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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과 신흥종교
전북대학교 명예교수 김 인수
들어가는 말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명산 모악산은 전북 서북 지역 사찰을 총괄하는 본부 금산사를 품에 안고 있으며, 금산사는 후백제 견훤부자의 애증이 담긴 역사의 현장이고 국보62호인 미륵전, 홍예석문 등 문화재가 많아 문화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모악산은 진잠의 신도안, 풍기의 금계동과 함께 명당으로 일컬어져 피난처로 꼽혔고, 무당과 각종 유사 종교시설이 많고 증산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모악산엔 금산사를 비롯한 각종 사찰과 종교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모악산은 금산사를 중심으로 불교, 수류성당을 중심한 천주교, 그 유명한 금산교회를 갖는 개신교, 그리고 원평교당을 소유한 원불교, 증산교 대부분의 종파 등, 수많은 종교 문화가 뒤섞인 곳이다.
I. 모악산의 명칭, 유래
모악산은 동경 127°01′00″, 북위 35°45′30″에 위치하며 높이는 795.2m이다. 노령산맥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호남평야와 전라북도 동부 산간 지대의 경계가 된다. 1971년 12월 모악산을 중심으로 면적 42.44㎢가 모악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금산사지를 보면 ‘엄뫼’라는 말이나‘큰뫼’라는 말은 아주 높은 산을 의미하는데, 한자가 들어오면서‘엄뫼’는 어머니 산이라는 뜻으로 의역해서‘모악’이라 했고,‘큰뫼’는‘큼’을 음역하고‘뫼’는 의역해서‘금산(金山)’이라고 적었다고 되어 있다. 구전에 의하면 모악산 꼭대기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닮은 큰 바위가 있어 모악산이라 했다고 한다. 모악산에는 산금이 있고, 주변의 금산면·금구면을 흐르는 원평천·두월천의 하상에는 사금이 있다. 주능선은 북동∼남서 방향이나 지능선이 동과 서로 뻗어 있다. 동쪽 사면은 만경강의 집수역으로 계곡의 물은 구이면의 전주저수지에 흘러들어 전주 서쪽을 흐르는 삼천이 된다. 서쪽 사면은 만경강과 동진강 사이의 원평천 집수역이 된다.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북쪽 금구면의 두월천과 남쪽 원평 천은 330년(비류왕 27)에 축조된 벽골제의 수원이 되었다. 모악산은 우리나라 남부의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보이며, 맑은 날이 많고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식물 분포학 상으로 온대형에 속한다. 식생은 대체로 고도가 높은 곳에서는 신갈나무가 우점하고 정상부에 아교목층의 철쭉꽃이 군락을 이루며 저지재는 소나무가, 계곡에는 층층나무와 느티나무 군락이 분포한다. 형성 및 변천암석은 중생대 쥐라기의 편마상화강암으로, 쥐라기에 대보화강암의 석영반암·석영 등의 관입을 받아 북동∼남서 방향의 함금석영맥이 많다. 산은 저평한 호남평야에 우뚝 솟은 산이어서 예로부터 미륵신앙의 본거지가 되었다.
서쪽 사면에 있는 금산사는 599년(법왕 1)에 창건된 것으로 신라 불교의 5교9산의 하나이며, 여러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 금산사미륵전(국보 제62호로 지정)은 겉보기에는 3층이나 실제로 통층으로 되어 있으며, 그 안의 미륵불상은 높이가 11.82m나 된다. 절 안에는 보물 제476호였던 대적광전은 28칸의 웅장한 목조건물이었는데, 1986년 12월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안에 있던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 불상도 소진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처영이 금산사에서 승병 1,000인을 일으켜 왜병을 무찔렀던 장거도 있었다. 또한 옛 기록에는 모악산에 무려 80여 개소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심원암·청련암·용천암·부도전·대원사·귀신사등이 있고 미륵신앙의 기도처가 곳곳에 있다. 귀신사는 서쪽 사면의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것으로 676년(문무왕 16)의상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이 절에는 대적광전(보물 제826호)·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2호)·부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3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미륵신앙이나 풍수지리설 등의 영향으로 여러 신흥종교의 집회소가 있다. 특히 금산면 청도리의 백운동은 모악산이 후천세계의 중심지라 믿어서, 1927년 이후 신도들이 집단 이주하였고 증산교의 의식인 오대치성으로 결속되어 종교취락을 이루었다.1976년 모악산도립공원 개발계획이 수립되어 숙박 시설과 토산품 가게의 집단화, 주변의 신흥 종교집단의 단속·철거 등이 이루어졌다.
예로부터 모악산은 천지의 영험한 정기가 뭉쳐 있는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증산교를 비롯한 여러 신흥종교가 태동했고, 이산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복지사회를 제시하는 불교의 미륵사상이 개화했다. 모악산은 계룡산과 함께 기가 센 산으로 알려져 있고 미륵불을 열망하는 민중의 소망은 지금도 그치질 않는다. 사철로 볼 때도 모악산은 우리나라에서 단풍이 가장 아름답다는 8대 학산에 속하며 몽환적인 단풍을 자랑한다. 또한 봄경치의 그 절경도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모악춘경이라 하여 호남사경 가운데 제일로 꼽는다.
고은 시인이 썼다는 모악산 비에는
내 고장 모악산은 산이 아니다.
어머니시다.
저 홀로 펼쳐 높지 않고
험하지 않고
먼데 사람들마저
어서 오라-
내 자식으로 품에 안을 어머니이다.
라고 읊고 있다
•대원사(大院寺)
구이 주차장을 출발하여 느긋하게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대원사는 모악산 동쪽 기슭 해발 420m에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마한 암자이다. 완만하고 평이한 길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모악을 찾는 이들이 많다. 벚꽃이 화창한 봄날엔 절간을 모두 열고 모악산 진달래 화전축제의 장을 열고 수만 명의 남녀노소가 함께 하는 자리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신흥종교의 진원지로 널리 알려진 모악산 대원사는 조계종 금산사의 말사로 670년(신라 문무왕 10년) 일승(一乘)이 심정·대원 등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해온다. 일승 등은 고구려 보장왕 때 백제에 귀화한 보덕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열반종의 교리를 익힌 뒤 보덕이 머물고 있는 고대산 경복사가 보이는 곳에 절을 짓고 대원사라 하였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으로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606년(선조 39년) 진묵 일옥이 중창하였고, 1886년(고종 23년)에는 건봉사 승려 금곡이 중창하였다.
