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60. 차르클릭의 미란유적
실크로드 유적 ‘약탈’해 간 서양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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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한때 서역의 여러 국가를 호령했던 미란국의 유적지. 사막으로 변한 드넓은 지역 곳곳에 유적의 잔해만 남아있다. 한 국가의 흐흥망성쇠를 보자마자 "모든 것은 변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
차르클릭(若羌)에 도착한 다음날인 2002년 9월18일. 누란빈관(樓蘭賓館)에서 아침을 맛있게 먹었다. 타클라마칸 사막 횡단 중 만난 카라브란이 떠올랐다. 끔찍하게 긴 하루였다. 책에서만 읽었던 카라브란을 만난 것은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니야에서 차르클릭까지, 거의 850km를 달렸다. 하루에 그만한 거리를 달릴 일은 앞으로는 없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차를 타고, 미란(米蘭)유적지로 출발했다. 차르클릭 시내에서 동남쪽 90km지점에 위치한 미란은 여러 가지 점에서 가보고 싶었던 유적지다. 차를 타고 40분 정도 달리니 ‘36병단’이라 적힌 표지판이 나왔다. 표지판을 끼고 우회전했다. 곧 마을이 나왔다. 36병단 마을이다. 마을은 1949년 왕진(王震)장군에 의해 만들어졌다. 신장 지역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중국 인민해방군이 파견됐고, 주둔군은 현지에서 둔전(屯田)하며 자급자족 생활을 영위했다. 신장 지역이 정리된 뒤에도 군인들은 미란 유적 앞마을에 그대로 남아 개척키로 했다. 그래서 마을은 미란 36병단으로도 불린다.
마을 입구에서 미란유적지를 물어 찾아갔다. 미란 유적지 앞에는 서역 특산과일인 하미과 밭이 즐비했다. 유적지 답사를 마치고 나오며 한 개 사먹기로 하고, 차를 몰아 유적지로 곧장 갔다. 잘 정리된 관개수로(灌漑水路)를 건너가니 바로 모래사막이 나타났다. 이곳이 미란유적지다. 한 때 서역 제국을 호령했던 미란이 오늘날 이처럼 사막으로 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오아시스가 사막으로 변한 이유가 무엇일까.
멀리서 찬찬히 유적지를 보았다. 드넓은 모래벌판 곳곳에 흙으로 만든 유적이 드문드문 서있다. 차를 타고 그대로 들어갔다. 미란에 왔다는 기쁨에 가슴이 떨렸다. 책에서만 보고, 사진으로만 보던 곳이라 그런 것 같았다. 인도 델리박물관에서 본 ‘날개 달린 천사(天使)’ 벽화 등이 모두 이곳에서 출토된 유적들. 미란 유적을 발굴한 인물은 영국의 오렐 스타인. 1907년 1월부터 2월에 걸친 제2차 조사에서 토번유적지 1곳과 6개의 사지(寺址)를 발굴했고, 7년 후 벌인 제3차 조사 때도 9개의 사지를 발굴, 모두 15개의 사지를 조사했다.
‘날개달린 천사상’ ‘본생도’ 등 벽화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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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미란 유적의 잔해에 보이는 벽화 흔적 |
스타인이 발굴한 사지 중 제3사지, 제5사지는 특히 유명하다. 제3사지에서는 불전도(佛傳圖)와 ‘날개달린 천사상’(有翼天使像) 벽화가 나왔고, 제5사지에서는 부처님 전생을 그린 본생도(本生圖) 등이 출토됐다. 제2사지 제15사지에서는 불상이 출토됐다. 특히 제2사지에서는 다량의 소조불두(塑造佛頭)가 나왔다. 발굴된 그림들과 불상들은 현재 영국박물관과 인도 뉴델리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스타인을 “실크로드의 서양 약탈자, 즉 양귀자(洋鬼子)”라 부른다. “중국 유물을 훔쳐간 도적 같은 놈”이란 뜻이다. 물론 양귀자는 오렐 스타인 혼자만 얻어먹는 말은 아니다. 스웨덴의 스벤 헤딘, 독일의 폰 르콕, 프랑스의 폴 펠리오, 미국의 랭던 워너, 일본의 오타니 등이 공히 중국에 의해 ‘실크로드의 악마들’로 지칭된다. 이들이 타클라마칸 주변의 사라진 도시에서 발굴하거나 뜯어간 유적 중엔 불교 관련 유물들이 많다.
이미 여러 번 살폈듯이 실크로드 상에서 불교 문명이 사라지게 된 정치적인 주된 원인은 당제국의 쇠퇴와 몰락, 그리고 이슬람의 동점(東漸)이다. 이슬람의 도래는 불교조형 미술의 종말을 의미했다. 무슬림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조각된 것들을 ‘우상’(偶像)이라며 특히 싫어했다. 실크로드 주변의 오아시스 도시들에 있던, 조각이 가득한 사원과 스투파는 그들에겐 단지 파괴대상일 따름이었다. 예상대로 이슬람에 의해 사원과 스투파들은 무차별적으로 파괴됐다.
