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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의 숨결
가슴먹먹하게하는 속울음의 시인,
정열鄭烈을 추억하다
-한국문인협회정읍지부 고문 시인 장 지 홍
● 들어가며
우리 정읍은 문향의 고을로 널리 알려져 왔다. 한글로 쓰인 최초의 백제가요 정읍사, 고대문학의 금자탑을 이룬 최초의 가사문학 상춘곡의 발상지가 바로 우리고장 정읍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적 전통에 맥을 이어서 정읍 땅에 태를 묻은 문학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삼국시대 고운 최치원, 조선 초기 불후헌 정극인 선생을 비롯하여 원적가와 참신가를 지으신 백학명 선사, 규방가사 일인자로 꼽히는 소고당 고단 여사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우리정읍과의 인연을 맺어 왔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의 문학 동인회와 비슷한 「이문회以文會」및 「시회詩會」가 고부 태인 정읍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어서 한문학이 크게 융성하였고 이에 따라 방각본(태인본)이라는 고대 출판문화의 찬란한 꽃을 피울 수가 있었다.
광복 후에는 이상비 신태근 김광섭 등이 주축이 된 예원계(후에 금요회)라는 문화예술단체가 있었으니 이가 정읍예총의 뿌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원계의 활동이 중단된 이후 약 20여년은 정읍문화의 공백기로써 문화 예술의 불모지라는 오명을 듣기도 했다. 이 무렵 해성과 같이 등장한 인물이 바로 정렬 시인이다.
정렬(鄭烈,1932-1994)은 우리고장 정읍시 정우면 회룡리(교촌)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정하렬鄭夏烈, 가운뎃자여름 하(夏)를 지우고「정렬」이란 필명으로 살았다. 교촌 마을은 갑오동학혁명 함성이 들판을 휘적셨던 동진강 유역의 한 모서리에 자리 잡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난하고 그저 평범한 농촌마을이다. 그가 병마와 싸우다가 귀천할 때까지 이곳을 단 한 번도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는 그러니까 그 자신의 말처럼 완전히 정읍 ‘시골촌놈(?)’으로 살았다.
그는 열악한 교단을 지킨 교사로서 농촌 문제에 관심을 보인 농부 시인으로서 지방 문화를 선도하는 문학인으로서 치열하게 살다간 우리 고장이 나은 입지적 문인이다
그는 생전에「원뢰遠雷」「바람들의 세상世上」「어느 흉년凶年에」「할 말은 끝내 이 땅에 묻어두고」의 네 권 시집을 남겼다.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가슴이 그냥 먹먹해 지고 우울해지며 뭔가 형언키 어려운 슬픈 정서가 회오리를 친다.
그는 스스로 ‘내 시는 어머니의 가슴 속에서 영 풀리지 못한 채 응어리진 핏덩이거나 아니면 한밤중 반딧불 같은 호롱불 앞에서 반쯤 석불이 되어 어께를 울먹이던 속울음이다’라고 밝혔듯이 시인의 시는 한을 안고 흐르는 동진강 유역의 아픈 역사와 민초들의 삶들이 서리서리 똬리를 친다.
시를 써온 지 30년이 더 지나고 귀천하기 전에 병석에서 낸 자전적인 시집 제목마저‘할 말은 끝내 이 땅에 묻어두고(창사,1985)’이니 작품 하나하나에 배어있는 응어리진 핏덩이, 울먹이는 한의 정서와 속울음은 한마디로 포괄하면 동진강변 민초들의 삶을 그대로 조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달팽아 달팽아 눈 있는 달팽아
집도 발도 없는 너는
왜 풀 한 포기 없는
한길에 나와
짓밟히는 전신을 귀로 쫑긋거리며
피 흘리는 전신을 눈으로 껌벅거리며
세상사 끝 까지 다아 보고
할 말은 끝내 이 땅에 묻어 두고
살아남은 귀먹고 눈 먼 것들을 위하여
성난 구둣발에 스스로 짓이겨져
할 말로 할 말로 달게 죽은 달팽아
-「할말」 2연-
정렬은 농촌의 실상과 6.25와 민족상잔, 동진강 유역 민초들의 아픔과 슬픔을 시로 표현한 것, 뿐만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며 나아갈 여러 분야에 걸쳐 내출혈로 형상화한 시편들을 우리 앞에 내놓았다. 이렇게 미래지향적인 당찬 시인이었던 그가 우리 곁에 오래 남아서 내 고장 문화진흥에 힘이 되어야 할 터인데 그렇게 빨리 우리 곁을 떠난 것이 못내 아쉽다.
