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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校訓)
지성(至誠), 활달(闊達), 강건(剛健), 협동(協同)
지성(至誠) : 묵묵불언 한결 같이 노력하는 하늘의 도리
활달(闊達) : 행동과 사고가 씩씩하여 의로움을 행함
강건(剛健) : 정의와 진리를 위해 희생하는 불굴의 정신
협동(協同) : 스스로를 반성하며 서로 협조하는 태도
교명(校名)의 유래
<景福>이란 校名은 民族의 正宮인 <景福宮>의 "景福"에서 由來한 것으로 그 뜻은 "큰 복", "큰 뜻 " 또는 "幸福"을 의미한다.
The school name “kyungbook(景福)”stems from Lee Dynasty's capital palace “kyungbockgung(景福宮).”It means bliss, great will, and happiness.
방송 통신고등학교 교가
학교연혁
권두언
축사
축사
격려사
스승님의 말씀
회고사
교지 부활을 꿈꾸며
교지 편집 위원장
2010년 2월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 쯤의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황량한 거리엔 스산한 바람이 소리쳐 울고 있었고, 메마른 먼지는 삭막한 거리의 주인처럼 시야를 가로 막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한 줄기 빛이 반세기를 돌아 만신창이가 되어 찾아온 낮선 이방인을 안내하고 있었다. 빛을 따라 들어선 곳엔 별천지처럼 눈부신 태양이 빛나고 온갖 기화요초가 아름답게 피어있는 정원에 나와 비슷한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즐겁게 웃으며 떠들썩하다. 그들의 행복한 것 같은 표정에서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처럼 이질적으로 보여 저들과 어울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에 절망하고 있는 나를 중심으로 그들은 서로 손을 잡아 커다란 원진을 치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원무를 추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들의 원진에 녹아들어 그들과 하나 되어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렇게 나는 다시는 들어 설 수 없을 것 같던 고등학교 교문을 들어섰고 예순다섯이란 생물학적 나이를잊어버린채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경복 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학교 이곳에서 내 인생은 다시 태어났다. 그로부터 3년 벌써 고교 3년생이 되었고 이제 졸업반이라 불린다. 지난 3년을 한결 같이 학교를 다니면서 나와 같이 새로운 삶을 꿈꾸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기쁨 이 환희를 공유해야 될 것 같은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이제 이 학교를 떠나면서 우리들이 이 학교를 다녀간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의식에 쫒기며 그 흔적을 찾아 또 다른 방황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어깨를 짓 눌러온다. 졸업=? 무엇인가 남기자, 우리 학교와 함께 영원한 모교의 그림자를 간직할 수 있는 것 그 무엇인가를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결국 교지를 만들자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렇게 새 교지 “늘 푸른은 태동하였다“늘 푸른”
“Lets' be evergreen! (우리 모두 늙지 말자!)
(우리 모두 늘 푸르자!)”
먼저 나의 이런 뜻을 나와 함께 문학 동아리를 하고 있는 ‘솔’회원들과 상의를 하는 한편 김치영 학생회장에게 의논을 하게 되고 그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을 얻어 홍 원기 교무주임에게 교지를 발행하고 싶다는 우리들의 뜻을 말씀 드렸다. 여러 가지 여건을 놓고 고심하던 교무주임 선생님은 마침내 우리들의 뜻을 받아들여 학교 예산에 반영하겠다. 는 대답을 주셨다.
오래전에 ‘양지’라는 이름의 교지가 잠시 발행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몇 회인가 발행되다가 중단된 ‘양지’의 맥을 이으면서 만학도의 현실에 어울리는 제목을 찾아 많은 고심을 하게 된 것은 교무주임 선생님께서 제목에 관한 전권을 내게주셨기때문이다. 교지의 표지엔 '늘 푸른’ (Lets' be evergreen!’ :우리 모두 늙지 말자!, 우리 모두 늘 푸르자!) 이란 이름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처음 만드는 교지라는 점에서 누구에게 묻고 자문을 받을 수가 없었다.
서울 시내 모 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인 후배에게 SOS를 타전했다.
그에게서 기존 서울시내 교지가 있는 고등학교의 교지를 수집(15개교)하여 검토하고 그중 적당한 것을 모델로 하여 우리들의 교지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교지 ‘양지’의 부활이자 새로운 교지 ‘늘 푸른’ 의 탄생이다.
스승님이 주시는 글
선배님 문단
선택 한다는 것
경복방송고 36회 총학생회장
서울 문화 예술대학교 신 경 하
경복 고등학교가 명문고라는 사실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그러면 경복고를 왜? 명문고라고 할까? 그것은 경복고를 졸업한 선배들이 서울대, 연대, 고대 등 사학의 명문대에 합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CEO 즉 현대, 삼성, LG, 뿐만 아니라 청와대를 비롯한 관계 등, 한마디로 정, 재계, 관계를 망라하여 가히 기라성 같은 인재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교 평준화 정책에 따라 많이 명문고 이미지가 퇴색했지만 전통이라는 관점에서 누가 뭐래도 경복고는 이 나라 근, 현대사를 풍미한 명문고임에는 틀림없다.
나와 후배님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경복방통고를 선택했는지 그 사연은 달라도 결국은 경복을 선택했다는 것으로 명문고를 다닌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듯하다. 여학생 여러분들이 경복고 출신이라면 필시 거짓일 거라고 웃을지도 모른다. 경복고는 남자들만 다니던 남학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복 방통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멀리 제주도에서 속초까지 전국의 방통고에서 경복이 명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필자가 아직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시절에도 전국학예경연대회에 참가해서 경복고 학우들이 각종 상을 휩쓸었던 일들이며, 특히 2011년 모교에서 있었던 전국대회에서의 성적은 말할 것도 없고 전교생이 하나 되어 경향각지에서 참여한 방통인 들을 환영하고 따듯하게 도와주는 등 경복인 들의 성숙한 봉사정신과 문화는 당시의 총학생회장으로서 가슴 뿌듯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명문이라 함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선택한 사람들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고 우리들의 선배님들이 쌓아온 전통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서울대를 최고의 명문대로 인정한다.
왜? 서울대가 국립대학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겠지만 법조계를 비롯한 관계 요직의 핵심에 이 학교 출신자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학과 출신은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하면 학교가 간판이 아니라 학과에 따라서 진로를 선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외국어에 소질이 있다면 외국어 대학이 제격일 테고, 기독교는 기독교 대학, 불교는 동국대학이라야 알아준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제는 학교를 보고 선택할 것이 아니라 학과를 보고 전공과목을 생각해서 선택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다.
우리나라는 고령화 시대로 가고 있다. 고령화 시대에는 실버산업이 유망하고 그에 따른 직종이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정부에서도 노인복지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국가 정책입안에 적극 반영시킬 것이라는 점을 예측할 수 있다. 여기서 후배 여러분들의 대학 선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필자의 경우를 소개하려 한다.
졸업을 앞둔 2011년 어느 날 조회시간에 담임선생님께서 “대학은 무조건 진학해야 한다.” 고 강조하셨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만학을 위해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학교생활에 충실하겠다는 생각뿐 이였지 진학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은 내 나이가 이미 칠순을 바라보고 있는 터에 대학을 졸업하면 무엇을 하나?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졸업한 선배들이 “대학진학을 포기한다면 방통고를 다니며 만학의 향학열을 불태운 의미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었다. 지금 나 또한 같은 말로 여러분의 선배로서 묻고 싶은 말이다. 대학을 가기로 결심을 했으면 이젠 선택이 남았는데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각 대학으로 진학한 선배들은 자기 학교로 오라고 손짓하고, 대학입학 설명회를
할 때면 모두 가고 싶은 대학이거나 자신의 여건과 맞지 않는다, 는 핸디캡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만학은 생업에 종사하면서 공부를 하는 이중에 부담도 작용한다. 여하튼 진학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디지털 사이버대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처럼 한 달에 한번 오프라인 수업을 하며 사이버 상으로 공부하는 대학이다. 근년에 들어서 직장생활과 병행하여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후죽순처럼 많이 개교했다. 또 그 중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어차피 삶이 선택의 연속이라면 이번에야 말로 바른 선택을 해서 멀리 돌아온 내 인생에 황혼을 멋지게 장식해 보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에 사이버 대학에 대한 설명을 하시는 조 경훈 박사의 열정적인 설명을 듣게 되면서 마음을 정하기 위해 조 박사님(행정학 박사)이 계시는 사이버 대학을 3차에 걸쳐 방문하고 상담을 통해 궁금증을 충분하게 설명들은 후 경복고를 함께 졸업한 동기들과 대학생이 되었다. 이제 대학생의 입장에서 오프라인 수업, 신입생 MT, 각종 행사가 고등학교 수업의 연장처럼 느껴졌지만 생소한 것은 역시 우린 새내기 대학생이다. 경복고에서의 3년 동안에 쌓아온 노하우라고 할까? 하는 학생회 활동, 연합회 활동이라든가 카페활동, 각 동아리 행사와 활동들이 지금의 대학생활에 큰 자양분이 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더구나 함께 입학한 동기들이 많으니 서로 의지가 되고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또 다른 의미로 모교의 정을 느끼기도 하면서 대학생활에 즐거움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동기생들이나 선배들이 좀 많은 대학을 선택하기를 권한다.
대학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장래를 위해 목숨 걸듯하지만
만학도의 대학생활은 즐거워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대학을 잘못 선택하면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면 쉽게 싫증을 내게 된다.
또 잘못된 선택은 강의가 재미없다는 것이다. 재미로 공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나이에 하는 공부가 재미조차 없다면 할 맛이 없게 된다. 재미있는 대학생활을 하기 위해서라도 학교 선택은 중요하다. 가능하다면 필자는 사랑하는 우리 후배님들이 우리학교로 진학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내가 전공하는 학과는 앞에서 언급한 실버문화 경영학이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미래에 가장 촉망받는 과목을 공부하는 것으로 필자가 아는 한 국내최초의 학과 이다. 따라서 서울대 법대가 법대 중 최고라면 실버문화 경영학에 관한 우리 학교가 최고라고 감히 권하고 싶다. 서울 문화 예술대학교 실버문화 경영학과 후배 여러분이 많이 입학해 줬으면 참 좋겠다.
*교지 출판을 축하 합니다.*
학생문단(韻文= 詩)
時間은 없고
晩 書 홍윤기
나, 예 오기위해
무저(無底)의 터널을
여리디. 여린 몸으로
육천칠백 스무 시간을
숨 가쁘게 헤엄쳐 왔다.
나, 가야 한다기에
암흑속 미로(迷路)를
홀로 두려움에 떨며
북두에 길 물어 한 길로
숨 가쁘게 항해 해 왔다.
무얼 하겠다고
망망대해(大海) 노도에
몸 던져 예 왔는가?
