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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 시평>_2026 가을_임현준
실심實心의 시학: 실체, 위로, 노래
-이문재, 「울게 하소서」, 문학동네, 2026 여름호.
-최민우, 「청년 도약 바람」, 대산문화, 2026 여름호.
-이영식, 「그 겨울의 손가락 욕辱」, 애지, 2026 여름호.
-반칠환, 「맹꽁이 학교」, 애지, 2026 여름호.
-조온윤, 「술래의 등」, 애지, 2026 여름호.
-안도현, 「정석가鄭石歌」, 문학동네, 2026 여름호.
사특함이 없는 순수한 생각
“사무사(思無邪)”는 시가집 시경(詩經)에 관해 공자가 논어에서 일갈한 총평이다. 본래 시경의 「노송(魯頌)‧경(駉)」편에서 쓰인 이 시구는 부국의 상징인 말(馬)을 잘 키워낸 노나라 군주를 칭송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무사는 “사무강(思無疆, 생각이 끝이 없다)‧사무기(思無期, 생각에 그침이 없다)‧사무역(思無斁, 생각에 싫어함이 없다)”과 대구를 이루는 어구인데, ‘사(思)’는 ‘생각’을 뜻하고 ‘무사(無邪)’는 ‘사특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말을 기르는 사람의 지극한 생각 또는 마음가짐을 가리키는 네 어구는 목민(牧民)을 칭송하려는 목적으로 쓰였다. 공자가 시경의 가치와 수록된 시편의 의의를 거론하면서, 문학의 교시적 기능을 강조하려 차용한 것이 바로 이 “사무사”라는 비평 용어였다. 문학의 효용성 측면에서 ‘사특함이 없는 순수한 생각’을 읊는 순선무악(純善無惡)의 노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된 시의 본질일 터이다. 특히 동양 문학에서 ‘순수한 생각’이라 함은 음탕하거나 난잡하지 않은 노래를 의미한다. 음란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위정자가 멀리해야 할 심리적 독이다. 이러한 인식에는 문학이 ‘다스리는 자―다스려지는 자’라는 위계질서를 상정한 채로 ‘정치적 합목적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푯값이 설정되어 있다.
2,500여 년 전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공자가 시가(詩歌)를 총평할 당시는 군주제가 첨단 정치였고 붓과 먹이 첨단 미디어였다. 자본주의와 민주정체가 기본인 현재에도 ‘사(思)’의 본질은 변함없지만, ‘무사(無邪)’의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때는 사특했던 것이 현재에는 돈이 되고 물질적 풍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현재에 살았더라면 정치가 아닌 경제 공학적 차원에서 ‘사유사(思有邪)’ 즉, ‘사특함이 있는 순수한 생각’을 지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즉물성이 삶의 수준을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되고, 인공지능‧휴머노이드‧메타버스‧가상자산 등을 비롯한 첨단기술이 인류가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했던 생활의 윤택함과 물질적 풍요를 제공하는 시대이다. 터치만으로 먹고 입고 거주하는 시공간이 생성되고, 느끼고 즐기고 향유하는 감각이 활성화된다. 우리의 실체적 하루는 편리해졌고 그만큼 재미있는 게 무진장 많아졌다. 문학작품보다 감동적이고 미학적이고 공감적인 이야기 콘텐츠를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사특함이 오락거리가 되고 생존이 되는 시대에는 윤리와 언어의 용법도 그것에 맞게 바뀐다. 물리적인 살아 있음보다 정신적인 생존이,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 욕망과 만족의 문제가 삶의 척도가 된다. 어쩌면 사특한 것에 대한 기준이 새로이 갱신된 세계에서는 시의 오래된 본질은 쓸모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꽃이 꺾일 때 울게 하소서
꽃 꺾는 사람이 먼저 울게 하소서
그리 울고 난 뒤에는
꺾이지 않은 꽃
피어날 꽃을 보고도 울게 하소서
돌을 보고도 울게 하소서
*‘울게 하소서’는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에 나오는 아리아 제목이기도 하다.
-이문재, 「울게 하소서」, 문학동네, 2026 여름호.
