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6절
수류면(水流面) : 전북 금구군 수류면, 1914년 김제군에 편입, 1935년 김제군 금산면으로 변경,
1995년 김제시 금산면으로 변경
원평(院坪) : 당시는 전북 금구군 수류면 원평, 지금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이다. 근원이
평평하게 됨, 원만하고 평평함을 뜻한다. 김성보집이 있고 시장에 김경집이 있음.
정남기(鄭南基) : 남쪽에 바른 기틀을 마련하시려는 뜻이 있다. 특히 상제님의 처남이니 부인의
집이고 여자는 음(陰)의 기운이므로 남쪽火의 기운을 음으로써 불길을 억누려 하시는 기운이다.
(행록 1-20 참조) 금구군 초저면 내주동(지금의 전북 김제시 봉남면 내광리(內光里) 내주마을)사람
으로 상제님의 처남이다. 본명 한표(漢表). 남기는 자(字).
김보경(金甫京, 1860~1934) : 본관 안동(安東). 본명은 영준(榮駿). 자 주팔(周八), 호 농호(聾湖)
신유(辛酉, 1861)년 9월 21일, 함열 회선동(지금의 익산시 성당면 대선리 외회선)에서 부(父) 김기원
(金基源)과 모(母) 서씨(徐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진사 이상의 벼슬을 많이 했고,
감역관(監役官)을 지냈다. 함라 지역의 유지(100석 이상 수확)였다. 눈썹이 진하고 기골이 장대
(190cm 정도. 그의 손자도 그렇게 크다)하고 힘이 세어서 인근 지역에서 당해 낼 자가 없었다고
한다. 학문을 좋아하여 14세에 사서삼경을 뗐고, 서당에서 훈장을 하기도 했다. 안동 김씨 문중일을
도맡아서 하였다. 임인(壬寅, 42세, 1902)년 4월 김형렬의 집에서 상제님을 만났다. 상제님께서
당시의 함열현 회선동(咸悅縣 會仙洞) 김보경의 집에서 천지공사를 보실 때에 물심양면으로 공헌
하였다. 김광찬을 천거하였다. 슬하에 두 아들(賢黙, 聖黙)과 세 딸을 두었다. 갑술(甲戌, 1934)년 9월
5일, 함열 회선동(지금의 익산시 성당면 대선리(聖堂面 大仙里))자택에서 74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1장 7절
七월에 : 1902년 7월
본댁 :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 지금의 전북 정읍 덕천면 신월리
1장 8절
심법(心法) : ① 마음을 쓰는 법. ② [불교] 오위의 하나. 우주 만유(宇宙萬有)를 물질적 존재와
마음의 이원(二元)으로 나눌 때에,물질적 대상에 대하여 인식 작용을 하는 것이다.
1장 9절
문운(文運) : ① 학문이나 예술이 번성하는 기세. 또는 문화나 문명이 진척되는 기운. ≒규운(奎運).
② 문인으로서의 운수. ③ 문명의 운로
조장(助長) :힘을 도와서 더 자라게 함.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쓴다.사행심 조장/과소비 조장.
천리(天理) : 천지 자연의 이치. 또는 하늘의 바른 도리. ¶천리를 거역하다/천리를 어기는 짓은 하지 마라.
금산사 : 전북 김제시 금산리 모악산 도립공원 입구에 세워진 사찰 백제 법왕 원년 (599) 왕의 복을
비는 사찰로 세워짐.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세우면서 중창(762~766). 임진 정유재란때 승병 훈련장
사찰이 파괴됨. 선조때(1601) 수문대사에 의해 3창. 그후 부분적 보수 개축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 대한불교 조계종산하 17교구 본사 사찰 미륵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대순회보 4-9 참조)
미륵전 : 국보 62호 일명 용화전 산호전 장육전이라 한다 이 건물은 외관 3층으로 되어 있고 내부
통층으로 된 우리나라 유일의 법당이다. 1층 대자대비 2층 용화지회 3층 미륵전 이라 부른다.
미륵불은 세 번의 변화가 있었다. 진표율사 33자 금불창건 1598년 정유재란때 소실 1601년 수문
대사가 36자 목불로 재건 1934년 원인 모를 불로 주불이 소실됨. 성열대사가 39자(11.82m) 석고
(토불)로 조성. 좌우 법화림보살, 대묘상보살 그 옆에 다시 협시보살 2구가 있어 날出자의 형태다.
(대순회보 4-9 참조)
1장 10절
강태공 : 주(周)나라(BC1050~BC256) 초기의 정치가․공신. 본명 강상(姜尙). 그의 선조가 여(呂)
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 불렸고, 속칭 강태공으로 알려져 있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초빙을 받아 그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
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에 봉함을 받아 그 시조가 되었다. 동해(東海)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으나,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문왕을 만나게 되었다는 등 그에 대한 전기는
대부분이 전설적이지만, 전국시대부터 한(漢)나라 시대에는 경제적 수완과 병법가(兵法家)로서의
그의 재주가 회자되기도 하였다. 병서(兵書) 《육도(六韜)》(6권)는 그의 저서라 하며, 뒷날 그의
고사를 바탕으로 하여 낚시질하는 사람을 태공망 혹은 태공이라 하는 속어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