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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씨가 꾸미는 술 모노가다리
제 62편ㅡ1 한국 국산 위스키의 역사: 도라지 위스키부터 국산 위스키 최후의 날까지. (1부)
http://kcanari.egloos.com/2444412
퍼온 글
( 사진 번호 순)
오늘 이야기는 재밋는 것 !!!!
옛날 위스키 중에 제일 유명한 위스키는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도라지 위스키가 아닐까 합니다. 최백호 본인이 '내가 도라지 위스키를 마셔본 마지막 세대'라고 자칭 할정도로 나이 지긋하신 분의 추억에나 존재하던 고전입니다. 묘하게 토속적인 이름이 인상적인데, 60년대 중반까지 팔리던 도라지 위스키는 실은 도리스 위스키라는 이름이었습니다.
1. <경향신문 1960년 3월 1일> 도라지위스키 광고
갑자기 이름이 바뀌는데 2월에 도리스 위스키를 만드는 국제 양조장 사장이 명예훼손으로 구속되는 사건이 영향을 끼쳤을 것 같습니다. 이름과는 달리 도라지는 안들어갔습니다.
50년대와 60년대를 대표하는 위스키는 도라지 위스키와 백양 위스키, 쌍마 위스키가 있었습니다
2. 백양위스키 광고
3. 쌍마위스키 광고
광고 크기만 봐도 점유율이 대충 어땠을지 감이 옵니다.
이 시절의 위스키는 위스키가 아니라, 주정(양조알콜)에 일본에서 수입한 위스키 향을 섞은 '위스키 맛 소주'였습니다. 위스키 원액이 들어간 위스키가 처음 나온 것은 1971년이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위스키는 청양산업이 주월 국군용으로 판매한 군납 위스키였습니다. 물론 이쪽도 위스키 원액이 20%미만인 기타 제재주였습니다.
시중에 위스키가 시판되는 것은 조금 뒤의 일입니다. 1973년에 백화양조와 진로가 해외수출을 조건부로 위스키 원액 수입을 허가받습니다. 해외수출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백화양조도 진로도 처음 만든 위스키는 인삼 위스키였습니다.
4. <매일경제 1973년 9월 13일. 백화양조 진셍위스키 발매>
5. <경향신문 1975년 12월 9일, 진로 에릭사 국내 시판 광고>
일단 수출용 위스키를 위해 원액을 수입했지만, 역시 최종 목표는 국내에 위스키를 판매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백화 양조는 '죠니 드레이크' 진로는 'JR위스키'를 발매합니다.
6. <동아일보 1975년 12월 27일, 백화 양조 죠지 드레이크 발매>
7. <매일 경제 1976년 12월 6일 진로주조 JR 위스키 발매>
죠지드레이크와 JR의 싸움은 죠지드레이크의 승리였습니다. 일년 일찍 시장에 나온 덕분도 있겠지만, 병 모양이 발렌타인과 비슷해서 잘 팔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설마 그럴까 싶지만, JR 위스키 역시 이름도 그렇고, 녹색병에 노란색 병으로 JB 위스키를 빼다 박았습니다. 이 어디서 많이 본듯한 병모양은 후대에도 이어집니다.
죠지 드레이크도 JR도 정통 스카치 위스크를 자처하지만, 죠지 드레이크도 JR도 당시 법에 따르면 위스키가 아닌 기타재제주였습니다. 위스키라는 이름을 쓰려면 원액 함량이 20%가 넘어야 하지만, 200%인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원액 함량을 아슬아슬하게 19,9%에 맞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좀 먹고 살기 시작하면서 수입양주을 대체하기 위한 국산양주를 만들기 위해, 국산 위스키 원액 생산시설을 갖추는 대신 위스키 생산허가를 내줍니다. 이때 생산 허가를 받은 곳은 여러군데지만 결국 위스키 원액을 생산하게 되는 곳은 백화양조와 진로, 그리고 브랜디를 열심히 만들던 해태주조 세 군데 뿐이었습니다.
