는 푯말이 나를 압도한다. 바깥에서 합장을 하고 님의 모습을 마주한다.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국보 제45호)은 무량수전 안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이다. 높이는 2.78m로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또한 온몸이 금빛 찬란하여 매우 정교한 솜씨로 지어졌는데, 고려시대 유일의 소상(塑像, 흙으로 빚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소조인 만큼 모델링이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과 위엄을 동시에 갖춘 조상이다. 불상은 토심(土心)에 칠금(漆金)을 입혔고 광배(光背)는 목판 위에 흙을 입힌 것으로 풍만한 얼굴과 두 어깨, 그리고 의첩(衣褶) 등에 소조의 특색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천의의 주름은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신라 말기 형식으로 굵은 입술과 광배만 아니면 신라 말기까지 연대를 올릴 수 있는 작품이다. 선묘각(善妙閣)엔 선묘아씨와 의상대사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 안양루(安養樓) 현판은 1974년 영주 고장 출신인 소남(小南)김종호(金宗鎬)선생(1901~1985)이 1944년 갑신년(甲申年)가을(秋)에 썼다고. 안양루와 석등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유홍준교수의 글귀를 되새겨 본다. 천하의 방랑시인 김삿갓도 부석사 안양루에 올라서는 저 예리한 풍자와 호방한 기개가 한풀꺾여 낮은 목소리의 자탄(自歎)만 하고 말았다고 했다. 세월무정노장부(歲月無情老丈夫)라 하여 "세월이 무정하구나 나는 벌써 늙어 있으니." 하며...
그런데 한 것 없이 바둥대기만 한 나는 난고(蘭皐)보다 낫살을 훨씬 더 많이 먹었다.ㅠㅠ 浮石寺 (부석사) (蘭皐. 金笠)1807年 ~ 1863年)(본명.金炳淵 )
平生未暇踏名區 (평생미가답명구) 白首今登安養樓 (백수금등안양루) 江山似畵東南別 (강산사화동남별) 天地如萍日夜浮 (천지여평일야부) 風塵萬事忽忽馬 (풍진만사홀홀마) 宇宙一身泛泛鳧 (우주일신범범부) 百年幾得看勝景 (백년기득간승경) 歲月無情老丈夫 (세월무정노장부)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펼쳐져 있고 천지는 부평같이 밤낮으로 떠있구나. 지나 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 온 듯 우주 간에 내 한 몸이 오리 마냥 헤엄치네. 백년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 있는데. 멀리 아스라이 소백산이 하늘금을 긋고있고... 더 가까이로 첩첩의 산들이 배알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의상대사는 천왕문에서부터 크게 삼단씩 이뤄진 세 개의 계단, 즉 모두 아홉 단의 돌계단을 만들어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무량수전에 이르도록 했다. 이는 극락세계에 이르는 9품 만다라, 즉 9단계를 상징한다고...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안양문(門)은 올라가서 보면 안양루(樓)가 된다. 부석사(浮石寺)현판은 이승만의 글씨라고 한다. 뜰 부(浮)자의 삼수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작은 석물 석 점은 기둥 없는 석등과 당간 같다. 작은 당간 천년의 세월을 버티고 선 석축의 아름다움 삼성각 범종루(梵鐘樓)엔 종(鐘)은 없고 법고와 나무로 된 물고기인 목어가 있다. 목어는 잉어의 몸에 용의 머리를 하고 있다. 범종루는 아래에서 보면 역시 2층 건축물로... '봉황산부석사(鳳凰山浮石寺)' 현판이 걸려있다. 안양루와 무량수전 건물이 많이 닮아있어... 비켜서서 포커스를 맞춰 보았는데,마치 뒷쪽 무량수전을 딱 반으로 축소한 게 안양루 같다. 경북 유형문화재인 삼층석탑의 동탑과 서탑이다. 1966년 부석사 인근에 있는 동방사지에서 옮겨와 현위치에 세운 것이다. 불사리탑이건비에 의하면 서탑에는 익산 왕궁리 5층탑으로부터 석존사리 5과를 분안하였다고 한다. 방형 지대석 위에 얹혀 있는 하층 기단면석에는 우주와 일주식의 탱주를 나타내었고, 하층기단 갑석 위에는 4분원 몰딩의 괴임이 있다. 상층기단 면석에도 우주와 일주식의 탱주를 모각하였고, 상층기단 갑석 밑에는 부연이 있으며, 위에는 옥신을 받는 괴임을 마련하였다. 상륜부는 없어진 것을 후보하였다. (동탑 높이 : 360cm, 서탑 높이 : 377cm) . .동탑 불사리탑이건비(佛舍利塔移建碑) 공사중인 박물관을 둘러보다 만난 5기의 석물. 양쪽 두 석등은 법주사의 '쌍사자석등'을 흉내낸 듯. 천왕문을 나서... 천왕문 안에 있는 사천왕은 신성한 사찰안으로 악귀나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동서남북을 나누어 지킨다고 한다. 동쪽: 지국천왕-'비파'를 들고 있다./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나쁜 사람은 벌하는 역할을 한다. 서쪽: 광목천왕-'용과 여의주'를 지니고 있다. / 악인에게 고통을 주어 선하게 변하게끔 하는 역할을 한다. 남쪽: 증장천왕-'보검'을 들고 있다./만물을 소생시키는 덕을 베푸는 역할을 한다. 북쪽: 다문천왕-'탑'을 손바닥 위에 얹고 있다./어둠 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하는 역할을 한다. 무량수전에서 안양루와 범종루를 거쳐 천왕문으로 빠져 나오면 부석사 경내를 벗어난다. 아홉단의 석축 돌계단은 극락세계의 9품(九品) 만다라의 이미지를 건축적 구조로 구현시킨 것이라 한다.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榮州 浮石寺 幢竿支柱)는 보물 제255호로 남북국 시대 신라의 당간지주이다. 곧게 뻗어오르면서(높이 428cm) 위쪽이 약간씩 좁아지는 모습이 다른 데서 본 것보다 아주 잘 생기고 잘 빠진 준수한 모습이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기둥 윗부분은 원을 2겹으로 경사지게 조각하였고, 옆면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기둥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는 한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위에 원형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주변에는 연꽃을 장식하고 윗면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치고 있다.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을 주며,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해동화엄종찰(海東華嚴宗刹) 현판이 달린 일주문을 빠져나와... 뒤로 돌아보는 일주문엔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현판이 붙어있다. 부석사는 봉황산 자락에 터를 잡았음을 알 수 있다. 부석사는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改椽)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조사당(국보 19)·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조사당 벽화(국보 46)·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석조여래좌상·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취현암(醉玄庵)·범종루(梵鐘樓)·안양문(安養門)·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매표소에는... 주차비:3000원,관람료:1200원, 청소년:1000원, 어린이:800원 안내도엔 좌측 죽령에서부터 맨우측 끄트머리의 부석사까지 알기쉽게 표시되어 있다. 그 옆엔 '소백산자락길'안내도도 함께 서있다. 절문을 빠져나오면 우리 차가 대기하는 대형주차장.
절문을 빠져나와 돌아보는 봉황산은 그리 높지도 않으면서 그윽한 품으로 부석사를 품고 있다. 지금 나의 가슴에 애잔하게 남아있는 건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러브스토리.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하며 고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유학길을 이어간 의상대사는 결국 선묘낭자와의 운명적 만남으로 부석사를 창건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리운 부석사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旨(마지)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 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 마지(摩旨): 부처에게 올리는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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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복현의 산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