대원사는 상제님이라 일컫는 증산께서 1901년 5월 중순부터 주지승 박 금곡(朴錦谷)으로 하여금 방 한 칸을 치우게 하고 사람들의 근접을 일체 금하고 49일간 불음불식의 공부를 하신 곳이다.
대원사에는 또한 석가여래의 화신이라 일컬어지는 진묵성사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초의스님이 지은 『진묵조사유적고』에는 당시까지 전해지던 진묵스님의 이적(異蹟) 열여덟 가지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는 신통술이 아니라 불도(佛道)를 깨우치지 못한 대중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스님의 방편이었다. 다음의 이야기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진묵스님이 대원사에 머무를 때의 일화이다.
진묵대사가 사미승이던 어느 무렵에 창원의 마상포(馬上浦 )를 자주 지나가게 되었다. 이때 한 처녀가 스님을 훔쳐보며 자신도 모르게 사랑을 키워왔으나 이루어질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고,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채 홀로 내생을 기약하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후에 이 처녀는 환생을 하여 기춘이라는 이름의 남자로 태어나게 되었는데, 전생의 원에 따라 대원사에서 진묵대사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대사는 기춘이라는 아이를 시동으로 삼았는데, 신심이 지극하고 하는 일마다 영특하여 애지중지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대사가 기춘을 편애한다는 말이 떠돌면서 대중들의 비난거리가 되고 말았다. 대사는 그러한 자신의 행동이 이락삼매행임을 보여주기 위해, 어느 날 기춘을 시켜 국수로 대중공양을 하겠다는 것을 사중에 알렸다. 공양시간이 되어 사찰의 대중들이 모여들었지만, 공양 간에는 국수를 삶는 기척이 전혀 없었다. 이윽고 모든 대중들이 자리를 잡자 대사는 기춘에게 여러 개의 바늘을 주면서, 자신을 포함하여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발우에 바늘 한 개씩을 넣어 주도록 하였다. 발우속의 바늘을 쳐다보며 영문을 몰라 하는 대중들에게 대사는 한마디 던지며 젓가락을 들었다. “자, 이제 국수 공양들 하시지요.” 어느새 대사의 발우에는 바늘이 가는 국수로 변해서 가득하였으나 다른 대중들의 발우에는 여전히 한 개의 바늘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대원사 위로 올라가면 수왕사가 나온다. 여기는 주지승인 벽암스님이 빚은 송화백일주와 암반에서 흐르는 석간수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수왕사 이름도 일명 ‘물왕이 절’로 불린다. 대한민국 전통식품 명인 제1호인 벽암스님이 빚는 송화백일주는 400년 전 조선시대 진묵대사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해발 600m 고지에 위치한 수왕사에서 참선을 하던 수도승들의 고산병과 영양의 불균형에서 오는 혈액순환 장애를 예방할 목적으로 곡차를 일주일에 한 두 모금 마시도록하기 위해 만든 데서 유래를 했다고 한다.
밖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는 진묵은 유ㆍ선(儒ㆍ仙)에도 능통하였고 석가모니불의 후신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전경에 나오는 진묵의 이야기가 이를 대변한다.
이상을 간략히 요악해 보면 대원사는 창생을 구제하기 위해 상제님께서 49일간 불음불식의 공부를 하셔서 천지신명을 심판하였고, 도주께서는 백일도수를 보신 곳이다. 또한 김봉곡과 척이 맺힌 후 동양의 도통신을 이끌고 서양으로 건너가 서양의 문화계발을 일으킨 주요 인물이었다가 상제님의 해원공사에 의해 불교의 종장으로 임명되어 고국의 선경건설에 역사하게 된 진묵이 있던 본거지이기도 한다.
견훤과 정여립, 역사의 격랑 앞에서 그들은 모두 비운의 풍운아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불온한 반역이 모악산에서는 성스러움으로 다시 태어났다. 신라와 조선의 지배집단에게 그들은 패역의 수뇌였지만, 모악산 일대에서 그들은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되었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이르러. 이런 기억이 다시 개벽사상으로 승화되었다.
2. 증산도
모악산하의 독특한 종교적 분위기는 10여 세기 동안 내려온 미륵신앙과 강증산(姜甑山)의 후천개벽사상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악산을 근거로 한 대표적 신흥종교엔 증산도를 들 수 있다. 증산도는 1901년 전라북도 모악산에서 강일순에 의해 만들어졌다. 강일순은 조선 말기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로 실의에 빠진 조선민중들에게 꿈과 이상을 심어줬던 증산 강일순은 후천개벽을 꿈꾸었던 선각자였다. 인간본위의 평등사상, 민족고유의 홍익인간이념을 종교적 신념체계로 이끌어 올린 증산은 불교나 유교, 기독교나 동학 같은 기존의 종교와 사상으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고 판단, ‘무극대도(無極大道)’를 펼쳤다. 하지만 교세가 확장돼 가던 중 강일순 교주가 갑자기 사망하자 교주 승통문제에 혼선이 벌어져 여러 분파가 난립하기도 했다. 1992년 민족종교협의회에서 파악한 자료에 의하면 57개의 분파가 활동하고 있다. 증산도, 대순진리회 등이 상대적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며 그 맥을 잇고 있다.
증산도 교단에서는 강일순을 무극제(無極帝)라 하고, 창교주 안세찬을 태극제(太極帝)라 하며, 2대 교주 안경전을 황극제(皇極帝)라 칭한다.
교단 내에서는 강일순의 둘째 부인인 고판례가 1911년에 개창한 선도(교)가 기원이라고 하며, 종통이 고판례를 거쳐 증산도로 전달되었다고 주장한다. 강일순과 고판례의 언행을 담은 도전(道典)이라는 책을 경전으로 삼았고, 수행법으로서 태을주를 중심으로 하는 주문수행을 하며 정기행사로 치성(천주교의 미사, 개신교의 예배처럼)을 지낸다.
