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 정치의 격동속에서
1. 왕건은 어떻게 통일대업을 이룩하였나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한대에 이르면서 점점 통치체제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이시기에 나타난 것이 견훤, 궁예, 왕건이다.
궁예는 신라의 왕실 출신으로 양길의 휘하에서 활약하다가 나중에 양길까지 격파하고 태봉을 건국하였다. 궁예는 집권 초기에는 미륵불이라 칭하여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보여줬으나 세월이 갈수록 의심 많고 포악한 성격을 드러내었다. 결국 궁예는 왕위에서 쫓겨나고 왕건이 왕으로 추대되었다. 견훤은 경상도 상주 가은현 농민인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견훤은 체격이 장대하고 재주가 비범했다. 그는 신라의 군인으로 서남해안 지역을 지키다가 무진주를 점령하고 완산주까지 점령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그 후 궁예를 내쫓고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왕건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
왕건은 송악 출신으로 해상무역에서 부를 축척하여 호족이 되었다. 왕건은 궁예밑에서 대활약을 보였다. 궁예의 폭정이 심해지자 홍유,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등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왕건과 견훤은 초반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가 왕건에게 원군을 요청해왔다. 이에 왕건이 원군을 보내 신라를 도움으로써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러 번 전투를 벌였지만 결론을 짓지 못하고 결국은 다시 화친을 맺었다. 이후 견훤은 금강을 사랑하여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결국 왕자들이 난을 일으키고 견훤을 유폐시키고 금강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이에 견훤은 왕건에게 도망하여 귀순하고 곧이어 신라의 경순왕도 고려에 귀순함으로써 왕건의 후삼국 통일은 눈앞에 다가오게 되었다. 왕건은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내응을 받고 결전에 대비하였다. 결국 왕건은 경북 선산군 해평면에서 신검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여 왕건이 왕위에 오른지 19년만인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왕건이 견훤을 이기고 후삼국을 통일한 가장 큰 요인은 민심에 있었다. 견훤은 대외관계에서도 왕건을 앞섰으나 신라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고 또 후백제 내부의 분열이 정권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신라의 신하로서 왕을 죽인 것이 자기 모순이며, 반역으로 간주되어 민심을 잃었던 것이다.
이에 반면 왕건은 신라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처음부터 신라에 대한 유화정책과 협조관계를 유지하였다. 호족들에게도 지지세력을 확보하였고 백성들의 과중한 세금을 감면해 주었고 또 노비된 자를 풀어주는 등 백성들의 고통을 들어주는 정책을 하였다. 그리고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국으로 생각하여 따뜻하게 맞이하는 등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다.
2. 왕의 업적은 아내와 후손의 수에 비례한다
왕의 경우 대가 끊겨서는 안된다는 점 때문에 일반 신하들의 입장에서도 일단 왕실은 번성하여 후계가 안정되기를 바랬다.
고려시대 왕의 가족관계는 몇가지 점에서 조선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먼저 왕의 부인의 경우 조선은 정비와 후궁으로 명확히 구분하였다.
정비는 한명이며, 죽거나 폐비되었을 경우 다시 간택되었다. 고려는 정비와 후궁의 구별이 원 간섭기 이전까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소생자녀들 또한 차별이 없었던 점도 특이할 점이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의 부인은 신혜왕후 유씨와 장화왕후 오씨 두 명뿐이었다. 태조는 왕위에 오른 후에 전국의 유력 호적의 딸과 지속적으로 혼인하였다. 이는 당시 정치적 상황에 따른 태조의 지방호족 포섭책이었다.
태조는 이와 같은 지방세력가와 혼인을 통하여 왕권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으며 후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918년 42세의 나이에 즉위한 태조는 신혜왕후 유씨와 장화왕후 오씨 2명의 부인이 있었으나 당시 아들로는 장화왕후 소생의 무가 유일하였다.
왕권의 안정을 위해 박술희의 주청으로 921년 무는 열 살의 나이에 후계자로 책봉되었다.
고려 전기 국왕혼인의 양상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호족의 협조하에 국가를 이끌어가야 할 시기에는 호족과의 혼인정책을 하기 위해서 근친혼을 중점적으로 시행하였다. 이후에는 오히려 왕실의 번영을 위하여 왕실혼인을 개방하였다. 이는 왕실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대체로 전근대사회 국왕의 경우, 할 일 많고 실제 뛰어난 업적을 수행한 임금들은 아내도 많았고 자식도 많았다. 국왕의 업적은 대체로 아내와 자식의 수와 비례한다고 말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3. 무신 정중부의 일기
고려초엔 무신과 문신의 차별이 많았다. 거기에 무신들은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젊은 문신이 나이 많은 무신의 뺨을 때림으로 인해 결국 피비린내나는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정중부는 이후 이의방, 이고 등을 제거하고 최고집권자의 위치에 오른다. 거제도로 쫓겨난 전 임금 의종은 1173년 김보당의 난에 연루되어 결국 천인 출신의 장군 이의민에게 잔인하게 살해된다. 하지만 정중부 역시 명종 9년 청년장군 경대승에 의해 살해된다. 경대승, 이의민에 이어 1196년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1258년까지 60여 년간 최씨 집권기가 지속된다.
4. 삼별초는 무엇을 위해 싸웠나
삼별초란 좌별초와 우별초, 신의군 등 세 개의 별초군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그것이 설치된 것은 대략 1220년대의 어느 때이며, 당시는 최씨 무인정권의 두 번째 집권자 최우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무인정변 이후 지배층의 수탈이 더욱 심해지고, 한편으로는 집권자들이 권력쟁탈전에 급급한 나머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이완되자 백성들이 그 틈을 이용하여 항쟁하였다. 삼별초는 그런 백성들을 도적이라 칭하고 진압하는 부대였던 것이다.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핵심적인 군사력인 것이다.
