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화두를 ‘사량분별’과 ‘알음아리’로 푸나
<55> 진소경 계임에게 보낸 대혜선사의 답장 ①-1
[본문] 편지를 받아보니 뜻을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에 머물고자 하지만 근성이 지극히 둔하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치하합니다.
요즘 사대부들이 흔히 이 공부에 대하여 확실하게 깨달아서 곧바로 뛰어넘어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다만 근성이 너무 영리하며 지견이 너무 많아서 종사(宗師)가 막 입을 열어서 혀를 움직이는 것을 보기만 하면 벌써 한순간에 알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근기가 둔한 사람이 허다한 나쁜 지식과 나쁜 느낌들이 없어서 문득 하나의 기틀(一機)이나 하나의 경계(一境)나, 한마디 말(一言)이나 한 개의 구절(一句)에 부딪혀서 깨닫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요즘 사람들 총명하고 영리하여
이리저리 궁리…화두의심 부족해
[강설] 선불교에서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는 반드시 지식이 많거나 머리가 영리하거나 총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것은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오히려 큰 장애가 되기도 한다. 진소경이라는 사람은 스스로 공부에 대한 열정은 있으나 근기가 우둔하여 공부를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대혜선사는 그 점을 오히려 치하하였다. 근성이 너무 영리한 사람은 선지식이 입을 열어 무엇인가를 말을 하려고 하면 알아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도가 아니다. 깨달음도 아니다. 의식의 분별이며 사변의 장난이다. 의식을 초월한 직관에 의한 깨달음이 아니다.
하나의 기틀(一機)이란 선지식이 가만히 있는 것(良久)과 방(棒)과 할(喝)과 불자(拂子)를 세우거나 손가락을 세우는 것 등에서 깨닫는 것이다. 하나의 경계(一境)란 영운(靈雲)스님이 복숭아꽃을 보거나, 장경(長慶)선사가 발을 걷어 올리거나, 또는 세존이 새벽별을 보거나 하는 등에서 깨닫는 경우이다.
[본문] 그와 같은 사람은 곧 달마대사가 나타나서 100가지 신통을 다 사용하더라도 그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도리에도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근성이 영리한 사람은 도리어 영리한 근성에 장애를 입어서 졸지(口卒地)에 곧 쪼개지 못하며 폭지(爆地)에 곧 깨트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총명한 알음아리에서 배워 얻더라도 자기본분의 일에는 전혀 힘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남전(南泉)화상이 말씀하였습니다. “근일에는 선사가 지나치게 많지만 어리석고 둔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강설] 머리가 총명영리하지 않고 오히려 우둔한 사람은 하나의 기틀이나 하나의 경계나, 한마디 말이나 한 개의 구절에 부딪혀서 깨달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둔하기 때문에 머리를 굴리지 않으므로 도에 나아가기가 훨씬 쉽다.
요즘 사람들의 병통은 도에 대한 열정도 신심도 없지만 설사 신심이 다소 있고 열정이 조금은 있다손 치더라도 모두가 총명하고 영리하여 이리 저리 궁리하여 어떤 화두도 모두 다 사량 분별과 알음아리로 풀어내고 있어서 화두가 의심이 되지 않는 점이다.
졸지(口卒地)란 닭이 병아리를 깔 때 알을 품어 충분히 무르익으면 병아리가 안에서 소리를 낸다. 그때 어미닭이 밖에서 쪼아주는 것을 말한다. 흔히 졸탁동시(口卒啄同時)라고 하는 것이다. 화두를 의심하고 의심하여 참다운 의심이 돈발(頓發)한 뒤에 의단(疑團)이 무르익으면 저절로 화두가 타파되는 것을 뜻한다.
폭지(爆地)란 밤을 불에 구울 때 충분히 익으면 폭발하듯이 터지는 것을 말하는데 역시 화두를 드는 공부가 순일하여 동정일여(動靜一如)와 오매일여(寤寐一如)와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관문을 통과하여 의단이 터지는 순간을 뜻한다.
간화선이란 화두를 들다가 종점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의식세계에서 마치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됨으로 간화선 공부를 하는 데는 빠짐없이 자주 표현하는 말이다.
[출처 : 불교신문 2012.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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