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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대축일 도란도란글방 / 울고있는 마리아 (요한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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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 우리들의 묵상/체험. 김종업. 2021-04-04 ㅣNo.145856
(공동번역성서) 2021. 4. 4. 주님 부활 대축일 도란도란글방
울고있는 마리아
(요한 20,1-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0 그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시자 아리마태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향품을 넣어서 아마포로 잘 염을 한 후에 아리마태 요셉의 무덤에 葬事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을 하셨어요.
오늘 본문의 1절을 보면 그 부활의 날이 안식일 후 첫날이라고 그래요. 안식일 후 첫날 오늘날로 따지면 토요일 다음날이니까 주일이죠. 그래서 교회는 주일을 예배일로 지키는 거죠.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굳이 이틀도 아니고 나흘도 아닌 사흘을 무덤 속에 계시다가 부활을 하셨는가? 거기서부터 한번 시작해보자구요.
(마태 12;38-40) 38 그때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40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무덤에 갇혀있어야 하는 사흘이라는 시간을 요나의 이야기 속에서 끄집어내어 그 요나의 사흘과 연결을 시키시죠. 그리고 당신이 ‘이 세대에게 보여줄 수 있는 표징은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라는 말씀을 아울러 하세요.
요나의 표징은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부터 출발해서 역시 ‘방주, 테바’죠 방주 갈대상자가 방주 테바예요. 그 테바를 타고 물 위를 떠다니다가 저주의 물 위에서 건짐을 받는 모세의 이야기, 다 죽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모세만 방주에 담겨서 동동 뜨게 된단 말입니다. 그리고 홍해를 가르고 저주의 바다를 (거기에 애굽 사람은 다 빠져 죽었는데) 이스라엘 사람은 마른 땅처럼 건너죠.
저주의 바다에 빠지지 않고 마치 마른 땅처럼 건넜던 그 이스라엘 사람의 출애굽 이야기, 그리고 신약으로 넘어와서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그 에피소드를 거쳐서 다 빠져 죽어야 되는데 한 존재만 물 위를 걸어서 오신단 말이에요. 그 에피소드를 거쳐서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는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작은 그림으로 담고 있는 거죠. 어떻게 그 방주와 그 예수가 물 위를 뜨게 되었는가 예수를 맞이한 제자들의 배가 물 위를 뜨게 되었는가? 풍랑에 안 빠지고 그 이유를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요나의 표징이 왜죠? 요나서에도 나오잖아요. 풍랑으로 다 빠져 죽어야 할...
그 배 안에서 요나가 물에 던져지자 배가 살아나는 거잖아요. 그게 요나의 표징이란 말이에요.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풍랑에 빠져 죽어야 할 상황 속에서 요나라는 사람 하나가 물속에 빠져, 요나서에 굳이 그게 스올이라는 단어로 등장하죠. 지옥이에요. 스올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서 사흘 밤낮을 머물므로 해서 다른 말로 지옥과 같은 고통 속에서 사흘 밤낮을 죽었다가 살아나는 거예요. 스올에게 먹혔다가 풀려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은 거예요. 그거는. 지옥에게 먹혔다가 풀려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 스올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풍랑 속에 빠져야 할 다른 이들이 살아나는 사건. 구원의 사건이에요.
예수님이 빠져 죽으시고 저주의 바다, 풍랑에 빠져 죽어야 할 우리가 살아나는 거예요. 그게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부터 점층적인 그림으로 보여지는 거죠. 그러나 요나라는 존재의 개별적 측면에서 그 사건을 바라볼 때 요나는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의 댓가로 사흘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게 된 거죠. 가라는 대로 안 갔기 때문에 그가 물속으로 던져진 거란 말이에요. 그 결과 그는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어 니느웨로 향하잖아요. 따라서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표징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시는 말씀. 예언자 요나의 표징밖에는 보일 표징이 없다라는 말씀은 "니들이 바로 그 요나처럼 죽어야 하는데 바로 그 요나의 죽음, 너희들의 죽음을 내가 무덤 속에서 사흘간 표징으로 보여주겠다"라는 뜻이에요.
그게 요나의 표징이에요. 너희들이 그렇게 죽을 거야! 이게 요나의 표징이에요. 그런데 나한테 지금 기적을 보여달라는 거야? 아냐 내가 너희들한테 보여줄 수 있는 건 니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라는 그 표징밖에는 없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요나의 표징이에요.
사흘을 무덤 속에 계시면서 주님은 어떤 사흘을 회복시키는 거예요. 그냥 무덤 속에서 그들의 죽음을 보여주는 거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너희들은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데, 내가 너희들을 어떤 방법으로 살려 낼 거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사흘을 무덤 속에서 계시는 건데 그 사흘은 지금 인간들이 허물어 놓은 그 어떤 사흘을 회복시키는 거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복시킨 사흘이 창세기 속의 첫 창조 속에 첫 번째 사흘인 거예요.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의 사흘.
하느님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세상에 빛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혼돈에 구조를 세우시죠. 스트럭처(구조)를 세우신단 말이에요. 혼돈은 틀이 없음이란 뜻이거든요. 스트럭처가 없다는 뜻이에요. 공허는 엠띠네스 텅 비어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혼돈과 공허. 그러니까 틀도 없고 내용물도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잖아요.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하느님이 틀을 세우시고 내용물을 채우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틀이 첫째날, 둘째날, 세째날 틀이 세워지죠. 빛과 어두움이 갈리고, 궁창 위에 물과 아랫물로 갈리고 틀이 세워지는 거예요. 물과 뭍이 갈리잖아요. 틀이란 말이죠.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 그리고 넷째날, 다섯째날, 여섯째날이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을 채우는 거잖아요. 내용으로.