몽고와의 전쟁에서 최씨정권은 항쟁론을 내세우면서 정권유지를 할려고 하였다. 그래서 실제로 최씨정권은 전쟁 상태를 적절히 이용하여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다.
강화론이 현실적인 정책으로서 설득력을 더해가고 반대로 최씨정권이 내분으로 약화되어 강화론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을 때, 최씨정권의 몰락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결국 강화론자를 대표하던 문신 유경이 정변을 일으켜 최씨정권을 무너뜨리고 곧바로 강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변에 동원된 군대는 최씨정권 말기에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준이 지휘하는 삼별초였고 이들은 강화에 반대하였다.
무인정권 내부에서는 국왕 원종을 폐위하고 몽고와 다시 항쟁하자는 주장이 일어났고, 무인정권 안에서도 강경파였던 임연이 삼별초를 동원하여 김준을 제거하고 이어 국왕마저 폐위한 뒤 재항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몽고가 군대를 보내 시위하면서 원종을 복위시키라고 요구하자 곧 굴복하고 말았다.
무인정권이 붕괴되자 무인정권의 주력 부대였던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국왕과 강화파로 구성된 정부는 삼별초에 없애고 명단을 압수하였는데, 이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어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삼별초가 단기간에 세력을 확장하고 여러 해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삼별초의 병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의 광범한 지지와 호응이 있었기에 삼별초가 또 하나의 고려 정부로 존재하면서 몽고 및 몽고와 결탁한 개경 정부와 계속 항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무인정권의 붕괴와 강화파의 승리는 지배층 내부의 권력투쟁일 따름이었고 몽고와의 강화는 새로운 권력층과 침략자의 결탁이었다. 따라서 정쟁 중에 몽고 침략 및 지배층의 과중한 수탈에 맞서 싸워 왔던 이들로서는 이제 몽고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쳐오고 또 지배층의 수탈이 더욱 심해질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다시금 항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무력 기반이었고 권력 내부의 정쟁에서 무인정권이 패배하자 그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따라서 그 해답은, 삼별초가 떠받들고 있었던 무인정권을 회복하고, 가깝게는 눈앞에 닥친 정치적 보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싸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인정권을 붕괴시킨 세력이 몽고와 결탁했기 때문에 삼별초의 반란이 대몽항쟁의 연장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그것이 무인정권의 앞잡이였던 삼별초의 전력이나 권력 투쟁에서 파생된 정변을 정당화 시켜 주지는 못한다.
5.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한 까닭
신돈이 집권한 시기에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다.
공민왕은 신돈을 내세워 그에게 일반 정치에 관해서 거의 전권을 위임하였다. 신돈은 지방의 이름없는 승려 출신이어서 기성 정치세력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신돈 자신이나 일가붙이가 토지와 종을 수도 없이 거느린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개혁을 주저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고려 사회를 전반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공민왕에게는 이렇게 속세에 물들지 않은 신돈이야말로 자신의 정치를 일선에서 대신해 줄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런 개혁을 도운 세력이, 새로운 정치사상을 가진 젊은 신진사대부들 이었다.
신돈의 등용과 그의 개혁은 근본적으로 공민왕이 의도한 것이었으므로, 정치적인 면에서 공민왕의 신돈을 통한 정치운영은 측근정치의 한 변형이라는 면과 국왕에 의한 개혁 추진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돈 개혁은 정치 사회 경제 등 각 분야에 걸친 당시로서는 포괄적인 조처들이었다.
신돈의 개혁의 의의는 비록 그의 죽음으로 개혁이 실패하였다고 하더라도 권세가를 억누르며 일반민의 입장에서 개혁을 추진하였고, 공민왕의 왕권강화를 뒷받침해 주고, 새로운 정치세력인 신진사대부가 그의 개혁 속에서 성장하였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6. 최영과 이성계가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까닭
최영은 당대의 명문 집안 철원 최씨 출신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직계 선조들은 그다지 현달하지 못했고 아버지도 그의 나이 16세때 일찍 죽었다. 그런 까닭에 최영도 과거 등을 통하여 문신으로 출세하지 못하고, 남보다 뛰어난 완력을 바탕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이성계는 전주 이씨 출신이다. 1356년 공민왕이 반원 개혁정치를 단행할 때 이자춘이 고려에 귀화하면서 다시 고려의 관직은 받고 활동하였다. 이성계는 개경에 기반이 없던 자신의 불리함을 뛰어난 활솜씨 등 탁월한 무재를 바탕으로 극복하여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다.
우왕말기에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적극적이 왜구 토벌이 효과를 거둠에 따라 무장들의 정치적인 지위가 높아졌다. 그 중에서도 최영과 이성계가 중심이었다. 왜구의 침입이 격심해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들은 고려의 장수들 중 최영과 이성계만을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우왕때의 왜구 토벌에서 명성과 권력을 함께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이성계는 그의 근거지인 동북면 출신으로 이루어진 사병을 거느렸는데 이들은 이성계가 출세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7. 전환기의 갈림길, 고려의 충신이냐 조선의 공신이냐
고려 말 사대부는 사상의 차이에 의해 두 파로 나누어 지게 되었다.
수성파 사대부는 혈연 매개로 하는 가족 중심의 인간 관계를 중시하였다.
대의보다 사적인 인정을 강조한다.
이와 달리 정도전과 같은 사대부는 주자학을 통하여 국가의 공적 관계, 사회적 명분을 중시하였다.
혈연 관계로 비유된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절대 불변의 인간 관계가 되므로 영원하고 변경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이들은 이미 주어진 군신 관계를 어떠한 여건에서도 받아들이고 지키려 하였다.
선왕인 공민왕의 말에 복종해야 했고 군주에 대한 충성은 절대적이었다.
