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진이의 연정시 연구* 유 육 례 Ⅰ. 들어가는 말 <국문 요약> 황진이는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시인이다. 황진이는 연인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예술로 승화시켜 현재까지도 많은 독자층을 매료시키고 있다. 이는 황진이가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연정시를 창안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황진이는 님에 대한 보고픔과 그리움을 시에 있는 그대로 투영시켜 독자로 하여금 감정과 정서를 자각한 이후에 시의 화자와의 일체화, 혹은 동조화되는 공간구조를 만들었다. 이러한 황진이만의 독특한 시의 내재적 구조는 우리가 그녀를 우리나라 최고의 여성시인으로 평가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닌가 한다.
1) 황진이의 연정시는 남녀간의 사랑만을 노래한 시가 아니라 이별을 노래하면서, 더 나아가 이별한 후에 님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이다. 2)황진이의 연정시는 한시와 시조로 구별되는 시의 외재적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시의 내재적 형식에 독특한 이미지와 자연의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자아정체성에 통합하는 시의 구조적 특징을 갖는다. 3) 황진이의 연정시는 님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보고픔을 객관화한 이후에 다시 자신의 자아와 일체시키는 자아와 객관적 대상의 완전한 통합을 노래한다. 4) 황진이의 연정시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독창적인 이미지로 승화시켜 자신의 애절한 감정을 보편성으로 확립하고 있다.
※ 이 논문은 2014학년도 조선대학교 학술연구비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Ⅰ. 들어가는 말 황진이는 조선 중기인 16세기 중엽에 송도에 살았던 명기이다. 그녀는 남녀 간의 사랑을 시적 감정으로 승화시킨 당대의 유명한 여류시인이다. 황진이의 본명은 진(眞) 또는 진랑(眞娘)이고, 기명은 명월(明月)이다. 황진이가 살았던 조선시대는 가부장적 기류가 지배적이어서 여자들이 사회활동을 할 수 없었던 폐쇄적인 봉건사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진이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어들을 엮어내어 섬세하고 주옥같은 시를 창작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황진이의 삶과 문학작품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사료들은 전해지지 않고 당시의 사대부들의 기록만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황진이가 추구한 사랑은 어떤 유형이었을까? 그것은 앞으로 이 연구에서 필자가 임에 대한 황진이의 사랑이 어떻게 변화되고 발전되는가에 초점을 두어야 할 주제가 된다. 하지만 황진이가 살았던 시대는 이러한 남녀 간의 사랑을 과연 어떻게 평가했을까? 이보다 먼저 우리는 황진이가 살았던 시대에 여성이 시를 창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제기된다. 우리는 조선 중기시기에 황진이가 한시와 시조2)를 읊고 지었다는 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것은 양반가의 귀부인이든, 기생이든, 첩이든 간에, 여성이 시 짓는 행위는 그 당시의 사회가 쉽게 용납하지 않은 남성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여성들은 공식적으로 교육에서 소외되었고 집에서만 한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서 “婦女子로 文에 能하던 사람은 中國에서는 奇異한 일이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女流詩人이란 奇異한 일”3)이었다. 그 당시의 일반적인 사회풍토는 여성들이 집에서 소일꺼리로 양잠과 길쌈을 하는 일이어서, 여성이 시를 읊는 것이 아름다운 행실로 보여 질 수 없었다. 그래서 황진이, 이매창, 허난설헌, 이옥봉 같은 여성들이 한시와 시조 작품을 창작했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렇듯 여성과 한시 및 시조와의 만남은 여성이 사회적 갈등과 모순 속에서 여성의 본원적인 위치를 찾아가는 단계적 역할로써 여성사회의 새로운 변화의 전기를 알리는 신호탄이 아닐 수 없다. 