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 엔진오일 운반 대작전
오전 일찍 딸아이와 영상 통화를 했다. 건강하게 잘 놀고 있다. 책을 좋아해서 책을 끌어다가 읽어달라고 한단다. 내 새끼 맞네.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나서 통화를 계속할 수가 없다. 이러다간 우리 딸이 나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찔찔 우는 노인네를 누가 좋아하나? 그러나 나는, 내 지금 모든 복잡한 심정을 그저 눈물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너무 그립고, 너무 안타깝다. 너무 늦게 낳아 평생을 딸에게 빚지고 사는 심정이다. 한순간도 안타까운데 지금은 또 너무 멀리 있다.
오전 9시 10분. 옆의 호주 요트에 가서 작은 초콜릿 케익을 전한다. 어제 오일 석션기를 빌려준 마음의 선물이다. Island packet 은 45피트다. 워터메이커, 솔라 판넬, 풍력발전기, 윈드베인까지 완벽하게 갖춘 세계일주용 세일 요트다. 조만간 같이 배에서 식사 하자고 해서, 혹시 16일 한국서 손님 두 분 오는데 같이 와도 되냐고 묻자, Okay 란다. 김기자님 부자와 함께 가게 됐다. 이들은 일주일 더 있을 거라고 한다.
오전 9시 30분. 카트에 빈 오일 제리캔을 넣고, 빌려 쓴 실리콘 건과 파이 하나를 챙겨들고 존의 배로 간다. 가는 도중에 마리나 가드가 멈추란다. 오일 제리캔을 가리키며 뭐냐고 한다. 빈 통인데 오일 좀 얻으러 간다고 하니까, 이건 자기 윗선의 허가를 받을 상황이라고 한다. 아하, 여기서 엔진오일에 엄청 세금을 붙이니까, 문제가 될 수 있겠다 싶어. 이 케익은 문제없냐고 하니, 문제없단다. 그럼 나는 오일 포기한다. 이 케익만 전달하고 올란다. 하고 다시 배로 돌아갔다.
카트를 두고 케익을 들고 가는데 아까 그 가드도 또 세운다. 뭐냐? 물으니 자기가 윗선에 통화해 보니 약간의 오일은 문제없단다. 아 그러냐 고맙다. 그럼 다시 오일 가지러 가도 되냐? 묻으니 괜찮은데 Small support가 필요하단다. 그게 뭐냐고 하니, 500루피(2,128원)란다. 이런, 통과료를 달라는 거네. 알겠다고 하고 다시 돌아가 카트에 오일 제리캔을 실어 간다. 무사 통과다.
존의 배에 가서 이런 말을 하니 다들 웃는다. 존은 해도를 꺼내 이것저것 설명을 해준다. 진짜 세일러다. 그러더니 USB 파일을 컴퓨터에 꽂고 엑셀을 보여준다. 그는 벌써 몇 년째, 배들의 가격, 계류장소, 가까운 공항 등 요트를 구입하기 위한 모든 자료를 검색, 정리하고 있었다. 이 친구 아무래도 조만간 세일 요트 한 대 사지 싶다. 존은 세계일주는 아니고, 유럽과 지중해를 세일링 할 거라고 한다. 나는 제네시스 살 때 브로커였던 미디어 쉽의 파브리치오 연락처를 전달한다. 어찌되었건 존이 멋진 요트를 구매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따 저녁에 존이 제네시스로 온단다. 배의 전자 장비를 좀 설명해 달라고 내가 요청했다. 오늘은 둘이서 식사할까? 한국식당은 내일 가지 뭐.
오전 10시 30분. 다시 돌아오려는데, 누군가 인사한다. 돌아보니 나를 돕다가 핸드폰을 빠뜨려서 어제 내가 핸드폰 살 돈을 준 친구다. 그가 페이로더를 운전하고 있다. 존이 20리터 가득 채워준 제리캔을 페이로더에 실어 내 배까지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다. Okay! 다.
빈 카트를 끌고 천천히 걸어 나오는데, 아까 그 가드가 의아하게 쳐다본다. 빈 카트니 그렇겠지. 다가가서 악수하자고 하고, 500 루피(2,138원) 지폐를 접어 슬쩍 전달한다. 나는 오래전 한국의 교통경찰들에게 이런 식으로 뇌물을 주어 본적 있다. 진짜 수십 년 전 일이다. 뇌물 받던 교통경찰이 내게 알려준 방법을, 수십 년 후 스리랑카에서 능숙하게 써먹는다. 배운 기술은 사라지지 않는구나.