● 정렬이 살아온 길
앞서 말했듯이 정렬은 고향을 한 번도 떠나 살아본 일이 없다. 유년 시절에는 유학자이신 완고한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향리에 있는 서당에서 천자문과 사자소학을 익히던 중 할머니의 권에 의하여 초등학교 당시 오봉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수학하고 이어 1948년 전주상고에 진학하면서 글짓기에 흥미를 느껴 시를 공부하기에 이르렀다. 학교 문예부장을 맡으면서 문필을 인정받아 당시 문단의 거목巨木이신 신석정 선생을 큰 스승으로 모시고 김해강, 백양촌(신근) 선생과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를 갖추어서 시를 배우고 익혀 실력을 쌓았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얼마 뒤에 1953년 3월「자유신문」에서 공모한 신인문예작품 현상모집에「향수鄕愁」라는 작품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문학의 길에 나선다.
1955년에는 당시 한국의 유일한 문학전문지「문학예술」에 조지훈 추천으로「산」이 제1회 추천되고 이듬해「묵도黙禱」가 그 이듬해인 1958년에「원뢰遠雷」가 마지막으로 추천 완료되어 당선소감까지 써서 잡지사에 송부했으나 갑작스런‘문학예술’지의 폐간廢刊으로 그동안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 어쩌면‘가장 재수 없는 시인(?)’으로, 이후 두고두고 불행한 일들만 정렬 시인을 괴롭히었다.
여기서 문학예술 제1회 추천작품,「산」이란 시를 살펴보자.
말 없는 산을
웃지 마라.
울어도 울어도
소리 없는 산이거니
천년 몇 천 년을 두고
드나드는 봄을
피로 한결 꽃피운 두견杜鵑이도
못다 울 설음에 목이 메였다.
곡성哭聲은 아예 슬픔을 모르는
짐승들의 아우성---
진실로 통곡痛哭은
눈물도 소리도 없는 산이거니
아, 귀머거리로
돌아앉은 산山.
산山을
뉘라도 소리치지 마라.
-「문학예술 제1회 추천 산山」 전연-
‘산’이 탄생한 1955년과 마지막 추천완료작품인「원뢰遠雷」가 생산된 1958년의 3년여의 기간은 정렬 시인에게 숱한 시련과 절망을 안겨준 사건들이었다.
6.25전쟁으로 큰형과 친척을 잃고 늙으신 어머님과 큰형이 남긴 가족들을 책임져야하는 고난의 시기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는 군대에 갈 수 없었다. 본의 아니게 병역기피를 해야 했다. 그는 당시 태인고 김원철 선생이 태인「읍원정」옆 초가에 머물고 있을 때 선생님 댁을 식객으로 드나들며 병역기피자로 숨어 살면서 문학예술 제2회 추천작품「묵도黙禱」를 탈고한다. 그리고 1962년에 병역 대신으로‘국토건설단’에 차출이 되어 강원도 산골에서 12개월간 갖은 고생을 하고 병역을 마친 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여기는/푸른 담 위에 뜬 연잎보다 좁은/섬이 아닙니까?
천년을 두고 달려도 달려도/ 해안선이 보이지 않는/
뻘밭이 아닙니까?
-------생략
여기는 병속이 아닙니까?
시시로 바람같이 이는 당신의 한숨과/
나의 오열嗚咽을/
푸른 침묵으로 휩싸는 병속이 아닙니까?
