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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무릉도원의 삶>의 줄거리:
무릉도원이 내게 현실이 될 때 그 삶의 내용은 주렁주렁 맺히는 열매와 마음이 벌어지도록 충만한 기쁨입니다. 이 열매 맺음과 기쁨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예수님과의 일체됨에서 옵니다. 그것을 성경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날 사랑하시면 저절로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닌가요? 아닌가봅니다. 사랑 안에 거해야 하고 그래서 일체가 되야합니다.
무릉도원의 삶
(요15:9~17)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어제에 이어서 <무릉도원의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어제는 ‘무릉도원 진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늘은 진입한 그 무릉도원의 삶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얘깁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비유하시고,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인 주님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우리에게 열매가 없다, 이렇게 얘기하시는 것이 15장 전체의 주제가 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을 하시고, 오늘은 좀 차이가 나는 말씀을 하십니다.
9절에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고 하셨고 이젠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같은 내용 같지만 다른 내용입니다.
먼저, 우리가 무릉도원의 삶이라고 말할 때, 이 무릉도원의 삶이 천국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지상에서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들이 당장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지를 않고, 이 땅에서 살지 않습니까? 그렇게 이 지상에서의 삶을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붙은 가지로서 산다는 얘기인데, 그 삶이 바로 무릉도원의 삶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은 가지로서 살아가는 삶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렁주렁 맺혀지는 열매와 마음에 충만한 기쁨입니다.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열매와 기쁨이라는 거예요.
자, 이제 무릉도원의 삶의 내용을 한번 살펴봅니다.
무릉도원의 삶은 무릉도원으로 진입한 것을 전제로 해서 진행되는 삶입니다.
무릉도원으로의 진입이 뭐라고 했었지요?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이 세상을 빠져나가서 주님께서 개척하신 영역이 있어요, 새로 만들어진 영역입니다.
그 영역은 세상 바깥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늘아버지가 계시는 보좌 우편까지의 영역입니다.
주님께서 개척하신 영역이고 주님만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라는 이름이 거명될 때는, 마치 문패에 쓰인 이름이 그 집의 주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이름을 생각할 때는 언제나 예수님이 개척하신 영역을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지구 바깥에서부터 보좌 우편까지.
주님의 십자가사건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서 개척하신 이 영역을 생각하고, 우리 마음이 바로 여기에 머무르는 겁니다,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그래서 무릉도원의 삶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서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그 영역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 세상을 살 때, 이 세상의 삶이 무릉도원의 삶으로 된다는 얘기에요.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빠져나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세상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비어있도록 지어진 내 마음을 더 이상 이 세상 안에서 채움으로써 만족하고 기뻐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이젠 내 마음의 기쁨은 천국에 계신 아버지와 승천하신 주님과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써 내 마음이 채워질 것을 소망하는 상태에 있다는 얘깁니다.
그 상태에서 세상을 사는 거예요, 그 상태에서.
그러니까 내가 주님 안에 거해서, 주님이 개척하신 그 영역으로 들어가서 내 가족을 만날 때는 내 가정이 무릉도원의 상태로 진입해 들어가는 건데, 내가 계속해서 자식에게 기쁨을 얻고 아내에게서 위로를 얻으려 하면서 가정에서 살게 되면 그것은 여전히 무릉도원 바깥의 인간세상이 된다는 얘깁니다.
자, 이렇게 해서 펼쳐지는 무릉도원 속에서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나갑니까?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아,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면, 그러면 나는 주님의 사랑 안에 포함되는 것이지, 내가 또 자발적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사랑 안에 거하라는 얘기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와 일체가 되자’ 이런 뜻입니다.
‘나와 일체가 되자!’
내 안에 거하라고 할 때는 주님께서 개척해 놓으신 그 영역 안으로 들어가라, 즉 ‘세상을 빠져나오라’는 말씀이고, 이제 세상을 빠져나왔으면 ‘인격적으로 나와 일체가 되자’라고 하는 말씀이 ‘사랑 안에 거하라’는 얘깁니다.
쉽게 표현하면 이런 거예요.
갑돌이 갑순을 사랑하게 됩니다, 갑순이 마음이 아직 열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갑순의 손을 잡는데 갑순이 깜짝 놀라서 ‘왜 이러십니까?’ 하고 뿌리칩니다.
그게 세월이 지나서 갑순이 냇가에서 빨래하고 있는데 갑돌이 지게를 지고 지나가다가 그 갑순을 보고 몰래 와서 뒤에서 살포시 끌어안습니다.
이때 갑순이 빨래방망이를 놓고 그 젖은 손으로 갑돌의 손을 꽉 잡으면서 그에게 기댑니다.
이게 갑돌의 사랑 안에 갑순이 거하는 거예요.
맨 처음에는 어땠습니까? 뿌리쳤습니다.
이런 그림을 연상하면 주님께서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시는데, 왜 우리가 사랑 안에 거해야 되는 우리의 액션이 필요한 것인가를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랑 안에 거하라’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이 이렇게 일체를 이루라는 말씀인 것을 알겠어요.
