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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이미지 읽어내기 11. 불 – 정결하게 하는 것
성경은 전체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를 표현하는 이미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 이미지 각각을 면밀히 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어떻게 우리를 더 큰 이야기에 연결시키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지를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에서 세례 요한이 보낸 몇몇 사람들의 인사를 받습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힌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군중들에게 말하기를, 헤롯 안티파스가 진정한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동생의 아내를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메시아도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 안티파스는 요한을 적대시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고, 우리가 알고 있듯이 결국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그는 예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은 예수님이 두루 다니시면서 사람들을 고치시는 그런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이전에 예수님께 대해 가졌던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공개적으로 설교할 때, 즉 그가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 그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자기 뒤에 오시는 이가 자기보다 더 능력이 많으실 것인데, 그 이유는 그분이 성령과 불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이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요? 분명히 누군가가 문둥병자와 저는 사람,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을 고치러 돌아다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말은 훨씬 더 극적인 것을 의미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자기가 장차 올 엘리야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가 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칭찬으로 답을 하셨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세례 요한이 오리라 한 그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야 뒤에 오시는 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분은 불을 가져오실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생각하는 형태는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누구였습니까? 그리고 그 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구약성서에서 불에 대하여 생각할 때, 우리는 당연히 엘리야라는 인물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번은 엘리야가 반역하는 이스라엘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엘리야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를 대적했고,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멸절시켰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경우, 열왕기상 18장에서는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한쪽은 엘리야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여호와의 편에 선 인물입니다. 그리고 다른 쪽은 온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바알신의 선지자들입니다. 바알은 이교도의 신으로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합 왕의 시절에 그 신을 섬겼습니다. 바로 그들이 큰 싸움을 벌였습니다. 엘리야는 그 싸움에 대하여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우리가 제단을 쌓고 기도를 드려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 제물을 태워달라고 하자.”
바알의 제사장들도 다음과 같이 합니다. 그들은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바알에게 불을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무너진 주님의 제단을 다시 쌓고 그 위에 제물을 올려 놓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놀라운 일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는 도랑에 물을 가득 붓고 불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불이 내려 제물을 태우고 물을 핥듯이 말려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장면인 열왕기상 19장에서 엘리야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로부터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겁을 먹고 도망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산, 곧 호렙산이나 시내산까지 갑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내 보이셨고 엘리야는 급하고 강한 바람을 들으며 강력한 불도 보았으며 지진도 일어났지만, 그런 일들 가운데는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매우 세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방식으로 그에게 응답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런 강력한 횃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 극적인 일이나 외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제 엘리야에게는 해야 할 새로운 일이 생겼고, 그는 돌아가서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사역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마지막에 엘리야가 떠날 때가 되었을 때, 그는 하늘로 올려졌고 불말과 불마차가 그를 실어갔습니다. 이것이 열왕기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야는 그처럼 불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신약성경에서 사람들이 엘리야를 언급할 때 종종 불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불이라는 주제는 구약성서에 계속해서 등장하는데, 특히 심판의 불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불은 정결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말라기 3장을 보면,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오실 때, 그 모습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불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주님은 좌정하셔서 레위 자손을 정결하게 하시며, 그 결과 그들이 여호와께 의로운 제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 불은 경건치 아니하고 합당하지 아니한 모든 것을 소멸할 것이므로, 경건하고 합당한 것은 불로 단련한 귀한 보석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그래서 금이나 은 같은 것들은 더욱 그 진가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23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불과 같고, 반석을 부수는 망치와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제안을 제시하시거나 논평을 하심으로 현안을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마치 공동체를 휩쓸고 지나가는 불처럼 모든 악한 것을 제거해 버립니다. 그 그림은 신약성서에도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그것은 적절한 경고입니다.