왔으면 할 일 있으련만
한 일이 전무(全無) 이니
한 낮의 미몽(迷夢)속에
천하를 주유 하며
제 길 찾지 못하고
다녀간 흔적도 없는데
돌아 갈 날 코앞 이다.
이제 겨우 길 찾아
모자란 배움 채우고
단 하루를 살아도
제몫을 하련만은
시간 없다 서두르며
재촉하는 하늘이 미워라
이 땅에 보냈으면
잘 일러 크게 한번 쓰던지
시나리 떡잎이라 싹수가 없으면
모질게 잘라 버리던지
이제와 길 밝히면 아쉬워 어찌 가나.
여 름
3학년1반 박 두 숙
오월 아카시아 향기 머금고
감자밭 나들이 왔어요.
땡볕 친구삼아 목마름 참아내며
큰놈 작은놈 한 몸 되어
주렁주렁 얼굴 내밀어요.
누가 누가 예쁜가? 내기하듯
그 자리 어느 사이 모판 던져지더니
누가 키가 클까? 도토리 키 재듯
상하 좌우 나란 나란히 줄서
여름바람 친구해요
너도 나도 하나 되어
외로움 참아내며
알곡 쭉정 한 몸 되어
함께 가자 위로하네요.
비바람 천둥소리 무섭다 놀랠소냐
자연의 이치가 까닭 없이
오는 법 없으리니
채워지고 덜어내고
비워지는 우리네 삶이려니
인고의 세월 거쳐 알곡 되니
그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삶의 무게 열매 맺혀
환한 웃음 보답하네.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운문부분 금상 작품)
비
3학년 1반 김 유 자
우리 언니 가시는 길 보슬 보슬 비 내리네
슬프다 하며 주룩주룩 비 내리네
워낭소리 들으며 따라가는 꽃상여
소리 없이 눈물 흐르는 소낙비
우리언니 보고 싶어 어쩌나
우리언니 불쌍해서 어쩌나
뻐꾸기도 밤새우네. 외롭다하네
비야 비야 우리 언니 옷 젖을라.
비야 비야 우리언니 추울라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운문부분 은상 작품)
길
3학년 3반 양 강 순
너 댓살 무렵
옆집 언니 따라 나섰다.
길 일었다
혼자되어 되짚어 오는 동안
무서움에 떨었다
거리를 헤매다
해는 기울어져 가고
무심히 버려진 하잘것없는 것을 보며
내 모습인 냥 울었다.
그 때의 기억이
이리도 오래 남았는지
이제와 돌아보니
희미한 수채화로 미소 짓네.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동상 작품)
하늘 비
1학년 5반 현 동 훈
넓은 하늘에
파란 하늘 그림 그려볼까
떨어질듯 낮아진 구름
하늘 안 구름위에는
비구름 밭인가
가려진 하늘 안 하늘 비
볼 수가 없구나.
햇빛은 구름사이로 흘러가
검은 구름 이끌어
시름에 잠긴
농부의 맺힌 눈물을 아는가.
타들어가는 목마름 외침 소리에
숨죽여 찾아준 비구름은 비되어
방울방울 하늘 비 내려주네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입상작)
비
3학년5반 백왕선
비는 나의 친구
봄 비
비온 뒤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 녹으면
연두색의 아기 새싹들이 기지개를 편다.
여름 비
비온 뒤 짙은 녹색들의 잎들이
풍성함을 자랑하며 춤을 춘다.
가을 비
비온 뒤 들판에는 춤추는 곡식들과
주름진 농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있다.
겨울 비
비온 뒤 대지를 적신다. 세상이 분주하다.
그리고 따스한 온기가 세상에 돈다.
무지개는 말한다.
비 개인 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저 멀리 산꼭대기 위 하늘에 아름다운
자태로 날개를 펴야지
비야 언제나 네가 있었기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는
아름다운 자연이 있었단다.
비는 나의 친구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입상작)
여름 비
3학년2반 이 정 임
무자비한 태양
숨을 곳이 없다
목마르다
목마르다
오랜 기다림에 대지는 불타오른다.
목마른 대지가 갈구하는 것은
한 방울의 물
쏟아지는 비
비는 두 얼굴의 야누스
때로는 분노의 여신으로 대지를 꾸짖고
때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손길이 되어
푸른 생명들을 어루만지고 일으켜 세운다.
비는 상처내고 또한 치유한다.
또닥또닥
리듬을 타고 나른한 잠과 함께 오는 비
몸을 맡기면 여유가 선율처럼 살아난다.
비의 선물이다
기다림 끝의 비는 선물처럼 달콤하다.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입상작)
나무
3학년1반 김 용 출
나무
언제나 내가 그리워하는
푸른 색깔의 너를 좋아한다.
작고 아름답지만 미소 지며
바람에 춤을 추는 모습이 아름답구나.
모두에게 푸른 꿈을 나누워 주는
너의 모습은 언제나 싱그럽다.
사계절 푸른 그 아름다움에
어느새 너를 그리워하게 한다.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입상작)
비
3학년1반 김 원 희
메마른 하늘 향해 기도한다.
갈증이 태양 따라 목말라 한다.
파란 눈 노랑미소 고운 맘 전해줄까
하얀 구름 고운구름 눈 맞춰 따라 웃고
먹구름 짜증내면 이내 맘 식혀줄까
사랑미소 엷은 미소 힘겹게 웃어 본다.
네가 준 한 줄기사랑 수평선 파도 춤추고
네가 준 한 줄기사랑 푸른 숲 산새도 웃는다.
너의 사랑 그리운 날 내 눈물 모아 가슴에 담고
내 사랑 보고플 땐 고운 내볼 살며시 적셔주렴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입상작)
학생문단(散文=隨筆)
인 연
晩 書 홍윤기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여러 가지 형태의 다양한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는 게 삶의 본질이라고 한다. 인간이 태어나서 제일먼저 맺어지는 인연이 부모자식간의 인연이라면, 또 그 다음엔 형제자매 오누이의 인연으로 우리네 인연맺음은 평생을 계속하게 된다. 환생을 믿는 불가에선 전생에 삼천 번의 만남을 해야 이승에서 옷깃이라도 스친다고 해서 인연의 소중함을 깨우쳐주고 있거니와, 그 인연으로 해서 웃고 울며 살아가는 것이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인연 중엔 아주 잘 만난 인연으로 평생의 정을 쌓아가며 아름답게 살아가는 소중한 인연도 있지만 세상의 모든 인연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 있는 것도 아니어서, 되돌리고 싶은 그런 인연을 악연이라 부르기도 한다. 요즈음은 만나지 않아서 생면부지라고해도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연을 맺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컴퓨터라는 문명의 이기가 신의 영역인 인연을 맺는 일에도 이미 깊숙하게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맺은 인연은 전생에 어떤 관계였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떤 이는 부부간의 인연을 “전생에 원수가 만나서 이승에 부부가 되어,
평생 다투며 살아간다.” 고 웃으게 소리도 하지만, 때로는 그 말이 그럴듯하게 들릴 때도 없지 않다. 좋은 인연으로 시작해서 악연으로 끝나버리는 요즘의 이혼 세태를 꼬집는 말이겠지만, 그보다 더 아쉬운 것은 인연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배신하고 속이며, 작은 인연을 빙자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요즘의 인간관계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민족에게 구정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지난한해 어렵고 힘든 일들을 모두 털어버리고 새로운 희망으로 새해를 맞이한다는 세속적인 의미 외에도 그동안 맺어온 인연들을 찾아 덕담을 나누고 인사를 드리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따스한 정으로 녹아 있는 것이다. 많이 가진 자의 구정이나, 그렇지 못한 서민들의 구정이나 그 즐거움이나 행복감이 다르지 않다. 정성으로 작은 마음의 선물들을 주고, 받으며 또 새로운 출발을 하고 그 좋은 인연을
지속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고 평화로운 것도 그 마음속에 순수한 사랑과 정이 충만하기 때문일 터이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 되었지만, 정치인들과 경제인들 사이에 오갔던 소위 떡값에 관한 논란은 아름다운 명절기분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인연이라는 명분을 빙자하여 피차 패가망신을 자초한, 잘못된 만남이었으니 악연이라 불러 마땅하다. 요즘은 그나마 드러나지 않고 있어 다행한 일인지 모르지만, 웬 떡값이 그리도 비싼 것인지 가난한 보통사람들을 “억” 하고 놀라게 했었다. 그 날 이후 우리들에게 기천만원 정도는 돈도 아니라는 자조의 한숨을 짓게 했고, 돈의 가치가 급전직하하여 보통 억대가 아니면 말도 하지 말라고 한다. 단돈 몇 만원이 없어 끼니를 굶고 사흘 굶은 자가 남의 담을 넘게 하는 세상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게 되어 버렸으니, 소위 지도층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되새겨 봄직하다.
어린아이의 세뱃돈도 배춧잎이라고 불리는 만 원권에서 이제는 흰색의 수표여야 하니 주머니가 가벼운 할아버지들이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손자 녀석 재롱을 볼라치면 어김없이 배춧잎이 동원되어야 한다.
혈연으로 맺어진 인연조차 돈이 매개체가 되는 세상이다. 오늘도 결식아동이라 불리는 어린아이들이 명절이라 새 옷을 갈아입고 부모와 함께 나들이 하는 다른 아이들을 부러움과 질시에 눈으로 바라보며 그 가슴에 응어리진
아픔을 달래고 있다는 것을 한번쯤 돌아보는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넓은 의미에서 그 아이들도 우리들과 함께 이 나라의 국민이란 인연을 맺은 우리들의 아이이기 때문이다. 2002년 월드컵으로 대한민국이 온통 붉은 물결로 소용돌이 칠 때, 그 아이들도 붉은 악마가 되어 환희의 함성을 지르던 우리들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이해관계에 얽힌 인연이라면, 참된 아름다운 인연이라고 할 수 없다.
기왕에 맺은 인연이라면 옷깃을 스쳐서 맺었든 컴퓨터를 통해 만났던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소중하게 가꿔가느냐가 중요하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인연의 바탕에는 진실하고, 따스한 정이 깔려 있었으면 좋겠다.
