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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부림일
성경본문 : 에스더 9: 20-32
20. 모르드개가 이 일을 기록하고 아하수에로왕의 각 도에 있는 모든 유다인에게 무론 원근하고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21.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십 사일과 십 오일을 지키라
22. 이 달 이 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23. 유다인이 자기들의 이미 시작한대로 또는 모르드개의 보낸 글대로 계속하여 행하였으니
24.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모든 유다인의 대적 하만이 유다인을 진멸하기를 꾀하고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저희를 죽이고 멸하려 하였으나
25. 에스더가 왕의 앞에 나아감을 인하여 왕이 조서를 내려 하만이 유다인을 해하려던 악한 꾀를 그 머리에 돌려보내어 하만과 그 여러 아들을 나무에 달게 하였으므로
26. 무리가 부르의 이름을 좇아 이 두 날을 부림이라 하고 유다인이 이 글의 모든 말과 이 일에 보고 당한 것을 인하여
27. 뜻을 정하고 자기와 자손과 자기와 화합한 자들이 해마다 그 기록한 정기에 이 두 날을 연하여 지켜 폐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28. 각 도, 각 읍, 각 집에서 대대로 이 두 날을 기념하여 지키되 이 부림일을 유다인 중에서 폐하지 않게 하고 그 자손 중에서도 기념함이 폐하지 않게 하였더라 29. 아비하일의 딸 왕후 에스더와 유다인 모르드개가 전권으로 글을 쓰고 부림에 대한 이 둘째 편지를 굳이 지키게 하되
30. 화평하고 진실한 말로 편지를 써서 아하수에로의 나라 일백 이십 칠도에 있는 유다 모든 사람에게 보내어
31. 정한 기한에 이 부림일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유다인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의 명한바와 유다인이 금식하며 부르짖은 것을 인하여 자기와 자기 자손을 위하여 정한 바가 있음이더라
32. 에스더의 명령이 이 부림에 대한 일을 견고히 하였고 그 일이 책에 기록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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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 오경에 기록된 3대 절기, 유월절과 맥추절과 초막절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 오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이 신실하게 지키고 있는 절기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수전절(修殿節)입니다.
수전절은 ‘하누카’라고 하는데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성전에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성전 거리를 사창가로 만들었습니다.
기원전 165년, 마카비라는 독립운동가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물리치고 성전을 회복하였습니다. 수전절은 이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적합한 설명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수전절 = 성전을 수리한 날’ 이렇게 기억하시면 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부림절입니다.
유대인들은 포로생활을 하다가 고레스 왕의 명령에 따라 귀환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백성이 페르시아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들 가운데 하나인 에스더가 왕비가 되었습니다.
하만이라는 악한 사람이 있어 유다인들을 몰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에스더와 그의 삼촌인 모르드개가 힘써 이 음모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하만을 비롯하여 유다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부림절은 그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에스더서는 부림절의 유래를 잘 알려주는 성경입니다.
부림절은 유대인들의 절기입니다. 그런데 부림절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오늘 우리에게도 부림절이 있어야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부림절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교훈을 줍니까?
첫째, 부림절은 응답의 날이었습니다.
31절 중간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유다인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가 명령한 바와 같이 유다인이 금식하며 부르짖은 것으로 말미암아 자기와 자기 자손을 위하여 정한 바가 있음이더라
이 말씀은 금식하며 부르짖은 것이 응답된 것을 기억하기 위해 부림절을 정했다는 내용으로 이해됩니다.
하만의 음모 때문에 유다인들은 몰살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하만이 왕에게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다인들은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않으니 그대로 버려두는 것은 왕에게 무익합니다. 조서를 내려 그들을 진멸하소서’ 아뢰었습니다(에3:9). 왕은 좋게 여기고 반지를 빼어서 하만에게 내 주었습니다. 이 일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 것입니다. 왕의 이름으로 조서가 작성되어 전국에 전달되었습니다.