황진이는 이러한 사회적 정황 속에서 사회적 관습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독창적이며 감미롭고 감수성 넘치는 연정시4)를 창안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연정시를 노래하여 그 당시의 무수한 사대부들의 가슴에 연인에 대한 고귀하고 절제된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그녀의 연정시는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 감정을 뛰어 넘어 일반 연인들의 애절한 감정을 표상하는 보편성을 띄게 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접근하기 위하여 2장에서 “황진이 시대의 사회적 배경”에서 시대적 배경, 기녀 시조의 출현동기 등을 살펴볼 것이다. 제 3장에서는 “황진이의 생애와 교유인물”에서 황진이가 일생동안 만나고 헤어졌던 인물들을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제4장의 “시에 나타난 사랑과 연정의 노래”에서는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음영(吟詠)되고 있는 <靑山裏碧溪水ㅣ야>, <내 언제 無信여>, <冬至ㅅ 기나긴 밤을>, <靑山은 내이오>, <어져 내일이야>, <詠半月>,<相思夢>, <奉別蘇判書世讓> 등, 한시 3수와 시조 5수에서 임에 대한 애절한 사랑과 그리움의 성격을 분석하고자 한다. 제 5장의 “나오는 말”에서는 조선시대에 여성이라는 신분의 제약을 극복하고 남녀 간의 사랑의 고귀한 감정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황진이 시의 예술성을 강조하려고 한다. 1) 김용숙은 여러 문헌을 비교 검토하여 황진이의 생존 연대를 추정하였다. 김용숙에 따르면, 황진이는 중종(1488-1544, 재위기간 1506-1544) 6년경에 출생하여 중종 36년에서 37년경까지 살았던 시인이었다. 이는 황진이가 30세에서 31세 정도까지 밖에 생존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김용숙,『황진이의 생존 연대-추정을 위한 시론(試論)』, 강전섭 편,『황진이연구』, 창학사,1986, 172면) 2) 황진이의 작품은 한시 8수와 시조 6수가 전해진다. ※ 황진이의 시조는 다음과 같은 자료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어져 내일이야>가 초삭대엽에 무명씨의 작품으로 1수. (김수장 편, 이상보 해제,『一石本海東歌謠』, 규장문화사, 1979, 26면) 3) 沈守慶著, 沈錫奎譯,『遣閒雜錄』, 白夜出版社, 1980. 58면 Ⅱ. 황진이 시대의 사회적 배경 조선의 건국 사상은 고려 말에 원나라에서 도입한 성리학이 중심축이 되었다. 이에 학문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도본문말(道本文末)의 문학관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시문은 소기(小技)의 여사(餘事)로 여겨졌다. 이런 이유로 그 당시의 시인들은 시문 자체에 대한 논의를 체계적으로 진행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사회분위에서 당시의 문인들은 시 짓는 것에 대하여 그리 큰 자부심을 가질 수 없었다. 다만 시문은 성정을 도야하는데 기여하므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제한적 효용론이 초기 조선시대의 시 문학관을 지배했다.5) 5) 손미영,『한국여류 시인 연구』, 「허난설헌 시 연구」, 한국문학사, 1998,197-199면.
그리고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이시기는 백성들의 성숙한 문화의식 때문에 정신문화가 발달하여 다양한 유파의 문단을 형성했다. 이러한 사례는 백광홍, 이달, 최경창의 삼당파(三唐派)와 박은을 위시한 해동강서시파(海東江西詩波)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사회⋅정치적 정황에서 여성 시인들의 역할은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는 한시가 문학의 주류이던 시대이지만 여성이 한시를 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사대부 남성들은 교양으로 한시를 짓고, 전문 시인으로 자처하며 일생동안 한시를 창작했다. 바로 이들은 그 당시의 문학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정황에서 여성이 한시를 창작하는 것은 특히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소수의 기생들과 양반가의 규수들만이 시와 시조를 창작하여 여류 시세계를 형성했다. 그 당시에 일반여성들은 자신의 이름과 부모님께 안부를 묻는 편지를 읽고 쓸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 조선사회의 시대적 흐름이었다. 이러한 일반여성들의 일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나 연인과의 사랑과 이별을 시조와 한시로 창작한 여성이 바로 황진이이다.