8월의 어느 동행(同行)
3학년3반 이 수 경
오늘은 마른장마를 장난치듯 적시고 가는 비가내린 뒷날이라 제법 시원하다. 그러나 그 날은 그렇지 않았다. 귀를 간질일 정도의 바람마저 없이 그저 태양은 대지를 내려쬐어 땀이 이글거렸다. 스쳐가는 길 가의 사람들의 표정도 일그러져 보였다. 저 마다 응달을 찾아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잠시라도 햇볕아래 서면 머리를 홀라당 벗길 기세였다. 10년도 훨씬 지난 어느 여름날 휴가 가던 날이다. 난 혼자 고속터미널에 서 있었다. 몇 년이나 흘렀는지 이젠 기억마저 희석이 되어가고 있을 즈음 이제 비로소 엄마를 보러 가는 길이다. 홀로 이 생각 저 생각 상념에 빠져도 보고 그도 지루하면 주전부리도 하고 있는데 내 옆으로 젊은 아낙이 거동이 몹시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며느리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할머니를 자리에 모시자 난 의자를 비켜 앉으며 자리를 만들어 드렸다. “고맙네.” 할머니는 불편함에도 내게 고마움을 표하신다. 많이 불편하신 할머니가 안타까웠어도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는데 “어디까지 가시 나요?” 하고 젊은 아낙이 묻는다. 내가 장흥까지 가노라고 말하자 “그러면 저 부탁 좀 해도 될까요?” 하고 조심스럽게 다시 묻는다. “우리 어머님이신데 장흥 터미널 까지만 동행해 주셨으면,,,,,,.” 한다. “네 그렇게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대답 하면서 할머니를 살피니 한 쪽 손과 다리가 마비가 있으신 듯 몹시 힘겨워 보인다.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여행 하시는 군요?” 하고 물었다. 젊은 아낙의 말인 즉 “시 어른이신데 저희랑 지내시다가 시골로 내려가시겠다고 고집하셔서 할 수 없이 모시고는 나왔는데 걱정이 된다며, 아이가 어려서 자신이 집을 비울 수 없게 되어 혼자 내려 가셔야 하니 너무 속상하다고 한다. 내가 흔쾌히 걱정 말라고 했더니 몇 번이고 고맙다며 음료를 건넨다.
버스는 쉬지 않고 또닥이며 가는 시계처럼 잘도 달린다. 피곤한 듯 눈을 감고 계시는 할머니의 옆모습을 보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몇 년인지도 헤아리지 못할 세월이 흘렀어도 엄마를 찾지 않은 나였기에, 이제 무슨 바람이 불어 찾아 가는지 가슴이 먹먹하다. 가난, 지독하게 가난 했다. 정말 그랬다. 제법 인구밀도가 높은 동네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우리 집은 유난히 궁핍했다. 허구한 날 술과 동무하시는 아버지와 위 아래로 7남매인 우리를 엄마는 혼자 그저 혼자 거두셨다.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취하시는 날은 항상 집안은 언성이 높아지고 험악했다. 두 분은 거의 싸우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다투셨다. 그 시절 시골 사정이란 것이 거의 그랬겠지만 우리 집은 더 했다. 그러니 당시의 나의 심리는 우울했고 자신감도 잃어서 친구들 사이에도 위축된 생활을 해야 했다. 주말이면 들로 산으로 어른아이로 쉼 없이 일을 해야만 했으니 혹시 우리 부모가 양부모는 아닐까하는 생각도 많이 해 봤다. 집이 싫었고 원망했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학을 포기하고 상경을 하면서 집과는 멀어진 채 긴 시간을 흘려보냈다.
흘려보낸 세월만큼 주름이 졌을 엄마의 얼굴과 옆에 앉아 졸고계시는 할머니와 비교해 본다. 뭉클 한 무엇인가가 가슴에서 치밀어온다. 애써 감춰두었던 감정이 올라온다. 한 동안 정지해 버렸던 내 감정이 사그라지지 않고 따듯하게 남아 있었나 보다.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 졌다. 쉬지 않고 잘도 달리는 버스마저 느려 보이고 이제 반쯤 왔을 내 고향길이 너무 많이 남은 듯하다. 버스는 한참이나 더 가야 하는데 내 마음은 이미 고향에 닿아있었다. 내가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버스는 휴게소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할머니 휴게소에요. 내리 실 수 있으세요?” 할머니에게 물었다. “아녀 난 그냥 있을 테니 색시나 화장실 댕겨와” 하신다. 할머니를 남겨두고 내려서 주섬주섬 빵과 음료를 사서 서둘러 돌아왔다.
고향이 가까워지니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모두 고향인 듯 정겹다. 내가 잊고 살았던 감정들이 그 여행 그 동행으로 하나 씩 되 살아 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나 또한 엄마처럼 현실에 굴하지 않고 그렇게 부지런히 살고 있다.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했는데,,,,,,.
지금 엄마는 살아온 세월만큼 쇠약해 지셔서 집안에서만 생활 하신다. 울 엄마 이제 때로는 아이처럼 귀여움을 보이기도 하는 울 엄마의 얼굴에서 문득 문득 그 때의 이름 모르는 할머니가 떠오른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자식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한사코 말리는 자식들을 뿌리치고 귀향한다던 할머니를 고집부리는 것으로만 이해했는데 이제 생각 하면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이 느껴지기도 한다. 인제는 인생의 표창장이 더 많아지신 얼굴이지만 그 할머니나 울 엄마가 남은여생이 더 많이 편해졌으면 하고 바란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이 있다. 놓인 환경에 순응하지 못하고 원망만 했던 그 시간 들 허지만
그 어렵던 시간이 내 삶의 자양분이 되어 더 씩씩하게 홀로 설 수 있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지탱해 주는 가족이 살아가는 근간이라는 것도 내가 이 나이가 되어서 깨닫게 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엄~~~~~~~~~~~마 나도 엄마처럼 살아갑니다.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산문부분 금상작품)
진한 그리움
1학년5반 이 석 분
나는 요즈음 투잡을 한다.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두 가지 일을 한다. 낮에는 일당으로 밤에는 월급제로 한다. 매일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구름은 잔뜩 몰려다니는데 단비는 오지 않아 애타는 농부들의 간장을 태우더니 어제는 인심을 쓰듯 단비를 내려준다. 강원도에서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는데 가뭄이 너무 심해 걱정은 걱정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오늘 배정된 집을 찾아가 가사를 돕는 도우미를 한다. 가사 도우미가 내 직업이다. “여보세요 ㅇㅇㅇ APT 죠?” 라고 상냥하게
전화로 집을 확인하고 찾아가 열심히 일을 시작한다. 매일 아침마다 터질 것 같은 지하철에 시달리다 보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치기도 하지만 종일 땀 흘리고 일을 하다보면 옷은 흥건하게 젖고 금방 배고픔이 다가온다. 아침에 예쁘게 하고 나온 화장은 온데간데없다. 6시까지 일을 마치고 또 한집 월급제 집을 찾아간다. 다행이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다. 40평 빌라인데 4식구 매우 뚱뚱하고 못생긴 두 아들은 육식에다가 짠 반찬을 좋아한다. 이집 식구들의 특이한 식성 때문에 반찬 간을 볼 때마다 내 혀에게 못할 짓을 해야만 한다. 쳐진 어깨로 어스름한 골목길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면서 하늘을 본다. 반달이 나에게 “힘들지? 수고 했어” 하고 말을 건다. 남편의 목소리가 반달을 통해 들렸나보다. 지난해 9월3일 새벽 1시30분쯤에 중환자실에서 나를 남겨두고 아프게 세상을 떠난 남편의 얼굴이 반달 되어 빙그레 웃는 것 같다. 바람 좀 쏘이고 오겠다며 남편은 놀이터로 나갔었다. 거기서 남편은 취객에게 맞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당신이 왔던 곳으로 떠나고 말았고, 남편을 그 지경으로 만든 사람은 상해치사란 죄목으로 4년형을 받고 지금 교도소에서 벌을 받고 있지만 난 그 후유증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심한 스트레스가 가져온 불면증이다. 스트레스는 또 내게 당뇨와 고혈압 까지 덤으로 주어서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텅 빈 집에 작은 아이와 애완견 시추 뽀롱이와 함께 나를 남기고 돌아오지 못할 머나먼 곳으로 남편은 떠났지만 난 아직도 저녁이면 버릇처럼 골목 어귀를 쳐다본다. 훤칠한 키에 챙모자를 눌러 쓴 그림자가 보이면 깜짝깜짝 놀라는 버릇이 생긴 것도 그를 보내고 나서의 일이다.
이른 봄 어느 날 용마산 등산을 하고 돌아오는 골목에서 경복방통고 현수막을 보게 되었다.
절망의 늪에서 나를 향해 던져진 동앗줄을 받은 것 같은 강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저거야 저기라면 불면증을 없앨 수 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망설이지 않았다. 즉시 전화를 하던 봄날의 그 시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북악산을 품은 듯 자리 잡은 교정은 나를 매료시키고 흥분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불면증은 사라졌다. 아니 오히려 공부 좀 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졸음이 나를 찾아온다. 차츰 주위를 돌아보는 여유도 생겼는데 이를테면 가사 도우미를 하면서 느끼는 일이지만 물을 너무 많이 쓰는 것이 늘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수도를 잠그며 물의 소중함을 몸으로 느낀다.
가끔 밀려오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대신 해 주리라고 믿는다. 주말엔 가끔 애완견 뽀롱이에게“뽀롱아 우리 아빠 보러 갈까?” 하면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갸웃 등하는 모습에 강아지를 차에 태우고 광릉수목원을 가로질러 남편의 산소를 찾는다. 하늘을 찌를 듯 우람한 노송이 그늘을 만들어준 나무터널을 달리며 경치를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조용한 곳에 자리한 묘소에는 코스모스와 해바라기를 심었다. “뽀롱아 아빠 뽀롱이 왔어요. 당신 잘 있죠?” 묻지만 언제나 대답이 없다. 묘소를 지키는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 앉아 “다음에 또 오고 얼른 가라”고 손을 흔드는 남편의 모습을 본다. 가을이 오면 일주기가 된다. 코스모스가 꽃을 피우고 바람이 씨를 뿌려 다음해에는 탐스러운 담을 만들면 저녁 무렵 동네골목어귀의 그림자도, 하늘에 떠 있는 반달도 보이지 않게 되겠지. 30년 전에 다녔던 희미해진 수업처럼 길게 써 내려간 일기장은 점점 짧아지리라 생각 한다. 아이들의 아빠와의 추억은 눈물이 되었고 남편과의 추억도 한이 되어버린 지금 나는 투잡을하며 열심히 살아가며 슬픔을 달랜다. 경복인 으로 자부심을 갖고 하는 데까지의 노력을 할 것이다. 몸과 마음이 안정되면서 당뇨와 혈압도 잘 조절되고 있다. “넌 할 수 있어 잘 할 거야 이제 시작이니까” 스스로에게 힘을 주며 진한 그리움은 가슴에 담고 난 오늘도 삶을 위해 또 뛴다.