아달월,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으로 하면 2월과 3월 사이입니다, 이 달 13일이 되면 유다인들은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 할 것 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재산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지도에 따라 금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 응답으로 유다인들은 몰살을 면했고 오히려 유다인들을 해치려던 무리들은 도륙을 당했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기도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의 날이 있기를 원합니다.
에스더서는 이렇게 응답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철저한 기도입니다.
에스더가 목숨을 걸고 왕 앞에 나가려할 때 그는 동족들이 자기를 위하여 금식할 것을 부탁합니다.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철저한 금식을 부탁한 것입니다.
에스더도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다음에 왕 앞으로 나갔습니다.
에스더는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 앞으로 나갑니다.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에게 나가면 왕이 금 규를 내밀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는 것이 왕실의 규례입니다.
에스더서에는 에스더가 왕궁 안 뜰에 들어섰을 때 왕이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내밀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에5:2).
여기에서 일이 역전되기 시작합니다. 하만의 음모를 물리치고 유다인들을 구하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온전히 기도의 응답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밤낮 삼일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았으니 그 얼굴이 얼마나 파리해졌겠습니까?
왕이 그 얼굴을 보았을 때 사랑스러워 보이기는커녕 혐오감을 느끼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왕이 에스더를 보니 매우 사랑스러웠다고 적고 있습니다(에5:1).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이 왕의 눈에 무엇이 씌워지게 한 것입니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의 첫 번째 왕후가 아닙니다. 두 번째 왕비입니다.
첫 번째 왕비는 와스디였는데 쫓겨났습니다. 왜 쫓겨났지요? 왕이 잔치를 하면서 왕비를 나오라고 했습니다. 왕비의 아름다운 용모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와스디는 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왕은 기강을 세워야 하겠다고 하고서 와스디를 폐위하고 에스더를 왕후로 맞이한 것입니다.
그 에스더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 앞으로 나옵니다. 왕은 ‘이것 보아라, 전 왕비는 불러도 오지 않더니 새 왕비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실의 규례를 어기고 함부로 나와? 피장파장이로군! 아니 한 술 더 뜨는군!’ 괘씸하게 여기기 쉬웠습니다.
왕이 그런 마음을 먹었으면 에스더는 쫓겨나거나 처형당할 판입니다.
그러나 왕은 금 규를 내밀어 에스더가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에5:3)하였습니다.
유다인들과 에스더의 적극적인 기도, 결사적인 기도가 왕의 마음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적극적으로 기도하십니까?
뜨겁게 기도하십니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가 여럿 있습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어긋나는 기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와 함께 뜨뜻미지근한 기도, 미온적인 기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버리리라”(계3:15~16)라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뜨뜻미지근한 기도도 싫어하시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많은 기도 제목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기도제목들이 있습니다. 특히 수험생들, 수능고사가 이제 꼭 열흘 남았습니다.
교회적으로 성전 완공과 부흥을 위한 기도가 있습니다.
교회 전체를 위해 기도할 때 종교개혁기념주일인 이 주간에는 특별히 교회의 갱신을 위해, 교회가 새로워지도록,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한 기도, 정말 절박합니다. 어쩌면 지금 한국은 에스더 때의 유다인들보다 더 큰 위기 가운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은 문제들을 놓고 기도할 때 뜨겁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기도했으면 믿고 나가야합니다.
에스더서 4장 16절의 뒷부분을 보세요. 에스더는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왕 앞으로 나아갑니다.
‘열심히 기도했으니까 이제 왕이 나를 부르겠지!’ 하고서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에이, 이만큼 기도했으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하고서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고서 노력한 만큼, 모험한 만큼 응답해 주십니다.