근데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다는 겁니다.
계명을 지켜야 사랑 안에 거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그 계명이 뭐냐 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즉 내가 만나는 사람을 사랑할 때에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서 예수님과 일체가 된다는 얘깁니다.
갑돌이 갑순과 일체가 될 때 제 3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근데 왜 내가 주님과 일체가 되는 데에 3자가 등장해야 됩니까?
왜 그 사람을 사랑할 때에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면서 주님과 일체가 될 수 있다는 얘깁니까?
조금 갸우뚱해지지 않습니까?
주님과 일체가 되고 그리고 사랑을 하거나 어쩌거나 하면 좋은데, 그 사랑을 해야 일체가 된다는 얘기에요.
지금 주님 말씀이 그것 아닙니까?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게 되고 나와 일체가 된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나와 관계 맺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이 사랑이라는 것은 그 사람을 만날 때 더 이상 그 사람에게서 나의 기쁨과 만족과 나의 유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쪽으로만 향합니다.
그냥 주기만 하겠다는 마음을 갖는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그러셨으니까.
자, 이렇게 사랑해서 내가 만나는 사람을 향하는 마음이 행위로 나타나서 열매로 맺혀지게 될 때, 그 사랑은 우리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붙어있는 상태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열매가 맺혀진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포도나무에서 가지를 한번 꺾어봅니다.
그러면 거기서 진액이 나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은 포도나무에서 흐르고 있는 진액이 가지로 흘러들어 왔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다는 얘기에요.
어느 아파트든지 동마다 소방전이 있어요, 소방전에 짧고 굵은 파이프가 있습니다.
그 파이프를 잠가놓았는데 그걸 틀어놓으면 물이 콸콸 쏟아져요, 물이 바로 앞에 떨어집니다.
근데 거기에 호스를 갖다 꽂아놓으면 바로 앞에 떨어지던 물이 쭉쭉 멀리멀리 뻗어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할 때 사랑의 열매가 맺혀진다는 것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음으로써 가능한 얘기인데, 그건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주님께서 사랑의 진액을 뿜어내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는 일은 그 사람과 주님 사이에서 호스 역할을 하는 가지가 된다는 얘기에요.
그렇게 호스처럼 가지가 되어서 주님께 붙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열매를 맺게 된다는 얘깁니다.
이게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에요.
그러니까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주님을 통해 이 세상에 나타난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아버지와 주님이 승천하셔서 같이 계셔서 한 마음이 되어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체적으로는 내가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계시는데, 그 내가 만나는 사람을 향하여 뿜어대는 사랑의 진액이, 내가 호스처럼 가지처럼 주님께 붙어있을 때 그 사람에게로 흘러들어가서 내게서 행위로 나타나든지 열매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그때 사람들이 베드로를 숭배하려고 할 때, 베드로가 ‘너희가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인 그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 일이 나타났다’고 얘기합니다.
예수의 이름이 뭡니까?
예수의 이름, 하면 예수님께서 만드신 영역이 있는 거예요.
그 영역, 십자가와 보좌로 이루어진 그 영역 안으로 베드로의 마음이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킴으로써 자기에게 유익이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앉은뱅이를 향한 예수님과 하나님의 사랑의 진액이 베드로라는 사람을 통해서 열매 맺혀진 겁니다.
이런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자, 이 상태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기가 막힌 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우리가 마음의 방향을 이 세상에 살면서 이제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와서 십자가와 보좌까지 이어지는 주님이 개척한 영역에 마음을 두고, 더 이상 세상 것에서 나를 채우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11절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지를 지으실 때 함께 참여했던 그 하나님의 아들로서 갖고 있는 그 기쁨이 우리 마음 안에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려고 내가 지금 이 말을 너희에게 전해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왜 기쁠까요?
나를 통해서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전해지고 있는데, 왜 그게 기쁠까요?
여러분, 축구경기를 볼 때 그냥 한 팀을 응원할 때 골을 넣느냐 마느냐에만 관심을 두지 마시고 카메라로 비쳐지는 장면 장면을 꼼꼼히 보시면, 참 재미있는 게 많습니다.
골키퍼까지 열한 명이 상대방 진영을 향해 공격을 해 들어갑니다.
골키퍼가 볼을 받아서 앞에 있는 수비수에게 전해줍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패스합니다.
또 패스하고, 공격해 들어가서 맨 앞에 있는 공격수가 골을 넣게 됩니다.
맨 앞에 있는 공격수가 골을 딱 넣게 될 때, 이 공을 제일 먼저 전해준 골키퍼가 기뻐하는 모습을 카메라에서 본 적이 있습니까?
하~아, 공간적으로 너무너무 거리가 멀어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너무너무 여러 다리를 건넜기 때문에 관계도 없는 것 같아요.
팔을 벌리고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것 같이 골문 주위를 뱅글뱅글 돌면서 기뻐하고, 하늘을 향해 펄쩍펄쩍 뛰면서 기뻐하고, 열한 명이 난리가 나지 않습니까?