그러니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은 하느님 나라의 틀이 세워지는 거고, 넷째날, 다섯째날, 여섯째날은 그 나라의 내용물들이 채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의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에는 그런 틀이 세워지는 작업이 행해지고, 넷째날, 다섯째날, 여섯째날에는 열두 제자가 모아지잖아요. 열두 제자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 聖徒를 상징하는 거니까!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일곱째날). 가나의 혼인잔치가 벌려지죠. 어린 양의 혼인잔치. 안식의 완성!
그러니까 창세기 1장과 요한복음 1장은 정확히 같은 걸 이야기한다고 그랬어요. 그렇게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의 틀이 세워지고, 하느님 나라가 세워지고, 넷째날, 다섯째날, 여섯째날에 내용물이 채워지는 고 상태. 그걸 성경이 안식이라고 하잖아요. 싸바쓰. 그래서 일곱째 날 하느님이 안식하셨다 그러는 거예요. 쉬었다라는 말이 아니라, 고 상태가 안식이라는 뜻이에요. 하느님이 뭐가 힘들어서 쉬어요? 힘들어서 쉰 게 아니라 고 상태가 싸바쓰. 안식이라고 한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식이란 창조주 하느님께서 하늘 왕의 자리에 앉으시고 그게 싸바쓰의 뜻이에요. 원래 싸바쓰의 뜻.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완료하시고 당신의 자리에 앉는 것을 싸바쓰 안식이라고 그래요. 앉으시고 그 왕에게 모든 피조물들이 이 세상에 버금 왕으로 책봉이 된 인간의 다스림 안에서 하느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는 상태!
하느님이 하느님의 자리에 앉고 피조물은 피조물의 자리에서 죽은 흙의 자리에서 "저는 하느님 앞에서 죽은 흙입니다"라고 납작 엎드리는 그 상태! 그걸 히브리어로 '샤하'라고 하는데 그걸 예배라고 하죠. 그걸 헬라어로는 '프로스큐네오'라고 그래요. 그게 예배예요. 그러니까 안식, 예배, 하느님 나라는 엄밀히 말해서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모든 건 다 하느님에 대한 피조물의 절대 순종과 의존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들의 안식은 뭐죠? 우리의 뜻을 다 내려놓고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거예요. 그걸 자유라고 하죠.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빼앗기고, 나보다 더 크고 나보다 더 지혜롭고, 나보다 더 완벽한 존재에 의해 내 삶이 구속되는 거, 완벽하게 구속되는 상태를 자유라고 그래요. 우리가 맘대로 하는 게 자유 아니에요.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하는 건, 그 하고 싶은 거에 묶여있는 거예요. 그걸 구속이라고 하는 거예요. 자유는 하느님에게 나를 다 뺏기는 거예요. 그게 안식이에요. 그게 예배예요. 그게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란 말입니다.
죄는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서 통용되는 개념입니다. 하느님의 은혜가 배제된 인간들은 그냥 네페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인데, 그러면 움직이기는 하는데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존재. 그거를 좀비라고 그러죠. 강시. 콩콩거리면서 뛰어다니는데 시체잖아요. 강시끼리 막 싸워서 팔이 뚝뚝 떨어져 나가고 눈알이 막 파이고 그랬어. 강시끼리. 시체끼리 싸웠어요. 그래서 어떤 강시가 이겼어. 심지어 그냥 한 강시를 아주 늑실나게 패가지고 못 일어나게 만들었어요. 좀비들 사이에서는 죄라는 개념이 통용되지 않아요.
그러면 진짜 죄는 피조물이 하느님을 살해하는 거예요. 그것만 죄예요. 그런데 하느님을 살해한다고 해서 칼 들고 가서 하느님의 심장을 찌르는 게 아니라, 피조물은 전 존재를 하느님께 의존해야 되는데, 내 전 존재를 의탁하지 않고 내가 뭔가 할 수 있다라고 하고 하느님처럼 되어보겠다라고 나서는 걸 하느님을 죽였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자기들의 가능성을 여전히 의지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실제로 죽이는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 살해거든요. 그게 죄에요. 그게 하느님 나라가 깨진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선악구조를 갖고 죄라는 걸 함부로 판단하면 안되요. 죄는 인간이 하느님을 살해하는 행위 속에서 나오는 것만 죄예요. 우리가 하느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사건과, 상황과, 처지를 내가 다 해결하고 내가 다 감당하고, 내가 이끌어가고 개척하고 나서겠다는 그게 하느님 살해하는 거예요.
우리들이 처한 상황과 사건들 속에서, 처지 속에서 원통해하고 분해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원망스러워하는 게 하느님을 살해하는 거예요. 그분을 살아계신 존재로 인정 안하는 거니까! 그걸 죄라고 그래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열심히 종교행위를 하고 착한 일을 했음에도 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거예요.
여자가 하느님을 하느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기가 하느님처럼 되겠다고 했어요. 그게 죄라고 그랬죠. 그 죄가 하느님 나라를 깨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인간들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으로 빠진 거예요. 없음의 상태로 처음자리로 다시 떨어진 거예요. 그 상태를 예레미야가 이렇게 표현하죠.
(예레 4;22-23) 22 과연 내 백성이 어리석어서 나를 알지 못한다. 그들이 미련한 자녀들이라 이해하지 못한다. 악을 저지르는 데는 약삭빠르면서도 선을 행할 줄은 모른다. 23 내가 보니 땅은 혼돈과 불모요 하늘에는 빛이 사라졌다.
똑같이 나오죠. 창세기 1장 2절의 이야기와 똑같이 이 죄인들과 罪惡된 세상의 현실이 똑같이 표현되고 있잖아요. 또다시 틀이 없어졌고, 또다시 내용물이 없어졌어요. 전부다 죽어야 돼요. 이제. 어두움이라고 그래요. 그렇게 또다시 처음자리로 돌아간 인간과 인간 세상의 결국은 사망이죠.