그 당시에 시조나 한시를 지었던 여성들은 황진이, 이매창을 비롯한 소수의 기녀들과 신사임당, 송덕봉, 허난설헌과 같은 명문 사대부 출신의 여성 시인들이었다. 이 여성 시인들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여류 작가들이다. 이러한 여성 시인들은 여성만의 독특하고 뛰어난 감수성과 섬세한 시어를 자신의 작품에 묘사하여 시문이 남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확증했다. 그 이후 조선 후기에는 훨씬 더 많은 여성 한시 작가들이 등장했다. 그래서 한시는 더 이상 남성만의 전유물이 되지 못했다. 조선시대의 문학사에서 아주 걸출한 일들 중의 하나는 기녀들이 한시를 창작한 일이다. 기녀들은 사대부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일반 양반가의 규수들도 한시를 창작하기가 힘든 사회적 정황에서 기녀라는 신분을 뛰어 넘어 조선시대 문예부흥을 주도하였다. 기녀들이 이렇게 조선시대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그들이 당대의 이름난 사대부들과의 교유를 통해 사대부들이 그들의 시재를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두 편의 작품을 남긴 기녀들의 작품도 대부분 교류를 한사대부 남성에 의해서 세상에 전해졌다. 이는 남성 중심의 문학 환경에서 사대부 남성들이 여성의 한시 작품을 전파하거나 기록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대부 가정의 여성들은 유교 덕목에 의한 규범 때문에 자유롭게 한시와 시조를 창작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적 정황에서 기생들은 한시와 시조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시 짓기를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한시와 시조는 술자리에서도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기생이 사대부와 술자리에서 시중을 들면서 한시와 시조를 노래할 줄 알아야 격이 높다고 했다. 제대로 자격을 갖춘 기생은 가무를 두루 익히고 한시와 시조도 배워야 했다. 이러한 정황에서 한시와 시조는 사대부들만의 문학이 아닌 다른 계층에 속한 기녀들의 문학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기생이 창작한 최초의 한시는 조선시대의 성종 통치기에 소춘풍(笑春風)이라는 기생이 지은 한시이다. 성종이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면서 소춘풍에게 술을 따르게 했더니, 소춘풍은 영의정 앞에 나아가 문인을 칭송하는 한시를 지어 불렀다. 그 한시는 문신을 찬양하고 무신을 경시하는 구절이 있었다. 그런데 소춘풍은 무인출신으로 병조판서가 된 사람 앞에서 다시 문무가 일체이며, 오히려 용맹스러운 무인이 좋다는 한시를 읊었다. 그 결과로 문인과 무인 사이에 시비가 일어나자, 소춘풍은 이번에 큰 나라끼리 다투는데 조그만 나라가 큰 나라 양쪽을 모두 섬겨야지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세 번째 한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 세편이 모두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지만, 첫 번째 한시만을 음미해 보자. 唐虞어제 본 듯 漢唐宋오 본 듯 이 한시는 재미있는 일화 때문에 문헌으로 보존된 것이 아닌가 한다. 기생이 문인과 무인 사이의 다툼에 개입해 사대부들이 즐겨 쓰는 문구를 모방하다보니 자기 나름대로의 독 특한 표현을 사용했을 리가 없다. 기녀는 사대부가 의관을 파탈하고 허물없이 어울리는 자리에서 한시를 멋지게 지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한시의 중간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가 현재까지 남아있지 않다.7) 이제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황진이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떤 사대부들과 교류를 하면서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추앙을 받는지를 알아보자. 6) 황충기,『기생 時調와 漢詩』, 푸른사상, 2004, 18면 7) 조동일,『한국문학통사』 2, 지식산업사, 1994, 358면 Ⅲ. 황진이의 생애와 교유(交遊)인물 황진이는 조선중기 중종 통치시기에 송도에서 명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황진이는 기녀로서 갖추어야 할 기예를 두루 갖췄으며 한시와 시조도 잘 지었다고 한다.
소호당집(韶護堂集)은 황진이와 일서생(一書生) 사이의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 황진이는 일서생이 자신을 열렬히 사모하다 죽은 사건 때문에 어머니의 간곡한 반대에도 무릅쓰고 기가(妓家)에 들어갔다고 한다. “眞伊나이 15․16세에 隣家書生이 진이를 슬쩍 엿보고 그 미모에 반하여 상사병이 들어 죽었다. 靈柩가 진이의 대문 앞에 이르러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亡者의 집에서 自初至終을 이야기하고 간곡히 애원하여 진이의 저고리를 얻어 엎으니 비로소 靈柩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8) 8) 芳年十五六時 隣有一書生窺 而悅之 欲私不果 遂因綠成疾死. 柩發到眞門 不肯前 先是書生炳 其家頗聞其事 乃事人懇眞 得其襦覆之柩 然後柩始乃前. 『韶護堂集』, 券十四, 第七本十一城雜事傳. 