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릉"(穆陵)은 "동구릉"에서 제일 동쪽 끝에 있고 각기 떨어진 세 기(三 基)의 능으로 되어 있다.
"건원릉"의 "금천교"를 건너기 전에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로 올라간다.
홍살문 입구에 서면 다른 곳과 달리 "비각"(碑閣)이 정면으로 보이고 "능"은 보이지 않는다.
원래 이곳은 1600년(선조 33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승하(昇遐)하자,
"왕비 릉"인 "유릉"(裕陵)의 터로 정해진 곳이다.
1608년(선조 41년) 선조(宣祖)가 승하(昇遐)하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면서
능(陵)을 "건원릉"(建元陵)의 서편에 조영(造營)하고(지금의 경릉자리) 능호를 "숙릉"(肅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능호가 "숙릉"(淑陵, 정숙왕후의 능)과 음이 같아 이내 목릉(穆陵)으로 고쳤다.
"정숙왕후"(貞淑王后)는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 "익조"(翼祖)의 부인이다.
1630년(인조 8년)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장(移葬)하고 유릉(裕陵)과 목릉(穆陵)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穆陵)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후 1632년(인조 10년)에 선조(宣祖)의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계비의 능을 왕릉의 동편 언덕에 조영하고 처음에는 이를 따로이 "혜릉"(惠陵)이라 이름붙였다.
그러나 세 능역 간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 이를 모두 합하여 "목릉"(穆陵)이라 했다.
조선왕릉 중 세 개의 각각 다른 언덕이 조성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은 "목릉"(穆陵)이 유일하다.
또한 능역(陵域)이 가장 크다.
능으로 가다보면 비각(碑閣)이 가까워 먼저 가게 된다.
목릉 비석의 앞면.
조선왕후 왕릉에 있는 표석 중에 "부중강"(附中岡 : 가운데 언덕에 붙어서 위치하다)
이라는 용어가 들어가 있는 비석은 이 "목릉"이 유일하다.
이 "부중강"이라는 단어가 쓰인 연유와 배경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기사 1746년(영조 22년) 12월 23일 기사에 자세히 나와있다.
표석이 세워진 년도는 "숭정 기원후 120년"으로서 서기 1747년(영조 23년)이다.
목릉 비석의 뒷면.
목릉 비문의 역문.
능에는 올라가지 못하므로 가까이 가면 능의 모습을 찍을 수가 없다.
"인목왕후" 능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정자각"위로 "목능"의 모습이 어느 정도 보인다.
능은 세 곳에 있지만 "정자각"(丁字閣)은 "선조" 능 앞에 하나 뿐이다.
오른쪽 목책아래 산신석(山神石)이 보인다.
목릉의 정자각(丁字閣)은 조선 왕릉중 유일하게 "다포형식"(多包形式)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지붕과 들보사이에 지붕의 하중을 분산시키는 "공포"(栱包)가 보인다.
"공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러한 형식으로 건축한 것이 유일하여 보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2011년 12월, "문화재청"에서 목릉의 정자각을 보물 1743호로 지정하였다.
선조의 능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 더 맞은쪽에 있는 "인목왕후" 능쪽으로 올라간다.
선조의 능.
선조(宣祖)의 능침에는 "병풍석"이 둘러져 있다.
병풍석 대석(臺石)과 "장명등" 대석(臺石)에 새겨진 연꽃무늬와 모란 무늬가 독특하다.
이는 이후에 조성되는 왕릉 석물의 무늬에 많은 영향을 끼쳐 조선 말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석마(石馬)의 다리사이에는 투각(透刻)하지 않고 막혀져 있다.
장명등(長明燈), 석상(石像) 등은 다른 능과 다름이 없지만 조각 솜씨가 매우 서투르다.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도 3미터 내외로 크기만 할 뿐 말뚝 같은 느낌으로
상체와 하체의 비율이 맞지 않고 두상만 크게 만들어 갑갑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조선 시대 석인상(石人像) 중 가장 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608년에 장인(匠人)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가져 온 사진.
병풍석의 "면병풍석"(面屛風石)의 인물도 얼굴이 크게 조각되고 꽃무늬도 크기만 할뿐 정교하지 못하다.
선조(宣祖)는 조선 최초의 후궁(後宮) 소생 방계왕족 출신 왕이다.
"명종"의 유일한 친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하자 종친 가운데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河城君)이
후사로 선택되어 "명종"과 "인순왕후"의 양자로 들어가 "명종"의 뒤를 이었다.
초창기에는 숙모이자 법적 어머니인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지만 1년 만에 친정(親政) 을 하게 된다.
조선 역사의 중간에 위치한 임금으로 왕위 계승도를 보면
선조(宣祖)와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계보도가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이후의 조선 임금들은 모두 "선조"(宣祖)의 직계 후손으로 모두 "서계"(庶系)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선조(宣祖)는 "경복궁"에서 즉위한 마지막 왕이 되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270년을 방치되었다가
"고종"때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이 각계의 반대와 원성에도 불구하고 복원했지만
정작 "고종" 본인이 스스로를 황제로 격상시켰음을 선포한 곳은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이었고,
고종의 아들인 "순종"도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에서 즉위하였다.
이제 "의인왕후"(懿仁王后)능으로 간다.