그건 형벌이라기보다는 타락한 피조물들의 처음자리 확인이라고 하면 더 옳아요. 타락한 인간들의 처음자리는 먼지에요. 그 죽어있는 존재들의 현실을 지옥이라는 단어로 표현해주는 거예요. 하느님과 관계없는 죽어있는 자들을 그 죽음의 상태에 내버려 두는게 하느님의 잘못이에요? 원래 죽어야 할 것들을 죽음의 자리인 사망에다가 지옥에다가 던져놓겠다는데 왜 따지고 드는 거예요? 그게 인본주의에요. 왜 나랑 상의 안 하느냐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는 저 사람들 저렇게, 저렇게 지옥에다 던져 놓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새 언약을 주셨어요. 하느님께서 당신의 능력과 지혜로 죽어야 할 자들의 얼마를 당신의 은혜를 쏟아 부어 살려내겠다라는 거예요. "아이 그럴 거면 진작 타락하지 못할 그런 완벽한 존재를 만드시지!" "그래 알았어. 이제 내가 만들게." 그게 새 언약이에요. "절대 이제 타락할 수 없는 그런 존재 이제 내가 새롭게 창조할게." 그렇게 인간의 타락으로 또다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되어버린 이 세상의 현실 속으로 하느님 나라의 새 언약이 떨어져서 새로운 창조가 약속으로 주어져요. 그 새 창조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창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새 창조를 하느님이 어떻게 완성하시기로 한 거예요? 당신의 아들을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선택한 백성들의 연약함과 무력함과 어두움을 전부 아들 속에 넣어서 아들을 죽이시고 아들의 완전함을 또 그들에게 전가시키는 그 방법으로 우리를 살리기로 했단 말이에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하느님 나라를 다시 회복시키는 거죠.
하느님 나라의 틀은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 세워졌다 그랬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죽음으로 회복해야 할 하느님 나라는 사흘이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시는 거예요. 나흘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꼭 사흘이어야 돼요.
그렇게 사흘을 무덤 속에 머무시던 주님께서 안식 후 첫날, 주일에 무덤을 열고 부활하셨어요.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허물었던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완전히 회복이 된 거죠. 그래서 또다시 새 안식이 찾아왔고 이제 절대 흔들릴 수 없는 새 안식. 그리고 또 새 예배가 신령과 진리로 드려지는 새 예배의 현실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게 되는 거예요.
구약이 파괴되고 신약이 성취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예배(미사)를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그날을 새로운 안식일. 즉 영원히 깨지지 않을 그러한 안식이 완성된 날. 구약의 안식일 개념이 아니에요. 그러한 안식일로 지키는 거고, 그날에 하느님 나라의 작은 모형을 교회의 모임 속에서 경험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예배의 현장은 안식과 예배와 하느님 나라가 두루 경험이 되는 현장인 거예요. 따라서 구약의 안식일은 깨어져야 하는 거고, 신약의 안식일로 대체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일은 모든 율법이 그러하듯이, 엄밀히 말해 지키라고 준 게 아니라 "너희들은 온전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없는지를 알아먹으라고 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은혜로 달라가라고!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 바로 다음 날, 진짜 하느님이 이룩하신 신약의 안식일이 구약의 안식일을 밀어버리고 덮쳐버리고 그다음 날 서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회복이 될 것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모형으로 나타나죠.
(마태 27;50-53) 50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51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52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53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다음,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
예수님이 떠나가시자 휘장이 찢어져요.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죠. 그 휘장 안으로는 1년에 대제사장이 딱 한 번밖에 못 들어가요. 완벽한 결례를 행한 다음에 딱 한 번. 그런데 휘장이 찢어졌다는 건 이제 지성소, 시은좌, 속죄소 속으로 아무나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죠.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모든 자들이 마구 드나들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아무 때나 무릎 꿇고 하느님! 부르는 거예요. 그게 지성소거든요. 하느님과 내가 대화하는 곳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아무 때나 신령과 진리로 성령 안에서 어떠한 장소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무슨 제물 갖고 와 가지고 쪼개고 태우고 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에요. 이제는요.
이제 그렇게 해서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던 휘장이 찢어진 거고 그건 곳 창세기 첫째 날에 창공이 찢어지고 하늘과 땅이 휘장에 의해 갈라져 있었지만 이제 하늘과 땅이 연합되어지는 은혜의 현실이 이루어졌다라는 뜻이기도 해요. 창세기 첫째날, 둘째날, 세째날은 언약을 담고있는 거라 그랬죠.
그리고 두 번째로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갈라졌다고 그러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갈라졌다는 건 이 첫째 세상, 첫 번째 창조를 부정해 버리는 거예요. 흔들어 버리는 거예요. 바위가 갈라지고. 이 첫째 세상은 그냥 흔들려지고 새 세상이 왔다라는 거예요.
(고후 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자 피조물이란 단어 자체가 새로운 창조가 또 일어났다는 뜻 아닙니까?! 새로운 피조물이 누구예요? 우리들이에요.
어떻게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됐어요? 옛 피조물이었잖아요. 우린 아담 속에서 태어났잖아요. 어떻게 새로운 피조물이 됐죠? 예수 안에서 새 창조가 일어난 거예요. 분명 구약의 전도서 기자는 해 아래 새것 없다고 그랬는데, 신약에 와서 새것이 나타났다는 말이에요. 새 창조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게 우리예요. 모든 것이 하느님이 다 낳으셨다는 말이에요. 다 만드셨다는 말이에요. 새 창조를. 그래서 옛 창조가 흔들리는 거예요. 땅과 바위 흔들어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을 하시자,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잖아요. 고린도서에 나오죠. 부활의 첫 열매라는 건 그 뒤에 오는 나중 열매들이 이 첫 열매를 따라 줄줄이 하느님께 드려진다. 라는 얘기거든요. 그게 레위기의 율법이에요. 첫 이삭 드리는 날의 율법. 그러니까 진짜로 첫 열매가 예수님이 부활을 하시자, 성도가 진짜 무덤을 열고 다음 열매들로 줄줄이 나오더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 하느님은 종말에 일어날 그 성도의 부활을 역사 속에서 한 번 꽝하고 보여주신 거예요.