일서생은 황진이를 잠깐 보고서 그녀의 미모에 반해 사모의 정을 품다가 상사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다. 황진이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심정에 변화가 생겼다. 황진이는 일서생에 대한 미안함과 여성이 남성과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없다는 사회적 관습의 벽에 직면했다. 황진이는 이 사건을 계기로 기생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이했을지 모른다. "性格이 활달하여 男子같았으며 楓岳·太白山·智異山을 거쳐 金城에 이르렀을 때 그 고을의 원이 베푼 잔치에서 芦妓들이 가득 모인 중에 眞伊는 떨어진 곳에 때묻은 얼굴로 上座에 나가 이를 잡으면서 노래하고 거문고를 탔는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여러 기생들은 기가 질렸다.9)" 9) 性倜儻類男子 工琴善歌 嘗遊䢓山水間 其自楓岳 歷太白智異至錦城 州官方宴 節使聱妓滿座. 眞娘以弊衣折面直坐其上 捫蝨自苦 謳彈無小作 諸妓氣懾. 許筠, 『惺所覆瓿藁』, 券二十四, 「惺翁識小錄」 下, <眞娘工琴善歌>,『韓國文集叢刊』 55, 347면. "가정초에 松都의 妓生眞伊라는 자가 있었는데 여자 중에서도 뜻이 크고 높았으며 호협한 사람이었다."10) 10) 嘉靖初 松京有名妓眞伊者 女中之倜儻任俠人. 『於于野譚』, 유몽인지음, 손익철옮김, 돌베게, 2006, 78면. 위의 기록을 보면, 황진이는 외향적인 성격에 호탕한 성품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황진이는 기녀이면서도 고결하고 지모가 뛰어난 연인이었다. "진이는 시정의 천한 족속 같으면 천금을 준다고 하여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선비들과 교유하며 학문을 해독하고 당시를 보고 즐거워했다.11)" 11) 若市井賤隸 雖贈千金而不顧 好與儒士交遊 顧頗解文字喜觀唐詩. 『大東野乘』, 「松都記異」, 朝鮮古書刊行會, 375면. 황진이는 성격이 고결하여 풍류명사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12) 12) 眞高自標致非風流名士不得親, 李家原,『錦溪筆談』,『韓國漢文學史』, 普成文化社, 1961, 245면. 황진이가 기녀이면서도 이렇게 고결한 성격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자존감이 강했으며, 높은 이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황진이는 지모를 겸비한 여인이었다. 왜냐하면 황진이는 벽계수가 풍류 명사인지 아닌지를 한 수의 시로 판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황진이가 30년 동안 면벽 수행을 한 지족노선을 파계시킨 사례를 통해 그녀의 지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황진이는 적극적이면서도 상당한 결단력이 있었다. 황진이는 금강산이 천하의 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금강산을 비롯하여 전국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였다. 또한 황진이의 재질을 보면, 그녀는 기녀로서 천하에 둘도 없는 명기의 끼를 소유한 여성이었다. 황진이는 어려서부터 천자문(千字文), 열녀전(烈女伝),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을 두루 섭렵했다. 뿐만 아니라 황진이는 거문고와 가무 등에 조예가 깊었다. 아마도 이러한 황진이의 재질이 그녀를 조선 최고의 명기로 만드는 근원이 되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재기를 모두 갖춘 황진이는 어떤 남성이라도 그녀의 이지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황진이는 비록 기생이지만 전국각지의 남성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황진이는 빼어난 자색과 가무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즉흥적으로 시도 잘 지었다. 이러한 이유로 황진이의 시는 떠나버린 임을 기다리면서 눈물짓는 전통 애정시가와는 차별성을 지닌다.
Ⅳ. 황진이의 시에 나타난 사랑과 연정의 노래 황진이는 조선시대 최고의 기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생보다는 연정시를 노래한 조선시대 최고의 여성시인이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황진이는 초기시기에 일서생을, 중기시기에 지족노선, 개성유수 송공,송실 벽계수, 소세양을, 후기시기에는 화담 서경덕, 이생원, 이사종 등을 만났다. 황진이는 이들과 만나고 헤어짐을 많은 한시와 시조로 창작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시는 소수의 시에 불과하다.
황진이는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봉건 윤리가 사회를 지배하던 조선 시대에 기녀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신분은 독특하게도 계급적 질서를 벗어나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제한된 시를 창작하여 노래할 수 있는 이중성을 부여한다. 이는 황진이가 사대부들과의 만남과 교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공간을 형성한다. 또한 이는 황진이가 그 공간에서 자신의 재능을 문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편을 제공했다.