이들이 많은 문제점을 보면서도 결국 고려왕조를 부인하지 못하고 충신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정도전과 같은 창업파 사대부는 주자학의 대의명분에 충실하였다.이들은 ‘대의’하는 명분을 내세우며 혈연적이고 사적인 가치관을 비판하였다.
과거 춘추시대의 역사적 사례를 통하여 신하의 왕위 찬탈에 관한 시시비비를 가리고 엄정하게 평가하였다. 군주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충성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에 합치될 때에만 정통이며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혈연으로만 보증도는 군주상에 만족하지 않고 천명과 안심에 순응하는 군주상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명분에 맞는 정통의 군주를 원하게 되고 이에 어긋난다면 이를 정정하고 바꿔야만 했다. 그래서 유교의 명분론과 춘추대의에 비춰볼 때 우왕이 왕이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따라서 명분에 맞지 않은 우왕과 그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창왕을 물러나게 했다.
◎ 자주와 사대의 차이
1. 황제국체제를 지향한 고려국가
고려국가는 실제 여러 면에서 황제국체제로 운영되었다.
고려는 중국에 대해 외교적으로 제후국의 입장을 취하였으나, 국내에서는 황제국의 제도와 형식을 취한 이중체제로 운영하였다. 이는 당시의 세계국가인 중국과 가장 근접해 있는 지정학적 조건을 염두에 둔 외교적 방안의 하나로 이해된다.
국왕의 명령은 성지, 조 , 칙, 제라 하였다. 백성들은 국왕을 폐하라 하고 국왕은 스스로를 짐이라 하였다. 왕위계승자를 태자라 하고 국왕의 어머니를 태후라 하였다. 고려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기타 복장이나 의식에 있어서도 중국과 대등하게 하였다.
다른 왕실 용어들은 전부 황제국 용어로 하면서 최고 통치자와 그 부인을 왕과 왕후라는 제후국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 때문이었다.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외의 왕실 용어는 전부 황제국의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 묘지명이나 금석문을 보면 돌아가신 왕을 ‘선황’ 이라고 표현하거나, 당시의 국왕에게 ‘황제가 만세토록 살기를 원합니다’ 하고 표현하고 있어 고려의 백성들은 실제로 고려국왕을 황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황제국체제는 제천 즉 하늘에 대한 제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본래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존재는 황제만 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국왕은 원구제라 하는 하늘이 제사를 지냈다.
황제국의 모습은 중앙정치제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황제국체제하의 3성6부체제로 운용되었다. 이 외에도 황제국체제의 5군 편성으로 한 점이나, 수도인 개경을 황도라고도 하고 개경의 내성을 황성이라고 표현한 점등은 다 황제국체제를 지향한 고려국가의 일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려의 황제국체제의 모습은 후기에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변하였다. 충렬왕 때에 원나라는 자기들과 같은 황제국 수준의 제도와 칭호를 무례하다고 하여 고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려는 원과 유사한 것은 모두 고쳤다.
더구나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에서 왕의 이름에 ‘충’ 이라는 글자를 돌림자로 넣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결국 원 간섭기에 와서 고려의 체제가 황제국체제에서 제후국체제로 바뀌었음을 말해 준다.
조선왕조의 마지막인 1897년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새로 마든 원구단에 나아가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뒤, 우리도 황제국임을 선포하였다.
실로 우리 역사상 고려시대 광종의 칭제건원이후 처음 나타난 황제체제의 공식적인 선포였다.
2. 세계제국 몽고와 맞선 고려 민중의 힘
고려는 몽고의 6차 침입 때까지도 꿋꿋하게 항쟁하였다.
현재 우리 역사서에서는 그 전투에 참여했던 백성들보다는 지휘관등과 같은 지도층만을 두각 시켰다. 그러나 고려가 몽고제국체제하에서도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백성들의 장기간에 걸친 피어린 항쟁의 결과였다.
백성들은 지배층 출신의 훌륭한 장수가 지휘할 때 물론 그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몽고병을 격퇴했거니와, 지배층이 도망했을 때조차 스스로 단결하여 성을 고수했던 것이다.
3. 고려판 정신대 ‘공녀’
1274년 원나라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녀 140명을 요구한 것이 공녀로 끌려간 시초이다. 몽고군들은 전쟁 중에도 수많은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끌고 갔으며 전쟁이 끝나서도 고려에게 계속 공녀를 바칠 것을 강조하였다.
고려 여인들은 몽고와의 전쟁 중에 이미 수십만 명이 끌려갔다. 전쟁이 끝나고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도 수천 명이 ‘공녀’ 라는 이름하에 끌려가서 노래개감이 되었다. 고려왕조는 결국 백성의 딸을 제물로 바쳐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4. 원나라의 마지막 황후가 고려 여인이었다는데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중국에서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잡는 대변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의 한 가운데에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황후였던 고려 여인 기씨, 기황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나라에 공녀로 들어갔다가 결국 황후의 지위까지 올랐으며 그녀가 낳은 아들이 황태자가 되었는데 만일에 원나라가 망하지 않고 순조롭게 황위가 계승되었다면 고려의 피가 섞인 황제가 출현하였을 것이다.
기황후와 고려인 환관들은 원나라에서 막강한 정치세력을 이루었다. 기씨가 제2황후에 봉해진 바로 그 해에 자정원이라는 황후의 부속관청이 설치되었는데 여기에는 고려인 환관뿐 아니라 원나라의 고위 관리들도 포함되어 ‘자정원당’ 이라 불리는 당파를 형성하였다. 당시 이들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어서 관리들의 인사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기황후의 존재는 고려의 정치에도 당연히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도 고려에 있던 기화후의 일족들이 권세를 부렸다.
