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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ROME)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3일 간의 남부지역 여행을 마치고 피우치로 돌아왔다. 낮에 본 피우치는 우리를 춥고 배고프게 했던 첫날의 그 피우치가 아니었다. 가이드 장은 피우치를 약수와 포도주산지, 다수의 교황을 배출한 지역으로 소개했다. 피우치 약수는 르네상스시절 미켈란젤로와 단테도 다녀갔다고 했다. 유명 휴양지여서 그런지 산등성이에는 은퇴 후 연금수혜자들이 지어 놓은 별장이 많았다. 약수터 입장료도 7유로에서 10유로나 되어서 우리나라 동네 약수터와는 개념이 달랐다. 피우치 한국인 식당 봉봉에서 저녁을 먹은 뒤 우리 일행은 따로 티본스테이크와 와인으로 2차를 했다. 호텔 근처에 대형 마켓도 있어 쇼핑을 했는데 아내와 사모님들은 이탈리아 치약과 쵸콜릿이 유명하다며 한 보따리씩 구매했고 나는 구멍이 숭숭 뚫린 치즈맛과 약수 맛이 궁금해서 치즈 한 조각과 피에타 약수 한 병을 사들었다.
5일차는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투어다. 가이드 장은 경험 많고 지식도 풍부했다. 여행사들도 그리고 가이드들도 로마관광은 힘들어한다는데 정확한 계획과 결단력으로 우리 일행을 리드했다. 로마투어의 핵심은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과 콜로세움, 치르코 막시모 대전차경기장과 왕궁이 있었던 팔라티노 언덕, 코메스틴 성모마리아성당, 포로 로마노, 트레비분수, 스페인광장과 판테온이다. 우리는 오전에 시내관광을 하고 오후에는 바티칸 시국을 답사하기로 했다.
서양 격언에는 로마와 관련된 내용이 많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라던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와 같은 문구가 그것이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이런 문구가 교과서나 참고서 앞뒷면에 쓰여 있기도 했다. 때론 교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때도 선생님들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잘라 말하곤 했었다. 서유럽인들은 그리스는 철학과 문학 같은 정신문화를 발전시켰다면 로마는 법과 건축 등 실용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고 말한다. 심지어 유럽 상류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이 프랑스 칼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로마 귀족들의 기부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까지 주장한다.
어째든 서유럽은 로마의 역사와 전통 위에 살아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로마시내 관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건축이다. 가이드 장도 콜로세움을 이야기하며 로마건축이 얼마나 대단한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내부를 살필 수 있었던 신전 ‘판테온’은 이 건물이 2천 년 전에 지어진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뛰어났다. 트레비분수의 화려함, 로마공화정의 중심인 포로 로마노의 모습도 비록 중세 이후 건축 자재들이 뜯겨 주변 성당과 공공시설의 건축에 사용되기는 했지만 놀라움을 갖기에 충분했다. 콜로세움도 본래는 지붕이 있는 돔형의 건물이었다고 한다. 이 도시가 자그마한 팔라티노 언덕에서 시작된 것이 맞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로마문화는 대단하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용기, 사익(私益)보다 공익(公益)을 앞세운 정신은 후대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대단한 문화유산에는 억압과 수탈의 역사도 함께 한다. 람세스 2세의 피라미드가 연인원 250만 명을 동원하여 30년 간 건축되었고, 중국의 만리장성이 1m를 건축하는데 한 명의 목숨이 바쳐졌다는 사례는 결코 자랑스런 역사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위대한 로마건축 앞에서 ‘로마의 번영은 누구에 의한 것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는 무엇을 꿈꾸는가’, ‘나의 역사관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과 동의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어느 시대를 가장 자랑스러워하는지를 물으면 십중팔구 광개토대왕 시기를 꼽는다. 칭호에서 알 수 있듯 광개토호태왕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내부결속을 다졌으며 영토 확장을 통해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거듭나게 한 인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시기는 우리가 약소국을 침략하고 지배했던 시기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 수탈의 대가로 고구려는 번영할 수 있었다. 로마의 번영도 예외는 아니다.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된 로마는 피나는 노력 끝에 대제국을 건설하고 번영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것을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국가들이 로마를 모델로 삼아 번영을 꿈꾼다 해도 우리는 시류에 영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좋은 사회는 계급과 차별이 없는 사회고, 좋은 세계는 강자와 약자가 상생(相生)하고 협력하는 사회여야하기 때문이다.