<반달>은 연정의 유한을 노래하면서 임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을 드러내고 있다. 황진이는 “곤륜산”14)과 “견우와 직녀”15)라는 시어를 사용하여 임에 대한 그리움과 만남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詠半月 반달 황진이는 하늘의 달을 보며 임과 자신의 이별을 견우와 직녀로 비유하고 있다. 떠나버린 임은 황진이를 처음 만났을 때에 평생 동안 헤어지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사랑의 징표로 “곤륜산 맑은 구슬을 끊어”서 만든 옥 머리빗을 주었다. 하지만 잠시 동안 함께 머무르던 임은 머리빗만 남겨 놓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황진이는 임이 떠난 후에 임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다가 밝은 달이 하늘에 찬란히 빛나는 것을 보며 뜰을 거닐고 있다. 이때에 하늘에 떠 있는 반달은 그녀의 머리에 꽂은 옥머리빗과 동화되어 직녀의 머리빗처럼 보인다. 황진이는 이 시에서 목동인 견우와 옥황상제의 손녀인 직녀가 사랑을하여 결혼을 했지만, 옥황상제의 분노로 은하수에 견우별과 직녀별이 되어 1년에 한번 칠월칠석날을 제외하고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자신도 사랑하는 임을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황진이는 임이 준 옥머리빗을 “푸른 하늘에” 던져서 임과 현재 이 공간에서는 사랑을 나눌 수 없지만, 옥 머리빗이 반달로 치환되어 떠 있는 푸른 하늘에서 영원히 사랑하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하지만 황진이는 옥머리빗을 “푸른 하늘에 던졌구나”라고 말하며, 비록 연인들이 몸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푸른 하늘에 달이 떠오르는 날이면 언제든지 그녀와 임이 매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사랑하는 연인들이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시공을 초월하여 반달을 통해 언제든지 서로의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13) 黃浿江외,『韓國文學作家論』, 螢雪出版社, 1977, 227-228면 14) 곤륜산은 중국의 전설에서 멀리 서쪽에 있어 황하강의 발원점으로 믿어지는 성산이다. 곤륜산은 하늘에 닿을 만큼 높고 보옥이 나는 명산으로 전설적인 옥(玉)의 산지이다. 전국시대 이후 신선설이 유행함에 따라 곤륜산은 신선경으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되어, 산중에 불사의 물이 흐르고 선녀인 서왕모가 살고 있다는 신화들이 생겨났다. 중국의 신화나 전설에는 여러 가지 ‘낙원’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영험이 강한 신선들의 땅이라 일컬어지는 곳이 곤륜산이다. 이 산의 위치는 중국 북서쪽 끝에 있다고 전한다. 곤륜이라는 단어는 원래 ‘혼륜(渾淪)=카오스(혼돈)’을 뜻하는데, 모든 중국인들의 뿌리인 황하의 원류가 이 산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 산의 정상은 북극성과 마주보고 있다고 한다. 즉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나라 목동인 견우와 옥황상제의 손녀인 직녀가 결혼하였다. 그들은 결혼하고도 놀고먹으며 게으름을 피우자 옥황상제는 크게 노하여 견우는 은하수 동쪽에, 직녀는 은하수 서쪽에 떨어져 살게 하였다. 그래서 이 두 부부는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건널 수 없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애태우면서 지내야 했다. 이러한 견우와 직녀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들은 까마귀와 까치들은 해마다 칠석날에 이들을 만나게 해 주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 다리를 놓아주었으니 그것이 곧 오작교(烏鵲橋)이다. 그래서 견우와 직녀는 칠석날이 되면 이 오작교를 건너 서로 그리던 임을 만나 1년 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고 다시 헤어진다. 그러나 사랑의 회포를 풀기도 전에, 새벽닭이 울고 동쪽 하늘이 밝아오면 다시 이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직녀는 또다시 1년간 베를 짜고 견우는 밭을 갈면서 제각기 고독하게 보내야 한다. 그러기에 칠석날에는 까마귀와 까치를 한 마리도 볼 수 없다 하는데, 어쩌다 있는 것은 병들어서 오작교를 놓는 데 참여하지 못한 까마귀나 까치들뿐이라고 한다. 칠석날 저녁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상봉한 기쁨의 눈물이고, 이튿날 새벽에 비가 오면 이별의 눈물이라 전한다. 16)『歷代女流漢詩文選』, 大洋書籍, 金智勇譯, 1973, 67면. 이러한 사랑에 대한 간절한 소망은 <靑山裏碧溪水ㅣ야>에 잘 들어나 있다. <靑山裏碧溪水ㅣ야>는 황진이가 벽계수와의 만남을 노래한 시이다. 황진이는 벽계수와 유한한 인생을 한껏 즐겨 보겠다는 호방한 인생관과 모든 만남과 이별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바꿀 수 있다고 인식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이처럼 황진이는 만남과 이별에 대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전통적 여성상보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상을 구현하고 있다. 靑山裏碧溪水ㅣ야 수이 감을 쟈랑마라 이 시는 벽계수를 자연에 비유하여 우롱하는 능청스러움이 담겨있다.18) "소동(小童)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갖고 뒤에 따르게 하고, 그대는 小마를 타고 진이의 집을 지나 나귀에 올라 술을 마시면서 거문고로 一曲을 타고 있으면 진이가 반드시 그대 곁에 앉을 것이니 그대가 본체만체하여 일어나 나귀를 타고 가버린즉 진이가 뒤따라 올 것인데 취적교(吹笛橋)를 지나도록 돌아보지 않으면 원대로 성사될 것이요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원대로 성사되지 않을 것이니 시키는 대로 하라.19)" 19) 君使小童挾 琴隨後乘小驢過眞娘之家 登樓賒酒而飮 彈琴一曲 則眞娘必來坐君傍矣 君視若無見 卽起乘驢而行 則眞娘卽當隨後而來 若行過吹苖橋而不願 則事可諧矣 若不然則必不成矣. 