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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고의 선수 100 : No. 27, 마이크 트라웃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
* 이 글은 저자 조 포스넌스키가 <디 애슬레틱>에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 100명에 대해 올린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순위 기준? 저희도 몰라요.
조 포스넌스키(디 애슬레틱)
2020/2/29
마이크 트라웃은 메이저리그에서 풀 시즌을 소화한 모든 해에 최소 4개 이상의 주요 스탯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잠시(혹은 오랫동안) 생각해 보자. 로빈 욘트, 라인 샌버그, 론 산토 같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위대한 선수들조차 한번도 주요 스탯에서 리그 1위를 차지해 보지 못한 경우가 많다.
가령 블라디미르 게레로의 경우, 주요 스탯에서 리그 1위를 차지한 것이 커리어 내내 4번에 불과하다. 로베르토 알로마는 한 번뿐이다.
트라웃은 매년 최소 4개 이상의 주요 스탯에서 1위를 차지했다. 직접 보도록 하자.
2012 : 득점, 도루, OPS+, fWAR, bWAR
2013 : 득점, 볼넷, fWAR, bWAR
2014 : 득점, 타점, 루타수, fWAR
2015 : 장타율, OPS, OPS+, fWAR, bWAR
2016 : 득점, 볼넷, 출루율, OPS+, fWAR, bWAR
2017 : 출루율, 장타율, OPS, OPS+
2018 : 볼넷, 출루율, OPS, OPS+
2019 : 출루율, 장타율, OPS, OPS+
이는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는 스탯들은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이외에도 고의4구(3회), WPA(5회), RC(4회), 출루 횟수(4회), 중견수 수비율(실책이 없었던 2015, 2018년), adjusted batting wins*(5회) 등이 있다.
* adjusted batting wins : 개리 질레트와 피트 파머가 만든 타격 지표
그리고 독자 여러분도 트라웃이 이미 윌리 맥코비, 어니 뱅크스, 켄 그리피 주니어, 제프 배그웰, 로베르토 클레멘테, 프랭크 토마스, 칼 립켄 주니어, 기타 수많은 전설적인 선수들보다 높은 블랙 잉크 스코어(주요 스탯에서 얼마나 많이 1위를 차지했는지를 평가)를 쌓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트라웃이 소화한 풀시즌은 고작 8년이다.
이 모든 것들을 정리해서, 역대로 27세 시즌까지 트라웃보다 높은 WAR을 기록한 선수는 없다.
1. 마이크 트라웃, 72.5
2. 타이 콥, 69.0
3. 미키 맨틀, 68.1
4. 로저스 혼스비, 63.7
5. 알렉스 로드리게스, 63.6
하지만 마이크 트라웃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려운 이유가 있다. 트라웃의 경이로운 통계 기록들은 그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하는 게 아니라 되려 감추고 있다. 사람들은 트라웃을 과거의 전설들과 비교하는 것에 무덤덤해진 것처럼 보인다. 트라웃이 '나만 아는 선수'라서 그런 게 아니다. 사람들이 트라웃이 최고의 선수고, 동시대 선수들이 아니라 미키 맨틀, 윌리 메이스, 행크 애론, 켄 그리피 주니어, 타이 콥과 비교해야 할 정도라는 걸 잊고 사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이런 게 아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트라웃 이야기'는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초콜릿이 어떤 맛인지 남에게 설명해 보려 한 적이 있는가? 이는 아주아주 짜증나는 경험이다. '달다', '쓰다', '흙맛', '환상적' 같은 단어는 실제의 맛과는 한참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트라웃과 숫자의 관계도 이와 같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말도 안되는 기록들이 계속 나온다는 것이다. 올해 트라웃이 건강하다면 통산 WAR 순위에서 짐 토미, 조 디마지오, 제프 배그웰, 놀란 라이언 등 최대 23명의 명예의 전당 선수들을 넘어설 것이다. 30살도 되기 전에.
하지만 그게 트라웃의 진짜 '맛'을 설명해 줄까? 트라웃과 관련해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들은, 불편하다. 왜 더 큰 계약을 따지 않았는가? 왜 더 유명하지 않은가? 왜 사람들은 트라웃을 인정해 주지 않는가? 트라웃이 미국에서 더 관심을 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답은 없고 그럴싸한 가설만 무성하다. 야구가 애들한테 인기가 없다, 미국인 절반이 자러 가는 시간에 경기를 많이 한다(홈인 LA가 북미 대륙 서부에 있으므로), 트라웃 데뷔 이후 한 번도 플레이오프에서 이기지 못한 에인절스가 도움이 안된다, 유명세는 신경도 안쓰고 조용히 지내는 트라웃 본인도 문제다 등.
