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 교리는 불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만 있으면 되지 굳이 왜 교리가 필요한가? 교리는 심령을 메마르게 하고 신앙을 차갑게 할 뿐이다. 그래서 오직 성경만 있으면 된다. 맞습니다. 오직 성경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 무서운 오류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나름 정의를 내릴 때 그 자체가 교리가 된다고는 생각지 못합니다. 그러면 자기 맘대로 교리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잘못된 걸 알 수도 고칠 수도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문제를 감지했고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최초로 공회를 열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할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교리로 확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리는 성경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닙니다.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화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리는 신앙의 뼈대와 같습니다. 왜 교회가 교리를 체계화했을까? 그 이유는 성경의 내용이 방대하고 가르치는 내용의 중요성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회원이 되고 세례를 받는 과정에서 교회는 그가 가진 믿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교회는 사도신경을 만들어 냈고 사도신경은 가장 축약된 성경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신자라면 고백해야 하는 최소한의 내용이고 이 고백으로 교회는 서로의 믿음이 같음을 확인합니다.
둘째, 교리를 성경과 같은 권위 혹은 그 이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교리는 중요하나 교리가 성경을 대체하지 못합니다. 장로교가 표준으로 채택하고 따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자체가 이것을 천명합니다. 성경은 완전하지만, 교리는 아닙니다. 교리는 아주 안정적이지만 결함과 오류가 있습니다. 정통교회라 할지라도 각 교파가 추구하고 인정하는 교리가 다릅니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오직 성경의 원칙을 지킵니다. 이 말은 교리가 중요하고 성경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지만 교리를 성경과 같거나 그 이상의 권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리는 언제든 변경이 되나 성경을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교리는 말씀묵상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말씀묵상은 반드시 성경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리에 벗어나 해석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은 교리에 대한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을 고백하며 입교와 세례 문답으로 설교를 통해, 교리 공부를 통해 교리를 이미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 일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성경을 해석할 때 자연스럽게 그 토대로 해석하게 됩니다. 교리가 뼈대라는 비유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됩니다. 교리는 신자에게 내재화되는 것이지 매번 교리를 찾아서 확인하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사랑을 어딘가에서 찾아보고 확인해서 사랑한다고 고백합니까? 오히려 문제는 그게 아니라 교리를 알고 있으니, 교리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기사에 50년 사모로 살았으나 황혼이혼을 고려한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모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산 겁니다. 그 목사가 신학을 하지 않은 것도 교리를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신학교에서 배우니까,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하나님 말씀을 삶에 적용하지 않은 겁니다. 정통적 교리를 고백하고 알고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는 뼈대와 같습니다. 그러나 뼈대만 있고 살이 없는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너무 혐오스럽습니다. 말씀을 적용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이는 마치 디모데후서에 나오는 어리석은 여인들처럼 항상 배우나 끝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반대로 뼈는 없고 살만 있으면, 이 또한 혐오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뼈와 살을 다 갖추고 있을 때 바로 서서 걸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가르치는 자에게서 말씀 즉 교리를 듣고 배워야 하며 스스로 말씀을 묵상함으로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실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