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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꿈꾸던 청년,미얀마 난민 '르윈' | ||||||||||||||||||||||||||||||
[이란주가 만난 사람]문화다양성이라는 선물을 가져 온 '난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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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주(아시아인권문화연대)
'난민'은 자신의 나라에서 박해받아 다른 나라에 보호를 요청하는 이들이다. 많은 미얀마 인들이 정치활동, 출신민족, 종교 등의 이유로 박해를 피해 우리사회에 깃들어 살고 있는데, 특히 부천에 터를 잡은 이들이 많다. 이는 예전에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원미동 석왕사 아래쪽에 자리 잡았던 부천외국인노동자(현 부천이주민지원센터)의집을 중심으로 공동체 모임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미얀마 불교인들은 주말마다 석왕사로 모여들어 예불을 드리고 모임을 가지곤 했다. 석왕사 육화전에는 미얀마 인들이 돈을 모아 미얀마에서 모셔온, 하얀 옥돌로 만든 부처님이 있다. 한국 불자들도 하얗게 빛나는 이국 부처님을 알현하기 위해 석왕사를 찾는다고 한다. 미얀마 인들은 대한민국 이주역사 발전에 큰 기여를 해 왔는데, 그중에서도 자치활동은 정말 특별하다고 할 만 하다. 체류가 안정된 난민이 많고 또 그 난민이 부천을 중심으로 모여서 활동해 온 덕분에 집약됐기 때문이다. 최근 수년 동안은 이들이 종래 활동하던 부천에서 벗어나 임대료가 더 싼 부평으로 대거 이주해 갔다. 현재 인천 부평구 부평역을 중심으로 남부와 북부에는 미얀마 인들이 세운 사찰, 음식점, 식료품점, 통신상품점, 문화공간 등이 30여개 넘게 운영되고 있어, 부평이 1만7천여 명에 달하는 국내 체류 미얀마 인들의 홈타운으로 자리 잡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또 다른 기대도 있다. 20년째 난민으로 살고 있는 미얀마 사람 '르윈'은 그림을 그린다. 그는 미얀마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 박해를 받게 되어 한국으로 피신해 온 뒤, 만성신부전증을 얻어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만났다. 그에게 그림은 슬픔과 외로움, 고통을 달래게 해 주는 고마운 존재다. 본인은 한사코 화가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는 이미 전시회를 여러 차례 가진 소박한 화가다. 동그라미도 못 그리던 사람이라고 겸손해 하는 그는, 지난 2013년에 한국을 방문한 아웅산수치 여사에게 직접 그린 초상화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는 미얀마와 한국 미술계를 연결하는 고리이기도 하다. 그가 오래도록 건강해서 좋은 작품을 많이 내고, 든든한 고리가 되어 양 사회의 교류를 활발하게 촉진하기를 바란다. 또 '난민'이라는 이름에 갇혀 있는 이런 인적 자원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한국사회가 어서 알아보면 좋겠다. 지난 6월 20일은, 난민보호라는 국제 사회의 책임을 전 세계가 공유하고자 정한 '세계 난민의 날'이었다. 혁명을 꿈꾸던 청년, 르윈(Maung Lwin)/인터뷰 진행 이란주
나와는 많이도 다퉜던 사람이다. 멀고도 먼 한국 땅에서 자기 나라를 바라보며 운동의 원칙을 얘기하고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를, 나는 자주 공격하곤 했다. 원칙보다 자존심보다 사람을 먼저 보라고. 서로 잦게 충돌했고, 언성을 높이고, 도끼눈을 뜨고, 결국은 같이 일하는 것을 포기했더랬다. 드물게 길에서 만나면 시시하게 안부를 묻기는 했지만, 협력하는 일은 없는 상태로 15년이 흘렀다. 그 사이 그는 많이 아팠고, 아픔을 이기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6월 23일, 부천의 한 식당에서 만난 그는 웃는 얼굴로 모자를 벗었고, 머리카락은 하나도 안 보였다. 그림을, 언제부터 그린 겁니까? "2006년에 시작했으니까 이제 10년 됐네요. 그 전에는 그림을 그려본 적도 없고 그리려고 생각해 본적도 없었어요. 어느 날 문득, 제가 좋아하는 아웅산 장군, 수치 여사 같은 분들 모습을 직접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변에 친구들 몇 명하고 같이 시작했는데 다들 중간에 그만두고 지금은 저만 그리고 있어요. 그림동아리 미술시간에서 활동하는 김정아 선생님에게 연필소묘를 배웠어요. 서양화가 황영락 선생님에게 유화를, 김흥수 선생님에게 수채화를 배웠지요. 처음에는 동그라미도 못 그렸는데, 지금은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고 사람들이 다 놀라요.(웃음)" 2013년 아웅산수치 여사가 한국에 왔을 때 직접 그린 초상화를 선물했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그랬어요. 행복했어요. 그 초상화는 사진을 보고 그린 게 아니라 제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습을 그린 겁니다. 그 그림을 받고 수치여사가 정말 행복해 했어요. 저도 행복했어요." 그의 얼굴에 소년 같은 미소가 떠오른다. 