『錦溪筆談』 이에 벽계수는 이달의 제안대로 그대로 실행하였다. 그랬더니 황진이가 벽계수 뒤를 따라오면서 벽계수인지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체하고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오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라고 노래를 불렀다. 그때에 벽계수는 황진이가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고 어찌나 감동이 되었던지 취적교 다릿가에서 그녀를 뒤돌아보다가 나귀의 등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17) 鄭炳昱編著,『時調文學事典』, 新丘文化社, 1966, 482면 20) 此非 名士 乃 風流郞也. 李家原, 『韓國漢文學史』, 普成文化社, 1961, 245면. 그렇다면 황진이는 어떤 남성을 좋아 했을까? 황진이는 고매한 성격을 지닌 풍류명사를 좋아하며 그들만을 연인으로 사귀었다. 교류했던 남성들과 황진이의 만남은 황진이의 계획과 노력으로 성취된 것이 아니라 우연하게 찾아온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황진이의 모든 만남은 숙명적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황진이에게 다가오면, 그녀는 그 사람을 완전히 매료시켜버렸다. 이처럼 황진이의 사랑은 의도적이거나 계획적이지 않았으며 어느 날 문득 황진이를 찾아와 숙명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이루어진 사랑이 어느 날 황진이를 떠나서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되면, 그녀는 임을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면서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어 했다. 相思夢 그리운 꿈 儂訪歡時歡訪儂 내 임 찾아갈 때 임도 나를 찾아왔나봐 황진이는 이 시조에서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임을 꿈속에서 만나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연정시는 “꿈”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임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애절한 가를 제시하고 있다. 황진이는 임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나 사무쳐 꿈속에서라도 연인과 만남이 재현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래서 황진이는 상사병에 걸려 거의 죽음에 임박한 사람과 같은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녀의 소망은 오직 “내 임 찾아갈 때 임도 나를 찾아왔나 봐”라고 노래하며, 자신만 임을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 임도 그녀를 그리워해서 비록 현실이 아닌 꿈일지라도 꿈속에서라도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이 시는 두 연인이 이렇게 같은 꿈을 꾸다가 운명적으로 꿈속에서 “도중에 다정하게 만나리”라는 간절한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시는 임의 부재로 인해 혼자서만 임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임을 못 만나면 꿈속에서라도 꼭 만나야겠다는 그녀의 간절한 소망의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21) 朴榮完, 『黃眞伊文學硏究』, 忠南大學校大學院博士學位論文, 1995, 41면 다음의 시 <奉別蘇判書世讓>은 소세양이 황진이를 떠나려고 할 때에 지은 시이다. 소세양은 어린 시절에도 성격이 강직하여 자주 “매일 여색에 미혹하는 자는 세상의 남자가 아니다”22)고 말했다. 그리고 송도의 명기 황진이도 소세양이 어린 시절에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고 말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런데 소세양은 황진이의 재주와 미모가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서 친구들에게 “내가 이 여자와 함께 생활하기를 30일을 하고 즉시 이별할 것이되 털끝만큼이라도 다시 생각지 아니할 것이네”23)라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하지만 소세양이 실제로 송도로 가서 황진이를 만나보니 그녀는 과연 뛰어난 절색이었다. 소세양은 약조한 30일 동안을 그녀와 함께 살고 어쩔 수 없이 떠나려 하자, 그녀가 누(樓)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奉別蘇判書世讓 봉별소판서세양 황진이는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내기 싫어서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라고 노래했다. 떠나려고 대문을 나서던 소세양은 이러한 황진이의 마음을 노래한 시를 듣고 감동하여, 애초의 장담을 꺾고 자신이 비정한 사람이라 탄식하면서 다시 황진이의 집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도 황진이는 소세양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하고 종종 인편을 통해 그리움이 가득한 시를 보냈다고 한다. 22) 每日爲色所感者非男子世.『東國詩話彙成』, 第二十一券: 黃眞條. 24)『歷代女流漢詩文選』, 69면. 다음의 시 <내 언제 無信여>는 서화담과의 교류를 노래한 시이다. <내 언제 無信여>는 황진이가 서화담의 소문을 듣고 그를 시험해 보고자 찾아 갔지만 오히려 서화담의 고매한 인격에 감화를 받게 된다.