공민왕의 반원운동을 통해 기철 일당이 제거되었고 동시에 나머지 부원배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 후 기황후는 고려에 대한 복수는커녕 원나라가 무너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마도 분노와 회한 속에서 말년을 보냈을 것이지만, 부원배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고려에서는 신흥유신들이 등장하여 개혁을 추진하고 새 왕조 개창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관료의 길
1. 이규보의 과거시험대책은 어떠하였을까
이규보는 그의 아버지인 이윤수가 호부낭중이라는 중앙 정부기관의 벼슬을 지내기 전까지도 경기고 여주에 기반을 둔 토호집안 출신이었다.
이규보는 어릴 때부터 신동소리를 듣고 자라다가 과거 시험준비를 위해서 14살이 되자 당시의 명문 사립학교인 9재학당에 입학하였다.
이규보고 학교에 입학한 후 공부한 교과목은 대부분 유교의 경전이었다.
그 외에 시부 등과 같은 문장 짓는 수업도 받았다. 경전이나 역사책에 나온 고사성어나 음률 등이 문장을 지을 때 기초가 되었으므로 경전에 대한 암기는 중요하였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이규보는 뛰어난 글재주를 자랑했다.
하지만 그는 네 번의 재수 끝에 턱걸이로 과거에 합격하였다. 22살 때 치루어진 사마시에서야 비로소 일등으로 합격을 하고 대과인 제술업에 응시하여 합격하기도 하였지만 합격 등수는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가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한 이유는 과거시험의 문제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험에 쓰이는 형식적이고 화려한 문체가 불만이었다.
그로 인해 글짓는 감성과 세상 사는 도를 잘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훗날 그가 중국 당나라 유학자인 한유가 벌였던 고문체 복귀운동을 고려에서 실천하려 했던 것도 이러한 생각에서 연유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어렵게 과거시험을 통과했다고 해도 곧바로 관직에 등용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규보는 23살에 합격하였지만 그로부터 9년후에 관직을 받았던 것이다.
고려시대 과거 시험은 대체적으로 문신관료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다. 이규보가 추구한 방법 중의 하나가 백성들을 올바로 통치할 수 있는 관료를 선발하는 일이었고 그것은 바로 과거제도의 정상적 운영이었다.
말하자면 행정능력이 있으면서 백성과 국왕을 위해 올바른 관료가 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선발하는 일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후 고려 후기에 이르면 과거시험제도 자체를 이 목적에 맞도록 개정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2. 재상 이자연의 관료생활
이자연은 재상이 된 지 9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53세의 나이에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이렇게 빨리 수상이 될 줄은 몰랐다.
출세가 이렇게 빨랐던 것은 개인적인 능력도 능력이지만 가문 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자연이 중추원 승선으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승선은 국왕의 명령을 해당 관청이나 관료에게 전달하고 또 관청이나 관료들이 아뢰는 문서를 국왕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문서의 내용에 따라 전달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그 밖에 국정의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한 국왕의 자문에 대답하는 측근관료의 기능도 하였다. 국왕을 늘 가까이 모시는 직책이었던 만큼 정치적인 부담도 컸고 또 혜택도 많았다. 이자연이 승선에 올라 국왕을 보필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서른을 막 넘긴 때였다. 그 나이에 승선이 되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였으므로 주위의 부러운 눈총을 한 몸에 받았다. 물론 왕실의 외척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자연은 잠시 형부에서 근무한 적도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이부에서 활동하였다. 고려의 관직은 겸직제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자연도 이부와 중추원 두 곳의 업무를 겸직하였던 것이다. 이부에는 관리들의 인사기록부인 정안이 있어서 평소에는 주로 이것을 정리하였다. 그러다가 정기 또는 임시 인사가 있을 때면 각 관료들의 승진과 탈락을 심사하여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이자연은 오랜 이부 근무가 자신의 관료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 동안 수많은 관료들의 인사 기록을 낱낱이 볼 수 있었고 또 인재들을 어떻게 적절하게 뽑아서 어느 관청에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이 개인적으로 커다란 수확이었다. 뿐만 아니라 문종이 즉위한 뒤에 그는 이부상서로 있으면서 참지정사에 올라 처음 재상이 되었던 만큼 이부 시절이 그의 관직생활에서 중요한 획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이자연은 수상이 된 다음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우선 그는 중서문하성에 출근해서 일상 업무를 보아야 했다. 이러한 업무중의 하나는 국왕의 명령 문서인 제서를 심의하는 일이었다. 고려에서는 모든 국정이 원칙적으로 국왕의 명령으로 반포되었고 그것은 문서로 내려졌는데 시행되기 전에 먼저 중서문하서의 심의를 거쳐야 했다.
중서문하성은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국왕이 자의적으로 결정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물론 이러한 권한은 인사 문제만 아니라 왕명을 내려오는 모든 사안에 대하여 행사할 수 있었다.
고려에서는 흔히 재상의 임무를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자연은 때로 중서문하성에 부속된 정사당에서 다른 재상들과 함께 국정을 의논하고, 시행해야 할 일이 있으면 국왕에게 아뢰어 결재를 받아 추진하였다. 국왕은 외교, 군사나 인사문제와 같이 혼자 결정하기 어려운 시안이 생기면 언제든지 재상에게 자문을 요구하였다. 이 때 재상은 국왕의 자문의 받아 국정을 논의하면서 확대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려의 재상은 국정을 발의하거나 국왕의 자문에 응하여 결정적인 의견을 제출할 수 있었으므로 국정 결정 과정에서 국왕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자연은 자신이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7명의 자녀들이 모두 다 잘자라 주었고 세명의 딸이 왕비가 되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는 이모든 것이 다 부처님의 은덕이라고 생각하고 승려가 된 아들의 절에 찾아가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3. 고려인들이 선망하던 최고의 직업 ‘관료’ 의 삶의 모습
고려인들이 꿈꾸던 최고의 직업은 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관료는 당대 최고의 신분층이며 관직에 오른다는 것은 곧 경제적으로 생활이 보장된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고려와 같은 신분제 사회에서는 지배층인 그들에게는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가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당시 관료들에게도 소위 유니폼이란 것이 있었다. 유니폼의 상징성은 ‘색’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곧 관직의 차등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착용하는 모자와 허리띠에도 모두 정해진 재료와 색깔이 있었다. 그리고 관직종사에 뒤따르는 수입의 형태는 크게 달랐다.
