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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아인슈타인의 수표>의 줄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를 대비해서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천국이 아인슈타인의 수표가 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 씩이나 수표를 책갈피로 사용한 아인슈타인의 일화를 비유로 하여 주님이 당부하신 깨어있음의 참 의미를 살펴보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할 수 있는 복된 말씀으로 받아들여 봅니다
아인슈타인의 수표
(막13:28-37)
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아인슈타인의 수표>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1920년대 초 독일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을 때, 아인슈타인이 독일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지인들이 독일의 경제 상황을 전해 듣고 아인슈타인의 생계를 걱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끼리끼리 돈을 좀 모아 수표로 바꿔서 아인슈타인에게 보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그 보내진 수표를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났는데도 도대체 돈을 받은 사람이 잘 받았다는 전갈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돈을 보낸 지인들이 걱정에 사로잡혔어요,
‘이건 분명히 아인슈타인의 신상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 아니고서야 돈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돈 받았다는 전갈을 보내지 않느냐?’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소식을 알 길이 없다가 어떻게 수소문 끝에 아인슈타인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지인들이 이 사람에게 염려를 말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의 생계를 염려해서 돈을 보냈는데 잘 받았다는 응답이 없다’ 그랬더니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설마 아인슈타인에게 직접 돈을 보내지는 않았겠지요?’
‘그게 무슨 말이냐, 당연히 아인슈타인에게 직접 보냈지’
‘그러면 어떡하느냐, 빨리 아인슈타인의 부인에게 전보를 쳐라’ 해서 이 사람들이 부랴부랴 아인슈타인의 부인에게 전보를 쳤더니, 부인이 깜짝 놀라서 아인슈타인의 서재에 들어와서 뒤지기 시작합니다.
서랍을 뒤지고 온통 다 뒤져도 수표가 보이질 않습니다.
쓰레기통까지 뒤져 봤지만 시간이 이미 많이 지난 뒤입니다.
낙담을 하고 책상 위에 있는 책을 펼쳐보는데 아인슈타인이 그 책을 읽으면서 수표를 책갈피로 사용하고 있었던 거예요.
온 나라 안이 인플레이션으로 경제사정이 어렵게 되고 아인슈타인의 집의 생계가 용이하지 않게 진행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수표를 돈으로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책갈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미국에서 온 편지라서 뜯어보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편지를 읽기도 했겠지요.
그런데도 그 수표를 보면서 책갈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얘기에요.
그리고 미국으로 와서 살 때는 록펠러 재단에서 1500불, 1940년대 1500불이면 엄청난 돈이지요, 1500불의 수표를 발행해 주었는데, 그것도 역시 책갈피로 쓰고 있다가 책하고 수표를 같이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수표라고 하는 게, 군침이 흐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경제형편이 그럴 때…
그런데 그 수표의 효용가치에 대해서 아예 의식 자체가 깨어있지를 않는 겁니다.
이걸 바꿔서 무엇도 살 수 있고, 무엇도 살 수 있고… 얼마나 좋은 겁니까, 이 수표라는 게.
그런데 그 맛 자체에 대해서 의식이 죽어버린 상태인 겁니다.
그러니까 책갈피로 쓰고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아인슈타인이 모든 방면에 대해서 다 죽은 게 아니에요.
물리학에 대해서 너무너무 깨어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깨어있다고 하는 것이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엇이겠습니까?
몰입되어 있다는 얘깁니다.
물리학 연구에 몰입되어 있고, 물리학 연구에 깨어있었기 때문에 다른 방면에 대해서는 의식이 잠자고 있었던 거예요.
주님께서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을 대비해서 깨어있으라고 할 때, 이 깨어있다는 말과 잠잔다는 말이 같이 나온다고 해서 우리의 육체가 잠자는 것도 하지 말고 깨어있으라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의식이 깨어있으라는 얘깁니다.
