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사람이 일요일에 가끔 가까운 선원(禪院)엘 간다. 과거 교직에 있었기에 젊은 원장 스님에게 교리(敎理)가 아닌 일상의 일들을 더러는 자문을 해 주기도 해서 서로가 필요한 듯 해 보인다. 올 때는 공양(供養) 후에 남은 과일 혹은 떡 조각을 가져오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구수한 시락국을 얻어 왔다. 위(胃)가 좋지 않아 선원에서는 거의 먹지 않기 때문이다.
열 살 안팎 시절, 6·25 전쟁으로 너나없이 보리밥 한 그릇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때는 시래기죽 혹은 시락국도 고급먹거리였다. 75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 떠나고 늙은이 둘만 남았으니 김장도 않는다. 먹을 것이 많으니 김치는 거의 먹지 않은 편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 절인 배추 한 포기 사다가 적당히 얼버무려 간단히 해결하거나 그것도 귀찮으면 가까운 마트에서 조금 사 오면 된다.
문제는 맛이다. 아무리 그래도 사 온 것은 마누라가 만든 깊은 맛이 안 난다. 입맛도 마눌님의 손맛에 길들여진 탓이리라. 더구나 집 떠난 애들이 “어~엄~마 김치!” 하면 내 마누라가 아닌 그들의 엄마는 마음도 손도 가만히 있질 못한다. 평소에는 늘 “아이고 허리야, 다리야~~”, “먹고 싶으면 사다 자~압소” 하던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 수레를 끌고 집을 나선다.
좋은 세월이라 배추는 절인 것을, 그것도 인터넷 주문하면 문 앞까지 갖다준다. 무는 가급적 직접 골라 산다. 시퍼런 잎이 달린 무가 오면 잎은 잘라 연당(硏堂, 石庵硏堂)에 가져와서 널어 말린다. 시래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올해도 삼 년 만에 조금만 말렸다.
중학교 입학 전후 때가 아닌가 싶다. 그해 아버님이 진외가(陳外家)로 친척 되시는 우(禹) 씨와 배추와 무 밭을 도지로 사서 서울에서 넘기는 사업을 하셨다. 열차로 실어 보내면 아버님이 서울에서 받아 청과 도매업자에게 넘기는 과정인 듯 짐작한다. 그해 초겨울 한창 김장철인데 할아버지가 별세하여 부득이 동업자에게 맡기고 내려오셨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그 분이 내려오셔서 밑졌다고 했다. 장사 벌고 밑지는 것은 다반사. 유구무언이었다. 아버님 따라 밭에 가보니 시래기가 엄청 쌓였다. 그 이듬해까지 그야말로 신물 나도록 시래기를 먹었던 기억이 뚜렸하다. 그래도 시래기는 물리지 않고 지금도 맛있다.
흐믈흐물하게 푹 삶긴 시래기에 조선된장과 들깨가루를 듬뿍 풀고 온마리고기(큰 멸치)가 대가리 채로 둥둥 뜬 뜨끈한 국물의 시락국은 해장하는데 일품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6·25 전쟁 전이라 기억한다. 아버님이 민선 동장으로 계실 때다. 어느 겨울날 새벽부터 어머니가 동네 아주머니들 몇 분과 더불어 사랑채 소여물 끓이는 큰 솥에 시래기 된장국을 그득하게 끓이셨다.
점심 때가 되기 전에 허름한 무명 바지저고리 옷차림에 벙거지를 쓴 사람, 담요 쪼가리를 목에 두른 사람 등 20여 명이 집 앞 동사(同舍)에 도착했다. 마치 지나가는 거지 모습의 떼거리였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몇 차례 시락국 바케쓰를 날았다. 보리쌀이 더 많은 밥을 그 뜨근한 시락국에 말아 먹는 그 분들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며칠을 굶은 모양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 정식 국군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있었던 국민방위군인가 하여 정식 국가의 인정을 받지 않은 단체였었다고 한다.
내 고향마을인 중앙국민학교에 재직 중인 때였다. 대구 반월당에 경산행 버스 정류소가 있었다. 당시 경산은 선생님들이 대구시 이외는 제1로 꼽는 선망지였다. 그야말로 줄(?) 좋은 분들만 있었다.
저녁에 약주를 거나하게 잡수신 선생님 특히 느긋하신 교장, 교감님들도 아침 일찍 나오자니 속이 불편해 조반(朝飯)을 걸러고 나오신 분들은 정류소 옆 좁은 골목에 있는 시락국 할머니 즉석 가게에서 만난다.
뚝배기에 밥 한술을 담고는 연탄 화로 위에 허연 김을 내 뿜으며 슬슬 끊고 있는 시락국을 그득히 뜨고 수저만 걸쳐 주면 받아 들고선 너나없이 골목에 죽 늘어서거나 긴 나무의자에 앉아 먹는다기 보다는 들이 마신다. 반찬은 공용이다. 김치나 성금성금하게 썬 깍두기 한 사발을 걸상 위에 얹어 둔 것이 전부다.
학교 교장도 가끔 만난다. 이상하게 평소 그렇게 하늘 같고 서먹하던 그가 그렇게 시락국 사발을 들고 옆에 서서 먹을 때는 마치 지기(知己)가 된 느낌이었다. 학교에서는 제왕(帝王)적인 권위가 주렁주렁했었는데… . 거기서는 시퍼런 지위나 권위는 찾을 수가 없었다. 술에 절어 충혈된 눈이며 추위에 언 빨간 코끝이 그냥 늙으수레한 중늙은이었다. 뜨끈한 시락국물이 모든 것을 녹이고 따뜻이 감싸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