당시 관직은 9품으로 차등화되어 있었고 관료들은 각각 등급에 따라 규정된 전시과의 녹봉을 받았다. 전시과는 근무의 대가로 토지를 분급받는 것이며 녹봉은 현물인 미곡으로 받았다.
토지와 함께 관료의 주요한 경제기반은 노비였다. 모든 노비가 한 집안 내에서 생활하지는 않았지만 관료의 개인적인 생활 기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에는 틀림없었다.
관료들은 관직과 가문의 성쇠 또는 개인적인 능력에 따라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관료들의 경제 기반은 국가에서 보장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문의 성쇠 또는 능력에 따라 그들의 생활은 천차만별이었다.
4. 고려시대 내시는 환관이 아니었다.
고려의 내시는 환관 즉 남성이 제거된 고자가 아니고, 오히려 대개가 귀족 자제로서 용모가 단정하거나 유학적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선발된 엘리트였다. 내시의 선발기준이 주로 가문과 재능 및 용모를 중시하였다고는 하지만 국왕의 근시직인 만큼 내시가 되는 첫째 요건은 국왕의 총애가 우선이었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가진 것이 돈밖에 없는 사람이 뇌물을 써서 내시가 되려고 하기도 하였다. 국왕의 측근에 있으면 기회를 포착하여 잘만 하면 뜻밖의 출세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문신에 한정되었던 내시의 자격은 1170년 무인정변 후 변화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무신들은 그들에게도 내시직을 개방할 것을 요구하여 비로소 무신들도 내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려 내시직이 두드러지게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원 간섭기 이후라 하겠다. 고려 고유의 여러 근시기구가 별질되는 것과 함께 고려 내시는 이제 출발 초기에 보여 주었던 소수의 엘리트집단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원래 재능이 뛰어난 문인들로 구성되었던 내시가 고려말에는 여러 궁중 숙위군의 하나로 별질된 것이다.
고려 후기에 환관들로만 구성된 내시부가 출범한 것에 비하여, 내시는 본래 가지고 있던 여러 기능 가운데 궁중 숙위의 기능을 갖는 성중애마의 하나로 위축된 채, 조선 전기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일 뿐, 세종 때에는 이 내시가 환관내시와 용어상 혼란을 야기시킨다는 이유로 내직으로 개칭되었으며 이것마저 1466년 완전히 폐지되어 그 소임을 궁궐 숙위병인 충의위, 충찬위에서 대신 하게 되었다. 이로써 환관과 구별되는 고려의 내시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경제생활의 이모저모
1. 나라 살림의 벌이와 쓰임새
고려시대에는 현대적 의미의 예산 수립과 집행 절차를 밟지는 않았고, 지금의 재정경제원처럼 국가의 재정을 일원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관청도 없었다. 국가에서는 토지를 기준으로 예산을 짰다.
지출할 용도별로 토지를 해당 기관에 나누어주는 방식이 재정구조의 기본 특징이었다.
모든 토지가 정부의 세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과전이나 사원전 같은 토지는 관리나 사원에 토지세를 거두는 권한을 위임하였고, 왕실의 토지도 왕실에서 직접 세를 거두어 사용하였으므로, 정부의 재정에서는 제외시켜야 한다.
재정운영을 담당한 관청은 호부와 삼사였다. 호부는 가장 중요한 재정 담당 관청으로서, 기본재정원인 토지와 호구를 파악하고 관리하였다.
호부의 설치로 전국의 세원을 집중적이고 효율적으로 파악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호부가 파악한 세원을 바탕으로 조세를 거두고 지출하는 일 즉 재정운영을 계획하고 총괄한 것은 삼사였다. 특히 삼사는 조세와 녹봉에 관한 행정을 담당하고 재정출납에 관한 회계사무를 관장하는 정도에 그쳤다.
삼사가 회계의 출납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는 가운데, 국가 운영의 중심이 되는 쌀이나 베를 저장하고 지급하는 일은 창이라고 불린 관청이 나누어 담당하였다. 일반적으로 좌창은 관리의 녹봉을, 우창은 일반 비용을, 용문창은 군량을, 상평창은 물가조절을, 그리고 의창은 진휼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독립관청인 동시에 거기에 소요되는 곡물을 보관하는 창고의 기능도 하였다.
곡물을 보관하고 지출하던 좌창이나 우창의 관리자는 왕의 측근인 내시로 임명하였는데, 이를 통해 왕이 재정운영에 마음대로 간여하기가 쉬웠다.
그러므로 왕이나 담당 관리가 마음대로 지출할 수 없도록 여러 부서가 지출에 간여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중앙정부는 관리의 녹봉과 일반 비용, 국방비, 그리고 왕실재정 따위를 지출하였다.
일반 비용에 속하는 지출항목은 왕실의 공적인 경비, 각종 제사와 연등회, 팔관회에 드는 비용, 왕의 하사물, 건물의 건축비나 수리비, 전함이나 무기 제조비 따위였다. 일반비용의 규모는 녹봉과 비슷하였다. 그런데 국가 행사를 주관하는 관청은 별도의 재원을 관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방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고려시기에는 때로는 수십 년 동안 전쟁을 치뤄야 했기 때문에 막대한 방위비가 필요하였다.