바티칸-세상이 종교를 걱정해서야
서유럽의 역사는 그리스-로마문화, 크리스트교문화, 게르만 문화가 융합되어 형성되었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 중세 유럽을 지배한 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다. 우리나라도 관광지의 70~80%가 불교나 유교와 관련 있듯, 이탈리아 여행에서 8팔은 기독교와 관련 있다. 기독교는 이들에게 과거와 현재, 미래와 삶이다.
이번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여러 성당을 답사했다. 물론 내부까지 찬찬히 둘러본 것은 두 세 개뿐이지만 어느 도시에서든 중심에는 우뚝 솟은 두오모를 볼 수 있었다. 중세 이후 성당은 유럽인들의 모든 삶을 지배했다. 태어나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결혼을 하면서 혼배성사를 받았으며 죽은 뒤 성당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고 교회 묘지에 묻혔다. 한 때는 생산물의 1/10을 십일세로 내기도 했다. 성직자는 최고의 지식인이었고 성서를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었으며 음악과 예술의 지배자이기도 했다. 과거와는 다르지만 아직도 로마가톨릭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만큼 교회는 제도와 권력으로 이탈리아인들을 강력하게 구속한다.
로마는 라치오주에 속한다. 나에게 이탈리아는 세리에A라는 프로축구리그와 연관되어 이해된다. 로마는 유벤투스, AC밀란·인터밀란과 함께 이탈리아 리그를 이끄는 AS로마의 본거지다. 얼마 전까지 AS로마에는 프란체스코 토티라는 전설적인 원클럽맨을 중심으로 세리에A를 제패했다. 로마를 둘러싼 라치오주는 축구팀 라치오의 본거지다. 라치오팀은 극우성향의 팬들을 갖고 있다. 축구경기에서 인종차별적인 야유가 가장 많이 나와 제제를 받기도 한다. 유벤투스는 세리에A의 최강자다. 밀라노의 AC밀란, 인터밀란을 거쳐 간 유명 선수도 많다. 나폴리는 과거 마라도나가 뛸 때 최전성기를 구가했다가 최근 중동 재벌이 인수한 뒤 강팀으로 거듭났다. 피렌체 근처의 페루자에서는 한 때 안정환이 뛰었고 롬바르디아 지방의 베로나에서는 이승우선수가 뛰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적인 축구선수들은 세리에A에서 뛰기를 희망했다. 유럽 챔피언스리그도 밥 먹듯이 우승했다. 네덜란드의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도, 리카르도 삼총사, 브라질의 카카와 호나우지뉴도 이탈리아 리그에서 명성을 얻었다. 우리나라 축구팬들에게 ‘날강두’로 지탄받는 호날두도 유벤투스에서 뛴다.
라치오주는 통일 이전 교황령에 속했다. 그만큼 교회의 제도와 권력이 큰 영향을 끼쳤다. 교황청이 로마 근교 바티칸시티에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전 세계 가톨릭 신자는 13억 명에 달한다. 13억 가톨릭 신자들은 각자 소속국가가 존재하지만 정신적, 신앙적으로는 바티칸 교황의 지배를 받는다. 그렇다보니 바티칸의 면적은 0.44㎢에 불과하지만 영향력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강력하다. 바티칸이 로마 교황의 거주관이 된 것은 6세기부터다. 1377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교황궁으로 정했다. 바티칸시국의 중심 건물은 성 베드로성당과 성 시스티나성당이고 그 앞으로는 베르니니가 건축한 성베드로광장과 142명의 성인(聖人) 조각이 있는 타원형의 거대한 회랑이 광장을 감싸고 있다. 성베드로성당이 처음 건축된 것은 4세기다. 기독교에서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처형되었다고 전하는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된 뒤 무덤 위에 성당을 건축한 것이 효시다. 현재의 성당은 16세기 초 신축한 건물이다. 십자군 전쟁 실패 뒤 교회와 교황의 권위가 하락하고 중세 기독교의 부패와 교리적 모순으로 위기를 겪던 로마가톨릭은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건축으로 권위를 되찾으려 했다. 하지만 재정적 어려움을 겪자 신학적으로 문제가 많았던 면벌부를 강제로 판매했다. 이것에 발단이 되어 루터와 칼뱅, 쯔빙글리 등이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로마가톨릭은 구교와 신교로 분열되었다. 그래서인지 성베드로성당은 건축적으로 매우 억압적이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종교적 편안함보다는 건축과 장식의 대단함에 주눅든다. 김O교수님 부부도 아내도 성당 내부를 둘러보며 연신 감탄을 자아냈는데 그것이 5백 년 전 로마교회가 성당을 건축한 궁극적 목적이었다. 아내는 비판적인 내 해석을 못마땅해 했다. 왜 있는 그대로를 보지 삐딱하게 해석 하냐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가 권위적이고 배부른 모습을 보면 심사가 꼬이는 걸 어떡하나.