그렇다 할지라도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형태와 시대적 맥락만 달라졌을 뿐 정치도 생활도 개인적인 정서도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특함이 없는 문학으로서 사무사든, 유익한 사특함이 있는 문학으로서 사유사든 시의 본질적인 필요성은 그대로이다. 문제는 할 것도, 관심 쏠릴 것도 많은 세상에서 시가 읽히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시를 읽는 이들은 시를 쓰는 이들뿐이다. 이것을 ‘문학의 종언’이라 하면 무거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지만, 생각해 보면 이는 단순한 현상일 가능성도 있다. 시는 공자 이래로 언제나 고급 문학으로 대우받아 왔으니까. 어차피 시는 살아남을 것이다. 대신 지금과 같은 추세에서는 시 말고 ‘시인’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종언’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이 어쩌면 시가 아닌 ‘현재의 시인’일 공산이 크다. 사특함을 배격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 허심(虛心), 그러니까 지독한 관념을 추종하는 현상의 주체가 누구인지 돌이켜 보시라.
이문재의 「울게 하소서」는 헨델의 오페라에서 차용한 제목만으로 오래된 취향의 구닥다리 감성을 표출하는 지극히 단순한 시이다. 소재도 “꽃”과 “돌”밖에 없다. 이마저도 <리날도>의 아리아 서사에 기대고 있어 뻔한 연정을 노래하고 있다. 그렇지만 문장의 단순성에서 오는 진정성, “울게 하소서”의 반복이 불러일으키는 감동의 파장, “꽃”과 “돌”을 보고도 울게 하는 위로와 치유의 여운이 이 시를 높은 격조에 이르게 한다. 이 자체만으로 실심(實心)을 담아내는 사특함이 없는 시가 된다. “꽃이 꺾일 때” 울지 않는 시, “꽃 꺾는 사람이 먼저” 울지 않는 시, “피어날 꽃”과 “돌을 보고도” 울지 않는 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실심(實心), 그러니까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의 경지에 이른 시이다. 결국 시가 오래되고 낡아 재미없어진 게 아니다. 첨단문물에 뒤처져서가 아니다. 시가 읽히지 않는 이유는 당신과 나를 울게 하는 위로가 없는 것, “돌”과 “꽃” 같은 실체가 없는 것, 심적 주문과 같은 노래의 운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가 신파가 되거나 유물론적이거나 운율의 제약에 휘말릴 필요는 없다. 공자가 비평하던 시대와 우리가 첨단문물에 휩싸여 시를 멀리하는 시대는 현격하지만, 진솔한 자기 고백과 연민의 위로는 기본적으로 내재해 있어야 한다. 환상성도 좋고 병리학적 관념성도 좋지만, 시적 대상을 체감할 수 있는 실체성은 더더욱 중요하다. 말놀이가 시의 주된 사업이라 해도 거기에는 내재율과 외재율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야 한다. 즉 눈물이 없거나, 꽃과 돌이 없거나, 노래가 없으면 절대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젊은 세대의 시적 실체
빠부라는 이름의 반려 거위 영상을 틀어두고
옅게 잠을 자다 열이 나서 깼다
영하 27도가 된 꿈이었다
실비보험 설문조사 전화를 받았는데
왠지 겁나서 급하게 끊었다
청년도약계좌는 월 70만 원씩 내야 한다고 한다
도약이 뭐 이리 어렵냐 못한다
연인과 여행을 계획하고 떠나던 일이 그립다
버스 창가에 낀 성에처럼 도모는 흐릿해지고
버스 기사님이 히터를 너무 세게 틀어서 찜질방이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다 내리라는 마음 같다
예수가 보인 가장 위대한 기적은
서른셋에 열두 명의 절친이 있었던 거다
물론 혼자 죽고 절반만 성공했지만
혼자라고 느껴질 때면 주위를 둘러보세요
이렇게 많은 이들 모두가 모두 혼자랍니다
마음을 따라가세요 떨어지고 맞고 쓰러지고
부딪히고 다시 어디론가 올라가고
이런 말을 하루에 40명이 자살하는 나라가 한다
자다가 모기한테 물리기를 반복하고
눈을 뜨니 무력감이 부풀어 오른다
그래도 새벽 여섯 시에 바다 수영을 가야 한다고 생각해
파도의 숨을 따라 몸을 맡기는 연습
방금 창조된 진흙이다
시드니 거리의 벌레들은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찾아
벼락을 먹고 자란다
내게도 벼락이 필요해
흩어지자 여기서
-최민우, 「청년 도약 바람」, 대산문화, 2026 여름호.
