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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크리소스톰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고 말했습니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은 돌아오는 길에,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이 살고 있던 가이사랴에 들렀습니다. 그때 유대로부터 내려온 아가보라는 사람이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수족을 매고는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행21:11)고 예언했습니다. 아가보는 바울의 결박과 투옥을 예언했던 것입니다. 이 예언을 들은 사람들은 울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 때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라고 말했습니다. “상하게 하느냐”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드뤼프톤테스”는 “두들겨 깨뜨린다”의 뜻으로, 바울을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의 애정에 가득 찬 눈물의 만류가, 마치 바울의 마음을 부수어 버릴 정도로 간곡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의 애정 어린 만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결의를 더욱 강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임을 당했던 바로 그 도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죽임을 당하는 것도 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한 순교자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한 목사를 잡은 루마니아 공산당은 그에게 예수를 부인하고, 공산당을 지지하라며 심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혹독한 고문에도 목사는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14살 된 목사의 아들을 잡아왔습니다. 그리곤 목사 앞에서 혹독한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자신의 고통 앞에서는 의연했던 목사였지만, 결국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모진 고문 속에 지쳐 쓰러져 있던 아들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아버지가 예수님을 부인하여 내가 산다고 하더라도, 저는 예수님을 부인한 아버지의 아들이란 말을 듣기 싫어요. 그러니 제발 예수님을 부인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아들의 부르짖음에 용기를 얻은 아버지는 끝까지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때 화가 난 공산당은 어린 알렉산더를 심하게 때려죽이고 말았습니다.
초대교회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던 폴리갑은 끊임없이 회유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86년 동안 하나님께 봉사했지만 하나님은 한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내가 어찌 나의 왕을 배역하겠는가?"라고 말하며 죽어갔습니다. 오래 전 충격적인 기사 하나가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를 출발해, 벨기에 브뤼셀 공항에 도착한 비행기 착륙장치 안에서 사람 모형의 검은색 얼음 덩어리 2개가 발견되었습니다. 밀입국을 시도하다 얼어죽은 어린아이들의 시체였습니다. 공항 직원들이 동사한 어린이들의 주머니에서 발견한 편지에는 “혹시 저희들이 얼어죽은 시체로 발견되더라도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비참한 상황을 꼭 세계에 알려 주세요 그리고 여러분 자녀에 대한 사랑을 저희에게도 조금만 나눠주세요. 아프리카는 지금 전쟁과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어요. 전세계에 도움을 호소합니다. 부디 저희가 살고 있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두 소년은 15살 포드 투르카나와 14살 야퀸코이타였습니다. 그들은 친구들의 고통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밀입국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알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들은 전쟁과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 친구들을 돕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신들의 생명을 바쳐 세계에 호소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요12:24절에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招引)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루스드라까지 쫓아온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은 무리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돌에 맞은 사람이 바울 한사람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바울이 계속해서 말을 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돌에 맞은 바울은 결국 쓰러졌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한 유대인들은, 그를 성밖으로 끌어 내쳤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군중 심리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군중들을 어떻게 선동했는지, 바울을 돌로 친 주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할지라도 군중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 앉은뱅이를 일으킨 바울과 바나바를 쓰스와 허메, 곧 그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신으로 간주했었습니다. 심지어 쓰스와 허메를 섬기는 제사장들까지 가세해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까지 드리려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겨우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우리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느 때는 성령으로 충만한 것 같은데, 순식간에 돌변하는 경우들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왜 그렇게 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굳이 설명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심정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아무튼 너무도 쉽게 돌변한 군중들과 유대인들의 돌에 맞은 바울은 죽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성밖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20-21절입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에 의해 성밖에 버려진 바울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은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루스드라 성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돌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절뚝거리며 다시 일어나 성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다시 성으로 들어간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바울은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1:23b)고 선포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살전2:9b절에서는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한 그는, 결국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시 성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천로 역정의 저자이면서 땜장이였던 죤 번연은 “무 자격증 설교자"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왜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이 복음을 전했느냐?“는 말과 함께 심한 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번연을 고문하던 사람이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체포될 당시, 번연은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묻자 번연은 "그 상황에서 내가 만일 비겁하게 도망쳤다면 나에게 복음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소? 