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한국 최초 여류화가 나혜석 /
이혼고백서 中 /
조선 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성도 사람이외다 !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 ————-
나혜석羅蕙錫(1896-1948)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유학생이었으며,
서양화가이며 소설가, 시인으로 그러면서 독립운동가로 당당히 자신의 삶을 살아갔던 여성.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세인의 비난 속에서 초라하게 죽어갔던 그녀가 백 년의 긴 침묵을 깨고 다시 부활했다. 여성의 권익이라는 것조차 입에 올릴 수 없었던 당시 왜 ? 여성에게만 정조가 강요되어야 하냐며 「이혼고백서」 를 발표했던, 우리 나라 최초의 페미니스트 나혜석의 화려하면서도 쓸쓸했던 불꽃
같은 생애가 두 권의 장편소설로 복원되었다. 「백년의 고독」 은 영광과 비난, 이상과 현실, 사랑과 증오,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겪으며 살았던 드라마틱한 인생, 그러나 천재적 예술가라기보다 지극히 인간다웠던 한 여성, 나혜석의 삶을 재조명한 작품이다.
————. ————-
-나혜석(1896 1948)
1896년 나혜석은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호조참판을 지내고 아버지 나기정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명문가였다.
1910년 여동생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미술과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일본에 유학중인 오빠의 권유로 도쿄여자미술학교의 유화과에 입학한다. 이때무터 유학생들 사이에 두각을 나타내며 그 이름이 회자되었다.
유학생 동인지인 <학지광>에 근대적 여성의 권리를 나타내는 글을 발표하였고 여자 유학생들끼리 조선여자친목회를 조직하여 <여자계>라는 잡지의 갈간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여권과 자유연애, 그리고 여성의 생활개선에 관한 글들을 발표했다.
과겨 현모양처로서의 역할을 부정하고 사회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여성상을 제기한 여성들. 이들이 바로 신여성이다.
나혜석은 바로 이러한 신여성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더욱 주목을 받는 것은 당시로서는 감히 시도도 할 수 없었던 자유연애를 했기 때문이다.
위험한 사상, 자유연애 -
나혜석은 21세때 첫사랑은 남자 시인 최승구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실의에 빠져 방황하다가 당시 와세다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다니던 춘원 이광수와 만나 급속히 가까워진다. 하진만 춘원은 기혼자였고, 이미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는 허영숙과 열애중이었다. 이 사실을 안 나혜석의 오빠들은 춘원과의 교제를 적극 만류했다.
민족개조론을 펴면서 민족주의를 표방한 이광수는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임을 인정하며 제국주의 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드러냈다. 이런 춘원의 사상은 이후 나혜석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920년 그녀의 나이 24세때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첫부인과 사별한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한다. 2년동안 집요한 구애를 한 김우영에게 나해석은 결혼의 조건을 내세우는데 그 때 상황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해 주시오.
김우영은 무조건 수락한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은 나혜석의 eNT에 따라 사별한 첫남자의 무덤이 있는 목표로 간다. 나중에 김우영은 그 무덤에 비석까지 세워주었다고 한다.
이렇토록 나혜석을 사랑했던 김우영은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이 될 정도로 거물이었고 김성수, 송진우, 최린, 최남선 등과 함께 당대의 명사였다.
세간의 주목을 받은 나혜석은 1921년 경성일보사 후원으로 첫 개인전을 연다. 조선 최초의 여류화가에게 매스컴은 주목을 했고 인파들은 몰려 들었다.
당시 직장인들의 한달 월급이 20원이였는데 나혜석의 그림은 한 점에 300원이나 하였다. 하지만 그림들은 전부 매진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927년 나혜석은 외교관으로 임명된 남편 김우영과 함께 유럽 여행길에 오른다. 시베리아를 거쳐 영국, 스페인, 미국 등을 여행하며 조선 여성의 선각자로서 견문을 넓혔다.
특히 파리는 그녀에게 '열린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예술혼을 맘껏 분출할 수 있게 하였다.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 준 것도 파리다.
나 중에 조선으로 돌아온 그녀는 파리를 그리워하며 이렇게 절규했다.
나혜석에게 파리를 더욱 잊을 수 없는 도시로 만들어 준 것은 남편의 친구인 최린과의 열렬한 연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베를린에 있었고 혼자 파리에 남아있던 나혜석은 사회지도자인 최린의 안내를 맡았다. 식당과 극장을 함께 가고, 유람선을 타고 가페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나는 公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내 남편과 이혼은 아니하렵니다.
나혜석은 최린의 프로포즈에 이렇듯 답했지만 결국 사회적인 통념을 위만하고 최린과 사랑을 나눈다.
최린과의 파리에서의 염문은 조선 지식인 사회의 최대 화제거리가 되었다. 1931년 나혜석은 결국 김우영으로부터 이혼울 당했다. 그들의 이혼소식은 동아일보를 통해 공식적인 기사로 다루어졌으나 최린이 막는 바람에 배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나혜석은 최린에게 이혼보상비 청구소송을 제기하여 또 한번 주목을 받았다. 그 제소 전문이 동아일보에 게재되자, 최린은 서둘러 나혜석에게 거금을 쥐어주고 재판을 취소하게 된다. 사회적인 선망을 받던 신여성이 하루아침에 비난과 멸시를 받는 추한 모습의 여자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나혜석과 최린의 연애를 기점으로 자유연애는 마치 여성해방의 상징으로 여겨졋다. 신여성이라면 누구나 자유연애자인 걸로 인식이 되었다.