최민우의 「청년 도약 바람」은 흔히 MZ라 불리는 세대의 현실을 가감 없이 조곤조곤 읊조리고 있는 시이다. 서정성의 미학이나 이미지의 참신한 요소가 특별히 감지되지는 않지만, 난해한 사유의 부유도 없고 난잡한 감정의 배설도 없다. 그러나 거리낌 없는 평범한 문장의 구사가 부유하는 감정과 혼란한 정서를 예사롭지 않은 것으로서 도드라지게 하는 매력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시는 젊은 세대들이 공유하는 “도약이 뭐 이리 어렵냐 못한다”나 “혼자 있고 싶으니까 다 내리라는 마음 같다”나 “이렇게 많은 이들 모두가 모두 혼자랍니다”와 같은 위태로움과 외로움, 배신감 같은 총체적인 정서에 기인한다. 거칠게 평하자면, 그들은 사회가 적층해 온 정치‧역사‧문화‧경제 같은 오래되고 견고한 룰에 어떤 위화감이나 이질감을 느끼고 있고, 이 시는 그런 어색한 현실을 “자다가 모기한테 물리기를 반복하고/ 눈을 뜨니 무력감이 부풀어 오른다”와 같이 실체적으로 체현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MZ라 지칭되는 세대들의 심리는 유별난 것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에서 다루는 시적 대상으로서의 실체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어떤 특별한 세대나 연령대와 상관없이, 현실은 특별할 것도 거대할 것도 없는 일상 그 자체일 따름이다. “실비보험 설문조사 전화”가 아무 때나 걸려 오는 것과 “버스 기사님이 히터를 너무 세게 틀어서” 오히려 불편해진 마음 같은 것이 펼쳐지는 시공간은 용속(庸俗)한 현실이고, “하루에 40명이 자살하는 나라”에서 “청년도약계좌는 70만 원씩 내야” 하는 곳이 평평범범한 보통의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MZ’라는 세대 갈라치기식 유행어 따위에 대해 가치판단을 할 필요는 없다. 시간은 연속성 위에 놓여 있으며, 각각의 세대는 현재 시점에 포착된 스펙트럼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이 시의 화자 또는 시인도 MZ였다가 베이비붐세대였다가 X세대가 되고 알파세대가 될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생로병사의 흐름 위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완숙했다가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다. 누구도 예외 없다. 따라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분절하여 이해하려는 인간 특유의 인식이 시간을 12진법 또는 60진법으로 요상하게 나누듯이, 사람과 사람의 연속되는 시간성을 ‘세대’별로 가르는 것을 관습적으로 용인해 왔을 뿐이다. 그냥 그렇게 인식될 뿐 아무 의미 없는, 뙤약볕 아래 오후 1시와 오후 2시의 가늠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 무의미한 가치판단일 뿐이다.
이 시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빠부라는 이름의 반려 거위 영상을 틀어두고”나, “버스 창가에 낀 성에처럼 도모는 흐릿해지고”나, “예수가 보인 가장 위대한 기적은/ 서른셋에 열두 명의 절친이 있었던 거다”와 같은 실체적인 행동과 인식이다. 이를 통해 젊은 세대로서 시적 화자 또는 시인이 느끼는 시대적 감정이 무엇인지 체감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시에 실체적으로 묘사되거나 진술되는 현실은 특별한 것이 없지만 시대적 흐름과 정황 맥락을 적시한다. 첨단 미디어 문물 속에서 “반려 거위 영상”은 새로운 정서 교감의 수단이 되고, 어떤 일을 이루려는 “도모”는 “창가에 낀 성에처럼” 잘 보이지 않고, 종교적 영혼의 구원보다 “절친”에 의한 즐거움이 더 실용적인 현실이 젊은 세대의 마음을 구체화한다.
정서의 형상화 자체만으로 이 시는 실체성을 얻는다. 실심의 시학은 변명도 해명도 비난도 독설도 아닌 진심에서 나온다. 제목 “청년 도약 바람”에서 세 개의 단어가 함의하는 다의적인 해석 층위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 리얼리티와 “벼락이 필요”한 시대적 위기의식을 다채롭게 해석할 수 있게 만든다. 여기에는 “방금 창조된 진흙”과 같은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였던 이들과 젊은 세대가 될 이들이 앞으로도 공유할 특별할 것도 거대할 것도 없는 일상 그 자체가 노정되어 있다. 일상에서, 특히 젊을 때의 나날이 위태롭지 않은 인간은 없다. 예수조차도 “혼자 죽”었다.
지나간(?) 세대의 시적 실체
썰렁하다 못해 두개골의 눈구멍처럼 텅 빈 세종로 대로변 상가들. 한 집 건너 나붙은 폐업 딱지가 부고장인 듯 을씨년스럽다. 연말 특수는커녕 남이야 죽든 말든 좌우 두 패로 갈라져 극한으로 치닫는 정치의 혹한기. 겨울의 항문은 꽁꽁 얼어붙어 오갈 데 없이 꽉 막히고 말았네.