에스더는 죽음을 각오하고 왕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려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기도했으면 믿고 그 다음 단계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설교 예화로 많이 알려진 ‘비오게 해달라는 기도와 어린이의 우산’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느 해 여름, 비가 오지 않아서 어려움이 심해지자 목사님이 ‘다음 주일에는 비가 오게 해 달라는 특별기도를 하겠습니다’ 광고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 역시 날이 맑았고 교회에서는 비가 오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는데 예배가 끝날 무렵에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교인들은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아 교회밖으로 나가지 못했는데 어린 아이 하나가 우산을 펼치고 교회 밖으로 나갑니다.
어른들이 ‘너는 어떻게 해서 우산을 가지고 왔니?’ 물으니까 어린이는 ‘아, 오늘, 비가 오게 해 달라는 특별기도를 드린다고 했으니까 비가 올 줄로 알고 우산을 준비했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어린이와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순교자 주기철(朱基徹) 목사님이 순교하기 전에 산정현교회 강단에서 마지막으로 한 설교가 있습니다. 그 제목이 ‘5종목의 나의 기도’입니다.
이 설교에서 주기철 목사님은 다섯 가지 기도를 합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둘째, 장기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옵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이 설교 겸 기도를 하고 계속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였습니다.
다시 체포되었고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여러분,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기도했으면 믿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림절, 응답의 날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부림절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교훈을 줍니까?
둘째, 부림절은 좋지 않은 것들이 좋은 것들로 변한 날이었습니다.
부림이라는 말은 ‘부르’에서 왔는데 부르는 ‘제비’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을 괴롭히는 하만일당이‘ 언제 유다인들을 몰살할까?’ 정하기 위해서 제비를 뽑았는데 이스라엘 달력으로 마지막 달인 아달월이 뽑혔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유다인들은 살고, 유다인들을 괴롭히던 세력이 몰살당하는 날로 변했습니다.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부림절에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습니다.
「공동번역성서 개정판은」22절 앞부분을 “이 달은 쓰라림이 기쁨으로 바뀌고 초상날이 축제일로 바뀐 달이요, 이 날은 유다인들이 원수에게서 풀려난 날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사야는 이사야서 61장 3절에서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의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여 하심이라”고 예언했는데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가 성도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기 바랍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 고통이 변하여 즐거운 일이 되기 바랍니다.
위험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 위험이 변하여 안전이 되기 바랍니다.
좌절감 가운데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 좌절감이 변하여 의욕이 되고 다시 한 번 도전하는 용기가 되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소망 가운데 살아야합니다.
성도의 삶은 소망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소망은 성도로 하여금 현재의 고통과 고난을 극복하고 그것이 기쁨으로 변하게 하는 가장 강한 능력입니다.
성도는 고통을 나쁜 결과로 받아들이지 않고, 소망이 성취되는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르드개를 비롯한 유다인들은 자기들이 몰살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누었습니다.
모르드개는 그런 가운데에서도 에스더에게 왕에게 나아가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고 부탁합니다. 아주 어려운 일이었지만 거기에 한 가닥 소망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원수들에게 멸망당하기로 작정되었던 날이 원수들을 멸망시키는 날로 변하였습니다.
부림절은 성도가 소망을 가지고 힘쓸 때 그 소망이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날입니다.
이 세상은 죄로 오염된 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선보다는 악이, 의보다는 불의의 세력이 더 큽니다.
이런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시키지 않고 살아간다면 성도는 어려움을 겪게 마련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중세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가르침과 싸우느라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다인들이 몰살의 위기를 만난 것은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꿇지도 않고 절하지도 않은 데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성도의 삶은 분명히 잘못된 세상 풍조와 싸우고 그것을 극복하려하고 그 때문에 고난을 받는 삶입니다.
고난 속에서 소망을 품고 그 소망이 언제인가를 이루어질 것을 믿고 사는 삶입니다.
변해야 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의 위상입니다. 지금 교회는 여러 가지 오해와 비난을 받는 일이 많습니다.
부림절에 유다인들의 위상이 바뀌고 부림절 이후 그들은 신분을 보장 받고 산 것처럼 교회가 칭찬과 인정과 존경을 받는 존재로 변해야하겠습니다.
