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윗은 시139:13-14절을 통해 "주께서 내 장부(臟腑)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組織)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神妙莫測)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가장 깊은 부분과 열정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즉 Made in God입니다. 그래서 걸작품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걸작품으로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타락하여 창조 때의 본래 모습까지 잃어버린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엡2:10a절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만드셨다"는 말은 본래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타락한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게 하시는 재창조 사역을 말합니다.
그런데 NIV성경은 이 말씀을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걸작품"(For we are God's workmanship, created in Christ Jesus to do good works)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걸작품으로 만드신 이유는 선한 일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도스"(agathos')는 "좋은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도, 또 범죄 하여 타락한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게 하신 목적도 선한 일, 곧 좋은 일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의 평생 좌우명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하자. 모든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고 어떠한 장소에서든지, 어느 시간이든지, 상대가 누구든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변함없이 최선을 다하자"이었습니다.
또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 역시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베풀며 살았느냐 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선한 일, 곧 좋은 일"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는 일입니다. 섬기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투자해서 섬기는 일입니다. 때로는 위험과 죽음의 위기와 비판까지도 무릎 쓰고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 섬김을 통해 세상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바로 그것이 가장 선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서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는, 그러므로 가장 선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1a절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유대인들이 민족 최고의 명절인 유월절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율법에 따라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 결례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결례 의식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명절에 성전에 나타나실 것인지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가야바와 종교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구석구석에 붙여 논 수배 전단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왠지 심상치 않은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문은 순식간에 유대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이미 그 소식을 들어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이번 명절만큼은 참여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예상을 보기 좋게 깨뜨리시고 예루살렘에서 2-3km 정도 떨어진 베다니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자신이 잡혀 죽게될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출발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소문을 듣지 못해서였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분명 아버지의 때를 따라 움직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에 하나 소문을 듣지 못하셨다할지라도 자신에게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알고 계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주님께 있어서 죽음은 식은 죽 먹는 것과 같이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14:34)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서는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14:36a)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께서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죽음을 목전에 두고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해야할 정도로 심한 근심과 깊은 슬픔에 사로잡히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당신의 양식이라고까지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오죽하셨으면 그렇게 기도하셨겠습니까?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이신 예수께조차도 피하고 싶을 정도로 감당하기 어렵고, 힘든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으실 정도로 어렵고 힘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기 위해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카알 힐티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명은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목숨을 걸고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목숨을 걸고 살아야할 이유, 곧 사명은 무엇입니까? 사명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모진 고난과 고통을 참고 견디게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다면 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분명한 사명을 가진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베다니에 들어가시자 그곳에서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1b-2a절입니다.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베다니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순례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머무를 수 있는 휴게소와 같은 곳으로, 주님 역시 예루살렘에 올라오실 때마다 줄곧 이곳에 머무셨습니다. 그런데 평행구절인 마26:6절은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라고 말씀합니다. 또 막14:3a절 역시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베다니에서 잔치를 배설한 사람은 나사로가 아니고 문둥이 시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학자들 가운데는 그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의 남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막연한 추측일 뿐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성경은 그가 분명 문둥이였으며, 주님께 고침 받은 사람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예수께서 베다니에 들르시자 즉시 초청해 은혜에 감사하는 잔치를 배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잔치를 벌이기에는 상당한 부담이 뒤따랐습니다. 주님은 산헤드린 공회가 작성한 수배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거리마다 수배 전단이 뿌려졌고, 포스터도 붙어 있었습니다. 거기다 가야바와 대제사장들은 주님을 보는 즉시 신고하라고 엄포를 놓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대 전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당연히 시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배설한 잔치에 대한 소문이 금방 종교지도자들에게 전달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베다니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주님을 위한 잔치를 배설하기 위해서는 언제 어떤 모양으로 닥칠지 모를 정치적인 위험까지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을 초청해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고침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치적인 위험을 각오하면서까지 주님을 위해 잔치를 배설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을 만나는 분명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체험을 통해 죽기까지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분명한 만남을 통해 어떤 환난과 시험과 핍박이 찾아와도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길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몬이 배설한 잔치에는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와 그의 형제들도 초청되었습니다. 그들 역시 시몬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2b절입니다.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① 마르다는 묵묵히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눅10장에 의하면 예수께서 나사로의 집에 방문하셨을 때 마르다는 주님과 일행들을 섬기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을 쏟아 부었습니다. 사실 마르다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주님께서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음식을 장만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여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마리아는 주님의 발 밑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혼자 음식 준비하기에는 바빴던 마르다가 도와 달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말씀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마리아의 태도에 화가 난 마르다는 주님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눅10:40b)라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 말에는 마리아를 향한 책망과 주님에 대한 원망,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확신과 과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마르다를 향해 "네가 많은 일로 염려(念慮)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1-42)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음식을 장만하는 것 모두 중요하지만, 어떤 일이든 기쁨으로 하는 것이 더욱 소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때부터 마르다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께서 죽었던 오라비를 살리신 이후에는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혼자 부엌일을 담당하고 있지만 묵묵히 기쁨으로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② 그때 나사로는 주님과 함께 앉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사로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었다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 날 정도로 썩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나사로 만큼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증거 하는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특히 9-11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 온 무리들 가운데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뿐만 아니라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를 보기 위해서 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 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기로 모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사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은 이적 가운데 절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편견 없이 그 사건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이요 생명의 주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시기심에 사로잡힌 대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싸워서라도,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살리신 나사로를 죽여서라도 기득권을 지키고야 말겠다는 어리석음과 잔인함을 드러냈습니다.