아귀 놈은 어디로 숨었는지 시뻘건 콩나물만 산더미로 쌓인 아귀찜 앞에 소주잔 놓고 뵈지도 않는 내일을 아귀아귀 씹는 군상들. 거친 세파 속 이러구러 악바리로 헤쳐온 이 시대의 아귀여, 머리보다 큰 아가리 떡 벌려서 닥치는 대로 집어삼킨 아가리의 힘으로 버텨온 너와 내가 아니더냐.
말로만 번지르르 애국자인 개뼈다귀 같은 것들. 싸잡아 안주로 씹으며 소주잔 털어 넣다 보면 욕 잔치가 거나하게 벌어지고 거칠어진 이바구에 아귀 뼈가 씹히는 거다. 그려, 아귀는 버릴 게 하나도 읍다니께. 아귀 부속 같은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일군 거여. 아문 그렇고말고.
소주병 수북이 쓰러뜨린 뒤 일어서며 주머니 뒤적이다가 손끝에 딸려 나온 종이 쪽지 하나. 그래 이 잡것, 바로 네 놈이렷다. 허구한 날 공치는 판에 가게 세貰는 빠지지 않는데 상점 문틈으로 기어든 겨울 불청객. 다름 아닌 급전이나 사채를 유혹하는 또 다른 검은 아귀, 아귀들. (내가 왜 이 종이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거지?)
이 우라질 놈의 세상, 온종일 묵었던 울화를 전단지처럼 북북 찢어 날리고 아귓집 골목 나서는데 머리카락도 몇 안 남은 이마 위를 번들번들 비벼대는 맥반석처럼 차가운 달. 한껏 불콰해진 사내가 작심한 듯 가운뎃손가락을 비아그라 먹은 성기처럼 불쑥 일으켜 세우더니
씨벌, 엿이나 먹어라!
-이영식, 「그 겨울의 손가락 욕辱」, 애지, 2026 여름호.
이영식의 「그 겨울의 손가락 욕辱」은 “거친 세파 속 이러구러 악바리로 헤쳐온 이 시대의 아귀여,”와 같은 문장만으로도 젊은 세대들에게 ‘꼰대’라 멸칭 받을 만한 시이다. 더군다나 “뵈지도 않는 내일을 아귀아귀 씹는 군상들”이 “아귀 부속 같은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일군 거여.”와 같은 낡은 표현이 시의 주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특별히 미학적인 요소도 감지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화자 또는 시인이 “정치의 혹한기”를 탓하거나 “온종일 묵었던 울화”에 “소주병 수북이 쓰러뜨”리는 우리 시대 중장년을 사실감 있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청년 도약 바람」과 별반 다름없는 자기 처지의 한탄이 표출된 시이기도 하다. 그들이 처한 현실의 시공간과 입장이 각 세대의 통용되는 말로 노출될 뿐이지, 낡은 표현으로 덧칠된 클리셰도 동일하다.
시적 묘사 또는 진술이나 비유랄 것도 없는 “가운뎃손가락을 비아그라 먹은 성기처럼 불쑥 일으켜 세우”는 대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대한 지나간(?) 세대의 불만을 대변한다. “아가리의 힘으로 버텨온 너와 내가” 일군 “한강의 기적”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이다. 어느 세대보다 지금의 중장년층에게 어울리는 관용어는 ‘피, 땀, 눈물’이다. 사회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의 언사를 단순한 자기과시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의 주체였던 이들이 맞이한 상황은 “썰렁하다 못해 두개골의 눈구멍처럼 텅 빈 세종로 대로변 상가들”과 같다. “급전이나 사채를 유혹하는 또 다른 검은 아귀”는 여전히 우리 시대 중장년의 생활에 빨대를 꽂고 있다. 그들은 “이 우라질 놈의 세상”에서 악에 받친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는 ‘존중받아야 마땅할 꼰대들’이다.