"의인왕후"와 "인목왕후"의 능침은 "정자각"에서 신로(神路)만 연결되어 있다.
"의인왕후"(懿仁王后)"는 반성부원군 박응순의 딸로 선조 2년(1569) 15세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의인왕후"(懿仁王后)"는 중전으로 있으면서 "인종"의 비(妃)인 인성왕후(仁聖王后)와
"명종"의 비(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를 섬김에 효성이 극진했고,
후궁 소생인 여러 아이에 대해서도 은애가 지극했지만 소생 없이 사망했다.
"의인왕후"(懿仁王后)능에는 "산신석"이 보이지 않는다.
"의인왕후"(懿仁王后)능의 석물도 "목능"과 거의 비슷하여 그리 자연스럽지 못하다.
병풍석은 보이지 않는다.
석마(石馬)도 다리 사이를 투각(透刻)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의인왕후"(懿仁王后)"능에서 봐야 할 것은 "망주석"과 "장명등"의 대석(臺石)에 새겨진 꽃무늬다.
이제 "인목왕후"(仁穆王后)능으로 간다.
능이 조금 멀리 있어서 신로(神路)도 꽤나 길다.
비각(碑閣)아래쪽에 있는 우물은 물이 없고 지금은 방치되어 있는듯하다.
"인목왕후"(仁穆王后)능 앞에 섰다.
이곳에는 오른쪽에 산신석(山神石) 보인다.
그리고 "인목왕후"(仁穆王后)능바로 앞에는 정사각형으로 두텁게 흙을 정지(整地)한 곳이 있다.
크기로 보아 혹시 "정자각"을 만들려고 했던 자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7년전 이곳에 왔을 때 마침 작업을 하는 분들이 있어 양해를 구하고 올라 가 봤다.
선조(宣祖)의 계비인 "인목왕후"(仁穆王后)는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19세에 51세인 선조(宣祖)의 계비가 되어
선조(宣祖)의 유일한 적통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하지만 광해군과의 정권 알력으로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유배된 후 살해되고,
"인목왕후"(仁穆王后)는 서궁(덕수궁)에 유폐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신분이 복위되어 대왕대비에 오른 인목왕후(仁穆王后)는
사후(死後) 건원릉 왼쪽 다섯째 산줄기에 안장되었다.
이곳도 "병풍석"은 없다.
"인목왕후"(仁穆王后)의 능은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능보다 다소 숙련된 솜씨로 만들어져 생동감을 보이지만
문·무인석의 허리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비율이 2 대 1 정도로 불균형이 심하다.
건원릉의 영향인지 석마(石馬)의 다리가 투각되어 있다.
"장명등"과 "망주석"의 대석(臺石)에 새겨진 꽃무늬가 화려하다.
혼유석(魂遊石) 받침돌인 고석(鼓石)의 귀면(鬼面).
"인목왕후"(仁穆王后)의 능에서 보이는 "선조"의 능과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능.
우리나라 왕릉중에 이렇게 넓은 잔디광장이 조성된 곳은 여기만 있을 듯하다.
여담(餘談)
파주 임진강 가에 "화석정"(花石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
"10만 대군 양병설"을 주장하던 "율곡선생"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곳으로 내려온다.
이곳에다 "정자"를 짓고 소일을 하는데 하인들을 시켜 하루도 빠짐없이 기름걸레로 정자를 닦게했다고 한다.
율곡선생이 돌아가실 때 자손들에게 유언을 하는데 봉투를 하나주며 큰일이 있으면 이 봉투를 열어보라고 하셨단다.
그리고 얼마후
임진왜란이 터지고 불과 며칠만에 "선조"는 북으로 피난을 하게 되어 이곳까지 오게 됐다.
폭우가 쏟아지는 한밤중에 도착한 선조 일행은 어둠속에서 임진강을 건너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선조와 몇몇 신하들이 정자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는데,,,,
이항복이 이런 외진곳에 정자가 있는 것을 기이하게 여겨 나가보니,
정자 이름이 "방화정"(放火亭)이다.
"선조"를 수행하던 "이항복"이 이곳이 율곡선생이 거처하던 곳임을 알고 후손을 찾았다.
후손은 "이항복"에게 율곡선생의 봉투를 내어 주었다.
봉투를 열어 본 "이항복"은 율곡선생의 선견지명에 감탄을 하고야 만다.
봉투안의 종이에는 단 한 줄의 글이 씌어 있었다.
"정자에 불을 질러라!"
율곡선생은 임금이 이곳으로 피난을 할 것을 예견하고 정자를 기름으로 닦아 불이 잘 타게 했던 것이다.
빗속에서도 기름을 먹은 정자는 활활 타 올라 사방을 비추고,
그 불빚으로 무사히 "선조"일행은 강을 건널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정자 이름은 "花石亭"이 아니고 "放火亭" 또는 "火石亭"이였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실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충신의 진언을 귀담아 듣지 않으면 국가가 위태로워 진다는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휘릉(徽陵)으로 간다. 徽陵 徽陵
첫댓글 덕분에 이씨 조선 왕릉의 예기를 알수 있어 열심히 보리다.
동구릉을 이렿게 자세한 설명할 수 있는 자료는 어디서 가져 왔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