이렇게 마르다와 나사로는 자신이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조용히 행동을 통해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③ 바로 그 때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사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여인에게 기름 부음 받은 사건이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주님의 사역 초기에 갈릴리에서 있었습니다(눅7:36-50). 예수께서 바리새인인 시몬의 집에서 들어가셨을 때, 죄인으로 소개된 한 여인이 나아와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맞춘 후 향유를 부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본문에 소개된 것처럼 주님의 사역 말기에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있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때 마리아가 귀한 향유를 가져다가 주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요한은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3절입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여기서 "나드"는 "나르도스타키스 자타만시"(Nardostachys Jatamansi)라는 이름을 가진 향나무의 뿌리에서 추출되는 끈끈하면서 향기로운 점액성 액체를 말합니다. 또 "순전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피스티코스"(pistikos')는 "설득력 있는, 신뢰할 수 있는"이란 뜻으로 "전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것"을 의미합니다. 또 그 향유의 값은 300 데나리온으로, 당시 장정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계산할 때 실로 엄청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14:3b절은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옥합"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라바스트론"(alab'astron)은 본래 병을 만들던 애굽의 도시 이름으로, 그 병은 반투명한 고급스러운 돌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께 향유를 붓기 위해 그 귀한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것은 예수께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부어드리고 싶은 마리아의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었다"(막14:8a)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또 당시 유대 사회의 여성들이 자신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자신이 드릴 수 있는 모든 것, 즉 몸과 마음과 물질을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 다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리아의 행위 역시 즉각적으로 반대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4-6절입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 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유다는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 그는 주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은혜가 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가르침을 받고 많은 이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속에는 돈에 대한 더러운 탐심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지인 에콰도르에 도착하자마자 인디언의 창에 맞아 죽은 제임스 엘리어트는 "결국은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것도 있다.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일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 수 없는 그것을 바치는 사람이 있다.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그 무엇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을 바치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무리 정당방위라 할지라도 총으로 인디언을 죽이게 된다면 선교의 문이 닫혀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그들을 위해 죽기 위해 그 땅에 들어갔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붙들 수 없는 자신의 생명을 포기함으로, 절대로 포기하거나 놓칠 수 없는 인디언들의 영혼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결국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을 위해 절대 포기해서는 안될 예수 그리스도를 놓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드리는 것을 허비하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행위를 비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행위는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7-8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평행 구절인 막14:6-8절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葬事)를 미리 준비(準備)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당신께 좋은 일을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좋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로스"(kalos')는 "선한, 아름다운, 가치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예수께 행한 일은 무엇보다 선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 부지중에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행위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죽으실 것이기 때문에 다시 헌신할 기회가 없겠지만, 구제할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빌3:7-9a절을 통해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 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자신이 갖추고 있던 모든 좋은 조건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 한 분만을 위해 사는 삶이 가장 선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복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선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막14:10-11)는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당신께 가장 좋은 일을 하였다는 말씀을 통해 유다를 깨우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창피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대제사장들에게 선생님을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그렇게 사악한 행동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27:5절은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누가는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행1:18)고 더 세밀하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이 사로잡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던 유다는 결국 참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몬과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님을 가장 좋은 모습으로, 선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게 섬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한가지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면서까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찌하든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근본적으로 변할 수 있고, 주님을 위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가장 좋은 모습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며, 누구보다 선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정신 병원에 자칭 예수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죽어도 자기는 예수라고 소리쳤습니다. 누군가 "네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냐?"고 물어보면 그는 "그렇다 내 아들아!"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상담전문가인 벤들러는 그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하곤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커다란 나무 십자가와 굵은 대못과 망치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곤 청년에게 "네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청년은 여전히 "그렇다 아들아!"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벤들러는 청년에게 가지고 들어온 도구들을 보이며 "네가 예수라면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때서야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것을 알아차린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밝혔습니다. 벤들러는 이와 같은 충격적인 "쇼크요법"을 통해 청년을 치료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엡2:1a절은 저와 여러분을 향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류는 하나님을 무시한 채 자신을 자랑하며 살고 있지만 본래는 허물과 죄로 인해 이미 끝장나 버린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실상이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성경은 그렇게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살리셨도다"(엡2:1b)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와 허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저와 여러분을 살려주셨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 축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와 허물을 지시고 죽으셨다가 오늘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반문하십니다. 그렇게 반문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게 될 모든 형태의 감옥으로부터 건지시기 위해서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셨습니까? 믿고 있습니까? 거듭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는 것만큼 선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은 없습니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세상을 섬기는 선한 삶을 배울 수 있고,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HODIE MIHI, CRAS TIBI)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래 "오늘은 내가 시체 되었기에 나를 매장해 주기 위하여 네가 여기와 있지만, 그러나 내일은 네가 시체 되어 누군가에 의해서 이곳에 매장될 것이다."라는 뜻을 가진 그 말에는 "오늘은 내가 육체의 허물을 벗고 영원 속으로 나의 삶을 확장시켜 나아갑니다. 내일은 당신이 육신의 허물을 벗고 영원 속으로 나아 올 수 있도록 오늘을 십자가 앞에서 소중하게 가꾸기를 기원합니다."라는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셨던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해 "이제는 너희가 나설 차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소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기로 결정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이웃을 섬기는 법이 무엇인지 배우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보다 선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11:2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