이영식의 많은 시는 현실 속에 불현듯 뾰족하게 솟아나 있는 감정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특장(特長)을 보여 준다. 「그 겨울의 손가락 욕」도 “시뻘건 콩나물만 산더미로 쌓인 아귀찜 앞에 소주잔 놓고” 생긴 시대적 푸념 자체를 꾸밈없이 표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가 상스럽거나 일회성 농담으로만 읽히지 않는 것은 “씨벌, 엿이나 먹어라!”와 같은 날것의 문장 안에 숨겨놓은 현실 리얼리티에 있다. 여기에는 시가 최대한으로 허용할 수 있는 표현의 경계선을 장난스레 우롱하는 시적 의도가 설정되어 있다. 이영식이 인식하는 중장년 세대의 실체는 경계의 이쪽과 저쪽에 속하지 못한 채 “을씨년스럽”게 또는 “비아그라 먹은 성기처럼 불쑥” 놓여 있는 “한껏 불콰해진 사내”의 존재론에 있기 때문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손가락 욕”을 시에서 구사하려면 이영식 시인처럼 번뜩이는 정신 속에서 아무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마 위를 번들번들 비벼대는 백반석처럼 차가운 달”과 같이 써야 한다. 난삽한 사유보다는, 난해한 관념보다는 욕 한마디가 더 시적이다. 시가 우리에게 실체적으로 다가올 때는 이렇게 적나라한 현실 세계를 마주하게 할 때이다. (내가 왜 이 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거지? 씨벌,)
유년기를 추종하는 종심(從心)의 시적 실체
김 박사네 전원주택 옆
장마철에만 열린다
책도 없고 책가방도 없다
1교시 내내 맹, 하면 꽁, 하고
2교시 내내 꽁, 하면 맹, 한다
수업이 끝나도 수시로
맹맹 꽁꽁 복습을 한다
한 글자도 한 문장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일자 학문을 깊게 판다
평생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반칠환, 「맹꽁이 학교」, 애지, 2026 여름호.
일테면, 세대별 특징을 최초로 정리한 셀럽은 공자였다. 논어에 적시된 내용을 적용하면, 「청년 도약 바람」은 갓을 쓰는 꽃다운 나이[弱冠]로 마음이 확고하게 서서 세계관을 확립[而立]하는 세대이다. 「그 겨울의 손가락 욕」은 하늘의 명을 깨닫거나[知天命] 귀가 순해져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耳順]할 수 있는 세대를 가리킨다. 두 시 모두 2,500년 전에 공자가 규정한 정신 연령에 한참 모자란 ‘사특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공자님 말씀이 오늘날에는 허황된 사특함이 되었거나. 사실 공자가 연령대별로 정신의 경지를 나눈 것은 그 자체로 형이상학적이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없고, 생활의 윤택 속에서 올바른 도덕적 가치를 함양하고, 세상만사 위정자의 덕으로 현실을 계도하려는 목적에서 설정된 이상적인 세계관에서나 가능한 희망 사항이었다.
그나마 공자가 가장 합리적으로 설정한 세대별 명칭은 환갑(還甲)이나 망팔(望八), 망백(望百)같이 살다 보면 더 오래 살고 싶다는 보편적인 염원의 숫자 표현밖에는 없다. 그중 “종심(從心)” 정도가 그나마 가장 현실적이고 실체적이다. “평생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從心所欲 不踰矩]”라는 종심의 연령대를 설명하는 대목은 쇠약해진 육체와 정신, 두루뭉술한 처세 능력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종심에 이르면 “일자 학문을 깊게” 판다 해도 “한 글자도 한 문장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라는 대목에 공감할 수밖에 없고, “수업이 끝나도 수시로/ 맹맹 꽁꽁 복습을” 해야 하는 이치도 이해할 수 있다. ‘공자왈, 맹자왈’ 하는 부질없는 말씀이 결국 생의 중요한 깨우침임을 「맹꽁이 학교」는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장마철에만” 열리는 이 자연의 순리 앞에서 화자 또는 시인은 그 세대의 시적 진실을 단순하지만 명쾌하게 형상화해 낸다. 이 시도 앞선 두 시와 마찬가지로 특별할 것도 거대할 것도 없는 노년의 일상 그 자체가 노정되어 있다.
「맹꽁이 학교」의 중요한 함의는 보편적 인간의 생애에 있어 마지막 정신적 단계인 ‘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 마음’이 유년기의 순수한 인식과 맥을 같이한다는 점이다. “책도 없고 책가방도 없”는 “마음 가는 대로”의 세계는 인간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이 중첩됨으로써 순환성을 획득한다. 허리가 굽어지는 것은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돌아가려는 물리적 변신이고, 말이 어눌해지고 정신이 흐려지는 것은 “맹, 하면 꽁,” 하는 선명한 순리에 연동되기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반칠환은 이 단순한 이치를 동시 같은 단순한 문장과 묘사만으로 웅숭깊게 담아낸다. 그가 쓴 여타의 시에서도 단순성의 깊이가 특질로 작용하는데, 특히 「맹꽁이 학교」는 삶의 실체, 다시 말해 종심에 이르기까지 무던히 이질적이고 고단한 현실의 실체를 “법도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관록으로 담백하게 빚어내고 있다.
