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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뀌고 바뀌는 팔레스타인의 패권
-팔레스타인 땅의 패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느부갓네살이 꿈속에서 보게 된 신상과 바벨론 땅에서 총리로 있던 다니엘에게 환상을 통하여 보여주 셨던 짐승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느부갓네살의 꿈과 다니엘의 환상 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전개될 세계사의 패권을 계시하신 것이 다. 그 계시대로 제국의 역사는 펼쳐진다. 예수님은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시대에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한 작은 마을에서 탄생하시는 것이다. 거대한 로마제국과 초라한 작은 마을이 대조가 된다.
☘ ❲유다를 지배했던 제국들❳바벨론(70년)⇨ 바사(200년)⇨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30년)⇨ 애굽의 프톨레미왕조(100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셀레우코스왕조(34년)⇨ 유다의 독립(100년)⇨ 로마(이후 신약성경 계속) |
1) 첫 번째 지배자 바벨론
-바벨론은 약70년 동안 유다를 지배한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은 바 사의 고레스에 의해 패하고 세계사에서 물러난다.
당시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유대인들은 비천한 자뿐이었다. 근근히 개인적 삶만 유지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바벨론 왕궁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었다. 바벨론에 잡혀온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대 신 회당을 중심으로 모여 율법이 가르쳐지고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하 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왕궁에서도 다니엘은 정한 시간에 예 루살렘을 향하여 기도를 하였다.
2) 두 번째 지배자 페르시아
-포로시대의 성경 내용에는 바사(페르시아) 왕들의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유대인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던 고레스를 비롯해서 다리오 1세, 아하수 에로, 아닥사스다 1세, 다리오2세, 아닥사스다 2세, 다리오 3세다. 이 왕 들 사이에 함께 살았던 유대 지도자들은 다니엘, 스룹바벨, 예수아, 학개, 스가랴,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등이다.
-이 때의 사건들 또한 우리에게 익숙하다. 포로귀환, 성전재건, 성곽재건, 개혁운동 등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했다. 후대에 이르러 이 공동체를 일반역사에서는 ‘유대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포로 귀환 후의 히브리 정체성❳ ▘포로 귀환 후 히브리 백성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불어 넣어준 인물 - 에스라말씀을 연구하는 문화가 나타남. ▘거대한 제국에서 보는, 팔레스타인 남방 유다쪽에 있는 포로 귀환 공동체의 모습 -->"수리아"라고 불림. 수리아는 곧 아람이다.-->아람 :아람, 모압, 에돔, 유다, 사마리아 전체를 포함. ▘에스라, 느헤미야, 포로 귀환 후 공문서--> 아람어로 작성됨, ▘팔레스타인 공용어--> 아람어 |
3) 세 번째 지배자 헬라(그리스)
-바사의 마지막 왕인 다리우스 3세와 그리스 마게도냐의 알렉산더는 비슷 한 시기에 왕으로 즉위한다. 알렉산더는 아버지 필립 포스로부터 전쟁에 관한 여러 병법을 배우게 되고 또한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8년
동안 많은 학문과 기술 그리고 전술과 철학, 헬라 문화 등을 어릴 적부터 배우게 된다. 그는 B.C.333년 잇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패퇴시킨 후, 뵈니게, 두로, 이집트가 차례로 그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유다)도 그의 수하에 들어간다. 또한 알렉산더대 왕은 눈을 동방으로 돌려서 바벨론 지역과 수사(에스더의 궁이 있던 장 소)까지 점령했고 멀리 인더스강까지 건넌다. 그는 B.C.323년에 병으로 뜻하지 않게 죽지만 그가 점령한 곳마다 헬라화시켜서 헬라문화가 온 세 상에 퍼지도록 하였다. 알렉산더는 세상을 떠났지만 헬라문화는 남은 것 이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제국은 여러 개의 제국으로 나누어지게 된 다.