바티칸시티의 큰 볼거리는 미술관과 성시스티나성당이다. 듣기로는 평소 미술관 앞은 관람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는데 우리는 코로나 덕분에 수월하게 통과했다. 가이드 장은 시간관계로 미술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중요한 곳만 관람하겠다고 잘라 말했다. 우리는 미술관 입구의 피에타와 라파엘로 작품을 거쳐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있는 성시스티나 성당만 관람했다. 나는 라파엘로 작품보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궁금했다. 너무도 유명한 그림이라 부분적으로는 봤지만 전체 그림을 관람했을 때 어떤 느낌일지 알고 싶었다. 최후의 심판은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근래 일본 방송사의 후원으로 복원작업을 마쳐 색체도 선명했고, 성당 천장과 벽 전체를 하나의 주제로 뒤덮은 그림은 명성대로 대단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너무 큰 그림이 한군데 펼쳐져 있어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이다.
다리아파 힘들어 하는 아내를 구석자리에 앉혀두고 성당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그림을 감상하다가 나도 다리가 아파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다가 일행을 놓쳤다. 구석자리에 앉혀 놓은 아내도 보이지 않는다. 가이드 장이 성당 안에서는 절대 일행을 놓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거늘 내가 어겨버린 것이다. 성당 내부를 돌며 아내를 찾고 있는데 인솔자 김선생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빨리 오지 않는다며 나무란다. 할 말이 없다.
파스타 파스타 파스타
여행에서 음식은 중요한 요소다. 음식은 문화의 총칭이다. 각 지역의 음식 속에는 자연환경과 생산활동이 들어있고 지배와 수탈, 저항의 역사가 숨 쉰다. 이탈리아는 밀의 나라, 올리브의 나라, 포도의 나라다. 여기에 해바라기를 더하는 사람도 있다. 소렌토 출신의 배우 소피아 로렌의 영화 ‘해바라기’에는 드넓은 해바라기밭이 엔딩장면으로 나온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예로부터 밀과 포도, 올리브오일 요리로 먹고 마시며 살아왔다. 지금도 올리브오일을 먹는 양이 우리나라 사람 소주 마시는 양과 비슷하다고 한다.
밀가루로 만든 이탈리아 대표 음식은 파스타다. 우리는 파스타 하면 ‘스파게티’ 한 종류만 생각하지만 실제 파스타의 종류는 수백 가지가 넘는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우리가 먹은 주식은 파스타였다. 인솔자 김선생은 점심메뉴를 묻는 우리에게 ‘파스타, 파스타, 파스타’라고 잘라 말했다.
정착생활이 시작된 뒤 인간의 식재료는 다양하게 발전했다. 밥보다 누들의 역사가 오래되었고 떡이 밥보다 오랜 연원을 갖고 있다. 누들의 역사가 오래된 것은 인류가 수전농업보다 한전농업 다시 말해서 밭농사를 먼저 지었기 때문이다. 밭에 심은 곡식은 신석기시대만 해도 귀리같은 잡곡이었지만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로 넘어오면서 밀과 보리, 벼를 심었다. 인간은 수확한 곡물을 가루로 만들어 요리했다. 선사시대 유적에서 맷돌의 원조인 갈돌이 발굴되는 것이 근거다. 밀가루, 보릿가루를 요리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국수가 가장 손쉬웠다. 유럽에서 누들로 부르는 면(麵)은 중국에서 처음 만들었다는 설이 우세하다. 하지만 먹는 방법은 지역에 따라 또는 자연조건에 따라 사뭇 달랐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다양한 모양의 파스타를 만들고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생산물로 소스를 만들어 비벼먹었다.