인생의 여정 내내 “맹, 하면 꽁, 하고” “꽁, 하면 맹, 한다”는 이 단순명쾌한 “법도”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연륜을 잘 쌓아야 하고 그 와중에 동심으로의 회귀를 끊임없이 지향해야 한다. 종심에 이르러야 닿을 수 있는 연륜의 끝판은 단순히 나이만으로 산출될 수 없다. 요즘에는 참어른을 뵐 수 있는 일이 좋은 시를 만나는 것만큼 요원하기만 하다는 점에서 이 시도 형이상학적인 면이 없지 않다.
등에 손을 얹어주고 싶은 시의 위로
자기 꼬리를 물려고 빙빙 도는 개가 있었다
개는 돌아보는 순간 시야에서 달아나는
제 꼬리를 쫓으며
한참을
제자리에서 빙빙 빙빙 돌았다
개가 잡고 싶어 하던 꼬리는
지쳐 포기하는 순간에라야 사라졌는데
정말로 사라진 건 아니고 그저
개의 엉덩이에 그대로 달려 있을 뿐이었다
잡을 수 없는 꼬리의 존재를
개가 느끼듯이
언뜻 고갤 돌리는 주변시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의 뒷모습이 비쳤을 때도
등을 밀고 싶었던 것 같다
너 아무도 곁에 없대도 서 있지만 말고 원하는 곳으로
빛이 있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걸
알려주고 싶어서
등에 손을 얹어주고 싶어서
오래도록
자꾸만 도망치는 뒷모습을 찾았던 것 같다
혼자 하는 술래잡기처럼
제자리에서
빙빙 빙빙
-조온윤, 「술래의 등」, 애지, 2026 여름호.
결국 지학(志學)부터 종심까지 실심의 시학은 현실에 충실한 시인의 진정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문학의 종언은 예술 장르의 소멸이 아니라, 작가와 시인의 마음가짐에 경종을 울리는 상징적 언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현실적이지 않은 마음으로 빚은 시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시를 읽지 않는 시대는 시를 쓰는 이들에게 책임이 있다 할 것이다. 생활의 실체가 없는 지극히 병리적인 추상의 세계를 관념어로 표현하는 시들을 방기하거나 이를 예술적으로 참신하다고 자꾸 치켜세우는 것도 문제이지만, 시의 본령이 되는 위로와 치유성을 도외시하는 것에 눈 감는 것이 무엇보다 크고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라는 장르의 존재론적 이유는 화자 또는 시인을 치유하고 독자를 위로하는 진정성에 달려 있다. 저 혼자 자위하는 시가 고전이 되었다는 소리를 도무지 들어본 적 없다.
조온윤의 「술래의 등」은 “자기 꼬리를 물려고 빙빙 도는 개”의 처지를 작금의 현실 맥락과 현대인의 심정에 비추어 보는 통찰력 있는 시이다. “돌아보는 순간 시야에서 달아나는/ 제 꼬리를 쫓으며” 사는 현대인의 비애감은 비근한 것이지만, “등에 손을 얹어주고 싶어서/ 오래도록/ 자꾸만 도망치는 뒷모습을 찾았던 것 같다”와 같은 위로의 문장은 예사롭지 않다. 좋은 시는 철학도 의학도 종교도 아니지만, “정말로 사라진 건 아니고 그저/ 개의 엉덩이에 그대로 달려 있을 뿐”이라는 비시적(非詩的)인 관조 속에서 “빛이 있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걸” “알려주고 싶”은 절실한 안타까움을 지니고 있다. 앞선 시들도 결국에는 “등을 밀고 싶었던 것 같다”처럼 화자 또는 시인 자신 또는 독자를 위로하고자 하는 연민이 기저에 흐르고 있다.
「술래의 등」이 ‘새로운’ 시는 아니다. 그러나 시의 위로는 언제나 참신하다. 우리 근현대문학이 ‘새로움’에 대해 갖는 인식적 편향은 망국의 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학의 기운이 꺾이고 식민지가 되고 서구 근대의 이원론적 합리성에 휘둘리게 되면서, 유구한 것의 배격과 새로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구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오래된 우리네 마음에는 분명 연민과 위로와 연대의 가치가 갓 태어난 강아지와 같이 낑낑대고 있을 것이다. 조온윤의 시는 “오래도록” 위로하는 마음을 지녔다는 점에서 “자기 꼬리를 물려고 빙빙 도는” 어미 “개”의 따스한 혀의 감촉을 떠올리게 한다. 나아가 그 뜨겁고 보드랍고 촉촉한 혀가 오래 핥아주는 것처럼 “제 꼬리를 쫓으며/ 한참을/ 제자리에서 빙빙 빙빙 돌”고 있는 ‘나’의 등을 쓸어주고 밀어주는 보드라운 손을 상상케 한다.