교조인 증산 강일순은 1871년 태어나 각지를 방랑하며 수행하던 중 1901년 전주 모악산 대원사 칠성각에서 도통을 하고 이후 1909년까지 천지공사라 하여 우주와 천지의 질서를 바꾸는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이 때 많은 기행(奇行)과 이적을 행하였다고 하며, 혹자는 미치광이로 취급하기도 하고 혹자는 하나님으로 떠받들었다. 강일순은 이후 "판을 짠다"는 표현으로 천지공사를 진행하는데, 그를 따른 제자 가운데 일부는 강일순이 진행한 천지공사의 변화의 상징인 "도수"를 부여받기도 했다. 강일순은 부인이 3명이었다. 먼저 1891년에 혼인한 정치순(鄭治順)은 강일순이 수행할 때 시종을 들었으나, 이후 이른바 대도통 이후에 시부모와의 불화로 부친이 내치라고 하면서 사실상 이혼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1904년(당시 34세)에 수석제자였던 김형렬에게 처음으로 수부를 세우기로 종용하자 셋째 딸이던 김말순을 추천하였고, 김형렬은 이후 장인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말순의 나이가 15세 정도로 차이가 컸고, 김형렬의 아내가 크게 반대하면서 예식을 미루기만 하였다. 결국 1907년 강일순이 제자인 차경석에게 다시 수부를 세우기를 명하였으므로, 이종누이인 고판례가 사별 이후 5개월째이므로 예식을 올린 뒤 이른바 고 수부가 되었다. 수부란 '으뜸가는 부인네'라는 뜻이다. 증산도에서는 고판례가 수부가 됨이 매우 중요한 종교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증산 강일순은 모악산의 용화동(龍華洞)을 가리켜 “이 곳은 나의 기지라. 장차 꽃밭이 될 것이요, 인성(人城)에 싸이리라.”라고 하였다. 또한 용화동 옆의 계룡봉(溪龍峯)에 대해서는 “신도안의 계룡산은 수탉이요, 모악산의 계룡봉은 암탉이라. 이 암탉이 진계(眞鷄)니라.” 하여 미래선경(未來仙境)의 성지로서 이곳을 신앙하였다. 또한, “세계의 젖줄은 조선이며 세계의 명당자리는 금산사, 문명개화의 국가가 삼천나라나 되고 도술문명이 세계를 뒤덮는다(萬國活計南朝鮮 淸風明月金山寺 文明開化三千國 道術運通九萬里).”라 하여 이곳이 세계문명의 중심지가 될 것을 암시하였다. 특히 금산사는 증산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내가 서천에서 역대법국 천계탑(天階塔)에 내려와서 삼계를 둘러보고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臨)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수운(崔水雲)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대도의 참 빛을 열지 못하므로 갑자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년에 세상에 내려왔노라.”라고 한 『대순전경 大巡典經』의 구절은 금산사 미륵불이 후천선경 건설의 주재자인 증산의 강림처 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증산이 죽기 직전에도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서 불양답(佛糧畓)이나 차지하리라.” 또는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할 정도였다. 증산이 1909년 6월 24일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은 단일교단을 형성하지 못하고 주변 지역에서 각 종파로 분립하게 되었다. 최초로 교단을 세운 이는 차경석(車京石)이다. 증산의 제2부인인 고씨(高氏)가 증산의 3년 상을 치르고 난 1911년 9월 19일 금산사 미륵전에서 증산탄신기념치성을 드리다가 증산의 영이 자기에게 내려왔다고 신어(神語)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이에 흩어졌던 교인들은 증산이 성령으로 재림한 것이라고 하면서 다시 모여들게 되자 차경석은 고씨를 모시고 선도교(仙道敎) 또는 태을교(太乙敎)라는 교명으로 포교를 시작하였다. 교세가 번창하자 차경석은 고씨 부인을 제쳐놓고 스스로 교주가 되어 보천교(普天敎)를 세웠다. 그는 신천지 개벽의 운로(運路)가 자기에게 있다고 자부하고 이른바 신세계조화정부(新世界造化政府)의 건설을 시도하여 스스로 천자(天子)임을 칭하였다. 그러자 차경석의 부당함을 비판하면서 신도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여 이후로 증산계의 수많은 종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김형렬(金亨烈)은 증산이 재림할 때 금산사 미륵불에 내려올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미륵불교를 세웠다. 안내성(安乃成)은 금산면 청도리 백운동에서 증산대도회(甑山大道會)를 일으켰으며, 증산 재세시 만국대장에 임명되었던 박공우(朴公又)는 의통(醫統) 전수를 자부하며 태을교를 세웠다. 차경석과 함께 보천교를 만드는데 노력한 이치복(李致輻)은 주문(呪文) 도통으로 천·지·인 삼덕이 통천하(統天下)함을 내세우며 제화교(濟化敎)를 만들었다. 증산의 무남독녀였던 강순임(姜舜任)은 조철제(趙哲濟)의 무극대도교가 증산과 관련을 맺기 위해 자신을 유인, 이용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24세 때 탈출한 뒤 33세 때 자살을 기도했으나 그때 증산의 말씀을 듣고 선불교를 세웠다. 차경석이 후비로 삼으려 하였으나 거절한 여처자(余處子)는 보천교에서 이탈한 교인들을 모아 금산리 용화동에 선도교(仙道敎)를 세웠다. 그녀는 예언과 안수를 잘해 제자들은 증산이 말한 의통의 신력(神力)이 그녀에게 내렸다고 믿었다. 후천개벽시 병겁(病劫)으로 인한 환란을 극복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증산은 해결의 묘방을 의통이라 했기 때문에 제자들의 의통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던 것이다. 또한 증산의 가르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륵선경의 사상이었기 때문에 이 요소도 여러 종파에 흔히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서백일(徐白一)의 용화교(龍華敎)에서 현저하게 드러난다. 서백일은 병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용화동 30리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용화선경은 여기서부터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 밖에 증산의 수제자 중 하나로서 증산의 재림을 믿으며 주문을 읽고 도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포교에 힘쓰지 않고 수십 명의 교인으로만 일파를 이루고 지낸 문공신(文公信)의 종파가 있다. 또한 도리원서문을 천독(千讀)하게 되면 도통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김광찬(金光贊)의 도리원파(桃李園派), 이상호(李相昊)·이정립(李正立) 형제의 교리체계화 사업이 두드러지는 동도교증산교회(東道敎甑山敎會)가 있다. 그리고 현재 모악산하에서는 제일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동도교보화교회 등 많은 종파들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미륵신앙이나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아 신흥종교들이 증산사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한국 종교의 뿌리인 금산사를 중심으로 증산교 등 여러 종교사상이 존재하지만 이들의 큰 중심은 미륵사상이다. 진표율사에 의해 세워진 금산사는 미래에 오실 부처님을 모시는 미륵신앙을 토대로 하고 있다. 정신적 혼란을 겪었던 민중들에겐 희망과 안락을 주는 신앙으로 다가섰고, 현재까지도 수많은 영항을 주고 있는 신앙이다.