(2012년 교내 학예대회 산문부분 은상 작품)
어머님의 희생
2학년6반 권 세 호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시골 장터 옆에 있었다. 5일장이 설 때면 왁작지껄 왼 종일 부산하다. 장터는 이웃 마을 사람들이 가져온 누구네 소가 어떻고 또는 돼지가 새끼를 낳고 아무개 아들이 장가를 가고, 등등 이런 저런 소식이 실시간으로 오가는 곳이기도 하다. 온갖 곡식과 채소가 가꾼 이와 함께 장터로 몰려나오니 시장 통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 시절 나의 어머님은 6.25 직후여서 어려운 살림살이 가운데서도 우리 7남매를 남과같이 키우시려고 무척이나 말없이 고초를 겪으시며 눈물로 보내셨다. 아버지께서는 당시 농림전수학교를 졸업하여 마을에서는 꽤 수준 높은 인텔리였다. 전에는 몰랐는데 면서기를 하신 경력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를 권 주사라고 불렀다. 일본에서 오는 편지를 읽어 준다거나 대필해 주시던 모습을 조금 커 가면서 알게 되었고,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어머니가 한쪽 팔이 불구여서 더욱 힘든 삶을 살아오시면서 7남매의 옷을 깨끗이 해 입히기 위해 남 몰래 냇가에서 빨래하던 모습이며, 책 보따리 메고 어머니의 빨래 통을 들어 드리면 괜스레 미안해하시던 모습들은 지금도 내 가슴에 잔영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는 관절염으로 오랜 투병을 하시게 되어 가산은 없어지고 친구들이 잘 되는 것을 보시며 술로 세월을 보내시고 계셨지만 가정을 지키시려고 안간힘을 쓰셨던 것 같다. 지금의 우리 남매가 있다는 것은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두 분이 가정을 지켜준 덕분이라 감사하며 살고 있다.
먹을 것이 없어 술도가에서 얻어온 술 찌게 미에 사카린을 넣어 먹고 학교에 간 날 쪼그만 놈이 아침부터 술이냐고 선생님으로부터 호되게 혼나고 의자를 머리에 이고 복도에서 벌 받은 일 때문에 전교생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고, 어머니가 장애인이여서 ‘병신 아들“이라는 놀림도 받았다. 중학교 다니던 때는 도시락 없이 학교간 자식이 안타까워 주전자에 보릿가루로 만든 보리개떡을 가져다 주셨는데 친구들이 별미라며 바꿔 먹자고 쟁탈전을 벌리기도 했었다. 그날 난 친구들의 밥을 먹으며 창피하고 부끄러워 홍당무가 되기도 했지만, 자칫 삐뚤어 질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어도 마음을 다잡게 한 것도 어머니께서 성치 않은 몸으로 아들 배고플 것을 염려하시어 학교에 찾아와서도 아들과 말 한마디 못 나누시고 교무실을 통해 도시락을 전해주시고 아들이 잇는 교실 쪽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돌아가시던 그 아련한 모습을 난 잊을 수가 없다. 그 힘들었던 시기에 난 나 자신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 ” 난 절대로 술을 먹지 않으리라“ 아버지의 술주정도 주정이지만, 술 찌개 미 사건으로 벌 받던 그 날 아침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약속은 지금의 내 아내에게도 지켜지고 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와 버스를 탔는데 내 옆에 앉지 않으시고 저 만치 떨어져 앉으신다. 아들이 창피해 할까 자신을 버리신 어머니는 밤, 낮으로 정화수 떠 놓고 자식들을 위해 지극 정성으로 빌고 또 빌어주신 덕분에 우리 7남매는 아무 탈 없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이 시대를 살고 있다. 운동회나 수학여행, 소풍을 손꼽아 기다리는 내 친구들을 보며 부러워하는 내게 어머니는 두 손을 꼬옥 잡아 주시며 “이담에 네 자식들에겐 꼭 해주라”던 내 어머니의 말씀이 지금도 천둥처럼 뚜렷하게 들린다. 못해주신 그분의 피멍드신 소리에 경주 불국사 수학여행,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그 때 못가 본 수학여행을 지금 이 나이에 방통고에서 가게 된 순간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이 가슴속에서 펑 터진 것 같았다. 내 아이들에게는 초등학교 졸업 기념 여행을 유럽으로 보내주면서 어머님이 내게 일러 주신 한번 맺은 인연은 소중하게 하라던 말씀을 실천하고 살려고 노력 한다 지금의 내 아내 어머님의 말씀으로 너무나 사랑스럽다. 두 딸과 아들도 사랑스럽고 소중한 내 가족이다. 내 어머니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가족이다. 늘 취해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을 대신해서 불편한 몸으로 당신의 7남매를 키워 내신 어머님의 희생을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으랴 어머니! 어머니의 피 눈물의 세월을 오직 가정을 지켜주신 덕분에 지금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어머님의 희생을 돌아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지금 내가 흘리는 눈물은 기쁨의 눈물입니다. 지금 동생 집에서 투병하고 계시는 어머니, 부디 완쾌하셔서 7남매 사는 모습, 또 이 못난 큰 아들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가는 모습 보시고 어머니의 한 풀으셔야지요. 어머니의 가이없는 사랑과 희생 감사드립니다. 어머니 많이, 많이 사랑합니다. 어머니 부디 건강하세요.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산문부분 동상 작품)
행복한 정원
1학년4반 오 미 애
내 어린 시절 기억의 편린 한 조각 초등학교 졸업식 가난한 의복 주위로 즐거움이 꽃잎처럼 둥둥 떠다니고 동그란 비눗방울이 친구들의 눈과 웃음 속으로 사라지던,,,,,,. 그 행복 했던 시절에 졸업식을 끝으로 친구들은 하나, 둘씩 제각기 떠나던 2월 그 처연하고 서럽던 계절 나는 버스에서 잘못 내린 승객처럼 허무한마음으로 적막강산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과 무서움으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고 싶었다. 이 세상 아무도 날 돌아보지 않는데 내가 나를 내려다보니 차라리 아무에게도 나의 초라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차라리 안개처럼 저 시린 햇볕 속으로 증발하기를 바랐다.
어린 시절 진학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은 아픔이 되어 살아오는 동안 세상을 외면하고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내 마음을 덕지덕지 할퀴어 생채기를 덧대었다. 게딱지 같이 좁은 골목길 처마 끝에도 눈부시게 청명한 하늘이 펼쳐져 있음을 그때는 알 수 없었다. 왜? 몰랐을까?
나는 잘하는 것이 별로 없다. 한 가정의 아내로, 주부로도, 그리고 엄마로도,,,,,,. 고모도 되고, 이모가 되기도 했지만 그 무엇도 잘 하지 못했다. 기본적인 정리정돈도, 말도 잘 하지 못했으며 말투가 예쁘지도 않다. 쉽게 포기하고 끈기도 없다. 어느 것 하나 자랑할게 없다.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화분하나도 제대로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지난 봄 시장에 나갔다가 유난하게 예쁜 꽃들이 눈에 들어와서 화분 두어 개 사다가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놓아두고 잘 자라주길 바랐는데 어느 새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둔한 나는 할 수 없이 화분을 치워 버리고 말았다.
우리 집의 유일한 꽃나무는 나의 딸이다. 다행이 뭘 하던 재미없어 하고 슬픈 마음의 엄마 옆에서 세상을 향해 환 하게 웃는 예쁜 꽃나무로 자라주었다. 세상살이에 서툰 엄마를 보며 사는 깨달음을 배운 걸까? 웃는 모습이 정말 예쁜 딸은 튼실한 나무들로 울타리를 만들어 초목이 무성하고 아늑한
아름다운 정원에 뿌리를 내리는 중이다. 뿌리가 잘 내리도록 옆의 나무가 보살필 것을 생각하니 감사하고 행복하다. 세상의 모든 어버이들의 소망대로 자연에 순화하며 동화되어 아름다운 꽃이 피고 열매맺는 그들만의 정원을 가꿔가겠지요.
얼마 전 그 빈 공간에 화분 두어 개가 자리를 잡았다. 조금 외로웠던 나는 그다지 고급스럽거나 예쁜 꽃이 피는 화분은 아니지만 열심히 물주고 통풍이 잘 되도록 하면서 얘기도 나누고 노래도 불러준다. 무엇인지 모를 희미한 그 무엇이 분명하게 드러날 때 필요한 시간 나와 함께한 시간을 조금씩 늘려가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속삭여 준다. 기특하다고, 예쁘다고, 잘하고 있다고,,,,,,. 희망을 조금씩 키우고 있다. 빈 정원의 초록의 무성함을,,,,,,.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동상 작품)
이쁘고 소중한 내~남편
3학년2반 박 연 숙
일요일 이른 아침 알람소리가 들리자 우리 부부는 바빠지기 시작한다.
남편이 더 서둔다. 어~이 늦을라. 허둥지둥 들뜬 마음으로 바쁘다. 입가엔 웃음가득이다. “대용아~ 서둘러라 늦을라. 책은? 필통은? 노트는? 안경 꼭 챙겨라” 아들을 채근한다. 한 달에 두 번 나를 학교까지 태워다주고, 수업이
끝나면 집에까지 데려다준다. 우리는 결혼 후 한 장소에서 23년째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결혼식도, 음식점도 누구의 도움 없이 우리 둘 만의 힘으로 시작했다. 그러던 2010년2월 지금은 우리학교 선배님이지만 남편친구분의 권유를 받고 남편은 1학년3반, 나는 1학년1반 학생으로 경복방송통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우리는 부부고등학생이다. 입학식 날 교장선생님의 환영사를 아직도 기억한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인생의 축복받을 날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면 그날이 바로 오늘인가 합니다.” 그랬다. 분명축복 받은 것이다.
입학하기 한해 전 2009년 8월 남편은 병원에서 큰 치료를 받게 되었고 무척이나 즐기던 술을 끊어야 했다. 물론 일선에서도 손을 떼고 오직 운동과 휴식이 필요했다. 남편은 뿌리 들린 나무처럼 시들어 흔들리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경복 방송통신고등학교의 입학은 우리 부부에게
축복을 함께 가져다주었다. 남편은 일 대신 책가방을 들었고 술 친구대신 선생님과 따듯한 정을 나누어가는 보석 같은 학우님들을 만나게 되었다.
소중하고 이쁜 내 남편은 이제 내가 당신을 업고가야 하는데 여기서 당신을 울게 할 수는 없다면서 일선에서 빠져나가 술을 끊고 산을 오르기 시작 했다. 동행도 없이 오직 당신 홀로 동네 뒷산인 도봉산 대동문부터 지리산 천왕봉으로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며 산사나이가 되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가게에서 일하는데 전화가 왔다. “여보 나야!” 하고는 한동안 말이 없다.