그 이상으로, 트라웃은 너무 꾸준하다. 메트로놈, 올드 페이스풀(*Old Faithful, 미국에 위치한 분출이 일정하기로 유명한 간헐천), 근위병 교대식과 같고, 제임스 본드가 총알을 피하고 테일러 스위프트가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코난이 범인을 찾아내고 크리스마스에 또 케빈이 찾아오는, 아침에 해가 뜨는 정도의 꾸준함이, 트라웃의 경이로움을 보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3할, 100볼넷, 100득점, 100타점, 30도루, 40홈런을 기록하고 환상적인 중견수 수비를 보이며 야구장을 즐거움으로 채워주는 선수를 보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터다.
그런데 매년 그렇게 하면 이제는 어떤 감탄사와 수식어를 붙여줘야 할까? 그러면 안 되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인간이다. 일출을 보면서 엄청나게 멋지다고 생각하는 일이 몇 번이나 있겠는가? 위대한 것도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제프 트라웃은 정말로 좋은 야구선수였다. 그가 직접 그렇게 말하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마이크 트라웃의 아버지니까! 마이크 트라웃이 그 겸손함을 어디서 배웠겠는가. 하지만 제프는 정말로 좋은 타자였다. 정확하게는 스위치 타자였다. 좌타 우타 가리지 않고 필드 곳곳으로 라인드라이브를 날렸는데, 비교하자면 키 작은 다니엘 머피 정도가 될 것이다. 델라웨어 대학에서 4학년을 시작하기 전에, 제프는 대서양 대학 야구 리그(Atlantic Collegiate Baseball League)에서 여름을 보냈다. 이 리그에 참가했다가 빅리그에 올라간 선수로는 제이미 모이어, 프랭크 비올라, 크레이그 비지오, 데니스 레너드를 비롯해 수십 명 이상이다.
그는 .481을 기록하고 ACBL이 주는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었다.
"그는 특별했습니다." 스포츠 기자 짐 오코넬이 말했다. 오코넬은 당시 리그의 공식 기록원이었다.
그 후 트라웃은 컵스의 지명에도 불구하고 4학년을 마치러 돌아왔고, 이번에는 갭 파워를 보여주며 .518을 기록했다. 전미 대학 올스타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키는 작았지만(173cm 정도) 미네소타는 타격 능력을 보고 5라운드에 뽑아 위스콘신 래피즈에 있는 마이너리그 팀으로 보냈다. 트라웃은 거기서 타율 .341, 장타율 .511을 기록해 젊은 감독을 놀라게 했다. 그 감독, 찰리 매뉴얼은 "잘 치는 선수였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왜 제프는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지 못했을까?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아마 무릎 부상이 제일 큰 문제였을 것이다. 제프는 무릎 수술만 4번 받았다. 엄지, 손 등 다른 부상도 있었다. 제프는 그냥 경기를 너무 열심히 뛰었다. 다른 방법이 없기도 했다. 어떤 팀이 173cm짜리 선수를 앞장서서 모셔가겠는가. 제프는 경기장에 제일 먼저 나와 제일 마지막에 나갔고, 어떤 기자에게 말한 것처럼 특타를 특권처럼 생각했다. 그렇게 제프는 점점 닳아 없어져 갔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제프는 확실한 수비 포지션이 없었다. 2루에 고정될 수도 있었지만 팀은 3루가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 3루에 고정되어야 했지만, 팀은 다시 2루로 보냈다. 이리저리 옮기는 동안 실책만 잔뜩 저질렀고, 어느 포지션에서도 안정감을 갖지 못한 채 타격은 되지만 수비는 꽝인 선수라는 인식만 생겼다. 한번 이런 인식이 생기면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
또 그는 너무 인생을 넓게 봤다. 야구를 사랑했지만 야구가 전부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는 데비(Debbie)와 결혼해 딸 틸 마리(Teal Marie)를 낳았다. 한 기자에게는 "점점 나이가 들고 있습니다. 미래를 생각해야죠."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야구라는 놈이 그렇게 깨끗하지가 않았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제프 트라웃은 계속 안타를 쳤다. 86년 AA팀 올란도에서 뛸 때는 .321/.406/.451을 기록했다. 팀에 이제 자신도 미래를 생각해야 되겠다고 말하자, 팀은 87년에 AAA로 승격시켜 주고 메이저리그에서 뛸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어쨌든, 제프는 그렇게 들었다.