제네시스에 돌아와 보니, 오일 제리캔이 먼저 도착해있다. 배에 잘 실어 놓고 잠시 쉰다.
오후 12시에 에이전트가 왔다. 오후 2시 이후에 온다더니 고무줄 약속이다. 실리콘과 실리콘 건을 샀다. 3,000 루피(12,825원이다.) 뭐 같이 한국 식당에 가서 점심이나 먹을까? 툭툭을 타고 600루피(2,565원)로 네고해서 갔다. 웬걸, 이미 망해서 문 닫았다. 한국에서 일했던 스리랑칸 노동자가 와서 만든 곳인데 얼마안가 망한 거다. 김치도 좀 사려고 기대가 컸는데, 완전 망했다. 그런데 바나나비치 쪽에 또 하나가 있단다. 반신반의 툭툭을 타고 (8km, 1,000루피, 4,275원) 바나나 비치를 샅샅이 뒤졌지만 한국 식당은 없다. 실망도 하고 내친김에 바닷가의 식당에 갔다. 에이전트가 제법 비싸 보이는 곳으로 안내한다.
에이전트가 이전에 같이 저녁 식사했을 때 얼마였냐고 내게 묻는다. 7,500루피 (32,063원) 라니까, 자신이 지금 회사에 들어와서 32년간 일했는데, 월급이 400달러(524,000원) 이란다. 자신은 가족도 있으니, 이런데 와서 식사를 해볼 수가 없다고 한다. 이게 바보인가 순진한 건가 모르겠다. 그래서 나를 앞세워 이런데서 밥을 얻어먹는 게 당연한일인가? 부자나라에서 왔으니 비싼 식사를 사라는 건가?
나는 한국에서 평범한 사람이다. 부자가 제아무리 부자라도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다. 부자가 밥 사면 나도 한 번 산다. 부자가 부담 가는 식사를 제안하면 거절한다. 똑같이 대접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안 먹는 게 맘 편하다. 속 편히 라면 먹는 게 낫지, 뭣 때문에 빚지는 기분으로 한우 먹을까? 그러나 후진국인들은 한국인들은 부자들이니까 돈을 써라 라는 생각인 것 같다. 그래서 후진국이다. 부자는 그냥 부자가 되었나? 왜 부자가 평범한 이들에게 돈을 써야 한다는 생각인가? 그냥 각자 삶을 사는 거다. 만약에 재난이 닥쳤거나, 정말 어려운 이들이 있다면 당연히 도와야 한다. 그러나 나보다 니가 부자니 돈 써! 하는 사람은 절대 부자가 안 된다. 거지근성. 부자들이 딱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한국식당도 망했어. 김치의 꿈도 날아갔어. 영 기분 파의인데, 에이전트의 마음가짐이 완전히 기분 망친다. 아마 나 스스로 기분이 상해서 지나치게 예민한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에이전트에게 서둘러 디젤 200리터를 날라 놓자고 한다. 더위가 엄청나다. 어서 샤워하고 쉬고 싶다. 한국서는 30분이면 될 일이, 여기서는 3시간씩 걸린다. 아침 엔진오일 뇌물사건부터 이래저래 실패의 하루다.
오후 3시 30분. 제네시스로 돌아와 선실에 들어가니 만두 찜기에 들어앉은 것 같다. 창을 훌훌 열고 샤워를 한다. 습기 때문에 선실에 냄새도 나는 것 같다. 짜증이 솟아서 냉수 마시고 속 차린다.
오후 6시 존이 왔다. 같이 선실내의 항해 기기들을 공부한다. 전부 이탈리아어로 되어있어 공부를 좀 많이 해야겠다. 내일은 유튜브로 기기들의 조작법을 공부해야겠다. 내일 저녁에 존과 같이 저녁 식사하기로 하고, 오늘은 서로 편히 쉰다.
이제 디젤유도 다 채웠고, 엔진 정비도 다 했다. 김기자님이 C80과 엔진벨트, 유수분리기 필터를 가지고 오시면 준비는 끝이다. 18일 다시 항해를 떠나려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는 점점 장거리 항해 요트 선장이 되어가나 보다. 모처럼 조용한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