“나 대청봉에 올라왔어 일곱 시간 걸렸어 해 냈어” 라며 무엇이 미안한 건지 미안하단다. 목이메인건지, 숨이 턱에찬건지 목소리가 잦아든다. 어쩌면 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00kg이 넘는 체중을 끌어않고 올라가느라 얼마나
숨이 차고 힘들었을까? 평지를 조금만 빨리 걸어도 숨소리가 거칠어지던
사람인데, 외롭고 두렵기도 했을 텐데 가슴이 뻐근하고 목이 아프다. 콧등이 찡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텐데 고작 수고했다고, 힘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쉬었다가 천천히 올라와요” 하고 말하니
학교 가야지 하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이때가 우리가 입학한지 두어 달 1학년 4월 봄의 일이다. 그 후 2년 힘들고 힘든 싸움을 남편은 잘도 이겨냈다. 다시 살아났다. 내 소중하고 이쁜 남편은 나를 위해 해냈다. 아프기 전보다 더 건강해졌다. 고맙고 한없이 이쁘고 크게 보인다. 입학해서 처음엔 기운 없다던 남편은 1학년 말 부터는 학교생활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마치 숨이 차서 친구들과 축구도 못하던 아들이 이젠 축구부 주장이된듯 하다.
지금 나의 신에게 감사하며 산다. 기왕에 받을 벌이라면 신은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힘까지 주셨으니 감사하다고,,,,,,.
그동안 내가 받아들고 풀어온 수많은 숙제들 이젠 또 어떤 숙제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과제물이든 성실하게 잘 풀어서 표창을 받겠다고 생각해 본다. 내 남편에게 갚아야 할 빚이 많아 만났으니 당신을 향해 열심히 갚아 가겠노라고, 남편도 내게 갚아야 할 빚이 있어 나를 만났다는 것을 이젠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안개꽃이 좋다. 작고 갸날퍼서 힘도 없고 예쁘진 않아도 여럿이 모이면 그 어느 꽃보다도 예쁜 안개꽃 다른 꽃들을 돋보이게 해주는 자기희생에
만족하고 활짝 웃는 착한 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안개꽃이 화려한 장미를 돋보이게 하듯이 내 남편을 위해 기꺼이 안개꽃이 되어 주리라. 내 남편이 더욱 건강하게 활짝 웃을 수 있다면 나 또한 화사한 웃음을 갖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음으로,,,,,,.
이 행복이 넘치는 시간 매번 등교하는 날 아침 담임선생님 말씀을 안 쓸 수가 없겠다. 아침 조회시간마다 바쁜 시간 짬을 내셔서 한 자라도 더 배워 가라고 칠판 한 쪽에 격언이나 명언을 적어 마음에 양식을 남겨주시는 우리 담임선생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유구필응, 송무백승 등 마음에 새겨 배우고 익혀 가겠습니다. 이제 내 나이 쉰셋 허지만 제2의 새로운 내 삶이 시작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이곳 경복 방송통신고등학교 의 3년을 바탕으로 대학에도 가고 오늘 보다 한 뼘 진화한 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더불어 친구가 잘되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며 멋진 내일을 살아가렵니다. 이 세상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동상 작품)
내 인생의 작은 아픔에서 얻은 교훈
2학년5반 김 광 국
“아저씨 인상이 꼭 부처님을 닮으셨군요.” 아저씨는 하던 톱질을 멈추고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땀을 닦으며 미소를 짓는다. “물 한모금드세요”
절에 계시면서 잡일을 맡아 하시는 분 같다. 산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잡나무 등을 베여 길을 정리하고 있었다. “저기 똑 바른 가지 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아저씨” 아저씨는 기분 좋게 나무를 베어 내 양손에 쥐어준다. 허름한 나무 지팡이를 집어 던지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일행과 함께 산을 내려왔다.
7개월 전만해도 등산 후 한 달이면 두세 번 찾는 단골 음식점을 찾았다.
한편에 지팡이를 세워두고 다리를 흔들어보고 일어서기도 여러 번 반복한다.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1년 동안은 절대 산행을 해서는 안 된다던 의사선생의 당부가 생각났다. 때문에 늘 비상시 쓰기위해 약 두어 봉지를 준비해 가지고 왔었다. 그런데 통증이 전혀 없다. 내게는 기적 같은 일이다. 기쁘고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눈물이 났다. 함께한 친구들 까지 눈시울을 적시며 기뻐해 준다. 내가 산악대장을 맡아 2년 넘게 산을 함께 오르던 친구들이다. 수술 후 한 달을 입원하고 세 달을 물리치료를 받았고 지금 두 달 넘게 자활훈련을 하고 있는 중에 오늘은 큰맘 먹고 산을 조금 오르다가 내려올 생각으로 산을 올랐는데, 북한산에서도 최고 난코스인 전에 즐기던 의상봉을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때로는 아얏 소리를 내면서 숨이 턱에 닿으면서 올랐다. 이제 그 하산 길이다. 일행들과 레이저 차를 몰아 돌아오는 길에 여러 생각에 잠겼다. 평소 산 사나이로 불리며 두 다리가 누구보다 튼튼해 자랑을 하곤 했으나 지금은 마른 장작처럼 되어 버렸다. 지난 1월 어느 날 친분 있는 분들과 약속을 하고 강원도에 있는 스키장에서 나이를 잊고 마음껏 즐겼다. 이제 한번만 더 하고 가야지 하면서 내려오는 길에 비명과 함께 큰일이 터지고 말았다. 포장 후 실려 내려와 간단한 치료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한방에 들려 침을 맞으면 되겠지 하고 그때만 해도 대수럽지 않게
생각 했는데, 선생님의 권유로 정형외과에서 촬영을 하고 의사 선생님과 필름을 놓고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진단 결과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것이었으니 뼈가 부러지고, 인대가 파열되어 최소 6주 진단에 1년은 더 가야 완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언젠가 나을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오래걸릴뿐 아니라 다리가 휘어지게 된다. “라는 대답이다. 순간 앞이 캄캄했고 할 말을 잊었다. 내가 하는 작은 사업이 1월에서 3월까지가 최고의 성수기이다. 이 기간에 일을 많이 해놓아야 여름의 비수기를 버틸 수 있는데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쩌랴 입원을 하고 두세 시간을 온갖 생각으로 침묵했다.
아니 누구와도 대화할 기분이 아니었다. 어떤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강이 나의 최고의 자산이었고 건강에 관한 자신이 있었는데 이 뜻 하지 못한 사고는 나의 신념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고 10여년을 한결 같이 다니던 산 들이 나를 비웃으며 눈앞을 스쳐간다. 세 시간 정도의 마취
그리고 정막이 흐른 뒤 마취에서 깨어나 평정을 되찾으며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 드리게 되었다. “그래 쉬어가라면 쉬어 가야지” 마음을 정하고 나니 평온해 졌다. 급우인 Y와 휠체어를 타고 학교에 오는 옆 반 K학우가 친근감을 더한다. 지금은 절름거리지만 앞뒤를 보는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다리에도
힘이 붙었다. 계단도 오르내리고 내 나이에 맞는 가벼운 운동도 하게 되면서
건강할수록 건강을 더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깨우쳤다.
난 오늘도 조심스레 북한산을 오른다.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입상작)
맏이
2학년5반 길 계 순
나는 어릴 때부터 아니 태어나길 운명처럼 태어났다. 맏이라는 큰 멍에를 가지고 말이다. 초등학교에 가면서부터 맏이라는 멍에가 위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생도 나와 같은 초등학생이었으나 나는 동생을 먼저 챙기는 버릇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내일 숙제며, 준비물 같은 소소한 것부터 동생들을 챙기고 나서야 비로소 나머지가 내 몫이다. 동생들에게 모두 돌아가고 나머지가 없으면 그만이니 내 것은 늘 부족했다. 그것이 모두 그런 것인가 보다. 모두 그렇게 사는 것인 줄 알고 불평 없이 살았다. 나는 5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내 삶의 몫은 맏이의 그것이었다. 부모님이 연로하셨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맏이의 짐은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그저 사는 모습으로 알고 순응하면서 살았다. 동생들이 중학교에 진학 하면서 생활 형편이 어려워지게 되자 맏이인 나는 학교를 중퇴하고 사회에 진출하여 돈을 벌어야 했다. 그것으로 동생의 학비를 대주면서 맏이인 나의 삶은 희생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렇게 맏이로서 내 삶이 아닌 맏이의 삶을 살아가면서 내
20대는 직업을 전전하며 그렇게 저물어 가고 이십대 후반에 접어들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내 희생에 대한 보상인가 결혼은 제법 잘해서 시집살이는 하지 않아도 되는 집안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맏이의 숙명적 삶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어서 신혼을 즐길 여유도 없이 동생이 대학을 간다고 함께 살아야 하는 입장이고 보니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맏이는 부모를 대신하다 싶이 하면서 막내까지 시집을 보내고 한 숨 돌릴만했더니 친정아버님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되셨다. 맏이의 고단한 삶이 다시 시작되었다.
병원치료비와 간병하는 이의 비용까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궁여지책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아버지 간병에 매달려야 했다.
우리 불쌍한 아버지 이북에서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여 피붙이 일가친척 하나 없이 외롭게 살아오신 우리 아버지 내가 직장까지 접어두고 아버지의 간병에 집중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너무 외로운 분이라는 생각이 더했는지 모른다. 내가 아버지 목욕을 시켜 드리려 하면 완강하게 거부 하시던 아버지가 근력이 점점 떨어지시더니 딸의 목욕도 말없이 받아 주셨다. 그것이 더
씁쓸하고 아프게 다가온다. 그렇게 정성을 다했건만 아버지는 당신이 오신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픔인가 슬픔인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마음엔 온통 후회뿐이다. 왜? 좀 더 정성을 다하지 못했을까? 더 정성을 드렸으면 아직도 내 옆에 계실 수 있었을 텐데 사랑하는 내 아버지 외로워 눈물지을 때는 가슴이 메어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을 우리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난 아직도 내 가슴에서 보내 드리지 못했나보다. 지금도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파주로 달려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딸의 마음이 이럴진대 아버지를 평생 사랑했던 우리 어머니의 마음은 또 말해 무엇 할까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울면서 밤을 보내고 또 울면서 날을 보내기를 몇 날 며칠 하시더니 우울증을 동반한 치매 증상이 왔다. 병원에서 1년 즘 계시다가 이것 저곳 전전하시더니 마침내 이 맏이에게 오셨다. 우리 어머니 표 치매는 모든 기억을 다 잊으신 것이 아닌가 보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잊지 않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신다. 곡 아버지의 외로워하실 때 모습과 같다. 아버지 계신 곳으로 빨리 가시고 싶단다. 그 말씀에 진위야 말할 게 아니지만 어머니의 눈빛은 간절하다. 맏이의 몫은 언제나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으니 하늘의 축복인가 아니면 전생에 빚을 져서 그 빚 갚음으로 맏이가 되었을까?