현실은 “개의 엉덩이에 그대로 달려 있을 뿐”인 것처럼 본래 거기에 있다. 시의 할 일은 아무렇지 않게 우리의 삶에 관여하는 비시적인 것들의 시적인 발화를 음정 삼아 “제자리에서/ 빙빙 빙빙” 술래잡기하듯 노래하는 일이다. 그 자체로 시의 할 일은 완성된다. 사무사를 현대 서정시에 투영해 본다면, 공자는 간계(奸計)한 말장난이나 억지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것으로서의 사특함이 없는 ‘위로하는 시’를 시경의 ‘국풍(國風)’에 넣지 않았을까 싶다.
시의 본질은 딩돌의 노래
딩하 돌하 감당할 수 없어서
딩하 돌하 감당할 수 없어서
이 무진장 생겨나는 새소리를
나 혼자 듣기 아까워서
당신께 보내려고 궁리를 해보는 것입니다
더러는 새들끼리 속절없이 통성명을 한들
더러는 새들끼리 밀고 당기며 연애를 한들
내가 왈가왈부할 바는 아닙니다
창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폭포수를
이리도 튀고 저리도 튀는 물방울들을
당신께 보내려고 궁리를 해보는 것입니다
빗자루로 쓸어 담고 손으로도 줍고
철사로 꿰어 쟁이고 실패로 칭칭 감아서
보자기로 싸서 부칠까 생각합니다
그 보자기 매듭 묶지 못하고서야
그 보자기 매듭 묶지 못하고서야
당신 귓바퀴에 새소리 닿으면 좋겠습니다
칼 든 번개에 새소리가 깨지기야 하겠습니까
억수장마에 새소리가 녹슬기야 하겠습니까
쉬파리에 새소리가 상하기야 하겠습니까
당신이 보자기를 받아 매듭을 푸는 순간
그 안에 담긴 새소리가 쏟아져 사라져버린들
그 안에 담긴 새소리가 쏟아져 사라져버린들
당신이 어찌 내 마음을 모르기야 하겠습니까
-안도현, 「정석가鄭石歌」, 문학동네, 2026 여름호.
시가 산문화되면 내면의 섬세함과 깊이가 보장되지만, 입말의 운율이 약화되고 정서 전달의 응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시는 노래로부터 발아한 소리와 리듬의 정신 예술이다. 말소리의 일정한 반복률과 자모음의 자연스러운 연쇄율이 시의 내재적인 박자와 연동되면 오라(aura)를 발산하는 좋은 시가 될 수 있다.
안도현의 「정석가鄭石歌」는 작자 미상의 고려 속요를 차용한 시이다. 본디 「정석가」는 우리네 전통 정서인 그리움과 기다림, 임을 향한 변치 않는 사랑을 강조하는 노래다. ‘정(鄭)’은 ‘징’을 ‘석(石)’은 ‘경쇠’를 의미하는데, 조선의 궁중 음악으로 구성될 때 흥을 돋우기 위해 삽입된 여음적 성격이 첫 도입부에 배치되어 있다. 안도현의 시에서 “딩하 돌하”는 “무진장 생겨나는 새소리”를 가리키는 의성어로 활용되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폭포수” 같은 “새소리”를 “당신께 보내려고 궁리”하는 마음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당신이 어찌 내 마음을 모르기야 하겠습니까”와 같이 연정의 정서를 함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 속요 「정석가」와 친연성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이리도 튀고 저리도 튀는 물방울들”이나 “빗자루로 쓸어 담고 손으로도 줍고/ 철사로 꿰어 쟁이고 실패로 칭칭 감”는 이미지가 청각에서 공감각으로 다채롭게 형상화되어 상상력의 명징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수준 높은 생동감의 체현을 목도할 수 있다. “새소리”를 “보자기로 싸서” “당신 귓바퀴에” 닿게 하겠다는 서정성은 안도현 시인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미지 활용과 구사가 어떻게 시에 유난스럽지 않게 구사되어야 하는지 모범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교착어로 된 우리 시의 경우, 운율에 있어 음수율‧장단율‧고저율 등 소리 기재의 불리함 때문에 시의 회화적인 요소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 감각 이미지의 창의적 변용을 통해 공감각 이미지의 확장 활용이 두드러지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거기에다 한국의 서정시는 회화적인 이미지즘 안에 내재율적 음악성을 강화하기 위해 우주와 자연의 운행, 인간 본연의 생체적 주기와 박동, 개연성을 함의한 철학적‧과학적 원리 등을 접목한 주지주의 경향의 사유를 적극 활용한다. 안도현의 「정석가」도 분절되어 발음되는 우리말의 한계를 분쇄할 만큼 문장의 반복과 이미지의 논리적 중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할 수 없어서’의 반복이나 ‘~고서야’, ‘~습니까’, ‘~들’ 같은 어미의 반복 배치는 이 시를 소리 내어 읽을 때 “보자기를 받아 매듭을 푸는 순간/ 그 안에 담긴 새소리가 쏟아”지는 청각 체험을 할 수 있게 한다.