골 하나 넣으면 골 넣은 사람은 몸 조심해야 돼요, 다른 선수들이 와서 덮쳐버리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다칠 것 같아요.
그리고 골키퍼는 혼자서 난리를 하며 기뻐합니다.
바로 이 원리와 똑같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내가 만나는 사람을 향하여 사랑의 진액을 골키퍼가 볼을 전해주듯이 전해주십니다.
나는 골게터가 되어서 그 사람에게서 주님이 원하시고 아버지하나님이 원하시는 행위를 해서 열매를 맺는 겁니다.
이때 나는 쓰러져요, 왜? 주님과 하나님이 나를 덮쳐서 기뻐하고 계시기 때문에.
골을 넣은 골게터에게 모든 선수들이 와서 덮쳐버리면서 기뻐하는 것처럼.
이게 일체감이라는 겁니다.
일체감은 어떨 때 생깁니까?
둘이서만 마주보고 있다고 생기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부부가 아무 말 없이 운전하고 갈 때는 일체감이 없어요.
그런데 어떤 차가 와서 백지 쓱 긁어놓고 지나갑니다.
둘 다 차를 세웠어요, 아내는 차 안에 있습니다.
남편이 얘기하는데 그 사람이 자기가 잘했다고 막 우기는 거예요.
화가 나서 부인이 나갑니다, 그래서 남편과 일체가 되어서 그 사람에게 따지고 달려듭니다.
이렇게 일체감이란 것은 제3자가 나타날 때 형성되는 겁니다.
골키퍼와 골게터가 너무 멀리 떨어져서 플레이를 하고 있어요.
그러나 골을 넣으면서 그 골로 인해 제3의 행동과 현상을 통해서 골키퍼와 골게터가 일체감을 누리는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까? 어떻게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됩니까?
일체감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계기가 뭐냐 하면,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사랑을 그대로 막힘없이 흘려보내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서 주님이 원래 계획하시고 아버지가 원래 계획하신 그 사랑의 열매가 나타날 때, 나와 하나님과 주님이 하나가 되는 일체감의 기쁨이 거기서 생겨난다는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됩니까?
마주보고 있으면 하나 됩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반복해서 얘기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유가 뭔지 아니? 내가 지금 하나님과 일체가 돼서 기쁘거든? 왜 기쁘냐 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내가 그대로 다 통과시켜서, 나의 유익을 위하는 게 하나도 없이 그냥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다 통과시키므로 나의 공생애의 삶을 통해서 열매 맺혀지게 하고 있기 때문에, 나와 하나님이 일체가 되어서 너무너무 기쁜데, 이 기쁨이 너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서 흘려보낸 것 같이 나와 아버지가 사랑하는 그 사랑을 너희가 그대로 흘려보낼 때, 더 이상 세상에서 너희 자신의 유익과 기쁨을 위해서 살지 않고, 아버지와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흘려보낼 때, 그래서 그 사랑이 너희 손끝과 발끝에서 그 사람을 위한 열매로 맺혀질 때, 너와 나는 일체가 되는 거야!’ ‘그 기쁨을 누가 알겠느냐?’ 이 세상은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게 기쁘게 하려고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릉도원의 삶이 어떻게 진행됩니까?
먼저 주님 안에 거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빠져나가서 마음이 절대로 이 세상으로 다시 내려와서 세상 안에서 뭐 먹을 것 없나, 내 배를 채울 게 없나? 세상에서 내 유익을 찾을 게 없을까? 기쁨을 좀 누릴 게 없을까? 이러지 말자는 거예요.
절대로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됩니다.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가만 보니까,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끝없이 세상을 향한 사랑의 진액을 내려 보내시는데, 지금 내가 만나는 가족과 이웃, 내가 만나는 직장의 동료 상사, 그렇게 맘에 안 드는 사장님, 그 사람에게도 사랑을 보내고 계시더라는 겁니다.
내가 사장에게서 유익을 찾으려는 마음을 중단하자마자 그 사장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그때 얼른 하나님의 사랑이 땅에 떨어지려는 것을 내가 호스가 되어서 사장에게 전달해주는 겁니다.
내가 안 하면 다 땅에 떨어져버리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열두 제자를 통해서 뻗어갔고, 120문도를 향해 뻗어갔고, 초대교회를 향해 뻗어갔고, 이제는 나를 통해서 내가 만나는 사장님에게, 내가 만나는 부장님에게, 내가 만나는 부하직원들에게 뻗어나가게 하시려고 나를 부르신 것 아닙니까?
나를 택하신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만을 위해서입니까?
아니요,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열매 맺혀질 때, 골을 넣었을 때 골게터와 골키퍼가 기뻐하는 것처럼, 일체감 안에서 하나님과 내가 일체를 이루며 기뻐하는 이 지상에서 무릉도원의 삶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얘깁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더 이상 세상에서 내 기쁨을 찾지 않게 하셔서 주님 안에 머물러 있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 세상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나타날 수 있게 됨으로써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아버지와 주님의 사랑이 열매 맺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나와 주님과 아버지가 일체 되는 감격이 날마다 풍성하게 경험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