하지만 미네소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프를 다시 올란도로 돌려보냈고, 거기서 잘 치면 AAA로 승격시키겠다고 말했다. 너무 먼 이야기였다. 제프는 이를 거부하고 다른 팀을 알아볼 수 있도록 방출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네소타는 제프를 방출시켜 주지 않았다. 당시 제프는 지역 주간지 밀빌 데일리(The Millville Daily)에 말했다. "제 에이전트에게 빅리그 감인 타자를 방출시키지 않겠다고 했다더군요. 그리고 제 에이전트는, 그러면 왜 빅리그에 올리지 않느냐고 말했죠."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제프는 훈련 참가를 거부했고, 미네소타는 무급으로 묶어 놓은 채 교착 상태에 빠졌다. 제프는 이렇게 말했다. "프로야구를 그만두고 싶지 않습니다. 전 제가 선수로서 잠재력을 온전히 폭발시켰다고 생각하지 않고, 계속 뛰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커리어가 이런 식으로 망가지는 것도 싫습니다. 저는 제 입장을 확실하게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입장을 고수했다. 제프는 8월에 은퇴했고, 아버지이자 선생님, 코치 역할에 매진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일을 할 때가 됐습니다. 야구 외에도 할 일이 많아요."
4년 뒤, 막내 아들인 마이크가 태어났다.
야구를 너무 일찍 떠났다고 후회한 적은 없었을까? 아마 당연히 있겠지만, 많진 않았을 것이다. 제프는 그 후로 야구와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운도 나빴다고 인정할 것이다. 수많은 부상들, 협조적이지 않았던 조직, 좋지 않은 타이밍(3루에서는 개리 개티(Gary Gaetti)에게 막혔다) 등...
하지만 지금은 아들 마이크가 야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인 상황에서, 그는 자신과 마이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재능? 당연하다.
하지만 다른 것도 있다.
"자신감," 제프가 말했다. "저는 선수로서 자신감을 갖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가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 했죠. 하지만 저는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마이크와는 다르죠. 훌륭한 메이저리그 선수들과는 달랐습니다. 4타수 무안타를 치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실책을 저지르면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죠. 제 자신을 충분히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마이크는?
"마이크에겐 의심이란 게 없죠." 제프가 말했다.
마이크 트라웃이 왜 타석에서 그렇게 자주 타임을 부르는지 아는가? 이따금씩 머릿속에 잡념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이크는 잡념을 떨쳐내길 원한다.
무슨 생각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기가 중요하다. 무슨 생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트라웃이 보기에 타석에서는 어떤 생각도 좋지 않다. 트라웃이 원하고, 트라웃이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공(空)이다. 그래서 타임을 부르고 모든 것을 잊은 뒤('리셋 모드'라고 부른다) 피닉스의 하늘처럼 맑은 마음으로 다시 타석에 들어선다.
"제 철학은 '단순하게'입니다." 트라웃이 말했다.
이런 철학을 가진 타자는 트라웃 외에도 많다. 공 보고 공 치기("See the ball, hit the ball"). Ve la pelota, pegále a la pelota(스페인어로 같은 말). 명예의 전당 타자 토니 페레즈는 기자들이 어떤 식으로 타격하는지 물을 때마다 다른 선수들이 웃을 만한 답을 했다. "공 보고 공 치는 거죠." 이런 선수들은 모두 비슷하게 말할 것이다. 조지 브렛은 이 철학에 깊게 빠져서 한 번에 두 가지 생각을 하지 않도록 다양한 마음 수련을 했다.