한국에 20년째 살고 있는 미얀마인 르윈의 미소는, 시간을 거꾸로 돌려 88년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얀마는 민주국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으나, 1962년 네윈의 쿠데타로 기나긴 독재와 가난을 맞아들였다. 견디다 못한 국민들이 1988년 초부터 본격적인 저항운동을 벌이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사망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저항과 혁명의 열기는 고조되고 계엄령이 선포되는데, 미얀마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인 아웅산수치 여사는, 총부리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시위 대중을 향해 연설하며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된다. 1988년 8월 8일 8시 8분을 기해 전국의 학생, 승려 등 많은 시민들이 일제히 일어나 민주항쟁을 벌이며, '군부퇴진, 다당제와 직선제 시행’'등을 요구한다. 이에 주춤한 네윈은 일선에서 물러나지만, 곧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최소 2천명, 최대 2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데 사건의 진상과 정확한 희생자 규모는 지금까지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군부는 불법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나라 이름마저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꿔버렸다. 같은 해 수치여사와 정치적 동지들은 정당 NLD(민족민주동맹)를 창당하고, 1990년 총선에서 의석의 82%를 차지하는 큰 승리를 한다. 그러나 군부는 이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정권이양을 거부했으며, 오히려 행정, 입법, 사법권을 모두 차지하고 나라를 감시와 억압, 자유박탈과 가난으로 몰아넣었다. 군부는 국회의원 당선자,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벌였다. 수치여사를 가택연금하고, 수천 명을 감옥으로 끌어가 모진 고문을 했고, 10만여 명을 해외로 내몰았다. 수치여사는 총 15년에 달하는 긴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정치적 지도자 역할을 하고자 노력했다. 국민의 지지도 계속 이어졌다. 여사는 가택연금 해제 후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2012년 4월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2013년에는 광주를 방문하여 2004년 수상했으나 직접 받지 못했던 광주인권상을 직접 받았다.
8888때 르윈은 양곤대에서 학생회를 이끌었다. 학생들을 교육하고 조직하며 혁명을 향해 나아갔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쫓기고 지쳐간다. 때마침 한국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산업연수생을 들여오기 시작했던 터다. 혁명가는 더 이상 국내에서 버틸 수 없음을 절감하고 친구들이 만들어다 준 위장 여권으로 산업기술연수생이 되어 한국으로 온다. 1996년 일이다. 몇 년 후, 르윈을 비롯해 비슷한 이유로 한국에 와 있던 몇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NLD 한국 지부를 만들고 본부로부터 공식적인 지부로 인정받았다. 당시 당원 대부분이 체류비자가 없었는데, 그중 일부가 법무부 출입국의 단속에 걸리면서 신변 보호를 위해 난민인정 신청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높아졌다. 꽤나 길고 격렬한 논의 끝에 당원 전부가 한국 정부에 난민인정 신청을 했다. 한국 사회는 이때 처음 '난민'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고, 좌충우돌했다. 자신의 나라에서 박해받고 있으니 보호해 달라고 손을 내밀었던 난민들은, 감히 손을 내밀었다는 이유로 오히려 비난당하고 거부당했다. 네 주장이 사실인지 문서와 근거자료를 내놓으라고 추궁 받았다. 난민들은 상처입고 쪼그라들었다. 르윈과 동료들도 그랬다. 그들의 모든 정치활동, 반정부활동은 난민인정을 받기 위한 쇼라는 비아냥을 듣기 일쑤였다. 수치스럽고 분노 가득한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르윈은 만성신부전증을 진단받았다. 우연히 혈압을 쟀다가 고혈압이 발견되고, 이어 찾아간 병원에서는 당장 입원해서 혈액 투석을 받으라는 말을 들었다. 그 뒤로 그는 8년 동안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 받다가, 멀리 미얀마에서 달려온 동생에게서 신장을 얻어 이식 받았다. 그 사이 2003년에는 난민인정신청을 했던 당원 중 르윈을 포함한 3명이 ‘본국에서 정치활동을 하다 박해 받았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대한민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슬픔과 외로움, 고통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린 그림을 받아든 수치여사가 무척 행복해 했다니, 그는 또 얼마나 행복했을 것인가! 그림 그리려면 공간이 필요할 텐데, 주로 어디서 그려요?