가이드는 이탈리아인들은 365일 가운데 360일은 파스타를 먹는다고 말했다. 그만큼 파스타는 우리의 밥만큼이나 흔한 이태리인들의 일상적 음식이다. 파스타는 듀럼 밀에 물을 넣고 반죽해서 소금물에 끊여낸 모든 면(麵)들의 총칭이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우리나라 쫄면 같은 국수에 토마토 소스를 얹는 스파게티가 있고, 원통형 파스타면에 페스토나같은 소스를 얹어 먹는 펜네, 그 외에도 푸실리, 파르펠레, 탈리아델레, 라자냐같은 것들이 있다. 파스타의 원산지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다. 시칠리아에서는 기원전부터 밀이 생산되었고 이것으로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하지만 밀은 쉽게 부패되어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지 못하다가 12~3세기 건파스타가 만들어지면서 제노바를 비롯한 이탈리아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우리와 같은 반도국가여서인지 이탈리아 음식도 남쪽으로 갈수록 맛이 짜고 북쪽으로 갈수록 약간 심심하다. 또 해산물과 오렌지, 토마토가 풍부한 남쪽에서는 토마토소스를 얹는 스파게티나 해산물이 들어간 파스타가 많았지만 북쪽은 토마토 소스와 크림치즈소스를 얹은 것이 많았다. 여행 내내 점심, 저녁으로 파스타를 먹었지만 크게 물리다거나 지겨워 포크를 내려놓는 일은 없었다. 동행한 두 분 교수님도 끼니마다 매우 맛있게 파스타를 드셨다. 하지만 아내가 걱정이었다. 향신료에 약한 아내가 과연 이탈리아 음식에 적응할 수 있을까 우려되었다. 다행히 파스타는 대체로 잘 먹었는데 로마를 지나면서부터는 한계를 드러냈다. 아내는 이럴 때를 대비해 풍부한 비상식량을 준비했다. 아내가 풀어낸 작은 캐리어에는 컵밥, 컵라면, 라면, 김, 볶음김치가 가득했고 심지어 라면포트까지 싸가지고 와서 무인도에 불시착해도 한 달은 버틸 만했다.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대부분의 호텔에서는 외부 음식을 단속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아서 나중에는 동료들에게 한 두 개씩 나눠주기도 하고 나도 한두 개 먹었지만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아내는 파스타가 물려서라기보다 캐리어 음식들을 줄이기 위해 컵밥이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이번 여행에서 잊을 수 없는 음식은 단연 티본스테이크와 라코타 치즈다. 청청지역이며 초지가 발달한 이탈리아의 소고기나 양고기는 육질이 우수하고 맛이 좋다. 하지만 패키지여행에서 우리 맘대로 음식을 주문할 수 없어 꾹 참고 있었는데 4일차 로마근교의 피에타에서 2박하면서 드디어 기회가 왔다. 호텔 근처 한국레스토랑 봉봉에서 주문한 티본스테이크는 1kg짜리 두 개 뿐인데도 6명이 나눠 먹을 만큼 많았다(나중에 옆 테이블의 남은 고기도 가져다 먹었지만). 피렌체에서 점심을 먹을 때도 파스타와 함께 티본스테이크가 나왔다. 피렌체의 스테이크는 피에타보다 크기는 작았지만 육질은 우수했다. 나는 용감하게도 살을 발라낸 뼈를 손으로 잡고 뜯었다. 이것이 아내에게는 부끄럽게 여겨졌나 보다. 아내의 표정은 싸늘해졌고 두 김교수님 내외분은 한동안 우리 눈치만 살폈다. 난감했던 상황, 빨리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