하지만 트라웃은 한 차원 다르다. 그는 공을 예측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강한 자신감을 갖고 타석에 들어선다. 그는 투수가 자신의 존에 공을 던지면 자신이 강하게 쳐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제프가 말한 대로, 트라웃은 의심하지 않는다. 한 번 놓치더라도, 두 번 놓치더라도, 열 번 놓치더라도 이 신념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트라웃은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초자연적인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도 모른다. 제프는 마이크를 야구선수로 키우지 않았다. 제프와 달리 마이크는 스위치 타자가 아니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제프는 자신의 야구 인생이 어땠든 아이들에게는 강요하지 않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다. 그와 데비가 자식들에게 바랐던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고, 스스로의 열정을 좇으며,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마이크는 거기서 시작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야구를 사랑했다. 마이크는 항상 고등학교 팀을 따라다녔다. 항상 TV로 경기를 보고 싶어 했다. 데릭 지터를 너무나 좋아해서 항상 지터의 2번 유니폼을 입고 지터의 모든 것을 따라했다.
거기서 자신감이 왔다. 물론 처음부터 재능도 있었다. 새처럼 빨랐다. 강하게 칠 수 있었다. 수비도 잘했다. 아버지보다 훨씬 크게 자라기도 했다. 이제 트라웃은 188cm에 107kg으로, 가족사진을 보면 다른 가족들보다 너무 두드러지지 않게 한 발짝 뒤에서 찍은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트라웃은 야구장에 있는 것이 집에 있는 것처럼 행복했다. 자신이 있을 곳은 세상에 야구장밖에 없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가. 고등학교 때는 투수로 노히터를 기록했다. 한 주(州) 플레이오프 경기에서는 모든 타석에서 고의4구를 얻었는데, 심지어 만루인 상황도 있었다.
제프가 집에 돌아와 숨을 죽이고 데비에게 "마이크는 정말 대단한 선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한 것만도 여러 번이었다.
스카우트들이 마이크 트라웃을 놓쳤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건 아니었으니까. 스카우트들은 트라웃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훌륭한 야구 집안에서 태어난 것을 알았고, 1라운드 감인 것도 알았다. 커트 워너(*Kurt Warner, 명예의 전당 NFL 선수)처럼 스카우트가 왔을 때 본인은 슈퍼에서 물건이나 정리하고 있었던, 그런 류의 스토리는 아니다.
스카우트들은 분명히 트라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스카우트들은 트라웃이 1라운드 이상의 재능이라는 것을 놓쳤다. 어쩌다 보니 스카우트들은 트라웃이 곧바로 빅리그에서 뛸 준비가 된, 평생에 한번 볼 수 있을까 말까 한 선수라는 것을 놓쳤다. 그리고 야구선수를 스카우트하는 일로 돈을 받는 사람들이 이런 대단한 재능을 놓쳤다는 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다.
2009년 드래프트에서 스티븐 스트라스버그가 뽑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스트라스버그를 드래프트 역사상 최고의 투수 유망주라 불렀다. 스트라스버그는 드래프트 화제를 싹쓸이했고, 스트라스버그 다음에 누가 뽑혔는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로 중견수 2명(대학 선수 더스틴 애클리, 고졸 선수 도노반 테이트)이 뽑혔고, 다음으로는 고졸 포수가 뽑혔다. 뒤이은 여덟 팀은 투수를 뽑았다. 투수가 많은 해라는 평가를 받을 터였다.
다음은 야구계에서 가장 똑똑한 팀 중 하나인 오클랜드 에이스였다. 오클랜드는 트라웃을 잘 알고 있었다. 데이비드 포스트 부단장은 트라웃이 뛰는 모습을 봤다. 트라웃은 얼마나 잘했을까? "홈런 2개를 쳤습니다." 포스트가 선명하고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 투수로 들어와 95마일짜리 투구로 게임을 끝냈죠."
에이스는 대신 대졸 유격수 그랜트 그린을 뽑았다.
애리조나는 연속 픽을 갖고 있었고 야수 두 명을 뽑았지만 트라웃의 이름은 없었다. 휴스턴은 캘리포니아의 라 번 고등학교를 졸업한 유격수 지오바니 마이어를 뽑았다. 화이트삭스는 루이지애나 주립대 중견수인 제러드 미첼을 뽑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인절스가, 랜달 그리척을 뽑고 곧바로 다음 지명권으로, 드디어, 마이크 트라웃을 뽑았다.
트라웃 앞에 24명이 뽑혔다고? 포스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오클랜드가 지나치게 객관적 데이터에만 의지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결정을 내릴 때 비 수치적인 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J.J.피콜로 캔자스시티 부단장은 뉴저지 주라는 지역이 (트라웃 대신)투수인 애런 크로우를 뽑는 데에 분명히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뉴저지 출신 대형 유망주가 요즘에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좀 달랐을텐데요." 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뉴저지 주는 오랫동안 메이저리그 타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뉴저지 출신의 마지막 대형 선수? 구스 고슬린(1900년생)? 더키 메드윅(1911년생)? 에릭 캐로스(1967년생)?