나자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시잖아요. 죽었다가 살아난 이가 실지로 살아나서 "야 하느님 나라 있더라. 니네들 예수 믿어라"라고 얘기해도 모세와 예언자, 성경을 안 믿는자, 믿음이 없는 자는 절대 못 돌아온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누가 무덤열고 살아나면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요. 못 믿어요.
예수님이 살아났는데도 안 믿었다니깐요. 제자들도 안 믿었어요. 그런데 뭘 보여주면 믿을 수 있다라고 착각들을 하는 거예요. 믿음은 보는 것에서 오지 않아요. 듣는 것으로도 오지 않아요. 아니 들음에서 난다고 그랬는데요? 예. 성령이 들려주시는 그 들음에서만 나요. 무조건 듣는다고 다 신앙으로 들어가지 못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죽은 거예요.
예수의 죽음 안에서 죽은 죽음. 우리의 죽음이 예수의 죽음 안에서 죽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무덤이 열리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느님 나라의 회복, 영생, 구원 그 이외에 없어요. 근데 그건 눈에 보이지도 않아! 그래서 믿음이라는 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에요. 유일한 복.
여자에 의해서 허물어진 하느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에 힘입어서, 최초의 부활의 목격자가 누구란 말이에요? 여자란 말이에요. 여자에게 다시 무상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최초의 에덴동산에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버림받았습니다. 남자가 오히려 여자에게 죄를 다 뒤집어 씌우죠. 저 여자가 그랬다고, 지도 먹었으면서.
그래서 거기에 일부러 동산지기라는 단어가 나오고 동산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 동산에서의 마지막 아담은 죽어야 할 여자 막달라 마리아. 그 창녀였던 마리아. 죽어야 할 죄인인데, 그 여자의 죽음을 가져가서 대신 죽으시고 살아나셔서 이 여자를 살려내시는 거예요. 자기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 동산에서의 아담의 실패를 두 번째 동산에서 마지막 아담이 성취해 내시는 거예요. 그게 복이에요. 우리에게 주어진 복. 그 여자가 바로 나라니까요. 교회. 그래서 교회를 어린 양의 신부라고 하는 거예요. 여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마리아가 우리란 말입니다. 마라, 마리아, 미리암 다 똑같은 말이라 그랬죠. 쓰다, 괴롭다, 고통스럽다. 그 저주의 현실에서 우리를 나오미로 뒤집어엎어버리는 거예요. 바꾸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게 십자가와 부활인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울 일이 아니라 기뻐 뛰며 춤춰야 할 일이잖아요. 이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당신을 쫓던 무리들에게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수차례 말씀하셨죠.
그런데 안식 후 첫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날에 예수님의 최 측근 중의 한 사람인 마리아가. 여자가 예수님의 무덤에 와서는 예수님이 안 계신 것을 보고 슬퍼하며 우는 거예요. 굉장히 기특한 건가요?
잘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어떠한 상황이면 안 울었을까요? 그냥 시체가 거기에 있으면 안 울었을까요? 생각을 해 보세요. 그 운게 기특하다고 생각만 하지 마시고, 그러면 마리아가 안 울려면 어떻게 돼야 돼요? 시체가 거기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마리아가 운건 잘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지금 당신들의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말씀대로 죽으신 후에 말씀대로 살아나신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통곡을 하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통곡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한계란 말입니다. 이게 구약의 한계란 말인 거예요. 마리아가 구약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오죽하면 천사가 나타나서 너 왜 우니? 라고 달래줘요. 울지 말라는 뜻이에요. 우는 이유를 말해봐가 아니라, 울지 마! 이게 울 일이 아냐! 라고 천사가 달래준단 말입니다. 그리고는 울고있는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당신 말씀대로 살아나신 거라고 설명을 해 줘요. 병행구절이 있는 루가복음으로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루가24;1- 7) 1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2 그런데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3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4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6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7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여러번 말씀하셨는데 왜 울어? 이런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당신을 쫓던 이들에게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신 걸 몇 군데만 찾아드릴게요.
(마태 16;21- 23) 21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은 이제 죽었다가 살아나서 너희들에게 정말 큰 선물을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인간은 말리죠! 이게 구약이에요. "안돼요. 죽지 마세요"이게 구약. 살아서 날 도와달라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예수님은 죽어서 은닉되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큰 선물을 주신다고 하는데, 인간들은 구약에 속해있는 자들은 살아서 나에게 눈에 보이는 유익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구약이에요.
(마태 17;22-23) 22 그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마태 20;17- 19) 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18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변모산에서 내려오다가도 또 말씀하시죠. "난 죽어야 돼,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돼" 수없이 말씀하신 거예요.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그런데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여자들이 무덤에 갔다가 빈 것을 보고 그리고 천사를 만나고 막 달려와 가지고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부활하셨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뭐라고 했어요. 누군가 하나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진짜 기다리고 있었다면, "진짜야, 야 그 일이 일어났구나" 그랬을 거라구요. 근데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뭐라 그랬어요? "헛소리하지 마!" 그랬어요. 왜 헛소리하고 있어! 그러니까 안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죠.
(루가 24;8 -11) 8 그러자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 9 그리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 10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사도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11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레로스' . 헛소리, 잡담 이런 뜻이에요. "시끄러, 시끄러" 예수님의 제자들 중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제자들은 하나도 없었던 거예요.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시간선 속에서의 부활은 이 세대의 마지막 오는 세대의 시작에야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유대인들의 시간선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되는데, 그들도 부활을 믿었단 말입니다. 사두가인들만 안 믿었어요. 나머지는 전부 부활을 믿었어요. 근데 그 부활이 언제 일어날 거라고 믿었냐면, 이 세상, 이 세대가 다 끝나고 오는 세대가 열릴 때 부활이 일어날 거라고 믿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나자로의 누이인 마리아도 "그래요 저도 부활을 믿어요"라고 이야기를 했던 거예요.