"집에서요. 그림배우면서 몇 년은 화실에도 나갔는데, 지금은 돈을 못 내니 화실에 가기가 좀 그래요. 선생님들은 돈 안 줘도 되니까 그냥 오라고 하지만, 저는 불편해서 갈 수 없어요. 집에서는 유화를 못 그려요. 너무 좁고 냄새도 잘 안 빠지니까요. 그래서 주로 수채화를 그리죠. 이번에 수치여사 70세 생일 선물로 그린 그림도 수채화예요." "저는 그림이 참 고마워요. 아프고, 돈 걱정도 많고, 나라 걱정도 많은데 그림 그리면 그런 거 다 잊거든요. 신장 이식 받은 사람들이 10년 살면 많이 사는 거래요. 제가 수술 받을 때 의사들이 6년 정도 더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벌써 7년째 살고 있거든요. 이게 다 그림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하하." 전시회도 여러 번 했지요? "네 번 했어요. 그룹전 두 번, 개인전 두 번이요. 제가 화가도 아니고 돈도 없으니까, 부천시청 갤러리나 문예전시관처럼 돈 안 드는데서 했어요.(웃음) 지금은 그림도 많이 그리지 못해요. 몸도 아프고 화구가 너무 비싸기도 해서요. 유화 재료는 원래 비싸고, 수채화는 오래 보관하려면 비싸고 좋은 종이에 좋은 물감, 물도 깨끗하고 좋은 물 써야 하거든요. 그래서 좋은 물감과 싼 물감을 섞어서 써요." 어렵게 배운 그림인데, 누군가에게 가르쳐주기도 하나요? "저는 화가도 아니고 그냥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여기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뭐 저한테 가르쳐달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요.(웃음) 하지만 나중에 미얀마에 가면 아이들을 가르쳐보려고 해요. 제가 친구들과 돈 모아서 만든 학교가 여러 개 있어요. 그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싶어요. 미얀마에는 초중고등학교에 미술 교육이 없거든요. 요즘은 대학에 과목이 생긴 거 같은데,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그것도 없었어요. 미술 공부하고 싶으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3년짜리 미술학원에 가는 게 다였어요." 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수입활동을 못하고 있는데... "동사무소에서 주는 지원금을 40만 원 정도 받아요. 그거로 월세 25만원 내고, 가스 전기비 내요. 먹고 병원 가는 것은 동생이랑 동료들이 도와줍니다. 이식신장 거부반응을 줄이기 위해 약을 먹고 있는데, 이 약이 부작용이 아주 심해요. 특히 뼈와 관절이 많이 아픕니다. 얼마 전에도 관절 두 군데 수술하는데 200만원이나 들었어요. 고맙게도 동료들이 도와줘서 해결했어요. 제 동생이 저에게 신장을 주러 왔잖아요. 그 뒤로 그냥 여기서 지내고 있어요. 법무부에 사정을 얘기하니 동생도 난민인정을 해 주데요. 동생은 저한테 신장도 주고, 돈도 주고... 아주 미안하지요." 부천에는 유독 미얀마 인이 많이 살고 있다. 그것은 부천 소재 석왕사와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이 대거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던 90년대 중반에 활동을 시작한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은 원미동 석왕사 아래쪽, 그러니까 지금은 룸비니 유치원이 들어선 그 자리에 문을 열었다. 당시 그 옆에는 일주문도 서 있었는데, 일주문 양 기둥에 방이 한 칸 씩 있어 네팔공동체와 미얀마공동체가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 썼다. 대부분이 불교도인 미얀마 인들은 주말마다 석왕사로 모여들어 예불을 드리고 모임을 가졌다. 석왕사 육화전에는 미얀마 노동자들이 돈을 모아 미얀마에서 모셔온 하얀 부처님이 있는데, 미얀마 불자들은 그 앞에 앉으면 온 몸과 마음이 흐르르 녹아 고향집 어머니 앞에 앉은듯하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부천에는 많은 미얀마인들이 터를 잡아 살고 있다. 미얀마 인들은 대한민국 이주역사 발전에 큰 기여를 해 왔다. 외국인산업기술연수생제도 폐지 운동, 2003년 미등록노동자 강제추방 저지 운동, 난민운동을 주도적으로 해 온 것이 그렇다. 또 다른 나라 출신 이주민에게서는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주민 자치운동이 특히 그렇다. 대한민국은 이주노동자에 대하여 단기간 순환정책을 쓰고 있는 탓에 노동자가 오래 일하며 살 수 없다. 전에 외국인 관리가 엄격하지 않아 비자 없이 일하는 미등록노동자가 많았다. 10년 이상 체류하는 이들도 많았으므로, 이들이 단속을 피해가며 자치모임을 주도하여 생활·문화·노동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고용허가제 실시를 앞두고 벌어진 대대적인 미등록자 추방 정책은 이마저도 씨를 말려 버렸다. 다행히도 미얀마 인들은 2000년경부터 벌어진 난민운동에 힘입어 다른 양상을 선보였다. ‘정치적 의견, 출신민족, 종교에 따른 박해’ 등 다양한 사유로 본국을 떠나 온 이들이 난민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며 이주민 자치활동의 맥락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2014년 말 현재 모두 9,539명이 난민인정신청을 하여 471명이 인정받았는데, 그 중 미얀마 출신이 153명(자료출처 : 난민인권센터)이다. 