1909년, 경술국치 1년 전에 강일순은 천지공사의 종료를 선언하고 사망한다. 이로 인해 당시 강일순이 이야기한 개벽이 도래하리라 믿었던 제자들은 충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고판례는 강일순이 죽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나, 강일순이 영적으로 나타나 자신의 죽음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이후 영적인 혼례식을 거행했다. 1911년에 차경석에게 강일순 탄신 기념 치성을 올리도록 하였다가 깨어난 뒤 강일순의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고판례가 강일순으로부터 도통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다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고판례는 자신이 강일순의 계승자임을 선언하고, 전라북도 정읍군(지금의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에서 종교성이 매우 강한 집단을 이루었다. 교단명은 공식적으로 정한 바 없으나 내부에서는 선도교(仙道敎)라는 말을 사용한 듯하다.
그러나 고판례의 이종사촌인 차경석과 고판례는 함께 할 수 없었다. 차경석은 이미 동학운동에 깊게 참여했던 명망 있는 사람이었고, 그 자신의 개인적인 카리스마 또한 막강했다. 차경석은 교단 운영에 있어 고판례를 철저히 배제하였고, 고판례는 차경석을 떠나 조종리에서 두 번째 교단을 꾸렸다. 이후 이상호가 보천교에서 분열해 나와 동화교를 차릴 때 고판례를 받들었으나 이상호 또한 교단 운영에서 고판례를 배제하였다. 이에 고판례는 다시 동화교를 나와 오성산에서 은거하다 1935년 사망한다.
이후 차경석의 보천교는 교세가 한때 600만 신도라고 주장할 정도로 흥성했으나 일제의 집요한 탄압으로 차경석 사망 이후 붕괴된다. 증산도 관련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는 증산 계열 교단을 독립운동의 소굴로 보고 집요하게 탄압하여 일제시대의 증산 신앙인들은 모두 지하활동으로 연명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독립운동'이라는 게, '보천교를 믿다 보면 일제가 몰락하고 교주 차경석이 조선의 임금이 된다'는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차경석 본인이 직접 천자를 칭한 적은 없으나 제를 올리면서 제문에 "나라 이름은 대시국(大時國)"이라고 밝히는 등 나라를 세울 것처럼 말하였다. 아마 직접 말은 안 했어도 자기가 도통한 뒤 군주가 되리라 믿었던 듯하다. 이 때문에 다른 제자들에게서도 말이 나왔는데, 사실 차경석은 강일순의 제자들 중에서도 굉장히 늦게 들어온 사람이었다. 더하여 독립운동자금으로 쓴다며 모은 거액의 돈 중 '실제 독립운동' 계열로 흘러들어간 것 중 상당수의 자금은 앞의 '독립운동', 즉 차경석이 천자가 된다는 허상을 부풀리는데 쓰였다. 보천교 내부에서는 일제를 상대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 '차천자의 꿈'에 보면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차경석은 처음에는 강일순을 신앙함으로써 정말로 도통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 보천교까지 세우고 자신이 신앙생활을 실천해도 강일순이 말했던 것과 같은 도통을 얻을 수 없었다. 차경석은 날이 갈수록 강일순에 대한 신앙심을 잃다가, 결국 강일순을 기만적인 도인 정도로 간주하게 된다. 이에 차경석은 보천교의 신앙체계를 강일순을 중심으로 한 신앙체계에서 유교에 가까운 신앙체계로 바꾸려고 했고, 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을 모아 성리학+종교 정도로 만들려고 했다. 이에 보천교 신자 전체는 차경석이 바꾼 신앙을 따르는 신파와 예전대로 강일순을 신앙하는 구파로 나뉘어 큰 분쟁거리가 된다.
차경석은 정읍에 보천교 총본산인 '십일전'을 세웠는데, 군산항을 통하여 만주에서 소나무를 들여오기까지 하여 조선시대 경복궁 근정전보다 더 크게 세웠다. 십일전을 세우는데 차경석은 큰 교세를 기울였다. 원래 그 안에는 강일순을 봉안했지만, 차경석이 강일순을 따르지 않기로 한 다음에는 차경석의 부인이 환상을 봤다면서, 강일순은 사슬에 묶여 있고 차경석의 영위가 상제로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민중들의 충성심도 강했지만, 일제의 탄압도 집요했고, 민중과 별개로 다른 종교와도 사이가 나빴으며 조선인 지식인 사이에서도 구시대적인 가치를 들먹이며 재산을 헌납하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비판이 많았다. 보천교 고위 간부였던 이상호는 자금 및 일제와의 관계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1924년 차경석에게 파문당했다. 이후 1928년, 전북 김제에서 동화교(東華敎)라는 종교단체를 세웠다. 1931년에는 김제에 있던 고판례를 끌어들여 증산계 종교 중에서는 나름 세력이 커졌다. 1936년 차경석이 죽은 후 일제의 유사종교해체령에 따라 보천교 및 기타 종교들이 해산당할 때 동화교 역시 해산 당했다.
광복을 맞은 1945년, 이상호는 최위석, 자기 동생인 이정립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법사(大法社)라는 이름으로 서울에서 다시 종교조직을 세웠다. 증산도 측에서는 이때 (증산도의 창교주) 안세찬이 중요인물로서, 아니 오히려 실질적인 대표처럼 활동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증산종교계에서 이미 이름이 높았던 이상호와 비교하여 안세찬은 나이도, 경력도 보잘 것 없었다. 1947년에는 중요인물이었던 최위석과 갈라져 교단명을 '증산교'라 하였다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교단명을 바꾸다가 1967년에 증산교 본부라고 현재의 교명을 확정했다.