접적지역이어서 군량미가 가장 많이 필요한 양계지방에는 개인이 토지세를 거두는 사전은 두지 않고, 그 지역에서 거둔 세금을 모두 방위비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양계에서 거두는 조세만으로는 부족하여 남도의 조세도 운송하여 국방비에 충당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관청은 나름대로 독립된 재정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에서 시행하는 사업에 드는 예산은 우창에서 지급하였지만, 각 관청의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자체적으로 조달하고 관리하였다. 이러한 운영경비를 조달하는 재원으로 공해전이라는 토지가 있었다.
지방관청 역시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
중앙정부에 납부하려고 거둔 세금 가운데 일부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경비를 마련하도록 토지가 지급되었다. 이 역시 보통 공해전이라고 불렀다.
지방관청의 공해전에는 지방관의 녹봉을 비롯한 운영비를 조달하는 공수전과 종이를 마련하는 지전 따위가 있었다.
수입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국민에게서 거두는 세금이다.
세금은 토지에서 거두는 토지세와 집집마다 거두는 공물, 그리고 부역이 있었는데, 거두는 기준과 내용은 매우 복잡했다. 부역은 직접 사람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이었으므로 가장 고달픈 세금이었다.
세금을 부과하는 대상은 토지와 호구였다. 토지는 논과 밭으로 나누어 조세를 거두었는데, 비옥도에 따라 토지의 등급을 나누어 거두었다. 거두는 양은 생산량의 10분의 1로, 이것은 ‘천하통법’ 으로 여겨졌다.
고려말 과전법에서는 쌀 20석이 생산되는 땅을 1결로 삼아서 2석을 조세로 받았다.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은 개인이나 관청은 직접 토지세를 거두었다.
관리는 자기 집의 노비를 보내 과전에서 토지세를 거두어 갔으며, 공해전을 받은 관청도 직접 토지세를 거두었다.
왕실의 재정은 내장택. 내고 같은 관청에서 관장하였다. 내장택은 왕실의 소유지인 내장전과 장처전을 관장하였다. 장처전은 왕실에 예속된 마을인 장과 처의 토지였다.
국가의 재정은 기본으로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고, 고려시기 세금의 원천은 토지와 백성이었다. 특히 토지는 부와 조세의 원천이었으므로 토지를 개인이나 관청에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재정구조를 짰다.
2. 물길따라 뱃길따라 열리는 고려의 교통로
<<고려사>>를 보면 당시 전국에는 525개의 역이 있고, 이 역들은 22역도로 묶여 있었다. 역도는 지금의 국도를 연상하면 된다. 그런데 22역도 가운데 8개는 수도인 개경 북쪽에 있었고, 그 남쪽에 14개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병부에서 도로를 관할하였다. 병부 아래에 있는 공역서라는 관청에서 각 지방에 보내는 문서가 제대로 격식을 갖추었는지 사신들이 지방에 갈 때 역에서 사용하는 말의 수가 규정대로 지켜지고 있는지를 감독하였다.
이 일을 담당하는 관리가 관역사이다.
개경 북쪽에서 북계를 관통하는 6개의 물길 121개 역 가운데 53퍼센트에 달하는 64개 역과 개경 동쪽에서 동계의 남북을 관통하는 3개 물길 91개 역 가운데 57퍼센트에 이르는 52개 역, 그리고 개경남쪽에서 서울을 지나 춘천, 제천 방면 2개의 물길 54개 역 가운데 33퍼센트에 해당하는 18개 역을 6등급으로 나누어 특별히 관리하였다.
역에는 역장과 역리, 역정이 있었다. 역장은 역에 관한 모든 일을 책임졌다.
역리는 문서를 전달하고, 필요한 말을 뽑아 내고 인원을 충원하였다.
역정은 직접 문서를 들고 뛰거나 사신들의 심부름을 하였다. 역의 운영명목으로 공해전 명목의 토지, 용지 조달을 위한 지위전, 역장을 위한 장전, 말 사육을 위한 마위전을 지급하였다.
중앙관청의 공문서는 먼저 상서성에 보고한 후 각 지방에 보냈다. 공문서는 보통 가죽주머니에 넣어 역졸이 릴레이하는 식으로 역에서 역으로 전송했다.
각 지역에서 생산된 곡식은 조창에 모아 배로 운반하였다.
전국 각지에는 13곳의 조창이 있었다. 조창에는 역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영역과 주민이 있었다. 이들이 조세로 거두어 들인 쌀을 보관하고 조운하였다. 이 일을 총책임을 지며 감독하는 이를 판관이라고 하였다.
운반비는 곡식량과 출발 지역에 따라 책정하였다. 즉 개경까지의 수송 거리와 난이도에 따라 달랐다. 그리고 곡식을 옮기는 기간에 대한 규정도 있었다.
22물길과 뱃길은 중앙과 지방을 묶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앙에서 각종 공문서를 보낼 때도 길을 통하여 전달하였고, 조세를 거둘 때도 길을 통해야 하였다. 임금이나 관리가 이 길을 따라 지방을 여행하였고 군사나 상인도 이 길을 이용하였다. 길 가는 도중에 잠을 자거나 물건도 쌓아 놓을 공간도 필요하였다.
3. 농장은 과연 산천을 경게로 할 정도였나
농장은 원래 많은 토지와 노동력을 갖춘 대토지소유를 말한다.
고려시대 대부분의 농장주가 국왕이나 국왕의 집안, 귀족관료 및 사원이나 승려에 국한된 것은 당시 사회가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가는 이들이 신분적 특권을 활용하여 대토지소유자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주었다. 국가가 보장해준 이 권리를 수조권이라 한다.