4) 네 번째 지배자 프톨레미 왕조
-알렉산더의 죽음 후에 헬라 대제국은 그의 부하들에 의해 투쟁이 벌어지 고 그 중에 두 사람이 가장 큰 권력을 갖게 되는데, 프톨레미와 셀레쿠오 스였다. 프톨레미는 이집트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셀레우코스는 티그리 스 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갖게 된다. 이 두 경쟁자는 팔레스타인과 뵈니게를 탐냈는데 결국 먼저는 프톨레미의 손에 들어간다. 그래서 팔레 스타인은 헬라인이 다스리는 이집트의 속국이 되는 것이다.
-이 왕조는 유대 공동체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일찍이 프톨레미 1세는 알 렉산더 대왕을 기념해서 지중해를 낀 해변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개 발하여 수도로 삼는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도시에만도 약 백 만 명의 유 대인 디아스포라가 있었다고 하니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한 지역이다.
-이렇게 이집트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 동안 히브리말로 쓰여진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B.C.3세기 경, 프톨레미 2세는 랍비 72명 을 통하여 흩어진 구약성경을 모으고 그리고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하게 한다. 이 작업은 280년경 완성된다. 이 최초의 번역본을 ‘칠십인경, 혹 은 칠십인역’이라고 한다. 이 역사는 앞으로 신약시대에 와서 온 땅에 복 음이 전파되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
5) 다섯 번째 지배자 셀레우코스 왕조
-셀레우코스 역시 프톨레미와 마찬가지로 헬라 사람의 왕조이다. 알렉산더 대왕과 프톨레미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헬라 문화는 자연스럽게 유대 땅에 전달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헬라의 문화는 발달된 문화였다. 셀레우 코스 1세는 유대인 공동체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던 왕이기도 하다.
-B.C.198년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는 프톨레미 왕조의 군대를 물리치고 그들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몰아낸다. 이 때에 안티오쿠스는 여러 도시를 건설하면서, ‘안디옥’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16개나 건설한다. 성경 에 나오는 수리아 안디옥, 비시디아 안디옥 등이다. 팔레스타인 땅 안에도 헬라식 도시들이 여러 개 세워졌다.
-그런데 유대 땅에 고통의 역사가 닥친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이르렀을 때에, 유대인을 잔혹하게 핍박하는 정책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로마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의 금들을 가져간다. 또한 그는 자신을 신격화하고 헬라의 신들을 섬기도록 강요한다.
-B.C.167년에 급기야 유대인 양민들을 학살을 감행하고 유대교의 모든 관 습을 금하는 칙령을 공포한다. 희생 제사를 금지했고 안식일과 절기 지키 는 것을 금하고 율법의 사본들을 파기하는 명령을 내렸고 할례를 금지시 키면서 어길 경우에는 사형에 처하는 법을 공포했다. 하나님 여호와를 섬 기는 율법을 금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을 신격화하여 만든 제우스 신상 을 예루살렘 성전안에 세우고 숭배하게 했으며 율법에서 금하는 돼지고기 를 제물로 바치게 하고 유대인들에게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하였다. 그 리고 이교의 제단들을 도처에 세웠고 그곳에서 제사를 하게 하였다.
6) 마카비 혁명(독립 100년)
-유대인들은 이 잔인한 탄압에 무장을 하고 대항하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 도 율법과 언약에 열심이었던 제사장 가문에 속한 맛다디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들들과 함께 투쟁을 하는데 앞장선다. 결국 이들의 활동으로 안티 오쿠스 4세에게서 독립하게 되는데 이를 가르켜서 우리는 흔히 마카비운 동‘이라고 부른다. ’마카비‘란, 맛다디아의 셋째아들 유다의 별명인데, ’ 쇠망치‘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승리로 유대인들은 100년 동안 독립을 한다. B.C.165년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게 하는데 바로 이를 기념하는 명절이 신약성경에도 나오는 수전절이다. 그 때 이래로 마카비의 후계자들이 계속해서 유대인들을 다스리게 되는데 이 왕조를 하스모니안 왕조라고 한다.