그는 1963년 만학晩學으로 국학대학 국문과에 적을 두고 학업과 시작에 매진한다, 곧 태인 중.고등학교에 나가게 된다. 직급은 강사였다. 그는 온갖 정성을 쏟아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원래 성품이 온화하고 학문에 대한 고집과 애교심이 강해서 이사장과 학교장에게 신임을 받고 학생들에게 둘도 없이 인기 있는 스승으로 추앙 받았다. 이 무렵의 제자 중에는 사회 각계에서 빛나는 업적을 쌓은 인재들이 많지만 한국 민속학의 대가이고 학창시절에 이미「코스모스를 위한 서정抒情」시집을 상제한 박순호(원광대 명예교수), 전북문학을 선도하는 중추적 시인 주봉구(제9회 전북문학상 수상자), 한국여성운동의 선봉에 서서 정신대 문제에 관심을 두어「그대 조선의 십자가여」를 발표하여 민족작가의 반열에 오른 장정임(1948- ) 시인이 바로 그의 제자이다.
정렬은 문학예술 폐간의 아픔에서 벗어나「사상계思想界」의 신인상 응모에 도전한다. 박남수 선생의 추천으로 얼굴,무화과,꽃으로, 세 편이 1회로써 당선되어 화려하게 시인 반열에 오른다. 이는 당시 정읍에서는 최초로 추천제를 통과하여 정읍 최초의 시인으로서 이름을 알린다. 전북문학의 대부 신석정 선생을 필두로 김해강 구름재(박병순) 천이두(평론가) 최승범(시조시인)과도 교류를 쌓으면서 열심히 시를 썼다.
정렬은 누구보다 섬세한 감성을 지니고 인정이 넘치는 시인으로 대인 관계에 있어서도 언제나 겸손하고 사리가 분명했다. 정양(鄭洋1942- ) 시인의 말을 빌리면 정렬 시인은‘시도 좋지만 시보다도 사람 좋고 맑은 품성을 지닌 시인’이라고 추억하고 있다.
1964년 그간 몸담았던 태인중.고등학교 강사직을 내놓고 친구가 교장으로 있는 태인 기술학교로 직장을 옮긴다. 태인 기술학교는 정규 중학교가 아니라 검정고시를 거쳐야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고등공민학교 수준의 상업특수학교이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가 장득원(張得遠1897-1972) 선생이 미륵불교 후원으로 설립한 상업 기술학교로 수업료가‘보리 때 보리 한 말, 쌀 때 쌀 한 말 씩’받아서 운영하는 열악하기 짝이 없는 가난한 학교였다. 그러나 교사진은 당시에 어대다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실력 있는 선생님들로 짜여 있었다. 정렬 시인의 친구가 교장인 장주상(전주사범, 전북대 벙정대학 졸)을 비롯해서 교감 한갑수(한국해양대학 출신) 유기남(서울대 독문과 중퇴) 신형곤(서울대 농학과 출신)등 당시에 보기 드문 자원봉사자들로 이루어져 고입검정고시 합격률 80%를 훨씬 능가하는 전국 제1위의 실력을 자랑하는 학교였다. 정렬은 어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이 시절이 나에게는 가장 행복했다. 천진한 학생들과 함께 동심으로 사는 게 시詩 쓰는 일 다음으로 좋았다-라고.
정렬의 두 번째 시집「바람들의 세상世上(1976)」은 첫 시집「원뢰遠雷(1961)」가 흐지부지 비명에 사라진지 만 15년이 지난 뒤였다. 이게 원래는 태인기술학교장 장주상의 서문과 그가 손수 그린 삽화揷畵를 곁들여 90여 쪽의 프린트 물로 제작되어 학생들에게 주어서 명심보감(?)처럼 널리 애송되었던 것인데 정렬이 중등교사 국어과 준교사 자격을 얻어 신태인 상업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거기에서 당시에 보기 드물게 양장판 고급인쇄로 세상의 빛을 보았다.
하루 종일
또 바람이 붑니다.