안세찬은 증산교 본부에서 '교정'이라는 중간간부 정도의 직책을 맡았으며 아산 지방에서 상당한 포교 실적을 올렸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증산교 본부에 있던 안세찬은 "의통인패를 만들자. 청음(이상호의 호)이 만드는데 우리도 못 만들 이유가 없다" 하며 독자적으로 의통인패를 제작했다. 그런데 증산교 본부에서는 의통인패를 병겁에 대비한 신물이라 하여 교주인 이상호만 만들던 상황이었다. 안세찬이 독자적으로 이를 만들자 교단 본부측에서는 크게 놀라 안세찬을 경계하였다.
그 뒤 안세찬은 의통구호단의 조직국장을 맡으면서 호신호부(護身護符)와 인물 배치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구성하여 다시 한번 다른 간부들과 크게 다투었다. 하여 1951년, 증산교 본부로부터 출교처분을 받았다. 이후 안세찬은 옷감을 만들거나 대전에서 한의원을 하면서 1975년까지 종교와 크게 관계없이 살았다. 현재 증산도에서는 이 또한 강일순이 안배한 바라고 주장하며 '20년 대휴게기'라고 부른다.
동생이자 2대 교주인 이정립이 사망하자 안세찬은 다시 증산교 본부에 나타났다. 안세찬은 증산교 본부에서 나를 따르라고 주장했지만, 증산교 본부 사람들은 모두 안세찬을 비난하며 따르지 않았다. 1951년 출교처분을 받았을 때 자기(안세찬)는 다른 간부들에게 "내가 또 오리다. 교단 잘 지키소"라고 했으며, 증산교 본부의 간부들은 모두 사표를 내고, 예전 안세찬과 가까웠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단을 새로 조직해야 하고, 자기(안세찬)는 강일순의 직제자 중 한 명인 이치복의 연원을 이었으며, 이상호(증산교 본부 창교주)와는 동지적인 입장에서 일했다는 것이다. 증산교 본부 교단은 아무도 이 주장을 따르지 않았으며 이를 반박했다.
그는 셋째 아들 안중건과 함께 대전을 중심으로 하여 '대법사 증산교'라는 이름으로 창교하였다. 그런데 대법사든 증산교든 모두 증산교 본부가 사용했었던(대법사) 이름이거나 사용하는 중인(증산교) 이름이라 비난받았다. 이름이 비슷해서 다른 사람들은 이상호 증산교와 안세찬 증산교를 혼동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전 증산교 등으로 교명을 바꾸다가 1984년에 비로소 현재 교명인 증산도로 교명을 확정하였다.
창교주 안세찬은 2012년 2월 24일에 만 90세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현재는 안중건이 2대 교주이다. 안중건은 자기 아버지인 안세찬을 '태상종도사'라고 추존(?)하였다.
증산도의 우주관은 시간적으로 우주에도 1년이 존재하며, 그 주기는 129,600년이고 4계절로 나누어진다고 본다. 그리하여 봄, 여름의 선천(先天)과 가을, 겨울의 후천(後天)으로 나눠지며, 겨울에 약 3만 년의 빙하기가 온다고 본다. 현재 시점은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하추교역기(夏秋交易期)에 있다고 본다.
•개벽관
우주관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겨울에서 봄이 되면서 선천이 열리는 사건을 선천개벽, 여름에서 가을이 되면서 후천이 열리는 사건을 후천개벽이라 한다. 선천개벽은 낳아 기르는(生長)의 원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른바 인류의 황금시대이다. 그러나 후천개벽은 거두고 휴식하는(斂藏) 원리로 이루어 져서 지축변동과 함께 열매와 같은 인간들만 남고 나머지는 전멸할 정도의 대사건이 일어난다고 한다.
•상제관
후천개벽의 대겁액을 맞이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우주의 주재자인 옥황상제가 지상에 직접 내려왔으며, 그 인물이 강일순이라는 것이다. 옥황상제가 곧 기독교의 하느님, 불교의 미륵불이라는 것이며 상제야말로 이러한 하느님의 참된 호칭이라 한다.
•신관
일원적다신론관(一元的多神論觀)으로서 우주의 주재자, 통치자인 옥황상제 밑에 모든 신적 존재가 있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만유가 신이라는 입장이다. 고조선의 삼신관에 기초하여 조화, 치화, 교화의 삼신이 만물을 낳고 기른다고 본다. 산, 돌, 강 등 자연물에 깃든 신은 인격이 없는 원신(元神)이라 하고 각각의 생물도 모두 신을 가지고 있고, 특별히 인간은 삼신의 기운을 온전히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인간은 신명이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고 죽으면 다시 신이 된다고 한다. '사람은 육신을 가진 신명이고 신명은 육신이 없는 사람이다.' 라는 것이 증산도의 신관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조상과 부모가 곧 그 사람의 하느님이라는 교리를 가진다. 천지가 인간을 낳고 부모가 자식을 낳기 때문에 부모는 곧 자녀의 천지라고 한다. 조상 제사는 이러한 은덕에 보은하는 것이며 이로써 후손에게 살 길이 열린다고 본다.
•척신(隻神)
척신은 원한을 맺고 죽은 신명이다. 조선시대 재판의 원고가 되는 것을 척(隻)이라 한 데서 척진다는 표현이 나왔고 척신이라는 말이 나왔다. 조상 중에 남에게 원한을 품게 한 사람이 있으면 당한 사람이 죽어 척신이 되어 그 자손을 해친다고 한다. 증산도에서는 이러한 척신의 원한을 풀어 주거나(解寃) 척신으로 부터 몸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척신은 무조건적인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대상이다.
•복마(伏魔)
척신은 이유가 있는데 비해 이유 없이 사람에게 해꼬지 하는 신명이며 선천 상극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마(魔)라 한다. 진리로써 무찔러야 하는 대상이라고 한다.
•인간관
인간은 천지의 대행자로서 하느님과 동격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본다. 그러나 선천의 상극 기운에 의해 이러한 가능성이 꺾이고 무너져 모든 고통을 당한다고 하며, 후천 개벽에는 이러한 상극의 질서가 상생의 질서로 바뀌기 때문에 참된 인간으로 도통할 수 있다고 한다.
•천지공사
후천개벽을 맞이하여 기존의 상극질서를 상생의 질서로 바꾸고 하늘도 땅도 뜯어고쳐 새 세상을 연 작업이 천지공사이다. 천지공사를 통해 20세기 이후 모든 역사의 행로가 정해졌다고 한다. 천지공사는 강일순이 1901년부터 1909년까지 행했으며 그 때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이 천지공사의 내용이라고 한다.