-포로시대 이후부터는, 국권이 상실되므로 말마암아 ‘나라’라는 개념보다는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유다공동체’는 왕도 없고 선지자도 하나님께서 보내시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장들과 성전중심의 신정정치 였으며 내적으로 지도자는 당연히 제사장들이었다.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들은 싸웠고 이로 인해 유다는 100년 동안 독립하게 되었다. 나라를 되찾은 것이다. 성전을 청결케 했던 것이다. 소위 ‘마카비 시대’는 ‘유대교가 제도적으로 다져지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회 복하면서 율법연구와 가르침을 강조하게 된다. 안식일, 할례, 정결 의식, 십일조, 성전과 제사규례 등을 강조함으로써 정화된 ‘새 이스라엘 공동체’ 의 특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마카비 전쟁을 통하여 그들은, 율법(안식일)을 지키려고 전쟁을 하고 죽는 날까지 율법을 지키며 죽는 것이 유대인답게 사는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누가 과연 하나님의 백성인가?’라고 묻는 물음 앞에, 포로 이후에는 ‘성전 짓는 자’이던 것이, 중간기를 거치면서 ‘율법을 지키는 자’ 로 유대 사회는 봉합된다.
-중간기의 마카비 가문을 통하여 제사장이 대제사장이 되고 왕의 직분도 같이 했다. 그러므로 율법에 나타나는 제사행위는 당연히 가장 중요한 요 소가 되었다. 이렇게 흘러가는 역사는 후에 이들 유대 공동체 내에서 ‘누 가 대제사장이냐?’가 곧 ‘누가 권력가냐?’로 대치되는 역사를 낳고 말았 다.
-하스모니안 왕조는 제4대까지 내려 오면서 예루살렘 동남쪽의 이두메(에 돔지역)까지 정복하게 된다. 이 때 정복한 에돔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총 독을 두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안티파스(B.C.78년 사망)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본래 이두메(에돔지역)을 다스리던 왕이었다. 바로 이 사람이 예수님 이 탄생할 때에 죽이려고 했었던 헤롯(대헤롯)의 할아버지이다.
-안티파스는 로마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면서 로마의 권력에 가까 이하며 결국에는 하스모니안 왕조에 반역한다. 로마와 손을 잡고서 유대 의 왕자리를 빼앗고 왕이 된다. 이것은 유대가 다시 로마의 지배하에 들 어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께서 탄생하시는 즈음에 유대의 왕으 로 에돔 사람 헤롯대왕이 있었고 그 위에 로마라는 큰 지배 세력이 있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로마와 헤롯이라는 이중 지배하에 압제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티파스는 돈으로 권력을 샀다.
7) 여섯 번째 지배자 로마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과 다니엘의 환상가운데 언약하셨던 네 번째 제국은 로마였다. 로마는 원로원 위에 삼두정치(폼페이, 크랏수스, 율리어스 시저)를 두고 있었다. 유다의 100년 독립 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갈 때에는 삼두 중 폼페이 관할 지역이었다.
-B.C.63년에 안티파터(안티파스의 아들, 대헤롯의 아버지)가 폼페이를 도 와 예루살렘을 정복한다. 그 후 율리어스 시저(가이사)와 폼페이는 패권을 놓고 싸우기 시작한다. 한 나라의 머리는 3개가 될 수 없었다. 1개의 머 리가 되고자 전쟁을 하는 것이다. 결국 가이사는 이집트에서 폼페이를 죽 이고 얼마 후 최초로 로마를 통일천하하는 주인공이 된다. 가이사는 마카 비 가문의 힐카누스 2세를 한 지역의 총독 정도로 임명을 하고, 안티파터 를 사실상 유대의 행정관으로 임명한다. 안티파터의 힘이 커진다. 안티파 터는 그의 작은 아들 헤롯(대헤롯)을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한다.