귀족이 관료 등이 되어 수조권을 분급받으면, 가문의 경제력은 확실히 보장받게 된다. 만약 자신의 토지가 소조지가 되면, 소유지와 수조지가 일치되어 일종의 면조의 특권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의 토지에 수조지가 설정되면 그 사람의 토지에 영향력을 갖게 된다.
농장이란 문무관료나 사원이 자신의 경제 생활을 위해 신분적인 특권을 바탕으로 많은 토지를 모아서 피지배층의 노동력을 이용한 농업경영이라고 할 수 있다.
농장주들은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상속이나 매입, 고리대, 기진, 개간, 모수사패, 탈점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농장에서 토지 확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노동력의 확보였다. 토지를 확보하였다고 하더라도 농사를 지을 노동력이 있어야만 농장은 제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장은 소유 계층만큼 규모도 다양하였다.
고려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농장이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였거나 군현을 넘나들 정도로 컸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농장주는 자신의 토지와 다른 사람의 것을 구분하기 위해 사방 경계표시를 하였다.
농장을 관리하는 곳을 농사나 장사라고 하였다. 그 곳에는 농장 책임자와 함께 농장에서 일하는 농민이 살았고, 농장에서 나는 농산물을 저장하기도 하였다. 농장의 총책임자는 주로 장사의 업무를 담당하고 감독하였다는 의미에서 장주 또는 장두라 불렀다.
또 이들 장주를 통괄하는 상급관리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토지와 노비문서를 관장하고 농장주가 거주하는 곳으로 곡식을 옮기는 일을 하였다.
농장주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확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농장을 경영하였다.
노배를 동원한 농장경영은 노비를 자유롭게 부릴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리하였다. 농장주는 노비농민에게 수확의 반과 함께 노주로서의 관리인 노비 신공을 받았다.
고려 귀족은 농장을 소유하고 경영하는 것을 본업에 대한 별업으로 간주하였다. 별업이라고는 하였지만, 실제로 농장 경영이 귀족다운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정치나 사회 활동을 원만하게 하려면,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일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 활동과 농장경영은 귀족들이 반드시 갖추어야만 하는 요건이었고, 동전의 양면과 같이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4. 사원의 농지경여과 상업활동
사원은 승려들이 수행하며 생활하는 공간이자 신자들이 찾는 장소이다.
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제력이 필요하다.
불교가 사회적으로 큰 구실을 하고 정치세력의 지원을 받았던 고려시대에도, 사원은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원의 농지는 시납, 개간, 매득 그리고 국가의 사급 등 다양한 계기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렇게 마련한 사원의 농지는 그 규모가 상당하였지만, 일정한 지역 특히 사원 주위에 집중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처럼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생표가 설치된 경우는 예외적으로 토지가 집중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배의 내용에 있어서도 상이하였다. 곧 사원은 장생표내의 농지만이 아니라 산림 농민에 대해 배타적인 지배를 할 수 있었다.
사원은 농업생산에 필요한 것들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경작농민에게 그것을 대여하기도 하였다.
사원전을 경작하는 농민은 양인농민, 노비, 하급승려 등 다양하였다.
사원전을 경작하는 핵심적인 부류는 양인농민이었다. 사원 노비는 사원 소속의 토지를 경작하는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주임무는 아니었다.
사원은 다량의 물품 구매자임과 동시에 판매자이기도 하였다.
사원은 건축시의 자재, 북구제작을 위한 재료, 불교행사에 필요한 물품, 승려들의 생필품 가운데 상당한 양을 구매하여 조달하였다. 그리고 사원이 생산한 잉여물품, 가공품을 판매하였다.
사원이 교역활동을 통해 판매하고 있는 품목은 다양하였다.
파와 마늘은 승려가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작물인데도 재배하고 나아가 판매까지 하고 있어 자주 문제시 되었다.
사원은 수공업제품의 생산에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생산한 물품은 자체 소비하고 남을 경우 판매하였을 것이다.
사원이 판매해서 잉여를 축적할 수 있는 또 다른 계기는 염분이었다. 소금은 생필품이기 때문에 이것을 판매하여 부를 증대할 수 있었다. 그 밖에 사원은 기름과 벌꿀을 생산 판매하기도 하였다.
사원은 물품을 판매하는 것만 아니라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원은 잉여생산물의 판매와 필요한 물품의 구매를 통해서 상업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또한 사원은 교역의 중요한 장소였다. 불교행사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으며, 상호간에 자연스럽게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개경의 팔관회 행사에는 외국 상인까지 참여해서 물품을 거래하였다.
지방 사찰이 개경의 거래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원은 공물납부와 관련해서도 상행위를 하였다. 대납이 그것이다.
또한 사원은 중국에서 경전이나 단청 원료를 구입하기 위해서 국제 교역에 종사하였다.
승려들은 원거리 교역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개 하루만에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없어서 숙박을 해야 했다. 이에 사원이나 승려들은 원이라는 독특한 숙박시설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사원의 농지경영을 통해 확보한 잉여물이 양식이나 종자로 농민에게 대부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빈민구제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사원은 대부행위를 통해서 농민들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찰은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조형미가 뛰어난 불상과 불탑을 조성하였고, 화려한 불화를 남길 수 있었다. 또한 승려들은 생산활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종교적 수행에 몰두할 수 있었다.
사원과 승려는 백성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위조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외침이 있을 때 크게 활약할 수 있었다.
5. 고려시대 권력형 비리의 결정판 ‘염흥방 토지탈점 사건’
염흥방은 막강한 부를 가진 권세가로서 불법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기에 그의 가노들도 그의 부를 믿고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있었다.