의식이 깨어있다는 얘기는 이렇게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에 대해서 갖는 관계처럼 의식이 몰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의식이 잠자고 있다는 것은 바로 만지면서 책갈피로 사용하고 있었던 수표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마음상태가 잠자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주님께서 잠자지 말고 깨어있으라고 하신 참 의미라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왜 우리가 재림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깨어있지를 못할까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는 아예 예수님에 대해서 깨어있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깨어있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에 대해서 깨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 아닌데! 날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께 간구하고 있는데?’
그게 깨어있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강릉에 있으니까 말씀을 듣던 분들이나 지인들 중에 저를 만나러 오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그래서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대화를 할 때마다 느끼는 거예요.
대화라는 게 참 즐거운데, 상대방의 관심이 대화를 주도합니다.
제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요.
그런데 어떤 분은 서울에서 출발해서 강릉 왔다가 길면 네 시간 이렇게 있다가 가시거든요?
그 동안에 제 근황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제게 전화를 걸고 저를 만나서 대면하여 식사하고 차 마시면서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저의 근황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를 않습니다.
제 근황에 대해서는 의식이 깨어있지를 않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씀만 하고 가십니다.
재미있지요?
또 어떤 분은, 친구 목사님이 한분 오셨는데 그분은 아예 당신 얘기는 하지를 않으시고 ‘아, 그랬어? 저랬어?’ 하고 제 얘기만 묻습니다.
그런 분도 계세요.
그러니까 온통 그분의 의식은 저에 대해서만 깨어있는 거예요.
또 반대 분은 전부 저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게 전화해서 약속을 하고 여기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 이야기만 하고 갑니다.
당신 자신에 대해서만 깨어있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우리의 상황을 아뢰고, 우리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주시기를 바라고, 은혜를 구하고…
전부 다 예수님과 기도를 통해서 대화하고 있지만 내 상황에 대해서만 깨어있는 것이에요.
주님의 상황에 대해서 깨어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주님이 계신 천국에 대해서 깨어있어야 되는 겁니다.
어차피 재림은 우리가 그 때를 알 수 없으니까 주님에 대해서 깨어있으려면 주님이 지금 계시는 천국에 대해서 깨어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그 천국을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주신 것이에요.
왜? 주님 계신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아버지가 계신 곳이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깨어있으라는 이 말씀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깨어있으려면 그 때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때를 바늘 끝을 맞추는 것처럼 그렇게 깨어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깨어있으라는 것이고, 그 얘기는 ‘이 세상에 몰입되어서 이 세상에 대해서 깨어있을 게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인슈타인의 수표처럼 잠자고, 천국에 대해서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처럼 깨어있어라, 천국으로 몰입해라!’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이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이 되어야 되는데,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면 이 세상일이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물리학 같은 것이고, 천국은 우리에게 있어서 아인슈타인의 수표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천국의 효용가치를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 모르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일에 대해서 깨어있으니까…
자식에 대해서 깨어있고, 내 사업에 대해서 깨어있고, 내 건강문제에 대해서 바짝 깨어있습니다, 거기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실제로 계신 천국에 대해서는 완전히 아인슈타인의 수표가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수표를 날마다 만지면서 책갈피로 사용한 것처럼 날마다 천국을 얘기하고 있어도, 듣고 있어도, 죽은 다음에 갈 거라고 믿고 있어도, 천국의 효용가치에 대해서 지금 현재 이 자리에서 완전히 잠자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재림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깨어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지금 계신 곳에 대해서 우리가 잠자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오실 것에 대해서 우리가 깨어있을 수가 없지요.
지금 이 세상에서 내게 처해져 있는 내 경제 형편, 내 건강 형편, 내 가족 형편, 내 자식 형편에 대해서만 깨어있는 겁니다.
이랬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결국 깨어있다는 것이 몰입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여러분, 몰입한다는 말의 뜻이 이런 거예요.
모든 잡념, 방해물들을 차단하고 원하는 어느 한 곳에 자신의 모든 정신을 집중하는 것, 이거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지 않아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게 깨어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부 세상에 대해서 깨어있어요.
세상에 대해 깨어있다는 것, 이 세상 삶에 몰입되어 있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 것이냐 하면, 그게 바로 더러움이라는 겁니다.