1920년대 출판되 <별건곤>이라는 잡지에 실린 '부인운동자와의 회견기'가 있다. 당시 신여성들의 성의식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근일 여권운동자라 하면 일반이 품행이 방정치 못하다는데 이는 남성의 편견과 여자 자신의 무지에서 나오는 일종의 비방인 줄 압니다. 남자들은 그런 것을 불품행이니 무엇이니 하지마는 자기 가신이 하는 행동을 돌아 보면 그런 말이 아니 나올 줄 알아요.
이치를 따져 말하면 오늘 제도대로 하여도 잠자의 성욕의 충동을 완화시키려고 공창제도를 둔 것과 같이, 여자를 위하여서도 공창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요?
그렇나 편벽된 제도와 생각을 가지고 남자 자신은 성적 관계에 있어서는 사회적으로 관대한 처분을 내리면서, 여자가 만일 그러한 불품행한 일이 있다 하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다시 머리를 들을 수 없게 영영 장사를 지내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나의 생각은 일반 여성은 성적으로부터 먼저 모반을 하여야 될 것이야요. 식색(食色)이 다 마찬가지란 말이야요. 그러한 관념을 가졌으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요. 시장할 때에 밥 먹는 것이 부끄러울 것이 없겠지요.
1920년대 아직까지 유교이념이 팽배해 있고 서구사상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것이 완전히 조선의 것이 되지 못한 상황이였다. 그런데 자유연애론이 주창되고 실제로 '자유연애' 하는 여성들이 나오면서 그들은 사람들의 구경거리만 될 뿐이었다. 대개가 서구의 문화를 신봉하는 문화사대 주의자들이였기에 그 비난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족과 여성해방 사이에서, 일제세대를 살았던 생각있는 지식인들은 모두가 나라를 구해야한다는 일념으오 일제에 항거하였다. 급진적인 여성관을 가지고 있는 나혜석도 이 부분에서는 생각을 같이 하였다. 3 1 운동 당시에는 김활란 등과 비밀회합을 벌이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나혜석의 애국심은 한 의열단원의 위험한 위탁물을 맡아주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의열단은 3 1운동 이후 무장으로 투쟁하지 않으면 독립을 이루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주로 경찰서 등 일제 기구를 폭파하고 일본고관을 암살하는 등 테러 활동을 중심으로 활약한 조직이다. 이 조직의 한 사람인 박기홍은 어느 날 자신의 권총 한 자루를 나혜석에게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남편 김우영이 만주 부영사였으므로 안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기홍은 검거되고, 나혜석은 권총을 깊숙이 감춰둔 뒤 그가 출감하자 다시 그에게 권총을 내주었다. 박기홍은 그 위험한 위탁물을 그때까지 보관해 두었다가 내 주는 나혜석의 대담함을 보고는 무척 놀랐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여류화가로 개인전을 열 수 있었던 나혜석은 식민지하에서는 문화활동도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모든 작품은 일제의 허가를 받아야만 전시를 할 수가 있었다.
조국이 처한 현실 앞에서 예술활동을 통해 좌절한 민초들에게 힘을 줄 것인지 일제의 편에 붙어 예술을 끝까지 할 것인지 하는 갈들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의열단을 적극적으로 도울 만큼 독립을 원했던 나혜석은 하나를 선택 할 수 밖에 없었다. 멀고 먼 길을 돌아 조국의 광복을 볼 것이냐.. 자유롭게 예술활동을 할 것이냐..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나혜석은 끝까지 조국이 처한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자유연애와 같은 자유적이고도 급진적인 사상으로 여성해방론자의 길을 걷게 된다.
각종 글과 예술활동을 통해 여성들의 봉건적인 의식을 깨우치기는 했지만 그것이 조국해방을 이루는데 기여하지는 못했다.
꺼져가는 불꽃.
1941년 어느날, 화가 이승만의 집 앞에 한 걸인 여인이 주인을 찾았다. 화가는 처음에 그 여인이 누군지를 몰랐다.
"저 나혜석이예요."
"그럴 리가 있나요? 정말 나혜석 맞아요?"
그 걸인이 나혜석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눈부셨던 아름다움이 이제는 누더기를 걸친 걸인이라니.. 그녀는 십여년 전 맡겨놓았던 외국판화를 찾아 치마폭에 싸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혼을 하고 최린과도 극도로 사이가 나빠지자 그녀는 방황과 유랑을 거듭한다.
4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느니라.
이렇듯 잡지 <삼천리>를 통해 '이혼고백서'까지 실은 나혜석은 이제 없었다.
친구 김일엽이 거처하던 수덕사에 머물다가 돈 한푼없이 그곳을 뛰쳐 나와 거리를 떠돈다.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고 부분적인 육체 마비현상까지 겪는다.
나혜석은 마지막 선택으로 충남도청 산업국장으로 있는 김우영을 찾아 가지만 김우영이 동원한 경찰에 의해 대전땅에서 추방당한다.
양로원을 떠돌다가 1946년 눈보라치던 어느날 거리에 쓰러져 있던 나혜석은 시립자제원으로 옮겨지고 거기서 무연고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한다.
한 관보에 의하면 사망일이 1949년 12월 10일로 되어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한 시대를 불꽃처럼 살았던 나혜석은 이렇게 허망하게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부유한 명문가의 딸, 한국 최초의 여류화가, 일본유학을 다녀온 지식인, 연애결혼과 자유연애의 기쁨, 이혼의 아픔을 겪으면서 신여성의 화려한 삶은 비참하게 끝이 났다.
————- ————
( 본 개인 스토리는 상기 내용 및 사진에 대한 상업성도 없음을 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