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의 위대한 선조/순흥안씨대감
시조 휘 자미(子美)께서는 고려 희종조에 흥위위(興威衛) 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냈고, 뒤에 문성공(文成公) 향(珦)의 귀현(貴顯)으로 인하여 신호위(神虎衛)상호군(上護軍)에 추봉되셨다.
우리나라 주자학의 태두 안향(安珦)은 고려조의 대표적 인물, 원종(元宗) 1년18세 때 문과에 들어 1275년 (충렬왕(忠烈王) 1년) 상주(尙州)판관을 지내고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어 공주를 따라 원(元)나라에 들어갔을 때,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베껴 쓰고 돌아와 계속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가 되었다. 벼슬은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에 이르렀다. 그는 또 문교의 진흥을 위해 육영재단인 섬학전을 설치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등 이 땅에 유학의 학풍을 수립했다. 사후에는 문묘(文廟) 배향의 영예를 누렸다.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사대부(士大夫) 명문가로 이름나게 된 것도 이 분의 학문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의 문하에서 명유(名儒) 백이정(白頤正) ․ 우탁(禹倬) 등이 나왔고, 특히 백이정의 학풍은 이제현(李齊賢) ․ 이색(李穡) 등에 계승되었으며, 다시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권근(權近)이 나와 유학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졌다. 충숙왕 때 상호군(上護軍) ․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한 안우기(安于器)는 안향(安珦)의 아들이다.
안축(安軸)은 충목왕(忠穆王)때 찬성사(贊成事), 안보(安輔)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안집(安輯)은 대제학으로 3형제는 여말(麗末)의 명신들이다. 안축은 국문학사에 빛나는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 등의 명편을 남긴 대문장가이다.
이 밖에 여말과 조선초의 인물로 안목(安牧)(공민조(公愍朝) ․ 대제학)) ․ 안원숭(安元崇)(공민조 ․ 대제학) ․ 안종원(安宗源) (태조조 ․ 안경공(安景恭)(태조조(太祖朝) ․ 집현전대제학) ․ 안원(安瑗)(태종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 도절제사(都節制使) 등이 있다. 이중 안경공(安景恭) ․ 영삼사사(領三司使)은 조선개국공신으로 가문의 번성을 이루었다. 그의 아들 안순(安純)(세종조) ․ 예문관대제학 손자 안숭선(安崇善)은 《고려사(高麗史)》 편찬에도 참여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던 석학이었다.
순흥안씨는 조선 중종~명종 대에 다시 전성기를 누린다.
이 때 안침(安琛)(중종조 ․ 지돈녕(知敦寧) ․ 안당(安瑭(중종조 ․ 좌의정) 안위(安瑋)명종조 ․ 병판(兵判) 등의 명현을 냈다.
이들 중 좌의정 안당(安瑭은 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사림파의 유신들을 구하려다 도리어 남곤(南袞) ․ 심정(沈貞) 등에 화를 당하고 다시 서고모(庶姑母)의 아들인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그의 아들 처겸(處謙) 처근(處謹)과 함께 사사(賜死)되었다. 이 신사무옥(辛巳誣獄) 사화로 안당(安瑭의 일문은 몰락의길을 걸었다.
안위(安瑋)는 명종 10년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수한 석학이다. 그는 군략가로 유명했으며 의학에도 정통했다. 사후 청백리에 올랐다. 그의 아우 판결사(判決使) 안상(安瑺은 음악의 대가였다. 그는 선조 5년 거문고 ․ 비파 ․ 장구의 악보를 망라하여 《금합자보(琴合字譜)》를 발간했는데 우리나라 국악사에 최고 보물로 이 악보를 ‘금보(琴譜)’라 한다. 또한 조선초기 대표적 화가로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安堅) 화가가 있다.
☞ [안위 ․ 안현 형제의 기록을 잘못 인용했다. 형인 문간공 안위는 군략가로 유명했다, 아우인 문희공 안현은 의학에 정통했으며, 사후 청백리에 올랐다]
근세기 들어서는 일제 강점기에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그리고 안중근(安重根)은 민족사의 가장 참담한 어듬 속에 몸을 살라 어둠을 밝히고 구원(久遠)의 별이 되어 역사의 천공(天空)에 오른 거룩한 두 이름, 이들은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영광일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 위인들이다.