-B.C.44년에 가이사(율리어스 시저)가 죽자 다시 로마는 혼란이 찾아온다. 때에 안티파터는 죽고 헤롯은 마카비 가문의 항쟁으로 다시 로마로 도망 을 가게 된다. 헤롯은 로마에서 유대의 왕이 되기 위한 로비를 펼치고 결 국에는 헤롯이 왕으로 임명된다. 결국 로마군의 지원을 받아 마키비 하스 모니안 왕조 계열의 마지막 통치자 안티고누스를 죽이고 예루살렘 성을 빼앗는다. 이 때 헤롯을 도와준 장군이 안토니우스였다. 이렇게 해서 헤롯 은 명실공히 ‘유대의 왕’으로 등장하는 것인다. B.C.37년경의 일이다. 이 때부터 에돔사람 헤롯 가문은 ‘유대의 왕’으로 다스리게 된다.
☘ ❲헤롯알기❳ ⓵ ▸헤롯은 유대인의 지지를 충분히 얻지 못하자 하스모니안 가문의 유대인 여자 미리암 1세와 결혼함으로써 왕조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이는 그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헤롯은 B.C. 37년에 로마 황제의 도움을 받아 유다의 왕이 되었다. 이로써 약 100년 동안의 하스모니안 통치가 종결되었다. 헤롯은 이두메아인(에돔인)으로서 머리가 비상한 책략가였고 잔인한 독재자였다. 그는 B.C. 31년까지는 안토니우스를 지지하였으나 옥타비아누스가 정권 다툼에서 승리하게 되자 그에게 찾아가서 왕관을 벗어들고 자신을 처벌해 달라고 자청하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헤롯을 용서하고 그에게 왕관을 씌워 주었다. ▸통치 초기(권력 기반 마련을 위한 피의 숙청): 자신의 세력을 굳히기 위해 왕족인 아내와 장모, 동서, 그리고 힐카누스 2세까지 처형시킴. ▸통치 중기(건축 사업): 수많은 건축 공사를 함. 그는 황제 신전, 극장, 경기장, 체육관, 목욕탕, 그리고 새 도시를 건축하였으며, 예루살렘을 그리스-로마식으로 바꾸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성전을 건축하였으며(B.C.20년-A.D.63년), 사마리아를 재건하여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그 이름을 따서 세바스테라 불렀고, 가이사랴에 항구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요새와 왕궁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그는 헬라주의자들만 요직에 앉힘으로 바리새인들의 반발을 샀다. ▸통치 말기: 자기의 아들을 모두 죽임(B.C. 7년). 주전 4년에 여리고에서 죽음을 당함. 마태는 바로 이 헤롯 때에 아기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고 하였다. (마2:1). |
☘ ❲헤롯성전알기❳ 헤롯 대왕이 중건한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에 이어 세 번째 세 워진 성전이다. 스룹바벨 성전이 B.C. 63-62년에 로마에 의해 완전히 유린된 후 헤롯 대왕이 B.C. 20년부터 재건하여 헤롯 사후 A.D. 64년에 완공되었다. 이 성전은 웅대하고 화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의 예언대로(막 13:1-2) 완공된 지 6년 뒤인 A.D.70년에 디도(Titus)가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 락될 때 함께 불타버렸다. |
☘ 예수님 탄생 시기의 ❮로마 황제 등극이야기와 칭호 ‘가이사’❯ 동부지역(수리아, 터키 등 지중해 동쪽 내륙)을 장악했던 안토니우스는 그만 이집트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진다. 가이사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이라는 곳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연합군과 해전을 벌인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므로 명실공 히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대권을 차지하게 된다.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이다. 예수님 탄생 시기의 로마 황제이다. 이때에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가 영을 내려 천하에 있는 사람들은 다 호적을 하라고 하는 바람에 요셉과 마리아도 그들의 고향 베들레헴 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렇게 황제 명칭을 최초로 가진 사람이 가이사의 양아들 옥 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숭고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나중에 받음)였지만 ‘가이사’라는 이름이 통상 ‘로마 황제’를 상징하는 칭호로 쓰이게 된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가이사’하 면, 황제를 가르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