하지만 피콜로는 곧바로 이게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 자신도 뉴저지 출신이다. 트라웃이 자란 밀빌에서 그리 멀지 않다. "이 일은 저를 평생 따라다닐 겁니다." 피콜로가 말했다.
팀들이 트라웃을 놓친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뉴저지는 날씨가 좋지 않다. 트라웃은 다른 유망주들에 비해 따뜻한 기후에서 플레이할 기회가 적었다. 유망주 순위가 낮아서 팀들이 간과하기도 했다.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시즌 시작 전 트라웃을 고졸 선수 중 80위로 선정했다. 트라웃의 미식축구 선수 같은 두꺼운 체형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몇몇 스카우트들은 트라웃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대부분의 스카우트들이 무엇이 마이크 트라웃을 그토록 특별하게 만드는지 놓쳤다는 것이다.
"재능이 있다는 건 알았습니다." 데이튼 무어 캔자스시티 단장이 말했다. "훌륭한 선수인 걸 알았죠. 당시 드래프트에는 좋은 선수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외의 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빅리거가 되려는 그 열망을 보지 않았고, 위대한 선수가 되기 위해 평생 준비했다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놓친 점을 모두 금세 알게 되었다. 17살에 트라웃은 루키 리그에서 .360을 쳤고, 싱글A로 승격됐다. 18살에는 싱글A에서 파워를 겸비해 .362를 치면서 45도루를 기록했고, 다시 승격됐다. 19살에도 파워를 겸비해 .326을 치고 33도루를 기록했고, 팀은 그를 메이저리그로 올렸다.
20살에 트라웃은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가 됐다.
이렇게나 빨랐다.
여러 번 기사화된 바와 같이 마이크 트라웃은 한번도 심야 토크쇼에 출연한 적이 없다. 자신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만들려 했던 CBS의 '60분'(유명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거절했고, HBO(유명 드라마/영화 케이블 방송사) 출연도 거절했다. 그는 여유 시간을 명성을 좇는 데에 쓰는 사람이 아니다. 홈런 더비에 참가한 적도 없다. 홈런 더비에 관심도 없고, 집에서 가족들과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구글에서 '마이크 트라웃/논란'으로 검색해 본다면 검색 결과가 하나 나올 것이다. 커미셔너 롭 만프레드가 섣부르게 트라웃이 명예에 관심 없음을 지적한 일이다.
"트라웃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하고 싶지 않고, 자유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고, 어떻게 보내고 싶지 않은지를 결정해 왔습니다." 만프레드가 말했다. "저는 우리가 트라웃의 브랜드 가치를 아주 크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하지만 트라웃의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죠."
우리는 누군가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아주 크게 만드는' 것을 거부하는 게 논란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는 불가피한, 트라웃이 감수해야 할 일이다. 그는 지루하다. 그는 미국인들의 주목을 끌지 못한다. 그는 야구를 더 멋지게 만들지 못한다. 그는 야구의 르브론 제임스나 톰 브래디가 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그는 혼자서 에인절스를 우승 경쟁권 팀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공평한지 또는 불공평한지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트라웃이 무엇을 남겼는지 보려 한다.
트라웃은 이런 것들을 남겼다. 마이크 트라웃은 작은 마을에서 자랐고, 매일 12살 때 야구에 대해 느꼈던 웃음과 즐거움을 갖고 야구장에 온다. 그는 사인을 해 준다. 홈런을 친다. 병원을 방문한다. 도루를 한다. 정중하게 질문에 답한다. 다이빙 캐치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존중한다. 볼넷을 얻는다. Big Brothers Big Sisters(어린이 대상 자원 봉사 단체)에서 일한다. 득점을 올린다. 아직 고작 28살이다.
그리고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걸로도 부족하면, 음... 나한테 어쩌라는 건가?
원문 : The Baseball 100: No. 27, Mike Trout
The Baseball 100: No. 27, Mike Trout
Sure, Trout was talented, right from the start. But more than anything, he just was so happy on the field, so at home.
theathletic.com
번역 : 객원 번역가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