•구원관
후천개벽을 맞이하면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죽게 되는데 이를 태을주 수행으로 이겨 내고 새 세상을 연다는 것이 증산도 구원관의 핵심이다.
•종통관
고판례를 증산상제의 도를 이어 받은 태모(太母), 수부(首婦)로 받든다. 수부는 남성인 증산상제와 동격으로 천지(天地)와 같이 음양 짝으로서 똑같이 천지공사를 수행하고 인류구원의 도통맥을 이어 주었다고 한다. 이의 근거로서 도전에 나오는 '수부의 치마폭을 벗어나면 죽으리라'는 강증산의 말이라든가 고판례가 '일등방문공사'등의 주요 공사에 참여한 사실 등을 든다.
•종지(宗指)
위와 같은 교리가 집약된 것이 증산도의 종지로서 원시반본(原始返本), 보은(報恩), 해원(解寃), 상생(相生)이다. 특히 상생은 강증산이 생전에 강조했던 것으로서 요즘 쓰는 의미와는 달리 새로 구축되는 우주의 질서라고 강조한다.
•경전
도전道典)을 경전으로 한다. 대순전경 등의 기존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증산도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1992년 초판을 편찬했다. 2003년에는 개정판을 출판했다. 교단 차원에서 영어를 비롯, 여러 나라 언어로 도전을 번역하는 중이다.
•개벽의 시기
개벽은 강일순이 구체적인 시기를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교단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가령 태극도에서는 지금이 개벽되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증산도는 지금은 '개벽이 임박한 때'이지 '개벽 중'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마치 기독교 종말론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극적인 천재지변/기타 재앙 등과 함께 영화처럼 개벽이 닥친다고 주장한다. 마치 금방이라도 개벽이 올듯, 내년 내후년에 개벽이 올 듯이 분위기를 유도하지만 몇 년 몇월 며칠이라고 날짜를 확장하여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며, 단지 '몇 년 이내로' 혹은 'XXXX년쯤에'라는 정도로 적당히 얼버무리는 식으로 말했을 뿐이다. 1988년 올림픽, 1999년 세기말, 2002년 월드컵 등이 증산도가 개벽의 때라고 말했던 연도다. 2002년은 60갑자로 임오년(壬午年)이었는데, 사오미(巳午未) 개명 도수라는 이론으로 왜 2002년이 개벽의 해인지 설명하였으며, 월드컵 분위기와 맞추어 개벽을 기다리는 열기를 고조시켰다. 하지만 2001~03년(신사-계미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자 언제 이야기했나는듯 잠잠해졌다가, 2013년 계사년이 되자 2대 교주 안중건 종도사는 다시 한 번 사오미 개벽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유행병이 돌 때면 이를 개벽의 증거라며 말하고 다니며, 증산도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유행병에서 살아남아 상제님과 함께 후천세계를 건설한다고 한다. 자신이 포교한 신자 6명 한 조로 '육임'이란 팀이 되어 후천세계 건설에 한몫한다고 한다. 육임을 만들 만큼 포교하지 못한 사람은 거리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를 치우는 일을 한다고 한다.
2003년 교단 내부에서 (사오미 개벽론에 따른) 종말론이 크게 일었을 때는 천연두를 지목했었다. 사실 강일순 본인이 개벽 전에 천연두[18]가 대발한다고 얘기했었다. 사스도 그랬고, 이정도로는 끝나지 않고 몇해 뒤에 더 큰 병이 올 것이다는 말을 했다. 물론 6년정도 지난 후에 신종플루가 돌기는 했지만, 아마 지금도 이 후에 더 큰게 온다고 하고 있지 않을까?
도전 간행 후에는 많은 증산도인들이 개벽의 시기를 계산하고 있기도 하다. 2002년 도전 개정판에는 기존 문헌에는 나오지 않았던 구체적인 개벽양상(병, 지각변동 등)이 많이 나오고 있다. 도전에 따르면 강일순 자신이 개벽 시기를 계산하는 사람들에 대한 협박에 가까운 경고[19]를 하기도 했고, 교단 내부에서도 엄하게 단속하기 때문에 자기들끼리만 쉬쉬하고 있는 중. 하지만 2003년 여름, 개벽이 온다는 주장이 교단 안에서부터 떠돌아서 꽤 후폭풍이 크게 있었다. 실망하고 떠난 사람들도 꽤 된다고 한다.
증산 계열 교단은 약 70여개에 이르는데 그 중 강일순을 직접 따랐던 문도들(김형렬, 박공우, 문공신, 차경석 등등)이 세웠던 교단과는 비교적 친밀한 관계에 있다. 경전인 도전 편찬과정에서 대부분 문도들의 자손인 이러한 교단 신도들의 증언이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2019년 현재 대부분의 증산계열 교단은 몰락한 상태이다. 상당수의 교단이 포교에 적극적이지 않은데다 신앙인들의 거의 다 고령이고 가족끼리 믿고 있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교단은 대략 다음과 같다.
•증산도
•대순진리회 계통(대진성주화, 여주도장파, 기타등등 많다)
•증산법종교
증산과 첫째 부인인 정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친혈육 강순임 여사가 중심이 된 교파. 그러나 강일순은 생전에 첫째 부인과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고 정씨부인이 문제였다. 걸핏하면 증산에게 투정을 부리고 증산의 어머니에게 함부로 대하고...한마디로 갖은 사고를 다 쳤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강일순이 수제자 김형렬에게 박처함을 알리고 오라 하나, 김형렬은 일부러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강일순은 정씨부인에게 생전 내내 냉정하게 대한다. 아무튼 강일순의 유일한 친혈육이 강순임 여사가 생전에 증산법종교의 신앙대상이자 자기 아버지기도 한 강일순의 유해를 증산법종교 내부로 옮겨왔다. 강일순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종교가 한둘이 아니지만, 딸이 아버지 묘소를 이장하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나.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증산법종교는 교세는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증산종교 중에서는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종파기도 하다.
우주의 질서를 4계절에 비유하여 현재는 여름의 말기에 해당하고, 곧 가을로 변하는 대변혁이 일어나는데 이를 개벽이라 하며 개벽의 때에 죽는 사람들을 살리자는 주장을 핵심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한국이 개벽 이후 세계에서 정신문명의 최선진국이 된다고 주장하며, 개벽 이후 오는 우주의 가을, 즉 후천세계에서는 5만 년 간 풍요를 누린다고 말한다.