(요한 11;23-24)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에스카테헤메라’에요. 종말의 날에. 이 세대의 마지막 날에 부활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셨는데도 이 세상은 여전히 건재했잖아요. 잠깐 어두워졌다가 금방 환해졌어요. 그리고 일상은 그대로 돌아가요. 해는 다시 뜨고, 달은 다시 떠요. 이 세대가 끝나지 않았단 말이에요.
종말은커녕 예수님을 죽인 이 세대가 버젓이 활기차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단 말이에요. 유대교의 시간선은 그러했지만 그리스도교의 시간선은 유대교의 시간선과 완전히 달라요. 그리스도교의 시간선은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점으로 해서 나중에 오는 세대가 이 세대 중간으로 뚫고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래서 요 시점부터 겹쳐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은 이 세대 속에서 오는 세대를 사는 이상한 사람들이 된 거예요. 굉장히 비현실적인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비현실적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돼요. 이 세대 속에서 오는 세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에요.
유대인의 시간선에서는 아직 오는 세대가 안 왔다고 믿어요. 왜? 이 세상이 건재하거든요. 그러니까 부활을 믿을 수 없는 거예요. 부활은 오는 세대 속에서 일어난다. 라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오는 세대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로 이 땅에 뚫고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왔다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침노해 들어온 거예요. 우리를. 우리가 천국을 침노하는 게 아니라. 거기 수동태로 번역이 되어갖고 자꾸 헷갈리는데, 데포넌트 동사라고 하거든요. 수동태인데 능동으로 번역해야 되는 동사가 있어요. 헬라어에는. 그게 데포넌트 동사인데 거기서 쓰인 게 데포넌트 동사에요.
그러니까 천국이 뚫고 들어온 거지 우리가 천국을 침노하는 거 아니란 말입니다. 천국이 우리를 침노해 들어왔어요. 언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그 하느님 나라를 살아요. 근데 개뿔이나 뭐가 하느님 나라가 이따위야 그런 생각 안 드세요? 하느님 나라는 되게 좋은 거라며? 무슨 개뿔이나 하느님 나라가 이 따위야! 맨날 속고, 당하고, 가난하고. 하느님 나라는 우리들이 좋아하는 것이 풍성하게 구비되어 있는 그런 곳을 하느님 나라라고 하지 않아요. 하느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복하는 자들이 하느님 앞에 납작 엎드려 있는 그 나라가 하느님 나라란 말입니다.
우린 지금 하느님의 통치에 의해 코가 꿰어서 끌려가고 있는 중이거든요. 완성의 자리로. 그걸 하느님 나라를 산다라고 하는 거예요. 뭘 대단히 기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가 일단 우리에게는 구속으로 체감이 돼요.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은 이 땅에서 우리들에게 빈곤함으로 올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에 내가 마귀를 묶어놓고 그의 세간을 늑탈하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있다 라고 그러죠. 마귀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그 상태. 그래서 하느님이 이끄시는 십자가의 삶의 원리 속으로 계속. 가기 싫어 죽겠는데, 들어가게 되는 그 상태를 하느님 나라를 산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아 뭔가 굉장히 평안하고 기쁘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아 너무 힘들어" 너무 힘들어야 되는 거예요. 그 비전과 야망과 뜻은 우리의 일상에서 그대로 실현이 되는데, 그 일상이 폭격을 당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어요. 그게 하느님 나라란 말입니다.
성경의 독자들인 성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오는 세대가 이 세대로 뚫고 들어와서 부활의 첫 열매가 맺혀졌음과 그 첫 열매의 열납(悅納, 기쁘게 바침)으로 말미암는 나머지 열매들의 필연적 열납의 현실을 보여주는 거예요. 왜? 첫 이삭이 드려지면 합격이 되거든요.
ks마크 요즘은 품인가요? 모르겠어요. 한국 떠난지가 오래돼서. 그거 맡을 때, 사과를 다 따가지고 가요? 사과가 과수원에서 한 5만개 나오는데, 그 5만개를 일일이, 하나하나 다 검사 맡아야 돼요? 몇개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합격이면 나머지도 합격이 되는 것처럼.
첫 열매가 하느님 앞에 제물로 열납이 되자 오 합격! 그 첫 열매가 품어 앉고 있는 모든 다른 존재가 쭉~ 따라 올라가는 거예요. 천국으로.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사도바오로가 그 현실을 이렇게 표현하죠.
(고전 15;20- 24)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 (우리가 붙은 자란 말이에요. 잘난 척 하지들 마세요. 그러니까. 붙어서 겨우 구원받았으면서) 24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므로 이 세대 속에서 오는 세대를 여신 거예요. 그리고 첫 열매가 되어서 하느님께 드려짐으로 해서 그 첫 열매에 속한 다음 열매들도 역시 부활에 참여하게 된 것임을 확증하신 거예요.
(레위 23;9 -14) 9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0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가서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너희 수확의 맏물인 곡식 단을 사제에게 가져와야 한다. 11 사제는 그 곡식 단이 너희를 위하여 호의로 받아들여지도록 주님 앞에 *흔들어 바친다. 사제는 그것을 안식일 다음 날 흔들어 바친다. 12 곡식 단을 흔들어 바치는 날, 너희는 일년 된 흠없는 어린 숫양 한 마리를 주님에게 번제물로 바쳐야 한다. 13 또 거기에 따르는 곡식 제물로는 기름을 섞은 고운 곡식 가루 십분의 이 에파를 바친다. 이는 주님을 위한 향기로운 화제물이다. 그리고 제주로는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바친다. 14 바로 그날이 되기 전에는, 곧 너희가 이렇게 너희 하느님에게 예물을 가져오기 전에는 빵도 볶은 곡식도 풋이삭도 먹지 못한다. 이는 너희가 사는 곳 어디에서나 대대로 지켜야 하는 영원한 규칙이다.’