위스키 시장을 일단 정리한 정부는 제일 잘 팔리던 죠지드레이크에 철퇴를 가합니다. 죄명은 양두구육. 위스키의 이름을 걸고 기타재제주를 판 죄를 물어 법인세 6천만원을 추징합니다. 시범 케이스인 셈이죠. (저번에도 이야기 했지만 아파트가 천만원 하던 시절)
그래서 백화양조는 죠지드레이크 대신 한국 기준으로 위스키인 베리나인을 진로는 JR대신 길벗을 출시합니다. 그리고 새로 참전한 해태주조가 드슈를 출시하면서 위스키 전쟁의 2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참고로 한국 기준으로 위스키라는 것은 위스키 원액 함량이 20%이상이라는 뜻입니다.
8. <동아일보 1977년 7월 4일. 백화양조 베리나인 출시>
9. <동아일보 1977년 8월 8일.해태주조 드슈 출시>
10. <경향신문 1977년 7월 28일. 길벗 출시>
영어로 Gilbert이라 쓰고 길벗이라고 읽는 진로의 네이밍 센스가 돋보이지만, 오히려 이 토속적인 이름과 이미지 때문에 훗날 실패한 브랜드 네이밍 사례로 두고두고 이야기 됩니다
무려 정비석 선생님이 출연한 TV광고가 있을 정도로 광고에도 힘을 들였지만, 백화양조의 베리나인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해태주조의 드슈는 일찌감치 떨어져 나가고 백화양조 베리나인의 독주를 진로의 길벗이 가까스로 따라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25% 위스키 시대는 금방 막을 내리고 30% 위스키 시대가 옵니다. 정부의 국산주류 개발계획에 따라 위스키 원액으로 만든 기타제재주 규모를 줄이고 조금 더 위스키 원액 함량을 올린 30% 위스키를 만들게 합니다.
해태주조가 손털고 나간 자리엔 씨그램과 합작회사인 오비씨그램이 들어옵니다. 그렇게 백화양조 베리나인 골드, 진로 길벗 로얄, 오비씨그램의 블랙스톤이 발매되면서 본격적인 위스키 삼국지의 막이 오릅니다.
이미 업계1위인 백화양조는 베리나인에 골드를 붙이는 정도였지만, 길벗의 패배를 되새긴 진로는 새 위스키 길벗 로얄의 컨셉을 정반대로 잡았습니다. 병도 그때 그분이 좋아했다는 외국의 유명 위스키를 연상시키게 만들고, 길벗이라는 이름은 조그맣게, 로얄은 커다랗게 써서 완전히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시바스 리갈과 거의 비슷한 맛으로 블렌딩 했다.'고 스스로 자처할 정도였습니다
11. <매일경제 1978년 11월 29일. 길벗로얄 출시>
그것 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증언식 광고로 세계수준에 손색없는 위스키라는 이미지를 심으려고 매우 노력했습니다
12. <1981년, ABC라디오 한국 특파원 케네스 L 칼리어> 길벗 로얄
13. <1981년, 서울 하이앗트 호텔 부 총 지배인 프란츠 F 돈하우저> 길벗 로얄
길벗 로얄의 증언식 광고의 백미는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이 광고가 실린 1981년에 한국에선 '11회 대통령배 국제 축구 대회'가 있었습니다. 원래는 박스(Park's)축구대회라고 불리던 대회였는데, 얼마 전에 정권을 잡은 육사 골키퍼 출신 대통령이 대대적으로 외국팀을 초청해서 대규모로 개최합니다.
당시 화랑팀(국가대표 1진, 2진은 충무팀)과 아르헨티나가 결승에서 맞붙었고, 2대2 무승부로 경기가 끝납니다. 대통령배 국제 축구 대회에 출전했던 아르헨'띠'나 팀의 증언식 광고입니다.
14. 로얄 축구선수
15. 로얄 축구선수
다음 편에 계속
배종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