민족주의가 발현할 시기인 일제강점기를 거친 탓에 이렇게 되었다는 변명도 있지만 바로 아래 문단에 나오듯 증산도는 일제 강점기가 증산 강일순의 명에 의한 것이라고 아예 도전에 명시돼 있다. 근본적으로 혈통에 따른 민족주의를 주장한다. 즉 후손으로서 자기 조상의 영혼과 자기 민족신을 제사를 지내어 받들고 위하지 않으면 환부역조(換父逆祖: 아비를 바꾸고 조상을 거스름)이며, 조상신과 민족신이 이러한 패륜 때문에 노하여 자손을 돕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왜 다른 나라의 종교를 믿으며 다른 민족의 신을 섬기냐는 말인데 되려 이런 작자들의 포부는 전세계인들을 우리 문화에 동화하게 만들며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한국인들이 세계를 리더하고 이끌어야 하며 이건 하늘의 선택을 받은 우리의 임무라는 주장한다.
증산도인들은 민족주의 감정과 함께 주술력을 대단히 강조한다. 태을주와 운장주는 증산종교에서 두루 쓰는 주문이지만, 증산도인들이 이 두 주문을 대대적으로 알려서 한국 오컬트 관련 홈페이지에 자료로 올랐을 정도이다. 두 주문의 주술력을 강조하지만, 그에 반대하여 오컬트에 관심 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두 주문의 힘이 정말 신통한지 회의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증산도인들은 저 두 주문의 힘이 전세계 모든 종교에서 사용하는 어떤 주문이나 만트라, 기 수련이나 요가 등보다도 바르고 순정하며 강력하고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증산종교 내부에서의 정통성
강일순은 자기 후계자를 지명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정통성을 주장하는 종교가 백가쟁명이다. 구태여 법적인 의미에서 정통성을 따진다면, 강일순의 무남독녀 딸자식인 강순임 여사가 세운 '증산법종교'를 가장 정통으로 봐야 한다. 강일순의 직계제자가 세운 종교들 또한 정통성 순위가 높다. 이렇게 따지면 증산도는 정통성 문제에 있어 서열이 한참 뒤로 밀린다.
대순전경 6판 4장 66절에, 그리고 대순전경보다 후에 나온 도전에 둘째 부인 고판례가 '나를 일등(一等)으로 정(定)하여 모든 일을 맡겨 주시렵니까?'하고 고판례를 후계자로 정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고판례를 강일순의 후계로 인정하는 종파는 이상호의 증산교가 시조이며, 대순전경은 이상호 형제가 발행했다. 이렇게 중대한 내용이 왜 6판부터 실렸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이상호 계열이 아닌 증산종교들은 모두들 고판례를 정통성의 보증으로 보지 않는다. 특히 증산의 최고참 제자였던 김형렬은 고 부인(고판례)이 증산 사후에 그 혼령을 보았다면서 사람들을 끌어모으자, 증산의 첫째 부인이며 강순임의 생모인 정씨 부인을 주문을 외우며 수도케 하면서 역시 증산의 혼령을 만나게 하려고 시도했다. 비록 김형렬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증산의 최고참 제자가 '고 부인이 생전에 증산에게 후계자로 임명된 것이 아니라' 사후에 증산의 혼령과 만났기 때문에 사람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포교 및 활동
길가에서 '도를 아십니까?' 라고 묻는 사람들은 대순진리회거나, 대순진리회에서 갈라진 파일 가능성이 높다. 증산도의 포교방법 자체는 기존에 알려진, 무난한(?) 방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고 주술력을 자극적으로 강조하는 점에서 금방 눈에 띈다. 큼지막한 표지판, 만화 등을 사용하기 때문에 단연 눈에 띈다. 인터넷으로 전도하는 경우도 많다. 2007년 STB상생방송이 개국된 후부터는 상생방송을 보고 증산도 도장을 찾아가 교리와 수행을 배우고 입도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사이비 종교 논란
환단고기를 경전으로 채택하고 전파하는 것에 대해서는 성향을 떠나서 아는 이는 지대한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사이비 종교라는 글들이 흔하게 보인다. 그렇다고 이 종교단체가 깨끗한 것이냐? 그것도 아니다. 내부 비판을 없애기 위해 살인사건도 벌였으며 모의 작당을 하여 파벌세력을 키우는 식의 행동도 보인다.
•대순진리회 동곡수련원.
조선 말기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암울한 시기에 민중들에겐 이상사회 실현을 약속하는 민속신앙과 결합하면서 미륵신앙이 민중에게 희망을 안기기도 했다. 이것이 본래 미륵신앙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교리 속에 미륵신앙을 자의적 해석과 절충으로 후천개벽적인 신흥종교로 발전하기도 했다. 주민 본인이 교주로 된 사례도 많다고 전해진다. 필방이나 약방 주인들이 종교적 교주로 나서기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집단화하기도 했다.
대순진리회는 기본적으로 연원을 증산계 종교의 교조인 증산 강일순(통칭 강증산)과 그 영적 제자로 자처한 정산 조철제에게서 찾는다.
태극도 자료를 따른다면, 조철제가 15세였던 1909년 음력 4월 28일(양력 6월 15일)에 꿈에서 증산이 나타나 "나는 구천상제요 너는 옥황상제라"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는 아직 증산이 사망하기 약 2개월 전으로 이때부터 조철제는 자신이야말로 증산의 참 후계자요 영적 제자이자 또한 옥황상제라고 자처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조철제의 주장일 뿐이다. 조철제는 강증산의 제자도 아니었고, 강증산을 생전에 만나본 적이 있는지도 불확실하다. 대순진리회 전경에 따르면 강일순은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아올 테니 그때 전해주라면서 선돌부인에게 봉서를 맡겼다는 구절이 있다. 대순계 자료에서는 강일순의 예언대로 을미생 조철제가 1919년 정월 보름에 선돌부인을 찾아가 봉서를 받아갔다고 서술한다.
강증산이 사망한 이후에 부인들과 외동딸, 직계제자들이 사분오열되어 각자 교단을 세우면서 서로 다투는데, 조철제도 이들 중 일부와 함께 1925년에 <무극도>(혹은 무극대도)를 세우고 증산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로 봉안하였다. 무극도는 1936년 일제의 유사종교해산령으로 보천교처럼 해산당하나, 해방 후에 조철제가 <태극도>라는 이름으로 재건한다. 1958년 조철제가 사망한 후 박한경(朴漢慶, 1917-1996. 호는 우당牛堂)은 자신이 조철제로부터 교단의 전권을 받았다고 주장하여 태극도가 분열되었다.