「정석가鄭石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실체와 위로만으로는 시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디 시는 노래의 운율이었고 주문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근현대에 와서 문학은 문자와 인쇄술의 발전에 기대어 묵독의 형식을 강요한다. 내용상으로는 사실에 기반한 허구를 있을 법하게 기술하는 것으로써 독자에게 간접 체험의 상상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작가나 시인이 바라보는 대상의 특별함을 사유하게 하고 창작자가 유도하는 대로 인식의 재축조를 할 수 있어야 리얼리티가 살아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시대가 변했다. 구전문학이 청각 미디어 중심이고 문자와 인쇄술에 의한 근현대문학이 시각 미디어 중심이었다면, 첨단 디지털 디바이스와 AI 시대의 문학은 시각‧청각 중심의 공감각 미디어가 창작의 주된 추동력이 된다. 오래된 말이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은 완전히 끝장났다고 말한 것은 유별난 비유가 아니었다. 근대문학이 강요한 묵독은 인간의 내면적인 영역을 확장하였지만, 현실 세계의 실체와 입말의 소리를 소홀히 여겼다. 이제는 보는 감각은 물론 말하고 듣는 감각도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안도현의 시가 들려주는 노래는 디스플레이와 고음질의 스피커, 가상현실에서의 시청각 비주얼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하지만 시가 정신 예술의 차원에서 상상력의 오감각을 생동감 있게 구현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좋은 시는 디바이스가 없어도 감각의 체현을 가능하게 해준다. 생각해 보시라, 운율과 상상력은 최첨단 기술의 원천이자 목적지이다. 이는 시가 종언을 고하지 않는 까닭이다.
사무사의 복원: 시적인 실체, 위로, 노래
현대 서정시는 ‘새로움 추구’에 명운이 달린 것처럼 행동해 왔다. 조선이 망하는 과정에서, 일제의 그늘에서 여과 없이 수용한 서구의 근대성은 유구한 것에 대한 배격을 밑바탕으로 조성되었다. 전통 시가의 경우도 예외는 없었다. 낡은 운율과 형식, 자연과 오래된 정서의 노래는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 같은 새로운 문예사조 앞에서 무용지물의 퇴물이 되었다. 그나마 우리의 전통 시가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시인과 작가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우리말이 본래 내재한 정신과 특유의 운율성이 한몫했다. 우리의 시가 서구의 영향을 수정 없이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그 안에 내재한 연민과 인정, 생활의 구체적인 실체, 입말의 노래성은 사라질 수 없다. 문학의 본질은 언어이고, 언어는 문화와 역사가 적층해 온 고유한 정신의 체현이다. 따라서 시의 본원은 위로이고 실체이고 노래다. 읽히지 않는 시, 이해되지 않는 시, 저 혼자 관념의 차원을 부유하는 시들은 위로도 실체도 노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없다. 없는 것을 탓할 수는 없지만, 없는 것을 통해 있는 것의 소중함을 다시금 확인할 수는 있다. 「울게 하소서」의 “꽃”과 “돌”을 보고 “울게” 하는 시, 「청년 도약 바람」의 “내게도 벼락이 필요해”나 「그 겨울의 손가락 욕」의 “엿이나 먹어라!” 하는 진정성의 시, 「맹꽁이 학교」의 “맹, 하면 꽁,” 하는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의 시, 「술래의 등」의 “등에 손을 얹어주”는 시, 「정석가」의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을 “당신께 보내려고 궁리를 해보는” 시에는 사무사의 ‘위로’가 있다. 또한 현실 정서가 ‘실체화’되는 물질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참 마음을 입말의 소리로, 운율의 형식으로 복원하려는 ‘노래’의 본질이 있다. 좋은 시를 정의한다는 자체가 모순이지만, 적어도 있어야 할 것이 있는 시가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는 것쯤은 명약관화하다. 시보다 재미있는 놀거리는 많지만, 시보다 울림 있는 실심의 콘텐츠가 드물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적어도 이 정도는 눈치채고 있어야 시인의 종언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려나 공자왈 맹자왈 하는 이야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