이제 나의 바람이 있다면 어머니가 조금 더 건강을 회복해서 머나먼 그곳으로 가시기 전에 여행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곧 내 소원이다. 조금만 더 걸을 수 있다면 제주도라도 모시고 다녀오는 것이 도 맏이의 마지막 몫일 거란 생각을 한다. 내 어머니의 삶은 어떤것이였을까? 이제 어머니 이 맏딸의 삶은 맏이로서 행복합니다. 더 열심히 어머니의 남은 삶 이 맏이가 모시고 살아가렵니다. 어머니 오래 오래 사세요. 이 씩씩한 맏이가 있잖아요.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입상작)
어머니
3학년3반 차 순 애
결혼 23년
아이 셋을 낳고 살림도 늘려가며 그 동안 큰 일없이 평탄하게 살았습니다.
1년 전 남편의 초등학교 친구들 8팀이 부부동반으로 제주도를 가게 되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막 제주도에 도착하여 미쳐 짐도풀기전에 큰 딸아이가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왜 전화 안 받아요? 시골 큰 엄마가 큰일이 생겼다고 빨리 전화하시래요.” 하더군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급히 큰 형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자네 빨리 시골로 와야겠네, 어머님이 교통사고로 위급하시니 되도록 빨리 오게“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망설이고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급하게 서둘러서 군산 행 비행기를 타고 갔지만 두 시간이나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해서 안내 석에 어머니 성함을 대고 몇 호실에 계시냐고 물었으나 어느 병실에도 없다는 대답입니다.
이 병원에 계시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왔으니 알아봐 달라고 했으나 대답은 여전히 안 계시다는 겁니다. 마침 친척 중에 한분이 우리를 알아보고 병실이 아니고 영안실에 계시다는 거였습니다. 순간, 숨이 막히고 꼼짝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졸지에 당한 일이여서 눈물도 안 나오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님은 정말 건강하시던 분이였는데 이런 청천벽력이 어디 있을까요? 제게는 자상하시고 우리가 막내라고 늘 걱정안해도 될 부분까지 걱정을 하시며 사셨습니다. 휴가 때 어머님을 뵈러 내려가면 아무리 바쁘셔도 일손을 놓고 한해 몇 번 만나는 자식들인데 자식들하고 놀아야지 일을 하고 있으면 너희들이 힘들고 불편하다고 하시며 편하게 지내도록 배려해 주시던 어머님입니다. 조금이라도 챙겨주시기 위해 애쓰시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주마등같이 흘러갑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집안의 시누이가 결혼한다는 연락을 받고 내려갔는데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시고 터미널 까지 나오셔서 두툼한 봉투를 내 손에 쥐어주시며 “네가 준비한 것으로 해라” 하시며 “70만원이다.”고 하십니다. 극구 사양하는 제게 ‘내가 해 줄 수 있을 때 받으라며 기어코 주시는 겁니다. 명절이면 막내아들이라고 해준 것이 없다 시며 생활비에 보태라고 쌀가마니에 2~30만원씩을 넣어주시던 우리어머니. 당신의 땀으로 농사지으셔서 철마다 보내주시곤 하셨던 어머니는 늘 막내 손주녀석 대학 갈 때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니 갑자기 말씀 한 마디 없이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면 송구하고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며느리한테 잘해야 내 아들이 편 하다시며 동네 모든 시어머니들께 강조하시던 어머니에게 나는 하나도 잘해 드리지 못한 부족한 며느리는 늘 후회와 회한으로 가슴을 칩니다. 제가 받은 사랑만큼은 못하겠지만 당신의 막내아들에게 또 제 자식들에게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도록 어머니를 본받고 실천해 나가는 길이 어머님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는 길로 알고 살아가겠습니다. 어머니 존경합니다. 그리고 뵙고 싶습니다.
오직 자식에게 주시기만 하시고 받지 않으신 어머니의 높은 뜻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그 높은 곳에서 지켜봐 주세요. 어머니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입상작)
지학(知學)과 희수(喜壽)의 소풍
1학년2반 심 재 호
오월의 어느 따듯한 봄날
어머니의 정성 담아 싸주신 오색 빛 도시락 가방을 메고 친구의 고사리 손잡고 선생님 호각소리에 발마춰 코스모스 피어난 신작로 걷던 소풍가던 날 칠성사이다 친구가 한 병 구입하여 가위, 바위, 보. 순서 꼴찌되어 친구입만 바라보던 기억속의 친구들, 모두 풍족하지 못했지만 유독 사난했던 내 어린 시절엔 어머니는 여덟 살 나와 누나들을 남겨두고 불러도 올 수없는 하늘나라로 가시고, 열 살 누나가 새벽 졸린 눈으로 옥수수 맷돌에 갈아 설익은 밥과 감자 두개 삶아 얹어주던 도시락 창피하다고, 가기 싫다고 투정부리는 나를 달래주던 누나의 품에 안겨 잠들었던 기억은 아련한데 지금은 그 때의 어머니도, 누나도 볼 수 없으니 나의 어린 날 추억은 눈물로 얼룩진 기억뿐이다.
세월이 흘러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어 불혹(不惑)의 중반을 훌쩍 넘어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나는 지금 사랑하는 아내와 고1과 중1 두 아들은 둔 가장이지만 배움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인터넷과 회사선배의 도움을 받아 역사와 전통 긍지 높은 경복방통고 문을 두드려 입학하게 된 기쁨과 약관(弱冠)에서 희수(喜壽) 까지 하나가 된 1학년 2반 23번 새내기 고1이 되어 사랑하는 아내의 정성이 담긴 도시락과 두 아들의 배웅을 받으며 소풍이라니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만남이 약속된 청량리로 향한다. 6~ 80년대 푸른 제복의 군복무시절 애환과 추억이 점점이 묻어있는 청량리 역사는 20여년이 지난 오늘 현대식 건물로 단장하여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 이미 도착한 선생님과 친구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참가인원 점검이 끝난 후 ITX 청춘열차 홈으로 이동하는데 선두가 인도를 잘못하여 다시 유턴하여 에스컬레이터를 사이에 두고 엇갈리는 풍경은 영락없는 고1이다. 길을 찾아 헤매는 것조차 미소짖게하는 추억이 되겠지 우여곡절 끝에 승차한 이름조차 흥겨운 ITX 청춘열차는 오늘 소풍가는 우리들을 위한 명명 (名名)같다는 생각을 한다. 무슨 얘기가 저리 많을까? 소년, 소녀로 돌아간 듯 도시락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열차는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다투어 열차에서 내리니 오월의 눈부신 햇살과 푸른 녹음의 풀내음이 우리를 반겨준다.
<날이 새면 물새들이 시름없이 나르고, 냇가에 수양버들 아래서 조용히 살고파라. 강촌에 살고 싶네.> 강촌에 살고 싶네. 란 노래가 절로 나오는 지학(知學)과 희수(喜壽)의 소풍지 강촌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조용한 시골풍경이 정겹다. 산책길을 따라 문배마을 가는 길가에는 기암괴석과 괴목 물푸레 상수리나무 잎새 사이로 부는 바람에 실려 산 더덕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어디서 왔는지 다람쥐 한 마리가 가던 길을 멈추고 낯선 이방인들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문배마을 어귀에 서니 숨이 턱에 닿는다. 서로 손을 잡아주고 밀어주면서 함께 오른 정상에서 땀을 씻으며 작은 성취감을 맛본다. 곰 취, 이름 모를 약초, 아카시아, 라일락의 향기들이 나이 지긋한 고등학생들을 반긴다.
문배마을은 한국전쟁당시만 해도 마을이 있는지 모를 만큼 산속 오지에 있어 전재의 참화를 피하고 산 호수가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김 씨 이 씨들이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자연부락이다. 이곳에서 산채비빔밥으로 허기를 달래고 뒤돌아보며 구곡 폭포로 향한다. 아직 폭포가 보이지도 않는데 물 떨어지는 소리가 웅장하게 들린다. 이윽고 폭포에 이르니 시원한 물줄기가 용의 승천함처럼 하늘로 치솟는 것 같다. 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구곡폭포는 특히 겨울 빙벽 등반으로 산악인들의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
기암괴석, 폭포, 절경과 어우러진 대자연과 함께하고 멋진 학우들과 또 하나의 잊을 수없는 추억을 만들어간다. 지학에서 희수까지의 만학도 들의 가슴에 아름답게 자리한 소중한 정은 새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희망의 추억으로 소중한 자산이 되리라는 생각을 한다. 짧은 여정도 잊은 채 자연과
말없는 대화를 하며 걷다보니 일행과 헤어져 낮선 길을 걷고 있다. 물어물어 강촌역에 이르니 먼저 온 친구들이 늦었다고 아우성이다. 서산에 걸친 해가 북한강 물에 붉은 노을을 만드는 황혼 무렵에 만학도를 실은 청춘열차는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달린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 나보다 더 가슴시린 사연을 간직한 사람도 없지 않을 우리, 동병상련의 만학도 들에게 오늘의 즐거운 추억만 남았으면 좋겠다.
먼 훗날 다시 강산이 바뀌는 세월이 흐른 뒤 오늘 함께한 학우들을 볼 수 있을까? 아마 많이 늙어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꿈길 같은 소풍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다. 가로등 불빛이 내가 가는 길을 밝혀주고 보이지는 않지만 저 하늘에 빛나고 있을 어머니와 누나의 별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영원한 안식처 가장 편한 나의쉼터에 들어오니 반갑게 맞아주는 두 아들 “아빠 다녀오셨어요?” “그래” “여보 재미있었어요?” “허허 즐거웠지요. 나 지금 다리아파요 주물러줘요” 아내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리광을 피워보는 나는 마흔 여덟에 느깍이 고등학교 일학년이다. 지학에서 희수까지 하나 되었던 오늘 소풍날의 추억의 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입상작)
아기 새의 첫 비행
3학년1반 이 소 연
지금부터 약 일 년 전 쯤에 혼자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중학생 때부터 일본의 언어, 문화, 가요, 혹은 에니메이션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제 비로소 일본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거창하게 도전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고 그저 호기심으로 갖는 욕심인지도 모르지만 이유야 어떻든 그렇게 한 시간 남짓 비행 끝에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하여 드디어 일본 땅을 밟는 순간 한껏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결국은 오고 말았구나. 싶었다. 일본어 학원은 고사하고 일본어를 제대로 배워본 일도 없는 내가 겨우 두 달 남짓 독학한 실력으로 이렇게 공항에 우두커니 서 있자니 공연히 뒷머리가 간지럽다. 입국신고서를 작성할 때만해도 멍했던 비행기 안에서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신고를 마치고 공항을 빠져나오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일본어와 어딘지 모를 우리나라와 다른 주변의 모습들이 주눅 들게 하면서 심장이 마치 바람바진 풍선처럼 쪼그라드는 것 같다. 심호흡을 하고 5분쯤 정신을 가다듬은 후 캐리어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하카타 역에서 일본인 친구 시노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리둥절하며 돌덩이처럼 굳어서 공항에 박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선 약속장소를 찾아가는 것이 순서이다. 어렵사리 지하철을 타고 하카타 역에 도착했다. 매표소 앞에서 시노를 만났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다닐 자신이 없어, 짐을 넣어두는
라커룸으로 갔는데 이미 낮은 자리는 모두 잠겨있어서 둘이서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끙끙대며 높은 자리에 넣어두고 우선 배를 채워야 겠기에 역 내 백화점 지하층에 우마카라는 식당에서 오사카 음식을 먹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게 짜다. 물을 네겁이나 마시니 시노는 한참이나 웃는다.시노의 안내로 근처의 신사나 공원을 돌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버스를 타고 지인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후쿠오카의 버스는 다른 지역과 달리 뒷문으로 승차하여 앞문으로 내리는데 승차할 때 번호표를 뽑고 전광판에 나타나는 금액을 내릴 때 지불하게 되어있다. 나카치쿠츠에서 버스를 내려 골목을 돌아 들어가면 지인의 집이 보였다. 그렇게 일본에서의 첫날을 보냈다.