그들 역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났을 때 나와 같은 비겁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겠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의 말에 감동을 받은 고문관은 번연에게 다시는 설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즉시 풀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번연은 전혀 마음의 동요 없이 자신은 풀려나는 즉시 설교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으로 인해 13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숙주나물은 사실 녹두나물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쉬기를 잘한다고 숙주나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녹두나물이 숙주나물이 된 유래는 조선 초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숙주는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시작해서 단종, 세조, 예종을 거치면서 권세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지 않고 권세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순간순간 변화무쌍한 변절과 배신을 일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번연은 다시는 설교하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옥에 갇힐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딤후4: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말했던 바울은 돌에 맞아 쓰러진 뒤에도 다시 일어났습니다. 부러졌을지도 모를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시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또 그 몸으로 30km미터나 떨어진 더베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그는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을 찾아갔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곳 사람들은 바울을 죽이려했었습니다. 돌로 친 다음에는 죽은 줄 알고 버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적인 감정 때문에 사역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자신의 몸을 추스리는 일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전도는 생명보다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바울은 마음을 바꿀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너무도 쉽게 변해 버린 군중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변함없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환난과 시험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따르고 추종하던 사람들이 순간순간 변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변치 않고 충성할 각오는 되어 있습니까? 자신의 감정과 상관없이 복음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절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그리고 안디옥에 들어간 바울은 가장 먼저 제자들을 위로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권했다”는 것은 그들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앉은뱅이를 고치는 현장과 군중들의 환호성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환호성도 잠깐, 이고니온과 안디옥에서 몰려온 유대인들에게 설득 당한 무리들은 바울을 돌로 쳐 죽을 지경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밖에 내어버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전도는 마치 실패처럼 보여졌습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어린 신앙의 소유자들이었던 제자들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흔들리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믿음에 거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권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에게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환난과 시험까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환난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찾아오는 홍역과 같은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있어서 홍역은 반드시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입니다. 그런데 이 홍역을 치루지 않은 사람은 무덤에서라도 치루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난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겪어야할 하나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환난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24:9절에서 예수님은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환난은 고난이며, 역경이며, 핍박입니다. 심할 경우에는 순교까지 각오해야 합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잃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과 가정과 재물을 잃었습니다. 몸은 기와로 긁어도 시원하지 않는 병에 결렸습니다. 이때 욥이 겪었을 몸과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야고보를 희생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렇다고 환난이나 시험이 육체적인 고통으로만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약한 부분을 통해 찾아오기도 합니다. 물질에 약한 사람들에게는 풍성한 물질을 대가로 신앙을 포기하도록 유혹합니다. 명예에 약한 사람들에게는 명예를 대가로 신앙을 포기하도록 유혹합니다. 학생들에게는 좋은 성적을 대가로 신앙을 포기하도록 유혹합니다. 이와 같이 고난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인 것입니다.
빌1:12-14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또 롬8:28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고난이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겪어야할 홍역과 같은 것임을 너무도 잘 아는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단순히 성공과 실패라는 인간적인 논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의 성취 여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배척을 당했다고 해서 그것을 실패라고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배척을 당하고, 돌에 맞고, 성밖에 버림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복음은 전해졌습니다. 새로운 제자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이방인 선교는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볼 때 실패로 보이는 환난까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제자들을 격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실패는 결코 무익한 것만은 아닙니다. ① 실패는 성장과 성숙의 기회가 됩니다. 사람들은 언제 성숙하게 됩니까? 성공했을 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패했을 때 더욱 성숙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이 되면 성취감이 있지만, 실패하면 사람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실패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 더욱 성숙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② 실패는 또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실패는 사명이다”라고 했습니다. 실패해 본 사람이 실패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③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실패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하게 됩니다. 아이 성 전투에서 패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수7:7a)라고 물었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통해 용기를 얻어 승승장구하며 가나안땅을 점령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를 너무도 쉽게 함락한 그는 자신만만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승리의 기쁨에 취한 그는 여리고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아이 성 전투를 앞에 두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이렇습니다. 일이 잘될 때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제 앞에서 일을 그르치고 맙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문제는 자기가 만들어놓고, 책임은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꼭 그 꼴입니다.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수7:11절에서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해서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지적은 구체적입니다. 