“음이 어린後ㅣ니 일이 다 어리다 / 萬重雲山에 어 임 오리마 / 지 닙 부 람에 여 긘가 노라”25) 라는 시에 황진이가 화답한 것이라고 한다. 비록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지냈지만 두 작품에 나타난 남녀간의 정은 다른 연인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다만 이런 감정을 순수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두 사람의 지혜가 돋보일 뿐이다. 내 언제 無信여 님을 언제 소겻관 이 시는 상사연모의 정을 노래한 시이다. 주위는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 밤이건만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소리를 임의 발자국소리로 잠시 오해한다. 황진이는 서화담에 대한 사랑을 일시적인 사랑이 아닌 진정성이 있는 사랑으로 대했건만 서화담은 잠시 스쳐지나가는 바람 같은 사랑으로 인식했을 것으로 보고 자신의 심정을 비탄어린 투로 하소연하고 있다. 이 시는 다시는 오지 않을 임에게 하소연하면서 고독과 갈등으로 이 밤을 지새우는 애절함을 표현한 작품이다. 25) 서경덕, 時典, 1378 <冬至ㅅ 기나긴 밤을>은 사람들로부터 회자되어 온 시이다. 이 시는 임을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고 길기 때문에 그 기다림의 시간을 단축시키고 임과 사랑을 나누는 시간을 확장시켜보고 싶은 황진이의 마음을 표현한 시이다. 冬至ㅅ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이 시는 황진이의 대표적인 연정시라고 볼 수 있다. 황진이는 임이 떠난 후에 혼자 기나긴 동짓달을 홀로 지내면서 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며칠 밤을 지새우고 있다. 황진이는 “冬至ㅅ 기나긴 밤을” 자신의 허리처럼 “한 허리를 버혀내여”라고 노래하는 의인법을 사용한다. 이 시에서 동짓달은 황진이가 얼마나 임을 그리워하는 가를 드러내는 이미지이다. 그리고 한 허리와 이불은 그리워하는 임과 사랑을 나누는 이미지이다. 황진이는 이러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일상적인 언어로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연정시의 백미를 드러내고 있다. 27)『時調文學事典』, 165면. 그리고 <靑山은 내이오>는 황진이가 지족노선를 파계시킨 뒤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는 그 때문에 둘 사이의 의사소통 맥락에서 이 작품을 해석하려는 시도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함의가 무엇인지 여전히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28) 지족노선은 비련의 주인공으로 숭유억불 시대에 산속으로 들어가 부처님의 진리를 찾아서 면벽하고 앉아 수행을 했던 수도승이다. 하지만 황진이는 지족노선에게 접근하여 그를 파계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지족노선이 황진이 곁을 떠나자 그녀는 이 시를 읊으면서 자신의 연정을 노래한다. 靑山은 내이오 綠水 님의 情이 청산은 지족노선에 대한 황진이의 변함없는 연정의 마음을 상징하는 이미지이다. 청산은 사시사철 계절의 변화에도 전혀 변화가 없이 처음과 똑같이 푸르름을 유지한다. 이는 바로 언제나 그대로 그 자리에서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황진이 자신의 마음이다. 반면에 녹수는 지족노선의 마음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이미지이다. 거울에 청산이 반영되었을 때에 녹수로 보이지만, 만약에 가을 단풍이 반영되었다면 울긋불긋하게 채색된 모자이크처럼 보일 것이다. 이는 바로 황진이를 버려두고 떠나버린 지족노선의 마음이다. 그래서 황진이는 “綠水흘러간들 靑山이야 變손가” 라고 노래하면서 자신의 마음은 과거와 현재가 전혀 변화하지 않은 올곧은 마음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황진이와 헤어진 지족노선의 마음도 비록 몸은 황진이 곁을 떠났지만 마음은 전혀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마지막 시행에서 제시하고 있다.