•용화교
또 하나 대표적 신흥종교론 용화교를 들 수 있다. 1931년 서백일이 미륵불교를 포교하며 창립한 것으로 1955년 금산사 청도리에 용화사를 건립한 뒤 ‘대한불교용화사’란 간판을 걸고 스스로 교주가 됐다. 신앙대상은 미륵불이며 이 미륵불은 곧 증산 강일순으로 받들어졌다. 하지만 교주 서백일이 사회적 물의를 빚다가 여신도에게 피살되면서 종단이 와해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모악산을 기반으로 한 신흥종교분포는 전북대 철학과에서 평생 동안 신흥종교를 연구한 이강오 교수의 ‘한국신흥종교총람’에 잘 나타나 있다. 이에 따르면 신흥종교 주 활동무대를 지역별로 봤을 때는 서울이 1백30개소로 가장 많았으며 다음이 전북에 66개소, 충남 계룡산을 중심으로 48개소 순이었다. 이중 서울에 신흥종교가 집중돼 있는 것은 포교대상 신도가 많기 때문으로 분석됐으며, 충남과 전북지역은 도참설과 풍수지리설과 깊이 관계돼 있는 것으로 풀이됐다.
이강오 교수는 “이들 가운데 2백여 개는 80년대 이후 우후죽순처럼 솟아났는데, 이는 정치사회의 긴장과 불안을 야기했던 시대적 요인과 함께 기존의 전통가치관이 뿌리째 흔들리면서 붕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며 "자칭 구세주들이 얄팍한 기행과 술수 등으로 민중을 기만하거나 역학적 도참설, 기독교의 말세 론 등으로 세상을 미혹케 하는 유사 신흥종교들은 오히려 사회를 혼란시키는 역기능을 갖고 있기도 하다"고 밝혔다.
실제로 모악산 근처엔 불교를 포함한 고등종교와 무속신앙, 그리고 아직 제자리를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한 유사종교가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조선 말기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6·25때까지 모악산은 계룡산과 더불어 수십 개 신흥종교가 성행했다. 하지만 신흥종교 중 하나였던 용화교주 서백일이 사망하고, 도립공원 개발과 함께 무허가 건물로 단속 철거되면서 그 수는 급격하게 줄기 시작했다. 또 박정희 정권 때 진행했던 정리 사업에 따라 한때 40여개가 자리 잡았던 신흥종교가 이제는 거의 대부분 떠난 실정이다.
모악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금평저수지 맞은편에는 증산법종교 본부가 자리잡고 있다. 한말 혼란기 때 모악산에서 증산도의 교조인 강증산이 도를 깨쳤고, 산기슭 구릿골에서 한약방을 열고 포교활동에 나섰던 것. 그 때문에 모악산 기슭에는 강증산을 모시는 증산도의 여러 종파가 모여 있고, 증산도법종교 본부에는 강증산의 유해가 모셔져있다. 강증산은 숨을 거두며 "자신을 보려거든 금산사 미륵전으로 오라"고 했다고 전한다.
나가는 말
어머니 같은 산 그 모악산은 명당으로 풍광으로 이름난 미륵의 땅이기도 하다. 말세에 이르러 세상을 구한다는 미륵 신앙이 모악산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는 것은 우리의 지나간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만큼 사회의 변혁을 갈구하는 민중들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준 땅, 도탄에 빠진 백성을 푸근하게 감싸 안았던 모악산이기도 했다. 진표율사, 후백제의 견훤, 기축옥사의 정여립, 한국 불교 최고의 기승 진묵, 동학혁명의 깃발을 높이 세웠던 녹두장군 전봉준 등이 어쩌면 그 시대의 원을 담은 각각의 미륵들이 아니었을까 한다. 모악산이 바라보이는 전주교도소에서 오랫동안 수감생활을 한 신영복은 ‘나무야 나무야’에서 “모악산의 길고 부드러운 능선은 언제 보아도 그 푸근함이 어머니의 품 같았습니다. 교도소의 하루가 저무는 시각에 우리는 곧잘 창가에 다가가 모악산을 바라보며 한 가닥 위로를 얻던 기억을 당신도 가지고 있겠지요”라고 쓴 적 있다. 망국의 진표율사를 비롯해 견훤, 대동계의 정여립, 척양척왜의 전봉준, 후천개벽의 강일순, 원불교의 소태산 등 난세를 만나면 사람들이 모악산으로 모여들었고 미륵전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모악산의 신흥종교의 변천양식은 네 단계로 규정지을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증산의 접령 또는 치병, 예언적 문답에 초점을 둔 종교들이다.
둘째 단계는 증산을 천사로 호칭하여 옥황상제·구천상제로 받듦으로써 절대적인 능력을 지닌 신격화 움직임을 보이는 종교들이다.
셋째 단계는 미륵사상에 초점을 두고 금산사에서부터 미륵선경이 열릴 것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들이다.
넷째 단계는 증산이 예시한 후천선경이 열리게 될 때 그 예시와 공사(公事)가 이미 단군·수운·증산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보고 삼단계 신앙체계를 주장하는 종교들이다. 이와 같이, 변천의 흐름을 잡아볼 수 있으나 그 주요 맥락은 후천선경 도래의 관건인 병겁해결을 위한 의통권능에 있다고 여겨진다.
지금은 난세인가? 길게 볼 것도 없이 근세기 100여 년, 이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은 세대마다 치른 쓰디쓴 경험으로 뚜렷하건대, 오늘의 삶 또한 유례없는 혼돈과 격정에 사로잡힌 상황이다. 망국, 전쟁, 궁핍, 독재 등의 고된 시간을 때로는 견디고 때로는 이겨내서 겨우 21세기에 이르렀건만, 오히려 이 휘황찬란한 하이테크 시대에 우리는 철옹성의 권력과 무기력한 정치와 격앙해진 민심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참고문헌
증산교개설, 류병덕,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77
한국민중 종교사상론, 홍범초, 창문각, 198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흥종교취락의 발생과 변천에 관한 연구 김상식 외,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