바람 자기를 기다리다가
소년도 가고 청춘도 가고 또 기다리다가
한밤중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깊은 꿈속에서도 역시
생시보다 더 세찬 바람이 붑니다.
내가 사는 마을 대숲들은
천 길 뒤집힌 바닷바람이 되고
사방을 둘러 싼 산들은
성난 커다란 짐승처럼 살기 서린
털끝들을 곤두세우며
울부짖고 일어 스는
불 바람이 되고,
꽃도 나무도 새도 구름도 바람이 되고
바람으로 오고 바람으로 가는 세월
천지가 온통 바람벽
바람으로 가득한,
마을은
하나 둘 등불이 꺼지고
하나 둘 문들이 잠기고
모든 길들이 묻히고 끝나고
인가도 마을도
바람들이 모여 사는
바람들의 세상
이승에서 바람으로 사라져 간
크고 작은 소중한 내 일상들과
멀고 가까운 내 살붙이들은
미친바람 속에 뒤범벅이 되어,
더러는 꽃 보라로 지다가
더러는 먹구름 천둥으로 울다가
더러는 낙엽으로 짓밟히다가
지금은
바람 속 진눈개비로 날리는 정렬 시인의 묘
텅 비인 하늘
이 벌, 벌판에서 또
한 십년쯤 더 서서
바람 자기를 기다리다가
실눈을 뜨면
세상은 역시
꿈속보다 더 세찬 바람이 붑니다.
-「바람들의 세상」 전연-
정렬은 정식 국어선생이 되어서 집에서 4키로 남짓 거리에 있는 신태인상업고등학교에 도보로 통근을 했다. 신태인은 기차汽車로 인하여 생겨난 신읍新邑으로 정읍의 관문이요 교통의 요지로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정렬은 원래 상업학교 출신인데다가 기술학교에서 다년간 학생들을 가르친 노하우가 있고 주산이나 상업부기에도 일가견이 있어 본과인 국어과목 뿐 아니라 상업 과목에도 조예가 있어서 학생들 인기는 최고였다. 그간 외롭게 혼자서 시 쓰는 작업을 계속 하였지만 이곳에 와서 새 친구가 생겼다. 바로 오경남(吳景南1934-) 시인이었다. 어쩐 일인가 그는 감곡면에서 농장을 새워서 농사일을 하면서 시작에 전념하고 있을 때였다.
오경남은 전남 벌교 출신으로 1963년 ‘현대문학’ 등단 작가로「먼동이 틀 무렵(63)」「소녀(65)」「가을 미각(70)」세 권의 시집을 낸 중견 시인이었다. 이 두 사람은 밤새워 어울려서 문학을 논했고 막소주를 마셨다. 정렬은 술을 좋아했다. 신석상(1937~1995) 소설가는‘정렬처럼 술을 맛나게 마시는 사람을 이제껏 본 일이 없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실수 하는 일이 없고 술로는 아마 전라감사(?) 한 자리라도 능히 했을 거라’며 웃었다. 어쨌든 이 두 사람은 서로 오며가며 술자리를 즐겼고 김제까지 나가서 원근불문遠近不問하고 친구들을 만났다. 김제는 신태인 바로 이웃에 있는 고을로 시를 사랑하는 문학인이 정읍 보다 많았다, 정이 많은 정렬은 이들과 흉허물 없이 사귀었고 문학에 관한 많은 얘기와 정보를 나눌 수 있었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현재 김제 시민공원에 정렬의 시비詩碑가 외롭게 서 있다. 그 시비에 정렬의 시‘바람소리’가 새겨져서 전한다.
