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따이한’(萊大韓)의 뜻을 풀이하면 혼혈 한국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월남 전쟁 때 생겨난 혼혈아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돌아 온다는 한국군 병사는 돌아오지 않았고 자국민들의 눈총 속에서 “라이따이한”으로 살아나가야 하는 어린 아이들은 이제는 나이 30대 중반이 넘어선 성인으로서 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가는 것을 꿈으로 살아가고 있다…. 일부 책임감 없는 한국인들에 의해 35년 전 전쟁의 비극으로 아물어 가고 있는 “라이따이한”의 아픔이 다시 야기 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에 대해 이야기 하다 보면 ‘라이따이한’이란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1992년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한국’을 ‘따이한’으로 불렀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베트남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월남전 때 참전한 한국 군인들에 대한 기억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 한국군이 주둔했던 다낭(ĐàNẵng), 퀴논(Quy Nhơn), 나짱(Nha Trang)에는 많은 라이따이한(Lai Đại Hàn)이라 불리는 한국인 2세들이 태어났고 현재도 살고 있다. 국교 정상화 이후부터 베트남에서는 한국 공식 명칭을 한꿕(Hàn Quốc : 韓國)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이 분단되면서 남한, 북한을 다르게 불렀는데 남한은 남찌에우띠엔(Nam Triều Tiên : 南朝鮮 남조선), 북한은 박찌에우띠엔(Bắc Triều Tiên : 北朝鮮 북조선)으로 불리었다. 북한의 공식명칭은 얀쭈 년얀 찌에우띠엔(Dân chủNhân dân Triều Tiên : 民主人民朝鮮) 민주인민조선이라 칭한다. ‘라이따이한’(萊大韓)의 뜻을 풀이하면 혼혈 한국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월남 전쟁 때 생겨난 혼혈아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의 혼혈인 들은 대수롭지 않게 일반인들과 교류하며 지내고 있지만 당시의 혼혈아들은 국제적인 문제로까지 대두 되었다. 전쟁이 낳은 아픔의 흔적으로는 너무나 긴 세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돌아 온다는 한국군 병사는 돌아오지 않았고 자국민들의 눈총 속에서 “라이따이한”으로 살아나가야 하는 어린 아이들은 이제는 나이 30대 중반이 넘어선 성인으로서 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가는 것을 꿈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의 나이 40대가 넘어선 사람들이라면 ‘베트콩’이란 말을 자주 들어보았을 것이다. 주로 영화에서나 TV 드라마에서 자주 사용 했던 단어 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의 월맹군을 무시하고 낮춰 부르는 말로 비엣꽁(Việt cộng)이란 단어를 한국식으로 ‘베트콩’이라 발음 했던 것이다. 원래 월맹군은 비엣민(Việt minh)으로 불리었는데 ‘비엣민’의 역사는 1941년부터 시작된다. 오랜 망명생활을 마치고 베트남에 돌아온 호찌민이 ‘비엣민’이란 유격대를 창설하며 일본과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항한다. 결국 1945년 일본이 물러나고 1954년 프랑스도 디엔비엔푸(Điện Biên Phủ)전투의 패배로 물러나게 된다. 이때 비엣민의 사상자는 8천명에 달했고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3천명이 넘어섰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군인들은 만 여명이 넘게 포로로 잡혔으며 그 중 7천여 명이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포로 수용소에서 또는 운반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공산주의 팽창을 우려하던 미국은 전쟁을 시작했고 약8년간의 월남전을 치르게 된다. 나짱은 월남전 당시 한국군 야전사령부와 십자성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30Km 떨어진 닌호아(Ninh Hòa)에는 백마부대가 주둔해 있었으나 지금은 건물들이 들어서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나짱에서 북으로 250Km 지점에 퀴논(Quy Nhơn)이란 도시가 있다. 퀴논에는 맹호부대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시내 한 가운데 팔각정은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월남전 당시 한국군의 최대 격전지인 안케(An Khê)는 퀴논에서 서쪽으로 약80Km 떨어진 고산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케 전승비만 쓸쓸히 남아 있다.
베트남이 통일 된지 30년이 넘었고 한국이 월남전쟁에서 철수를 하기 시작 한지 35년이 넘어서고 있다. 하지만 무분별한 극소수의 한국인들이 제2의 “라이따이한”을 다시 만들어 내고 있다. 국제결혼이 해마다 이슈화 되면서 베트남 정부는 국제결혼의 조건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2006년에 비례해 2007년도에는 한국으로 결혼을 자청하는 베트남 아가씨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베트남과 한국의 사이가 보이지 않는 벽으로 두터워 가고 있는데 일부 책임감 없는 한국인들에 의해 35년 전 전쟁의 비극으로 아물어 가고 있는 “라이따이한”의 아픔이 다시 야기 되고 있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좀 더 생각하고 책임감 있는 한국인으로서 베트남에 인식 시켜야 할 것이다. 모범이 되는 세계의 한국인으로 거듭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