난민 출신국으로 보면 가장 많은 수다. 인도적체류허가자 30명까지 합치면 무려 183명이 안정적인 체류를 하게 되면서 NLD, 미얀마 공동체, 버마행동 등 다양한 정치·운동조직이 활성화 되었으며, 자체적으로 한국어와 노동법 교육, 노동상담, 갈등 중재 등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 이들은 종래 활동하던 부천에서 벗어나 임대료가 더 싼 부평으로 대거 이주해 갔다. 부평역을 중심으로 남부와 북부에는 미얀마 인들이 세운 사찰, 음식점, 식료품점, 전화기와 통신상품점, 문화공간 등이 30여개 넘게 운영되고 있어, 부평이 1만7천여 명에 달하는 국내 체류 미얀마 인들의 홈타운으로 자리 잡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동료들과는 자주 만나죠? 주로 어디서 만나요? "정당 친구들은 NLD 사무실에서 만나요. 지난주 일요일(6월21일)엔 수치여사 70세 생일 파티를 가졌어요. 물론 생일 주인공은 없지만 우리들끼리 모여 같이 축하한 거죠. 다른 친구들을 만날 때는 부평으로 가요. 우리 친구들이 거기서 식당을 하고 있거든요. 식당이 되게 많은데 저는 2군데 정도만 알고 거기만 갑니다. 가끔 속상할 때도 있어요. 우리가 돈 벌고 잘 살기 위해서 한국에 온 것이 아닌데, 어떤 비즈니스 하는 친구들은 너무 자기만 먹고 사는데 급급하거든요." 자기 생활을 잘 꾸리는 것도 중요한데, 그럼 어떻게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우리 친구들 스스로 나라를 위해서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저랑 비슷한 걱정을 하는 동료들이 네 명 정도 있어요. 여기서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에 가서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저는 나라에 가서 교육 쪽 일을 하고 싶어요. 한 친구는 정치에 뜻이 있고, 또 한 친구는 언론 활동을 하고 싶어 하죠. 그런 일을 하자면 우리나라 상황이 어떤지 잘 살피고 있어야 하고, 준비도 잘하고 있어야죠. 물론 쉽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런 일을 다 내려놓고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건, 그건 아니잖아요." 나라로 돌아가려는 계획이 있나요? "수치여사를 만났을 때 의논하니, 올해 선거가 끝나고 NLD가 정권을 잡으면 해외에 있는 모든 동지들이 다 모이자고 하시데요.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 같아요. 지금 수치여사가 70세거든요. 정부는 올해 말에 있을 대선에서만 수치여사를 막으면 다음 선거가 있는 5년 후에는 수치여사가 너무 나이가 많으니 나서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지금 선거인 명부를 정부가 다 뒤집고 있어요. 유권자들의 이름, 나이, 주소 정보를 다 바꿔놓고 그것과 맞지 않으면 투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정권 잡는 것을 방해하려는 거죠. 만약에 수치여사가 기적처럼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지금 법으로는 제대로 대통령 노릇을 할 수가 없어요. 군부에 모든 권력이 몰려 있는 구조거든요. 이번 선거에서 이기든 지든 내년에는 돌아가야겠다고 동료들과 얘기하고 있어요." 지금 건강상태를 생각하면 돌아가기를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가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나 봅니다. "제가 먹는 약이 미얀마에 없다는 게 문제예요. 의사들과 상의하니까 3개월에 한번 씩 와서 검사받고 약 받아 가래요. 하하, 돈도 없는데 큰일 났어요. 88년 당시 함께 했던 동료들과 얘기하고 있는 건데요, 우리 민주화운동 역사를 담은 기념관을 만들고 싶어요. 미얀마에 있는 동료들 중에는 화가도 여럿 있으니 우리 활동과 역사를 그림으로 그려 기념관에 두고 후세에 전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아이들 그림도 가르쳐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아요." 그의 말은 여운이 길다. 그 여운을 되씹으며, 나는 슬프게 반성한다. 그에게 사람을 보라고 그리 몰아댔으면서, 나는 왜 그를 보지 않았던가. 그의 마음속에 깃든 혁명의 꿈과 추억,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원칙과 자존심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왜 보려하지 않았을까... 그에게 받아온 그림, '먼 옛날에(once upon a time)'는 종이에 수채물감으로 그려졌다. 수채화를 배우기도 전에 ‘그냥’ 그린 거란다. 고즈넉한 작센 건물과 길, 그 길을 오가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던 청년 르윈. 그의 청년과 중년은 그림 속에서 조용히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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