우리 마음은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께 드려져야 될 것입니다.
다 드려져야 됩니다, 다~ ~.
즉, 하나님께 몰입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게 다른 것에 몰입되어 있는 상태가 더러움이요, 이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우리 마음상태가 다른 것에 몰입되어 있어서, 마치 하얀 실크블라우스에 김칫국물을 잔뜩 묻히고 있는 것처럼, 김칫국물이 무조건 나쁘다거나 더러운 것은 아니지만 실크블라우스에 묻으면 블라우스도 김치도 더러워지는 겁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이 세상에 몰입되어 있는 상태에서 주님께서 오실 때, 그 더러움을 주님이 이제는 견디실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심판으로 처하게 된다는 얘기에요.
재림이 오기 전에 내가 죽을 텐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여러분, 분명히 합시다.
주님께서 재림의 때가 언제일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이 말씀을 내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우리가 재림이 되기 이전에 죽는다고 해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죽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심판대 앞에 서기 위해서 부활합니다.
이때 우리가 죽을 때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설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한참, ‘돈, 돈, 돈’ 하며 돈에 몰입돼 있다가 돈에 신경 쓰다가 뇌졸중으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장로님이세요.
그분이 돈 때문에 뇌졸중이 걸릴 정도로 신경 쓰고 있다가 죽었는데, 그 옛날 청년시절 뜨겁게 믿던 그때의 마음상태로 예수님을 만나도록 허락하시겠습니까?
아니에요, 그럴 수는 없다는 얘깁니다.
돈에 몰입되어 있고, 사업에 몰입돼있고, 세상살이에 몰입돼있고, 하나님께 몰입돼본 적도 없고, 주님께 천국에 몰입돼본 적이 없어요.
그쪽을 향해 의식이 깨어있어 본 적이 없습니다.
천국에 관한 한 전부 아인슈타인의 수표 같은 것들이었어요.
그리고는 이 땅에서 문제 해결하는 하나님, 이 땅에서 문제 해결하는 예수님에 대해서만 깨어있었던 거예요.
이거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 내 상황 내 문제에 대해 깨어있었던 것이고 거기에 몰입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홀연히 주님께서 임하신다는 이야기는, 내가 홀연히 죽기 때문에 내가 재림 이전에 죽어도 여전히 맞는 말씀이라 이겁니다.
자, 그러므로 문제는 어떻게 천국에 몰입할 수 있느냐는 것이에요.
천국에 계신 예수님께 몰입하고 그 예수님 좌편의 보좌에 앉아계시는 그 하나님께 어떻게 몰입할 수 있겠느냐?
몰입이란 다시 말해 ‘모든 잡념과 방해물을 차단하고…’, 마음에서 차단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신경을 잡아당기는 모든 것들을 차단한다는 거예요.
잡념도 차단해버립니다, 잡념이라는 것은 마음의 힘을 빼앗아가는 것이니까.
생각한다는 것, 걱정, 염려한다는 것, 이건 마음의 힘을 빼앗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끌려가는 것에 우리는 깨어있는 것이고 몰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천국에 몰입합니까?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그것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심지어 목사님들의 경우 목회라고 할지라도 십자가에서 마음으로부터 끊어내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은 자인 것을 인정해버리고,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지금 목회현장에 대해 죽어버리는 겁니다.
자식문제에 대해 죽어버리는 거예요, 사업에 대해 죽어버리는 겁니다.
내 건강에 이상신호가 느껴집니다, 그것에 대해서 지금 죽어버리는 겁니다.
우선은 천국에 몰입하는 게 중요합니다.
천국에 계신 아버지하나님과 주님께 몰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서 잡념을 다 잘라버립니다, 방해물을 다 차단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 마음에 생각이 날 때마다 십자가를 기억하고 잘라버리는 거예요.
이게 바로 몰입하는 거예요.
천국에 몰입하는 유일한 방법이 십자가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골로새서에서 ‘위엣 것을 생각하라!’,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땅의 것을 잘라냅니까?
그냥 안 하면 되는 거예요? 아니에요.