어느날 그의 가노인 이광이 전 밀직부사인 조반이 소유하고 있는 백주의 전토를 강탈하자, 조반은 전일에 일면이 있었던 염흥방을 찾아가서 돌려줄 것을 청했다. 염흥방은 일단 가노가 저지른 일이고 조반과 안면도 있고 해서 그 땅을 반환해주었다.
그러나 주인의 권력을 믿고 있던 가노는 다시 그땅을 강탈하고 조반을 능욕하기까지 했다. 조반은 가노를 찾아가 돌려줄 것을 청했지만 더 거만을 부렸고 결국 참다못한 조반은 이광을 죽이고 그 집에 불질렀다.
홧김에 했지만 그는 최고의 권력가인 염흥방이 걱정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기병을 데리고 염흥방에게 사유를 말할려고 서울로 향하였다.
그러자 염흥방은 크게 노하여 조반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하여 그럴 체포케 하였다. 그는 그의 자백을 잡아내기 위해 고문을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조반의 억울한 옥사를 알고 있던 우왕은 최영에게 그 일을 맡겼다.
최영은 염흥방을 가두고 임경미를 체포하도록 하자 그는 이걸 거부하고 반란을 도모하였다. 결국 염흥방과 그의 무리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통하여 당시 집권층들의 부와 권력의 축적 수단이 이러한 문어발식 토지의 탈점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바로 권력형 비리의 한 형태로 보여지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산천을 경계로 삼을 정도의 농장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는 모두 권세가의 강력한 정치권력을 이용한 것이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도덕적 각성과 철저한 사정 및 처벌이 요구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올바른 토지제도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6. 바다를 건너온 보따리 장사부대
고려시대에는 바다에서 배를 추진시키는 기구는 노와 돛뿐이었다. 그래서 고려와 중국을 오가는 상선들은 계절풍을 이용하여 항해하였다.
고려와 송나라 간의 무역품은 주로 송나라 상인들이 실어 날랐다. 이들은 중국과 남방의 물화를 싣고 와 고려의 물건과 교역해갔다.
고려는 뛰어난 조선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무역을 주도하지 못한 원인은 주로 국내의 시장 규모에서 찾아야 한다.
고려는 값비싼 물화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 아니었다. 또한 고려에서 소비하는 해외의 산물은 대게 지배층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치품에 국한되었다. 이 때문에 고려에는 대규모 선단을 운영할 정도의 상업자본이 형성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송나라에서는 재정난을 타개하는 방편으로 대외무역을 장려하였으며, 상업자본도 급속히 성장하였다. 조선술이 뛰어난데다 나침반의 발명 등으로 항해술 또한 획기적으로 발전하였다.
벽란도에 도착한 상인들은 대개 사헌무역의 방식으로 물화를 교환하였다.
고려는 주로 비단을 수입하였다. 비단 다음으로는 차와 약재를 수입하였다.
고려는 불교의 영향으로 차 마시는 풍습이 귀족과 승려간에 퍼졌으므로 양질의 중국차를 많이 수입하였다. 또한 중국 의서에 따라 약을 처방했으므로중국 및 남방의 약재를 수입하였다.
서적 또한 중요한 수입품이었다. 고려 지배층은 문화적 욕구에서 송나라에서 펴낸 책들을 적극적으로 구입하였다.
고려에서는 화폐가 활발히 유통되지 않았으므로 삼베와 인삼을 가지고 거래하였다. 일종의 구상 무역이었다.
종이, 먹 등도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7. 고려시대 돈이야기
현물화폐가 아닌 순수화폐로서 우리 나라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의 동전이었다.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화폐가 사용된 사실은 물론 당시 경제 상황의 커다란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와 아울러 문화, 사상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변동이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고려에서는 국가재정과 유통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정책하에 동전을 발행하였다. 하지만 화폐경제의 발전이 일반인들의 경제상황을 더욱 어렵게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고승 의천의 ‘돈 예찬론’에서는 동전의 사용을 권하였다.
그는 국가재정을 확충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문인 임춘은 돈의 부정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다.
그는 동전이 사용되면서 인간 사회의 탐욕과 이기심이 증대한다고 보았다. 또 국가재정의 확대만을 목표로 하는 정책은 능률을 내세우는 부패한 관료만 득세하게 하고 정직한 관료와 선량한 백성들은 피해를 보게 하늘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하였다.
동전이 사용되기 이전에 고려에서는 주로 쌀이나 옷감과 같은 현물을 화폐로 사용하였다.
고려시대 상업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은 은의 활발한 유통이다.
고려의 시장에서는 은이 가장 중요한 교환수단으로 유통되었고, 대부분의 상품은 은으로 그 가격이 환산되었다.
한편 옷감도 단순한 옷의 재료로서의 기능을 벗어난 순수한 교환수단으로서의 기능을 강화시켜가고 있었다.
적은 액수의 생활필수품을 구입하는 경우에는 은이나 포로 거래하기에 불편했기 때문에 쌀을 사용하였는데, 주식인 쌀을 식용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쌀에 흙을 섞어 유통시킬 경우 그 피해는 심각하였다. 은에 비하여 훨씬 가치가 적은 동전을 사용할 경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국가의 재정운영에서도 동전의 사용은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이는 현물이외에 동전을 사용할 경우 국가의 재정을 보다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더욱이 동전과 같은 금속화폐는 원칙적으로 정부만이 만들 수 있었으므로 경제생활에서 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고려정부는 여러 차례 금속화폐의 유통을 추진하였다.
원 간섭기에는 일시적으로 원나라의 지폐가 고려에서 유통되었다.
원의 간섭을 받고 있던 고려는 간접적으로나마 원나라의 경제권에 편입되었으므로 보초가 유통되었는데 세계 제국인 원나라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보초는 고려 국내에서도 별다른 저항 없이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하지만 원나라가 몰락하면서 보초의 가치는 땅에 떨어져 종이조각에 불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