첫 이삭 드리는 날에 대한 규칙인데요. 첫 이삭 드리는 날은 정확하게 과월절 삼일 후예요. 예수님이 과월절에 죽으시고 삼일 후에 부활하셨죠?. 첫 이삭이 그때 드려지는 거예요. 하느님께 온전히 그게 드려지면 나머지가 다 합격이 되는 거예요. 이건 하느님께 다 바쳐진 거야.라고 쳐 주는 거죠. 그게 바쳐지지 않았을 때 하느님께 온전히 열납이 되지 않았을 때 그걸 먹으면 죄예요. 부정한 자가 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첫 열매로 부활하셨어요. 이제 승천하여 하느님께 온전히 열납이 되었다라는 인정을 받아야 돼요. 물론 상징이지만.
근데 승천도 안 했는데 마리아가 붙들라고 그랬죠. 먹으면 안 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못 만지는 거예요. 내가 하느님 나라에 올라갔다가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합격 판정을 받아야 너희들은 비로소 그때 나를 가질 수 있다라는 뜻이에요. 그게. 그래서 못 만지는 거죠. 바로 그 현실이 오늘 본문에 그대로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첫 이삭 드리는 날에 첫 열매로 하느님께 드려져요. 바로 지금 예수님이 부활한 그날이 첫 이삭 드리는 날이었어요. 그때 드려진단 말입니다. 근데 아직 승천을 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그분의 부활이 적용이 안되는 거예요. 아직까지.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첫 이삭 드리는 날에 첫 열매로 하느님께 드려지는 형국으로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은 첫 이삭인 예수님에게 속한 나머지 이삭들이 전부 하느님께 드려지게 되는 연합의 교리를 담고 있는 거죠. 그게 Union Christ에요. 첫 열매로 첫 이삭으로 예수님이 드려지고 거기에 그냥 우리는 연합되어서 접붙임 받아서 거저 구원되어지는 거예요.
선악과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자는 절대 생명나무를 만질 수 없다. 그룹과 火焰劍으로 막혀있었으니까. 요 선악과의 시험은 예수만이 통과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근데 그 예수가 이 선악과 시험을 통과했다라는 것을 알려면 성령이 내려와야 되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여 성령이 내려오셔야 "아 예수님이 우리의 선악과 시험을 다 통과하시고 우리에게 생명나무를 거저 주신 거구나"를 알게 되는 거니까. 그전까지는 생명나무를 못 만지는 거죠. 마리아가 우리예요. 마리아는, 마라들 이 세상에 마라들, 그 마라들이 예수님을 내 것으로 연합되어 가질 수 있는 거예요. 바로 그러한 연유에서 예수님 무덤 안에 천사 둘이 있었던 거예요.
오늘본문 (요한20,11-12).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지금 이 구절을 읽으면서 조금 이상한 생각이 안드세요? 예수님은 지금 그 자리에 없으세요. 그리고 그 예수님을 쌌던 아마포만 놓여있는 상태거든요. 근데 어떡해 발쪽, 머리쪽이 어떤 쪽인지 알고 이렇게 썼을까요? 예수님을 쌌던 아마포가 그 자리에 고대로. 마치 몸에 기체가 빠져나간 것처럼 쏙 빠져나간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여기가 머리 쪽이고 여기가 발쪽 이구나를 분명히 알 수 있었건 거예요.
머리쪽에 수건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수건이 개켜있었다고 그러죠? 예수님이 쏙 빠져나와서 "어이구 얼굴에 수건은 내가 이걸 또 쓰고 있었네."이렇게 벗어서 개고 나온 게 아니라 그 개키다라는 단어 자체가 감싸다라는 뜻이거든요. 감싸있었던 게 내용물이 쑥 빠짐으로 폭 주저앉은 상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개켜있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아마포로 꽁꽁 염하는 거 어떻게 하시는 줄 아시죠? 꽁꽁 싸는 거예요. 아마포로 싸고 얼굴을 수건으로 감아놨다는 말이에요. 근데 마치 기체가 빠져나가듯 몸은 쏙 빠져나가고 그 예수님을 쌌던 수건과 아마포만 고자리에 남아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거죠.
유대인들이 뭐 도적설, 기절설 여러가지 학설들을 많이 내놨죠. 예수님의 시체를 누가 훔쳐 간 거다. 아니다 예수님이 잠깐 기절했다가 깨보니까 무덤 속이라서 다시 기어 나와갖고 저 유럽 어딘가에 가서 누구랑, 막달라 마리아랑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았다고...그런 논리들을 많이 펴잖아요.
옆구리를 찔리고, 십자가에 하루종일 매달려있던 분이 그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굴리고 그 앞에 있는 군병들을 피해서 도망갈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황급히 도망가시는 분이 아마포를 다 풀은 다음에 고대로 자기가 쌌던 그 자리에 놓고 수건도 그 자리에 놓고 벌거벗고 도망갔단 말이에요?
누가 훔쳐 간 거라는 도적설도 그래요. 훔쳐 가려면 밖에서 군병들이 지키고 있는데, 싼 채로 짊어지고 냅다 뛰어야지 그걸 전부 벗겨서 그 자리에다가 놓고 수건도 그 자리에다가 잘 개놓고 그리고 알몸만 가지고 도망갔다라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한 거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요런 단어들을 쓰는 거예요.