십자가를 바라보는 겁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아, 누가 너희를 미혹하느냐?’라고 바울이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확실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미혹하더냐?’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바라보듯이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에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의 생각이 날 때마다,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한 의식이 깨어날 때마다 십자가를 통해서 잠재워 버립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점점 더 모아집니다.
사업에 신경 쓸 마음 모으고, 건강에 신경 쓸 마음 모으고, 자식에 신경 쓸 마음 모으고, 다 마음을 십자가로 모아만 놓으면 십자가에 주어진 약속이 있어요.
성령께서 주어집니다.
성령께서 주어지시면서 내 마음을 하늘로 끌고 가서 천국의 실제 효용을 지금 느끼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천국의 효용을 지금 느낄 때, 천국에 몰입되어 있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나의 세상살이에 대해서 하나님의 의식이 본격적으로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사시는 거예요.
한번 이것을 우리가 경험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왜 성령이 충만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마음을 다 모아서 우리 마음이 십자가 위에서 충만해져야 돼요.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의 신경을 분산해서 빼앗아가는 모든 것들로부터 다 마음을 회수해서 십자가 위에서 내 마음이 충만해져야 -돈 위에 충만해지는 것, 사업 위에 충만해지는 것, 자식 위에 내 마음이 충만해져서는 안돼요- 성령이 충만해지더라 이겁니다.
십자가 위에서 충만한 마음에 대해서만 성령이 충만해 집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마음으로 주어지는데, 마음이 충만하지 않은데 성령이 어떻게 충만하게 임하시겠습니까?
성령을 담을 그릇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는데.
그래서 천국에 몰입될 때에 재림, 지금 재림하셔도 기쁜 겁니다.
미련이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천국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사업에 몰입되어 있을 때는 예수님 재림에 대해 아인슈타인의 수표처럼 생각할 뿐만 아니라 재림이 하나도 반갑지가 않아요.
‘일단 요걸 좀 잘 해보고 그리고 돈을 많이 모았으면 요걸 좀 쓴 다음에 재림을 하셔야지, 지금 은행에 천억이 들어있는데 한 푼도 못 썼는데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천억이 휴지가 돼버리네! 어떡해?’
여러분, 천국이 말로만 되고 실제 그 천국의 효용가치를 내게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가 돼서는 안 됩니다.
아인슈타인의 수표처럼 취급받아서는 안 돼요.
오히려 이 세상일에 대해서, 내 사업문제, 건강문제, 자식문제에 대해서 아인슈타인의 수표처럼 취급해버릴 정도로 천국에 몰입되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의 상대성이론을 발견해내기 위해서 얼마나 깊이깊이 몰입돼있었겠습니까?
수표를 만지작거리면서도 책갈피로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니 수표를 보면서도 그 가치와 맛을 모르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천국에 몰입되어서 이 세상일에 대해서 의식이 죽으세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세워두신 계획에 따라서 이 세상살이도 하나님의 의식이 깨어있는 것처럼 이끌려 가실 것입니다.
아,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깨어있으라! 천국에 대해 깨어있고 천국에 대해 몰입해라!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어라! 잠자라! 그러면 내가 깨어서 이 세상일은 이끌어 갈 것이고 너는 천국 안에서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천국의 평강을 누리라!’
이 말씀이 깨어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기가 막힌 이 말씀, 오늘 하루 종일 내 속에 생기는 모든 잡념에 대해서 이 세상일에 대해서, 나를 세상에 끌어들이는 몰입하게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주님의 십자가로 차단하고 오직 천국으로 몰입되어지는, 천국을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처럼 경험하게 되는 귀한 복된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정말 자그마한 티끌 같은 생각일지라도 이 세상에 대하여 내 의식이 움직이려 할 때 점점 더 깊이 끌려가지 말고 십자가를 기억하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함을 통해 내 마음을 세상으로부터 차단시키게 하여 주시고, 마음을 다 십자가 위에 모아서 성령님 인도하심을 따라 오직 천국에 몰입돼고, 천국을 향해서만 깨어있는 하루를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