그것은 분노의 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화 내고 짜증을 부리면서 불같이 채찍질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선한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바라시며,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보다 못한 것은 모두 깨끗이 없애 버리시고 불태우셔야 합니다. 물론 이런 일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할 때에도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불의 혀 같은 것이 제자들 각 사람의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그 위대한 장면인 오순절의 장면은 출애굽기 40장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빛나는 광채로 나타나 성막에 거하는 장면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때 급하고 강한 바람과 함께 불의 혀 같은 것이 제자들 위에 임하였고, 그들은 하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으며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여러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처럼 그 자리에는 바람이 있었고 불이 있었습니다. 마치 엘리야가 다시 나타난 것 같았습니다. 이것은 사실 세례 요한이 자신도 모르게 말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즉, 장차 오실 분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한 바로 그것입니다. 그때부터 그것은 그리스도인 소명의 일부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위험한 소명입니다. 여러분이 바람과 불을 불러일으킬 때, 바람이 집안의 모든 것을 어지럽게 흩어버릴 것입니다.
불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입니다.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때로는 우리는 그런 일이 최후의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심판의 불, 즉 어떤 사람의 사역에 있어서 옳지 않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어떤 터(기초)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터는 그리스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물을 짓고, 어떤 사람들은 나무와 풀과 짚으로 건물을 짓습니다. 불이 지나가면 나무와 풀과 짚은 다 타버릴 것이나 말라기 3장과 같이 금과 은과 보석은 연단되어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진정 어떤 사람들인지 그 진면목이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최후의 불 심판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한 창조물을 깨끗하게 하시려고 부패하고 훼손된 모든 것을 제거하시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특히 서방 교회의 오랜 중세 시대에 그랬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진노하시고 사람들을 벌하시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심코 명령을 어길 때, 그것도 어떤 것이든 한번만 죄를 지어도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창조의 선하심과 그 선한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므로, 그분은 자신의 창조물을 부패시키고 부식시키고 훼손하고 파괴하는 것을 허용하실 수 없으며, 특히 그분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인 인간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것을 허용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이 자신의 새로운 세계에 머물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이 그것을 태워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의 끝 부분에서 우리가 얻는 그림입니다.
그렇다면 불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새 창조에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정결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파괴해버립니다. 그런 것은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명한 구절이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마주합니다. 그것은 베드로후서 3장에 있는데요, 그것은 고린도전서 3장과 비슷합니다. 그 본문에서 베드로서신은 장차 올 불에 대하여 들려줍니다. 거기에 나오는 그리스어 본문은 이해하기 어렵고, 어떤 것은 매우 난해한 단어이며, 그 본문에 대하여 사본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주요 주제와 비교해 본다면 그것은 매우 특이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본문이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오래된 번역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완전히 태워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시는 것처럼 보이게 옮겼습니다. 신약성서의 나머지 부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종합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실 새 창조가 무에서 나온 새 창조가 아니라 옛 창조에서 나온 새 창조임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헬라어 단어가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불이 그 일을 마치면 하나님의 세계의 실체, 그것의 진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나타나며 그리고 전시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오래된 약속이 성취될 것입니다. 물론, 초대 교부들도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어떻게 살리실 것인가에 대해 논쟁했는데, 그들에게는 이미 순교를 당한 사람도 있었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방인들에게 화형을 당하여 그들의 몸과 뼈와 그것들을 강에 던져졌습니다. 그때 교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가 되면 당신들의 부활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알겠지요.’ 그러나 2세기 말과 3세기 초 이레나이우스(Irenaeus), 키프리안(Cyprian),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 같은 교사들, 그들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하나님에게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을 곤경에 빠뜨리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드셨고, 옛 창조의 폐허에서도 새 창조를 창조하시기 위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쉽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베드로후서 3장 구절에 대해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흥미롭고 중요하기는 하지만 텍스트 표면에 있는 작은 주름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이 선한 까닭은 심판 받아야 할 모든 것을 심판하기 때문이며, 처리되어야 할 모든 것을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새 창조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다음 강연에서 다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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