그 자리에 폭 주저앉은 아마포.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에 머리쪽, 발끝에 천사가 둘이 딱 마주 보고 서 있었어요. 어디서 봤어요. 이런 그림을? 법궤 위에서 봤잖아요 시은좌. 시은좌가 뭐예요?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 그 자리를 다른 말로 속죄소라고 하죠. 죄가 사해지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에 그룹이 둘이 딱 마주보고 앉아있어요. 바로 여기에서 이렇게 속죄가 일어난다라는 거예요. 그 안에 예수가 함께 계셨습니다. 돌아보니까 예수님이 계셨었잖아요. 거기가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거예요. 천사들과 예수가 계신 곳. 그러나 그 하느님 나라는 반드시 무덤 문을 열고 그 무덤 문 너머를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무덤 속으로 열심히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옛사람의 죽음, 옛사람의 무덤 속으로 한발한발 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무덤을 통과해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몸을 갖고 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우리 성도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는 거예요. 죽는 게 유익함이죠. 그 죽음의 문을 딱 열자마자 영원한 나라가 날 기다리고 있으니까! 근데 성도라는 사람들이 그걸 두려워한다니까요. 그 이야기가 출애굽기 25장 17절에 나와요.
(출애25,17-18) 17 너는 순금으로 속죄판을 만들어라. 그 길이는 두 암마 반, 너비는 한 암마 반으로 하여라. 18 그리고 금으로 커룹 둘을 만드는데, 속죄판 양쪽 끝을 마치로 두드려 만들어라.
끝이라는 똑같은 단어가 나오죠. 끝에 그룹이 서 있는 거예요. 천사가 서 있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의 시신이 놓여있던 자리에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 양쪽에 천사가 앉아있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인해 일어난 하느님의 백성의 속죄의 현실이 요 그림 속에서 선포되고 있어요. 그런데 마리아가 계속 울고 있단 말입니다. 이게 문제인 거예요. 우리는 인제 믿음으로 다 알아요. 그 현실을. 우린 영화를 미리 다 본 거예요. 다 봤어요. 절대 여기서 울 일이 아닌 거예요. 기뻐 뛰며 찬송을 해야 될 자리인데, 울고있단 말이에요.
우리들도 지금 울 때가 아닌데 가슴을 치며 울고 있어요. 절대 울 때가 아니에요. 근데 가슴을 치며 울고 있어요. 그리고 "대부님 나 어떡해요. 나 죽고 싶어요. 말리지 마" 막 이러고. 우리는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이라면서요. 근데 왜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보고 마리아처럼, 그 미련한 마리아처럼 그 영광스러운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 거기서 펼쳐지고 있는데, 왜 거기서 울고있냐구요. 우리가 지금 하느님 나라 들어와 있다면서요.
오늘 성당에서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여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다며? 왜? 눈에 자기가 원하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거기서 울고있냐구요. 바보들이죠. 그러니까. 하느님은 나오미(기쁨)로 지금 바꿔놨다 그러는데 "아니에요. 난 아직도 마리아(고통)예요." 자기가 우기고 있는 거예요. "아냐 내가 죽었다 살아났다니까" 그렇게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자기의 감정대로 통곡을 하고 있는 그 마리아를 때때로 우리가 굉장히 기특하게 보기도 해요.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놓여있고 자신이 죽은 예수님의 시신에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걸 보람이요, 감사요, 애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그 수준을 뭐라 그러죠. 유대주의라고 해요. 그걸 율법주의라고 해요. 내가 예수님께 뭔가를 해 드리고 싶다는 거예요. 근데 없어서 섭섭하다는 거예요. "아니 내 앞에 거지로 나타나지도 않았으면서 왜 나보고 안 했다고 그래요?" 이거거든요.
"나타나기만 했으면 내가 다 했을 텐데 아 안타깝다는 거죠. 그거 못하고 와서, 딴 건 다 했는데, 고것만 못하고 왔다는 거죠 그 걸 유대주의라고 해요. 그게 바리새인들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무덤이 빈 것을 보고 부활을 믿었다고 그래요. 그리고 제자도 달려와서 보고 부활을 믿었다고 그러죠? 오늘 본문에 보면, 믿었다고 그래요. 근데 고 밑에 굉장히 재미있는 말이 나와요. 한 번 보고 가죠.
(요한 20,8-10)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뭘 믿은 거예요? 도대체.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0 그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각자 집으로 그냥 가버렸어요. 믿었다며? 그냥 집으로 가버렸어요. 그리고 성경이 뭘 부연설명 하냐면, 그들이 아직 죽은자 가운데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라는 의미가 뭔지를 모르고 있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뭔가를 보고 내가 이건 믿는다라고 내 의지를 발동하여 "나는 믿어. 나는 확신해"라고 하는 것, 그거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구원의 확신 마찬가지예요. 내가 자꾸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고 하는데... 그거 큰 오산이에요. 루가복음 24장에 보면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손도 보여주시고 옆구리도 보여주시고 손도 넣어보라고 그래요. 그리고는 그래도 못 믿을까 봐 생선까지 드세요. 그리고 "나는 영혼이 아냐, 난 부활한 몸이야, 난 살도 있고 피도 있다. 만져 봐" 만지게까지 했단 말이죠. 제자들이 만졌습니다. 그리고 여드레 후에 토마에게 안 보여줬다고 또 나타났어요. "토마야 어디 갔다 왔니, 날 봐. 옆구리에 손 좀 넣어볼래?" 옆구리가 뚫렸어요. 제자들이 또 봤어요. 그거. 그리고 40일을 수시로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한 번에 500여 형제에게도 나타나셨어요. 예수님이. 근데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베드로가 "나 고기 잡으러 간다" 그랬더니 머리 긁적이면서 다 쫓아갔잖아요.