그런데 원어 성경은 이 단어들을 “뿐만 아니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적질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소유로 삼는” 범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7:26절에서 하나님은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받쳐진 물건을 도적질하면 화를 당할 것이라는 금지 규정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규정을 어겼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저지른 범죄는 단순한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킬만한 신성 모독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실패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스라엘의 범죄를 척결한 여호수아는 승승장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성경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모세와 베드로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전까지는 실패자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베드로는 갈릴리 해변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따뜻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은 들은 그들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실패가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축복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칼빈은 화려한 경력을 가졌지만 불의의 사고로 불구자가 되어 낙심해 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선생님은 이 세상의 명예와 부와 영향력 속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귀를 빌려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선생님에게 보다 분명히 말씀하시기 위해 선생님을 옆으로 불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생님 귀에 개인적으로 말씀하시기 원하십니다. 선생님이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선생님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패했을 때 낙심하거나 절망하는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십시오. 실패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환난과 시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극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3-26절입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행13:2-3절은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한 안디옥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이방인 선교를 계획하였고, 기도를 한 후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의해 파송 받은 바울과 바나바 역시 항상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제자들을 격려한 바울과 바나바는 제자들 가운데서 장로들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삶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밤낮 쉬지 않고 여행을 계속하면서도,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일꾼을 세우는 과정에서도 기도를 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기도는 바울에게 끊임없이 용기를 주었습니다. 1C의 전도자들은 누구나 개척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동역자도 없고 보호자도 없는 상황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교회를 세우는 일은 불가능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이 막연한 일을 기도와 함께 감당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금식할 때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역사 하시는 것을 체험하면서, 기도를 믿음의 문을 여는 열쇠로 사용하였습니다. 기도가 없는 신앙생활은 현실의 장벽과 방해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 마음에서 두려움을 몰아내고 도전 의지와 용기를 얻게 만들어 줍니다.
한 청년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뱃사람이 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소식을 접한 친구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바다에서 잃은 사람이 다시 뱃사람이 되려 한다”며 간절히 만류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자네들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침대에서 돌아가셨다고 해서 침대를 두려워하지 않듯 나는 바다가 두렵지 않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기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와 능력을 주십니다. 간절히 기도하였던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승리하였고, 기도하는 모세는 홍해와 애굽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재건축할 때에 많은 방해와 모함 그리고 위협이 있었으나 그는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끝내 그 일을 이루었습니다. 기도가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개척 선교지에서 누구의 도움과 협조도 없었지만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능력을 덧입으면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도의 힘으로 믿음의 문을 열어나갔던 것입니다. 금식기도를 통해 일꾼들을 세운 바울 일행은 그들을 주님께 부탁했습니다. 27-28절입니다.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바울 일행이 비시디아와 밤빌리아를 거쳐 안디옥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회중들이 모였습니다. 그때 바울 일행은 선교 여행동안 일어난 영웅담을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앉은뱅이를 일으켰고, 바보에서는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무당 엘루마를 눈멀게 했으며, 돌에 맞아 죽을 뻔했었는데 살아난 이야기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기도도 중요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기도했어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행한 모든 일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고전15:10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나갔고, 하나님께서 일하셨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전승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죽어 천국 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천국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베드로는 그에게 일생의 모든 일을 점수로 환산하여 100점이 넘어야 문이 열린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가 얼마나 성실히 신앙생활을 했으며 교회 봉사와 헌금생활에 성실한 것과 아내와의 혼인서약을 잘 지킨 것과 구제에 힘쓴 것을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것은 모두 1-2점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는 울면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습니다. 그 은혜를 믿고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천국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은혜가 있어서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한시로 잊지 않은 바울은 1차 선교 여행을 마친 후 자신의 영웅담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셨는지, 어떤 은혜를 허락하셨는지 고백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렸던 것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를 힘입어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하나님의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랍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난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렇게 순간순간 다가오는 환난과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죽기를 각오해야합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확실한 각오와 결심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은혜에 감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힘과 능력을 주시고, 지혜와 지식을 주시는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서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예배드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높이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