일본에서의 둘째 날은 그 곳에 살고 있는 한국인 친구와 모지코엘 갔다. 은하철도 999 만화에 등장하는 추억의 기차가 이곳 철도 기념관에 있다고 해서였다. 옛 날의 기차표와 기차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경적소리도 듣는다. 관람을 마치고 돌아 나오다가 우린 눈물을 흘려 가며 웃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한 카페에 광고 때문이었다. “금일 이후 망한다.”는 광고에 그만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우리라도 가서 마셔주자며 카페에 들어섰다. 시원한 밀크티를 주문해 마시고 잠시 다리를 쉰다. 이곳 모지코에 유명한 야끼카레 가게가 있다는데 그냥 지나칠 내가 아니다. 야끼카레 가게에 들러 식사를 하는데 옆 테이블에 정장을 한 노신사가 머리가 짧은 내 친구를 남자로 보고 “다정한 연인”이라며 너털웃음을 웃는다.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젊었을 때는 꽤나 멋쟁이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식사를 마치고 친구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가서 밤새 수다를 떤다.
셋째 날 부터는 8일 동안 일본의 문화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우리나라의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같은 불특정 소수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되었다. 일본의 차를 마시는 다도의 한 갈래인 오차체험, 자연박물관, 국립박물관, 수족관, 신사, 해저터널, 캐널시티, 등등 후쿠오카의 시내를 다니며 일본인들과 대화를 시도하기도 하고 쇼핑도 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일본 체험을 했다. 때가 마침 장마철이여서 습기가 많아 깨끗이 씻어도 무차별 달려드는 모기에게 속수무책으로 수혈을 해줘야 했지만 열흘간의 일본에서의 생활은 설레고, 긴장되기도 했지만 즐겁고 신기하기도 했던 감사하고 따듯한 시간이기도 했다. 성당을 찾았다. 일본의 성당도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미사를 드리고 신부님과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어린이 미사시간에 아이들이 부르는 성가는 가사를 모두 해석하기는 내게는 무리였으나 드문드문 들리는 가사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겐 제법 많은 변화가 생겼다. 아기 새가 처음 하늘을 날 때 위태위태했던 첫 비행처럼 나의 첫 해외단기연수도 처음엔 그렇게 위태위태하게 보였을 것이지만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경험하고 그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함께하며 시간을 공유하며 보낸 시간들은 가슴 따듯한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지도를 손에 들고 타국의 언어로 길을 찾고 문화를 몸으로 배우며 그들의 일상으로 녹아들어가 일본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값진 경험이 되었다. 또 오라 는 그 분들의 말씀은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있는 흔한 이별의 멘트지만 아마 그래서 더욱 코끝을 매워지게 하는가보다.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며 다시 비행기에 올라 우리나라로 향하는 비행 창문으로 후쿠오카의 모습이 보였다 사라졌다를 몇 번 반복하다가 이내 사라지고 한 시간 남짓을 날아 나는 다시 내 나라로 돌아 올수 있었다. 후쿠오카에서 보낸 열흘은 내 호기심의 시작이었지만 꿈결 속에 지나간 순간의 시간이었다. 짧은가 하면 긴 시간 같기도 했던 열흘이 내게 공부가 되고 가슴설레이는 여행이 되었고 일본과의 운명적인 비극의 역사를 다시 아프게 가슴에 새길 수 있었던 시간이 되어 주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지만 인류라는 공통점으로 통할 수 있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듯한 정 그것이었다.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국경을 뛰어넘은 따듯함은 우리가 모두 따듯한 피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헤어짐의 아쉬움으로 남아 기억될 것이다. 그 연수를 통하여 나는 용기 있는 사람, 진취적이고 뜨거운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한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동안 더 많은 여행과 도전으로 인한 열정과 배움이 내 삶을 한층 가치 있고 빛나는 나날들로 만들어 주리라. 나는 뜨거운 사람이어야 한다. 멈춤 없이 나가야 한다. 세상은 넓고 내게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단 한 순간이라고 해도 그대로 흘러 보내기엔 너무나 예쁘고 크게 빛 날수 있는 시간들이다. 나는 열흘간의 비행을 마친 아기새를 떠 올린다.
(2012년 교내 학예경연대회 입상작)
학교 행사 (사진 및 글)
동아리 소개(사진 및 글)
문학 동아리 <솔>회보 제 120호
인사의 말씀
경복 방통고 선, 후배 학우 여러분!!
경복 방통고의 역사와 함께 거의 맥(脈)을 같이하면서 방통고 최초의 동아리로 탄생한 우리 문학동아리 ‘솔’회는 명실상부한 우리 학교 대표 동아리로
성장했습니다. 초대 윤완상 회장님과 역대 졸업 선배님들의 사랑과 뜨거운 열정, 그리고 관심의 결과입니다. 그동안 솔 회는 솔 회보를 119회 까지 발행해 왔으나 여러 가지 자체 사정으로 중단 되었다가 금번 교지 ‘늘 푸른’의 출판과 더불어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회보를 이어 가도록 하였습니다.
인사의 말씀은 아래 한편의 수필로 대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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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지는 학교
문득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젊어지는 샘물>이란 제목의 전래 동화가 생각난다. 입학식을 위해 도열한 신입생들을 바라보면서 그랬다. 동화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 분수에 맡게 만족할 줄 알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내용이지만 요즘같이 웰빙이 대세를 이루고 저마다 건강을 삶의 가치관 중에 제일로 생각하는 추세이니, 젊어지는 샘물을 찾을 수만 있다면 재벌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 일 테고, 현대판 노다지가 될 것이 분명하다는 싱거운 생각이 난 것은 내 나이 이제 60도 중반을 넘어 서쪽 하늘을 진홍의 노을로 물들이는 황혼녘에서 무의미하게 흐르는 세월이 아까워 내 평생의 정신세계를 황폐하게 한 배움에의 갈증을 풀어 보겠다고 선택한 학교라는 이름의 또 다른 세계에 나와 비슷한 이유로 학교를 찾은 날 많이도 닮은 후배들의 비장하고 결의에 찬 모습을 보면서 <아! 그래 여기가 젊어지는 학교야> 라는 울림이 가슴속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나 보다. 젊어지는 학교는 가장 민주적이고 평등한 학교이니 충분한 배움을 누린 사람들에겐 입학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이러저런 이유로 학창 시절을 잃어버린 만(晩) 학도들에게 주어지는 특혜(?)이니 어쩌면 조금 늦었지만 나와 오늘 새로 입학한 후배들은 선택받은 행운아임이 틀림없다.
젊어지는 샘물을 찾았다면 누가 알새라 쉬쉬하고 꼭꼭 감쳐두어야겠지만 우리가 찾은 젊어지는 학교는 큰 소리로 외쳐 더 많은 나와 같은 사람을 젊게 만들어 갈 소명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젊어지는 우리 학교를 찾은 후배들에게 더 예쁘게 젊어지라고 내가 몸담은 문학 동아리를 소개 한다. 젊어지는 샘물이 물리적인 젊음을 주는 것을 전재하는 것이라면 우리학교는 정신을 젊게 해주는, 만능이라는 현대 과학도 풀 수 없는 불가사의한 정신세계의 특효약이기도 하다. 그 젊음을 더욱 윤택하게하고 S라인으로 멋지게 만들어 내는 꿈과 낭만을 논하는 열일곱 문학소년 소녀로 만들어 주는 삶의 연금술을 우리 솔 문학은 가꾸어 가고 있다.
요즘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는 CF중에 <정말 좋은데 뭐라고 말 할 수도 없고> 하는 구절이 왜? 그렇게 마음에 닿는지, 어떻게 우리 솔을 그들 마음을 울리도록 소개 할 수 있을까? 동아리 활동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니 시장에서 세일하듯 난장을 벌리기에는 나름대로 문학인의 자존이 허락하지 않으니 말이다. 우리학교가 젊어지는 학교라면 문학동아리 솔은 그 젊음을 더욱 내실 있고 보람 있게 해 주는 촉매라고 설명할까? 나 홀로 이 아름다운 낭만의 세계를 마음껏 누린다면 동화가 말하는 安分知足을 모르는 욕심쟁이 영감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없지 않다.
자랑이라고 생각해도 할 수 없지만 어제 내가 만난 동아리출신 졸업 선배들의 대학생활 중에 고교시절 솔 문학에서 활동했던 주옥같은 경험들이 그들의 대학 생활에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굳이 인용하지 않는다 해도 어렵게 선택한 귀중한 고교생활의 새로운 경험을 무의미하게 보내기에는 이 주체 할 수 없는 젊음(?)을 어떻게 발산할까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북악산 기슭, 푸른 솔 아래 도도하게 자리 잡고 이 나라 근 현대사의 기라성 같은 인물을 배출한 경복의 터전에서 다시 찾은 젊음을 보다 뜻있게 보내려는 젊은 후배들이 자신의 꿈과 낭만을 젊음에 접목하는 기쁨을 찾고 싶다면 주저 없이 솔 문학 동아리의 열린 문을 힘차게 두드리기 바란다.
그곳에서 그대와 나의 고교시절에 우정을 아름답게 꽃 피울 수 있기를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마음이 아름다운 후배들을 기다리며 난 기꺼운 마음으로 문향(文香)가득한 <솔 문학 동아리>의 문지기가 되리라.
제32대 솔 문학 동아리 회장 홍윤기
제37대 학생회 자문위원
(한국 문인 협회 회원, 문학저널 문인 회 이사)
2011년전국 학예 경연대회가 경복고에서 개최되었다. 우리학교 이쁜이들이 참가자들을 안내하고
경복의 아름다움 그리고 친절함을 과시한다.