대낮에도/ 바람 소리를 듣는 것은/내게는 괴로운 일이다
다정한 사람과/ 주고받는 조용한 속삭임 사이/
바람 소리를 듣는 것은/더욱 가슴 아픈 일이다/한밤중 나 혼자/
바람 소리를 듣고 있으면/스스로의 육신을 불태우고/
텅 비인 가슴 속 깊은 어둠 속에서/영혼이 울렁이는 속울음 같은/
나이 들수록/바람소리가 무섭다. -바람소리 전문
정렬은 이렇듯 고향을 안 떠나고 몇 마지기 안 되는 밭과 논을 가꾸며 당시에 들불처럼 일어난 농민운동에도 큰 관심을 보이고 농촌문제에 일가견을 나타냈다. 또 인근 문학인들을 모아서「향토문학」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하고 나름대로 불모의 땅에 현대시의 꽃을 피웠다
이 시절에 쓰인 두 편의 시를 소개한다.
일요일 아내와 피살이를 한다.
들판 바람은 온통 농약냄새 투성이다
웃머리를 몇 번 이루어 보아도
도열병에 타 죽고
남은 것은 반에 반뿐이다.
멍석같이 폭삭 주저앉은 속에
살아남은 벼 한 포기,
그 잎사귀에 맺힌 몇 개의 이슬
-중략
아침나절 새참으로 찹쌀 가용주를
행인 불러 병째로 즐기신
아버지는 호엽고병도 문고병도 잎마름병도 모르는
성한 옛날의 줄밭 같은 웃머리에서
한 이천년 전 뽑다가 놓친
피살이를 하신다. -「피살이」일부
몇 그루/울안 과목을 전지하고 있을 때/1학년짜리/
손녀가 쫒아와, 하는 당부/
<할아버지,
북쪽 가지만 전부 끊지..>
<왜?>
<이북은 전부 나쁜 놈들이니까..>
할 말이 없구나. 할아버지로도/
교단에 반생을 바친 선생으로도/
불쌍한 핏줄들아/너희들은/
이제 한그루 꽃나무에도/남북이 있구나.
가늘게 떨리는 북쪽가지 끝,
낮달이 파르르 떨고/한 마리 철새는 남으로 날아오고 있다
-「남북1」전연 -
1980년대가 점령군처럼 급히 들이닥쳤다. 5.18 광주 항쟁이 있었고 세상은 겁도 없이 황당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1982년 어느 늦가을, 정렬은 새집을 지어 집들이 하는 날 세 분의 시인이 모인다. 세상이 싫어서 절필을 하고 살던 문제(?)의 시인들이었다.
이들은 밤 새워 술을 마시며 시국을 탓하고 떠들며 웃고 울고 하다가 의기가 투합 하여‘3인시집’을 내기로 뜻을 모았다. 좌장격인 시인은 금강의 이병훈(군산 )이고 만경강의 정양(김제)과 그리고 동진강의 정렬(정읍)이 발간한 시집이「어느 흉년에(1982)」이다. 이 3인공동시집에는 힘들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초들 삶이 그대로 날것으로 담겨있다. 이들은 후에도 자주 만나서 형제처럼 속 있는 푸념을 하며 날 밤을 함께 보내곤 했다.
또 이때에는 수많은 동인지와 시인 수필가 소설가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 문예부흥의 시기였다. 문학의 불모지인 정읍에도 이러한 물결이 거세게 밀려왔다. 우리 정읍에서는 1982년 9월 9일, 내장문학 동인회를 모태로 사단법인‘한국문인협회’정주지부가 발족되고 정읍예총 창립의 주춧돌이 되었으며 이듬해 1983년 4월 15일자로 한국문인협회로부터 정식 지부의 인준을 받았다.
1991년에는 이 고장에 또 하나의 문학단체인 사단법인‘한국문인협회 정읍군지부’가 창립되어 초대 지부장에 바로 정렬 시인이 선출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정읍군지부 제2대 지부장은 임남곤(후에 정읍문화원장) 수필가가 선출되어 두 지부는 각자의 영역을 넓히며 활동하던 중에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정주시와 정읍군이 정읍시로 통합 되어 두 지부는 통합 총회를 열고「한국문인협회 정읍지부」가 되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통합 초대 지부장에 김동필 수필가가 피선되고 부지부장 임남곤, 사무국장은 김희선 수필가 맡아서 정읍의 문학을 이끌어 왔다.