어질고(仁), 슬기롭고(智), 굳센(勇) 한겨례의 얼이 고난의 마지막 수렁에서 ‘세계선민(世界選民)’의 사명을 향해 떨쳐 일어나며 도산(島山)은 ‘참되자(務實)’, ‘일하자(力行)’, ‘믿음을 주자(信義)’, ‘날쌔자(勇敢)’ 의 4대 정신을 지표로 큰 선비 운동[興士團]을 일으켰고 안중근(安重根)은 하얼빈역에서 동양 평화의 교란자 이등박문(伊藤博文)을 평화를 사랑하는 5억 아시아인의 이름으로 처단했다.
“장부는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이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임할지라도 기운이 구름같도다. (장부수사필여철(丈夫雖死心如鐵) 의사임위기사운(義士臨危氣似雲)” 1909년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처단한 안중근(安重根)은 이같은 유서를 남기고 의연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남아의 최후였다.
안중근은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였고, 승마 ․ 궁술도 익혀 문무를 겸했다.
1895년 천주학에 입교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남포에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운 후에 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 1908년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 지구군사령의 직책을 맡아 의병군을 이끌고 경흥(慶興)까지 쳐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르빈에 오는 이토의 살해를 결심,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하얼빈역에 잠입, 권총으로 이토를 쏘아 죽인 후 하얼빈 총영사 ․ 궁내대신 ․ 비서관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가 1910년 여순(旅順)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글씨에 뛰어나 많은 유필을남겼으며, 재감 중에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59년 일생을 일제와 싸우고, 일제에 나라가 먹히도록 하고만 자신과 겨레의 악덕과 싸우다 끝내 침략자의 형벌에 순국한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은 흔히 인도의 독립운동의 영웅 간디에 비교된다.
도산은 평남 강서 출신이며, 1897년 구세학당을 졸업한 후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9년 강서에 점진학교를 설립하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초등학교를 다닌 후 재미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공립협회(共立協會)를 만들었다.
1907년 귀국해서는 양기탁(梁起鐸) ․ 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민족각성 운동을 전개했다. 평양에 대성(大成)학교, 정주에 오산(五山)학교를 세웠다.
1912년 미국으로 망명, 대한민국총회를 조직, 총회장에 선임되고 이듬해 로스엔젤레스에서 청년학우회의 후신으로 흥사단을 설립했다. 3․운동 후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내무총장 ․ 국무총리서리 등을 역임했고, 독립신문을 창간, 1928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했으며, 다음해 상해에서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어 2년 6개월을 복역했다. 1937년 흥사단 동지와 함께 월우회(月友會)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며, 다음해 병보석 되어 지금의 서울대 병원에서 별세했다.
안중근(安重根)의 종제(從弟) 안명근(安明根) 또한 어렸을 때부터 형의 감화를 받고 항일운동에 투신, 무력으로써 독립을 쟁취할 목적으로 남만주에 무관학교 설립을 계획, 황해도의 부호들에게서 자금을 염출하다 체포되었다. 석방된 후 테라우치 총독의 암살을 계획하고 선천역에서 거사하려다 체포되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0년 간 복역했다. 그 뒤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길림성에서 병사했다.
또한, 안중근의 공판 때 무료 변호를 맡았던 애국변호사이며 1천 명의 의병을 진두지휘하여 홍주산성을 지킨 의병장 안병찬(安秉瓚)(상해임정․�법무차장), 한국최초의 비행사 안창남(安昌男), 3․1운동 후 독립군사령부를 창설한 안무(安武),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안재홍(安在鴻),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로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安益泰), 한말의 대표적인 화가 안중식(安中植)과 항일비밀 결사 대동청년단을 조직,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독립군운동을 측면 지원했던 거상 백산 안희제(安熙濟) 등이 순안(順安)의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