김치영 2학년장은 국악 부분으로 출전 준비 끝
국악 부분 경연을 관람하는 내빈들
경복고 대표선수 메이컴 중
제31대 솔회총무님도 보인다
문학의밤 행사를 끝내고
솔 문학의밤 행사중
솔회 졸업 선배님들의 미소가 일품
신입생 MT (다산선생 유적지에서)
문학 선생님, 독서답당 선생님도 참석
신입생환영식에 참석해주신 솔선배님들
경사모(경복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경복 기독학생회
경복 아소미
경복클럽 스사경
경복 골프회
방송 고전 국악 연합
37회 졸업생 주소록
편집후기
※ 학생작품(응모 작)
♥잔잔하게 흐르는 시냇물 같은 친구♥
3학년1반 김원희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처럼
언제나 따뜻한 마음 한 줄기가 고요하게
가슴으로 흐르는 것이 친구일거라고
매일 만나도 매일 만나지 않아도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늘 가슴 한켠에 말없이
잔잔한 그리움으로 밀려오는 친구가
진실한 마음의 진정한 친구라고
언제나 그 자리에
늘 그 모습 그대로 오염되지 않는
맑디맑은 샘물처럼
우정의 마음도 솔솔 솟아나는
그런 친구가 맑은 영혼의 친구인 것처럼
친 구간에는 어떤 언어가 필요 없다고 생각해
그 친구가 지금 어떤 상황이든
어떤 심정이든 굳이 말을 안 해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친구
가슴에 담아져 있는 친구
그런 친구가 진정한 마음의 친구인데
마음을 담아 걱정해 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어붙은 가슴을 녹이고
바라보는 진실한 눈빛이 아픈 마음을 적시게 하는
그런 친구가 영원히 변치 않는
우정의 친구가 있음 얼마나 좋을까
친구 지간에는 아무런 대가도
계산도 필요하지 않고
멀리 있어도 마음으로 의지하고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동반자 같은 진정한 친구가 맞지
살아가는 동안 같이 아파하고
함께 웃을 수 있는
희, 노, 애, 락을 같이 할 수 있는
지란지교 같은 그런 친구가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다
우리 마음 한자락 비우고
이런 친구가 되지 않을래. 바람에게
그리움
3학년1반 김 원 희
기억속의 한 페이지로 남아서
초록빛 그리움을 뒤로하고
후드득 나뭇잎 사이로 빗방울이 숨어 울어댄다.
가슴이 젖어서 울다 울다 멈추는
스산한 어둠이 내려오는 밤에 차가움만
남기고 울다 저 혼자 가버린다.
이렇게 흔들리는 바람 같은 여심은
누구에게 마음 비워둘 공간을 찾아서
이 시간 창문이 나보다 큰 창가에 떨어지는 빗방울 수를
헤아려 보면서 향기 그윽한헤즐럿 커피 잔에 나를 담는다.
하루를 막연히 그리움만 책갈피에 숨겨놓고
머리는 온통 환상의 아름다운 하롱베이 섬을 그린다.
잔잔한 물결위에 손 한번 담가보면서
차가움이 온기로 느껴지는 행복이 전해오면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다음날도
선상에서 아름다운 시간들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억 속에 지우개는 영원히 없길 바라면서
좋은 만남을, 곱게 접어 추억에 담아둔다.
우리 반 모범생 을 소개 한다.
3학년1반 김 원 희
늦깎이 학생이란 신분으로 입학을 하고보니 나이답지 않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철이 없는 건지 정말 여고생의 맘인지 분간이 안 될 때도 없지 않다. 지금 학생이란 신분으로 새로운 인연을 맺은 많은 선후배님을 학교생활에서 느끼고 배우고 참고하면서 새로운 인생의 시발점을 만든는제2의 삶을 살고 있다. 과연 졸업을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하면서 시작한 것이 2년이 지나 3학년이 되어 졸업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학우라곤 하지만 인생의 대 선배이면서 연세도 많으신 어르신들의 바른 생활 모범적인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더 남다른 경외감을 준다. 그 중에 남상갑 어르신이 있다.
그분의 공부의 하시는 모습은 진지하다 못해 숙연하게 보이는 모습이 아마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늘 책을 가까이 하시면서 외고 또 외우고 보고 또 보고 모든 일과를 학구열로 보내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래저래 생활을 핑계로 수업도 바르게 듣지 않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며 부끄럽게 만든다. 스스로 존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게 하는 분이다 .잘못된 것이 있음 바로 지적을 하시기보다는 우회해서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배려하며 잘못을 깨우쳐 주시고, 잘된 것엔 칭찬을 아낌없이 하시는 그 어른은 모든 다른 학우들에게도 본보기가 되고 있다.
오늘도 업무하다 최선을 다하지 못함을 스스로 책망하면서 잠시 막간을 이용해서 어른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이글을 쓴다. 그 분과 같은 반에서 함께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는 또 다른 행운이었다. 우리 반에는 남상갑 어르신뿐만 아니라 나이 지긋한 인생의 대 선배님들이 여러분 계셔서 학업 이외의 인생 공부를 경륜과 지혜로 몸소 가르쳐 주시는데 박호근님, 문준섭님, 박봉희 언니, 김옥엽언니들이 그런 분이다. 이 나이에 학교를 찾아서 못다 한 배움을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삶의 살아있는 삶의 귀중한 경험을 그 분들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은 또 다른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보석 같은 무언의 가르침을 주신 학우 어르신들과 헤어질
날을 아쉬워하며 다시 감사를 드린다. 우리 반 어르신 학우님들 내내 강녕하시길 빌며 그동안의 가르침을 귀감으로 삼아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내일날의 내 삶을 스스로 기대한다.
김석관 선생님께
3학년1반 김 원 희
가끔 시간은 유수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심코 흩뿌려진 씨앗하나가 이제 마당가득이 꽃을 피우고 예쁘게 갖가지 세월에 모습으로 경복37회라는 정원을 만들었으니,,,,,,. 처음서로 낯선 타인으로 제 각기 다른 목표를 위해 경복에서 만났지만 이제 함께한 시간과 남은 시간마저도 언제까지나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우리는 동창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낍니다. 그 중에 우리가 하나 되도록 이끌어 주신 선생님들과의 짧은 시간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은 우리 삶에 싱그러운 미소로 간직 될 것입니다. 만학의 문턱에서 여러 선생님들과의 만남은 우리 삶의 행운이었습니다. 그 중에 특별한 만남과 남다른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해학과 낭만을 몸소 보여 주셨던 김석관 선생님과는 3년을 함께한 것으로 행복했습니다.
오늘 김석관 선생님 육순을 맞는 생신날 선생님의 생신을 축하드릴 수 있는 행운의 자리를 만들어 주신 이덕현 회장의 깊은 배려에 감사하고 또한 모두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고 고맙습니다.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시간이 지나도 우리의 소중한 인연이고 싶습니다. 입학할 시점에는 여기서 졸업을 하면 넓은 바다를 향해 날으는 갈매기마냥 밑바닥 숨결조차도 시원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아쉽고 빨리 가는 시간이 못내 야속합니다. 경복에서 졸업을 하고 늘 같은 곳에서 문교부 혜택을 누리던, 노동부 혜택을 누리던, 경제적 차이를 볼모삼지 말고 경복의 좋은 추억을 한 움큼이라도 가져올 수 있게 경복의 모임이 활성화되어 햇볕 한줌에 따뜻함도 서로 건넬 수 있는 우리 정겨운 모임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면서 타인을 존경하는 신뢰하는 마음이 경복이라는 행복바구니에 열매로 맺어지길 원하면서 견우직녀가 만나는 7월7석 날 경복학생과스승님의 만남의 날이 1년에 한번이라도 오작교가 아닌 바로 이곳에서 뵈면 어떨까요? 선생님 건강 하세요. 선생님 주신 사랑과 웃음으로 감사 했습니다. 선생님의 제2의 인생이 더욱 강녕하셔서 좋은 글 많이 남기셔서 후학들의 배움이 되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연이 어머님의 사모곡
3학년1반 김 원 희
천년을 살다갈것도, 백 년을 살다갈것도 아닌데, 백세도 못 사는 덧없는 인생 속에서 하루하루 매순간 기도하듯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속에소연이남매의 큰 위안이고 버팀 목이였던 소연이 어머니! 온몸으로 병마와 힘겨운 싸움을 하시느라 온갖 고초 다 겪으시다 햇살이 유난히도 뜨거운 여름에 고운별 되어 홀연히 먼 여정을 당신혼자서 떠나셨습니다. 속절없이 변해가는 시간과 공간속에 힘든 세상 어머니란 이름하나에 연약한 몸으로 고통의 세월을 흐느끼면서도 안타까운 두 남매 홀로 사랑과 사랑으로 꼭꼭 덮어주고 보듬으며 키우셨는데 고운사랑 많은 사랑 주고 또 주면서 몸 불편한 소연이 한 번 더 보듬어 주시며 키운 소연이지금도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두 남매 두시고 어떻게 가셨나요? 훌훌 털고 일어나시길 바라는 애처로운 간절한 소연이 기도가 물거품 되고 고운엄마 한분 엄마 제대로 거두지 못한 소연이 맘 어떻게 하라고 눈을 감으셨습니까? 한번쯤 꼭 찾아뵈어야지 소연이 맘 다독이면서 몇 번이고 갈 기회를 미루던 끝에 결국비보를 전해들은 후에야 더더욱 가슴이 미어지고 아파오니 어머니 어찌합니까? 삶이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았지만 소연이 남매가 그래도 견딜 수 있었던 건 어머님이 살아계신 존재에 희망이 아닐까합니다. 어머니 가신 그 길은 되돌아 올수 없는 먼 길 이 세상보다 더 좋은 곳에서 행복한 미소 머금으시며 지금껏 누리지 못했던 어머님만의 세상이시길 빌고 또 빌겠습니다. 어머니 가시다가 그리우면 한번만 꼭 한번만 되돌아오셔서 잊은 것 없는지 살펴보러 오세요. 잠시 잊고 어머님께 드리지 못한 남아 있는 소연이 남매 효도 마져가져가세요. 눈물이 흘러 흘러서 어머님 계신 곳에 당도하면 고이 담아 두셨다가 훗날 엄마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 뒤 늦은 후회와 그리움이 온몸에서 녹아내린 아픔이라고 말해줄께요. 어머니 소연이 어머니 정말 고이고이 잠드세요. 그리고 어머니 사랑합니다.
저희 3-1반 이 소연 어머님께서 어제 아름다운 별나라로 가셨습니다. 잠시나마 어렵고 어렵게 살아가는 소연이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가신분에 명복을 우리 아시는 학우님은 함께 빌어드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