이슬람이 무너뜨린 사원과 스투파는 방치된 채 모래 속으로 사라져 갔다. 15세기경 타클라마칸 일대엔 이슬람만 남게 되자 사정은 더 악화됐다. 한 때 이 일대에 불교가 존재했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까지 빠졌다. 게다가 명나라(1368~1644)는 서방과의 교섭을 거의 하지 않고, 폐쇄의 길을 택했다. 이로 인해 기나긴 역사를 자랑했던 오아시스 도시들과 그들이 남긴 문명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 밑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천여 년 간 잠들어 있었다. 이런 도시와 유적들이 스벤 헤딘·오렐 스타인·폰 르콕 등에 의해 서서히 발굴됐고, 그와 동시에 〈대당서역기〉나 〈불국기〉 기록이 거짓이 아님이 드러났다. 특히 스타인은 자신이 이상적 인물로 존경했던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가 사실일 것으로 믿고, 정열적으로 중앙아시아 일대를 휘젓고 다녔다.
중앙아시아 무대에 처음으로 나타난 양귀자는 스벤 헤딘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였지, 고고학자는 아니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유물들은 1862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스타인의 손에 의해 비로소 체계적으로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조사하고자 한 고대 실크로드 오아시스 중 첫 번째 지역은 호탄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라왁사원지와 단단윌릭을 발굴했다. 이후 그는 여러 번 중앙아시아 일대를 돌아다니며 모래 밑에 깊숙이 숨어있던 오아시스 도시들과 유물들을 들춰냈다. 숨겨진 오아시스 도시들의 역사와 유물을 찾아낼 때마다 서방세계는 그에게 찬사를 보냈지만, 중국이 볼 때 그는 한낱 ‘양귀자’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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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외로이 서 있는 미란유적 |
상념을 접고 차를 타고 유적지로 들어갔다. 거대한 토괴(土塊) 앞에, 스타인이 토번(土蕃. 티베트) 성채로 분류한 유적 앞에 차를 세웠다. 이 유적에 대해 〈신강문물〉엔 이렇게 적혀있다. “장방형의 성은 남북 56m, 동서 70m 규모다. 네 모서리에 망루가 서 있고 성벽은 판축으로 다져 만들었으며, 서쪽에 성문으로 추정되는 2개의 유지(遺址)가 있다. 성 안 동쪽에 성청(城廳)으로 생각되는 큰 건물이 있으며, 남쪽으로 높이 10m의 토대가 서 있다.”
유적지에 들어가 자세히 살폈다. 동국대 문명대 교수에 따르면 이 성 유적은 토번세력의 서역 지배를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한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는 670년 토번에게 패했고, 8년 뒤인 678년 이경현도 역시 패했다. 그만큼 이 지역에서 토번의 세력은 막강했다. 미란의 성채는 당시 토번의 성세(盛勢)를 보여주는 유적인 것이다.
성채를 지나니 넓디넓은 사막에 군데군데 탑 같은 모양의 유적들이 보였다. 그 옛날 무수한 사람들이 지나갔을 여기. 이제는 사막으로 변한 거리를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사각거리는 모래를 밟으며 토탑(土塔)으로 보이는 유적 앞으로 갔다. 제3사지다. 탑의 한쪽 면은 파괴됐고, 상륜부는 없어졌다. 카슈가르에서 본 모르불탑을 연상시켰다. 주변의 황량한 사막 가운데 홀로 서있는 불탑.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의 영원성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것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무상(無常)의 진리’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유적 순례를 마치고 천천히 걸어 모래 평원을 빠져 나왔다. 정오가 다 됐는지 햇살은 어느 듯 따갑게 변해 있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유물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제대로 자기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는 유물들은 하나도 없었지만, 거의 1500여 년 전에 사라져 버린 고대 불교유적들의 잔해라 생각하니 단순하게 지나칠 수만은 없었다.
첫 서양 발굴자는 지리학자 스벤 헤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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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미란 유적 앞 마을인 '36병단 마을'의 하미과 밭에서 수확한 하미과 |
399년 중국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인도로 간 법현스님은 〈불국기〉에 미란유적(선선국)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지금의 미란이 당시 선선국에 속했는지 아닌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내용은 이렇다. “그곳은 땅이 거칠어 농사가 잘 안되며, 속인들의 의복은 전갈(氈褐)을 사용하는 것이 다를 뿐 거칠기는 중국 사람들의 옷과 마찬가지다. 이 나라의 왕은 불교를 믿으며, 스님은 4000명 정도 있다. 모두 소승에 속한다. 스님들은 물론 속인들도 인도의 법을 행하고 있는데, 이곳 뿐 아니라 서쪽에 있는 모든 나라도 대개 이와 비슷하다. 나라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지만 출가한 사람들은 모두 인도 말을 배우고 인도 책을 익히고 있다.”
관개수로 옆 둑에 올라 미란 유적을 다시 쳐다보았다. 아스라한 아지랑이 같은 무엇이 땅에서 올라오는 듯했다. 가물거리는 아지랑이 사이로 고대 이 곳에 살았던 사람들과 스님들이 오가는 듯했다. 그러나 이미 사라진 도시가 미란 아니던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질 뿐이라는 부처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돌렸다. 그 때 타클라마칸 사막 속에 혼자 서 있을 라왁사원지의 탑이 미란 유적과 겹쳐 보였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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