28) 조세영, 「동짓달 기나긴 밤…의 시공인식」,『한국고전시가작품론』2, 백영⋅ 정병욱선생 10주기추모논문집 편찬위원회, 集文堂, 1992, 499면. 29)『時調文學事典』, 483면. 마지막으로 다음의 시는 붙잡은 임이 다시 떠나게 되자 그리움을 읊는 연정시이다. 이 시에서 황진이는 임을 보낸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는다. 황진이는 떠나보낸 임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절제하지 못하고 회한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어져 내일이야 그릴줄을 모로냐 황진이는 고결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남자들을 선별하여 연인으로 사귀었지만, 떠나겠다는 임을 붙잡고 애걸복걸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진이는 임을 떠나보내고 난 이후에 임을 떠나보낸 자신의 잘못과 사무치는 그리움을 시에 낱낱이 묘사하고 있다. 황진이는 이 시에서 ‘어져’라는 말을 앞세워서 이별을 하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던 그리움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시에서 보듯이 임이 떠나가거나 머무는 일은 황진이 자신의 선택이자 의지에 달려 있었고, 황진이는 임을 배려하여 붙잡지 않았다. 그래서 “보내고 그리 情은 나도 몰라 노라” 처럼, 황진이는 임을 떠나보내고 아쉬울 줄 알면서도 붙잡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는 황진이의 내면적 갈등과 그러한 갈등 속에서도 타인을 배려하는 자세가 드러나 있다. 30)『時調文學事典』, 336면. Ⅴ. 나오는 말 황진이는 남녀 간의 사랑의 감정을 시의 형태로 구가한 조선시대 최고의 지성적인 여성 시인이다. 황진이가 기녀라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극찬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연인에 대한 애달픈 그리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창의성에서 비롯된다. 황진이에게 있어서 만남은 다른 사람들의 만남과 달리 신분적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황진이는 이러한 사회적 신분을 뛰어넘어 일생 동안 수없이 많은 남성들과 만남과 이별을 경험했다. 하지만 황진이는 이러한 만남과 헤어짐의 아픔과 고통에서 좌절하지 않고, 임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그녀만의 독특한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황진이는 시를 창작할 때에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기보다는 이를 자유자재로 유감없이 발휘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성향을 지녔다. 그리고 황진이는 그 당시에 무수한 사대부들의 가슴속에 고귀하고 절제된 사랑의 감정을 일깨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황진이는 시(詩), 서(書), 거문고, 가무 등에도 능수능란한 다재다능한 재능을 갖춘 예술인이다. 그래서 그 당시의 사대부 남성들은 그녀에게 흠모의 연정을 품었다. 이들 중에는 인생을 유유자적하게 즐겨 보겠다는 호방한 인생관을 가진 벽계수와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소세양이 있다. 그리고 황진이는 서경덕과의 교류를 통해 그의 고매한 인품과 정신적 사랑을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황진이는 이러한 무수한 연인들과 사랑을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이며 감미롭고 감수성 넘치는 연정시를 창안하였다. 황진이의 연정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참고 문헌> 1. 자료 2. 단행본 및 논문 서경덕, 時典, 1378 Abstract A Study on Jini Hwang’s Romantic Love and Yearning Feeling Poems / Yu, Yuk-rye When she wrote her poetry, Jini Hwang had specific character not to restrict her feeling but to express her feeling freely to her lover. And she largely contributed to make the gentry realize the emotion of exalted and temperate love at that time. She is an artist who is many-talented person about poetry, writings, a k?mungo, a Korean harp with six strings, and singing and dancing etc. So, in those days, the gentry fell in love with her in adoration. Among these persons, there are Byeog Gyesu who lived free life from worldly cares, and So Seyang who “was not a man if he fell a victim to the charms of a woman.” And She sublimed Seo Gyeongdeog of respectable and spiritual love into wonderful platonic love through interchanging him. She created her unique sweet sensible romantic love poem through love with these many lovers. In short, Gini Hwang’s romantic love poems have some of following characteristic. First, she express the free feeling of love to lover in her poems as it is, sang to sublime her feeling into poetry in using metaphor and a metaphorical expression. Second, she indicated her inner isolation frankly, set up overcome space in her mind. Third, she showed lament feeling for lover into universal validity to sublime yearning for lovers into personal emotion. Fourth, she always was situated at present time to emblematize man and woman’s yearning into the image of transcendency of time and space. Fifth, after she manifested yearning of lover in common words, she used specific image to unite to the lover. So, her romantic love poem is certainly the expression of her life. Therefore, her poems showed universal emotion of man and woman’s grief lo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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