한편 정렬은 불행하게도 전북대학병원에서 췌장암 진단을 받아 병마와 싸우다가
1994년 향년 63세 아까운 나이로 타계하고 말았다. 그가 투병생활을 하며 남긴 시 한 편과「향토문학」에 실렸던‘농로農老의 가을’을 소개한다.
종합병원 대합실 민 나무 의자에
우리 부부가 생면부지 남남 같이
한나절 앉아 무심히 바라보던
화분에 핀 동백꽃
탈지면에 물든 선혈보다 진한
그 핏빛.
내 육신에 뿌리 내린
몇 가지 병명을 생각하다가
창 밖 헐벗은 꽃나무들을 보다가
석정선생님 비음을 딸라가다가
아내 몰래 저승을 기웃거리다가
다시 대합실 민 의자에 나란히 앉아
마지막
내과과장의 금싸라기 같은 말 한마디 속에
우리 부부가 서로 만나고 있을 때
한 순간
한평생이 흘러가고
빨간 꽃잎 하나
이승을 뜨고 있었다.
그 순간
내 곁에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동백꽃」 전연-
쓸 것은 지푸라기 하나까지 다 주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마을로 다 돌아갔다
마지막 푸른 강물도 끊기고
모래까지 들어난 강심에는
대가리 잘린 채
얼어 터진 하얀 배때기를 드러낸
조선 무 한 개
짓이겨질 대로 짓이겨진 채
헐벗길 대로 헐벗긴 채
깊은 삼동에
이제 불모지로 버려진 벌판
그 벌판 건너
읍내 방앗간에서
알곡은 색깔이로 전부 날리고
쭉정이 쌀 반 가마
왕맵저만 한 수레 싣고
털털털 돌아가는
農老의 텅 빈 마음 속
황량한 벌판에는
살아남은 벌새 한 마리
성난 돌팔매로
눈보라치는 허공에
부릅뜨고 떠 있다. -「農老의 가을」전연-
● 마치며
정읍은 예로부터 문향文鄕이라 한다. 행상 떠나 돌아오지 않는 지아비를 걱정하여 부른 노래로 최초의 한글 시가「井邑詞」와 한국 고대 가사문학의 금자탑을 이룬 최초의 가사문학「賞春曲」의 발원지發源地가 바로 우리고장이다. 이러한 훌륭한 전통을 이어가지 못하고 일제 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는 문학의 불모지라는 오명으로 세인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다행히 1960년대 이후 정렬과 같은 걸출한 문인들이 등장해서 이런 불명예는 다소 해소된 듯 보이나 인근의 고창이나 부안 김제와 비교해 보면 아직도 턱 없이 뒤지는 게 사실이다. 정읍시 당국이나 정읍문협은 각성해야 한다. 한국문인협회 전국대회를 치룰 마땅한 장소 하나가 마련되어 있지 않고 각 지방마다 너부러져 있는 문학관은 아니라도 문학인들이 숨 쉴 공간 하나 사무실 하나가 없는 지금의 현실이 그저 서글프다.
문학 불모지 땅에 시의 꽃을 피운, 우리 정읍이 낳은 최초의 추천제 시인 정렬 시인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고 선생의 시비詩碑도 반드시 우리 손으로 정읍에 새워져야 한다. 서로 반목하고 질시할 게 아니라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우리 모두 함께 깨어나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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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단법인‘한국문인협회 정읍군지부’ 초대 지부장에 정렬 시인이 계신줄 몰랐습니다.
시어들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긴 글 잘 읽었습니다.
다음 정읍의 시인들(2)에서는 신춘문예로 등단한 전주고등학교의 3인방, 강인한 이가림 박정만 시인들의 사연을 싣겠습니다,.기대하십시오..우리 정읍내장문학의 홈페이지에 자주 들려 함께 정읍의 문향을 공유합시다.
정읍의 시인들~~
정읍문학의 뿌리를 찾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2편도 기대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