보세요. 예수님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면 우리가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자꾸들 이야기들을 하시는데, 예수님이 눈앞에 나타나도 고기 잡으러 가는 인간들이 인간이에요. 그런데 무슨 기적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겠다는 것입니까? 어떤 기적이 우리를 신앙 안으로 끌어 들어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착각들 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나타나서 옆구리에 손까지 넣어보라는데도 고기 잡으러 가는 인간들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와갖고 "예수님 그냥 올라가시면 어떡해요. 참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가 이때입니까?" 왜? 영의정이 돼야 돼거든요. 내가. 좌의정, 우의정 돼야 되는데, 예수님 그냥 가면 어떡하냐고!
너희들은 눈에 보는 것으로, 또 너희들이 들어 지식으로 갖고 있는 것으로 절대로 예수 못 믿는다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죠. 그래놓고 10km를 같이 갑니다. 10km면 꽤 먼 거예요. 제자들이 뭐라 그러냐면은 "아 그가 이스라엘 나라를 구속하실 자로 바랬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 바랬다라는 말이 희망이라는 뜻이거든요. 이스라엘 나라, 다윗의 왕국으로 회복해 주실 것을 내가 희망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근데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에요. 듣고도 여전히 이 세상눈에 보이는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세상의 가치와 힘. 그것을 공급해 주는 분이 메시야다는 그 사상. 민속메시야 사상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계속해서 듣다가 너무 답답하시니까 모세와 시편을 비롯하여, 모든 성경에 자기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 말씀에 대햐여 설명해 줬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구약성경 전체가 누구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예수에 대해서!
뭐 신명기 28장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이런 거를 우리가 뚝 떼서 적용하시면 안 돼요. 공식처럼. 구약은 전부 예수의 필연성, 십자가의 필연성을 설명하는 거거든요. 보세요.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땐 제자들에게 희망이 있었어요. 바랐더라 그러잖아요. 근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그러면 그들에게 이제 진짜 희망이 이루어진 거거든요. 하느님 나라가 주어진건데, 희망이 죽어지게 되니깐 그들의 희망이 작살나는 거예요. 내가 이스라엘 나라를 우리 주님이 회복하실걸 바랐는데, 그분이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희망이 작살났다.
그런데 그 이면에 있는 그 희망이 그를 덮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보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들의 삶의 현실에서는 그걸 못 보냔 말이에요. 우리의 삶 속에서 희망이 자꾸 폭격을 당하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이 우리를 점령해 가고 있는 중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어요. 그리고 은닉되어 계셔야 돼요. 눈에 보이면 안돼요. 근데 눈에 보이게 해 달라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도와달라고 계속 울고 계시잖습니까! 기도하면서 부르짖으며 통곡하는 주된 이유가 뭐예요? 눈에 보이는 거 나에게 안줘서 그러는거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서 설명해주자 그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라고 그래요. 예수님을 봤을때도 몰랐어요. 만졌을 때도 몰랐어요. 근데 예수님이 빵을 떼어서 주고,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거잖아요. 몸이 그들에게 먹혀지고. 하느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게 해주셨어요. 그랬더니 눈이 딱 뜨여져서 "어 예수님이네" 알아봤어요. 그 즉시 사라지시는 거예요. 왜 인줄 아세요? 신앙이라고 하는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눈이 뜨이자마자 사라지는 거예요. 구약 때 까지는 예수님이 나타나세요. 기적으로 나타나세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 까지는 구약이에요. 기적이 많이 일어나야 돼요. 그러나 성령이 오시고 믿음이 왔잖아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걸 실체로 받아들이는 거라면서요! 그럼 내 안에 믿음이 왔다라는 증거가 뭐예요? 하느님이, 예수가 은닉되어서 부활해서 없어졌는데 나에게 그분이 이룬 영광의 현실이 보여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현실에서 예수가 안보이고 예수가 가시적으로 우리를 안 돕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울어야 돼요? 안 울어야 돼는데 왜 울고 있냔 말이에요.
대답은 또박또박 잘하는데, 삶 속에서 그게 안 나타나잖아요. 예수님은 살아 계세요. 안 죽었다니까요. 근데 왜 예수님이 죽어있는 것처럼 사세요?. 살아서 내 안으로 지금 뚫고 들어와서 은닉되어 있는 상태로 나를 끌고 계세요. 그러면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안 보이는 그분이, 살아계셔서 안 보이는 그분이. 죽었으면 보여야 돼요. 근데 살아 계시기 때문에 안 보여요. 지금 믿음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게 나중에 이제 종말의 때에, 지금은 안 보이는 그리고 지금 오는 세대와 이 세대와 섞여있는 그 하느님 나라가 그 종말의 때에 극치에 이를 거예요. 그때 확 드러나는 거예요. 지금은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울면 안돼요.
신앙은 다른 종교인들처럼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얻어내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모르니까! 그냥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라도 나를 위로하려고 자꾸들 그러는건데, 그러니까 말씀을 배워야지요.
천사들이 뭐라 그래요. 눈으로 예수님을 봤는데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예수님이 너희들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다시 생각해 봐라’ 그러잖아요. 그리고 예수님도 말씀을 풀어주시잖아요. 말씀 속에 뭐가 들어있어요? 안 보이잖아요. 그러나 말씀 속에 하느님이 이 세상에 말씀으로 오셨잖아요. 말씀 속에 하느님이 들어있다구요. 어떻게 알아요? 믿음으로 안다니깐요 그걸. 아니 어떻게 믿음이 왔죠? 성령이 내려오셨잖아요. 첫 열매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러면 우리는 그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자가 돼야 돼요. 자꾸 보여달라고 울지 마세요!
우리는 지금 예배와 안식과 하느님 나라가 회복되어 있는 그 영광된 현실 속에서 그 보이지 않는 현실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존재여야 돼요. 그럼 우리들은 일상에게 휘들리면 안 돼요.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우리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 그런것으로 一喜一悲하지 마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루어 놓은 그 현실을 바라보세요. 그때마다 그리고 일어나세요!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에요.
주님 부활, 나의 부활, 우리 모두의 부활! 축하드려요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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