에스더서 8장 16절과 17절을 보면 부림절에 유다인에게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고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요즘 말로 주민등록을 하는데 ‘나도 민족을 유다인으로 바꿔 기재해 주시오’ 이렇게 민족을 정정하거나, 유다인들의 공동체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교회의 위상이 달라지면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이 저절로 많아집니다.
어느 목사님이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어느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그 교회당이 매우 낡아서 비가 새고 굵은 나무로 벽을 받쳐 놓았습니다. 이 목사님이 열심히 전도를 하는데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느 분에게 교회 나오라고 하니까 그 분이 ‘교회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데 비가 오면 비를 맞는 하나님을 믿어서는 무엇을 합니까? 나 안 나갑니다!’ 하더랍니다. 이 목사님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았고 또 깨달았습니다. ‘아, 이것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구나!’ 이 목사님은 교인들과 힘을 합해 힘써 교회당을 새로 짓는데 그 지역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지었습니다. 그랬더니 저절로 부흥이 되더랍니다.
지금 집 값을 결정 짓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교육환경입니다. 교육환경이 좋은 지역사회로 사람들이 몰리고 집 값이 올라갑니다. 이와 관련된 정책들이 계속해서 보도되고 있습니다.
엉뚱한 생각이라고 하실 지 모르겠지만 교회환경이 좋은 곳이 집 값이 비싸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됩니다. 요즘 교회가 들어오면 집 값 떨어진다고 데모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그 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나, 이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인가요?
좋은 교회가 있어서 그 교회를 통해서 그 지역사회 사람들의 생활이 변화되고, 그 지역사회의 가정들이 변화되고, 교회가 그 지역사회에 많은 도움을 주고, 그 지역사회가 정직하고 정결한 곳이 되고, 그 교회가 그 지역사회의 자랑이 되어서 그런 일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교회의 위상, 그리고 교회에 대한 인식이 변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변해야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인데 이것이 종교개혁 기념주일에 우리가 새롭게 생각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변하지 않는 소망을 품고 살아 현재의 슬픔과 고통이 기쁨과 즐거운 일로 변하는, 좋지 않은 것들이 좋은 것으로 변하고 교회가 새로워져서 교회의 위상이 변하는 오늘의 부림절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부림절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교훈을 줍니까?
셋째, 부림절은 하나님의 섬세한 인도를 깨닫는 날입니다.
에스더에는 많은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본래 왕후였던 와스디가 왕비 자리에서 추방 당하고 그를 대신해서 에스더가 왕후가 되고.
하만이 유다인들을 몰살할 음모를 꾸미고, 에스더를 통해 이 음모가 왕에게 알려지고, 일이 뒤바뀌고 이런 과정에서 아슬아슬한 대목도 많고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흥미진진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한 번 소개해 드린 일화인데 미국의 프랭클린이 한동안 프랑스의 대사로 일한 일이 있었습니다. 외교관들이 모인 파티에서 성경 이야기가 나왔는데 한 외교관이 ‘세상에 성경처럼 재미없는 책은 또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프랭클린은 빙그레 웃고 돌아와서 한 연극배우를 불러 에스더서를 일인연극으로 꾸며 연습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외교관들을 초청해서 ‘오늘은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일인연극으로 보여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외교관들은 그 배우의 에스더서 연극을 아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특히 성경이 재미없다고 한 그 외교관이 제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가장 강하게, 가장 인상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에스더서에는 ‘기도’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금식하며 부르짖었다’는 우회적인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어디보다도 뜨거운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모두 죽게 되었으니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겠습니까?
이 점에서 에스더서는 우리의 전도에 많은 암시를 줍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이 없이 하나님을 전하고 기도라는 말이 없이 기도의 힘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면 이렇게 좋습니다’ 하는 것을 보여주어 사람의 마음을 끌게 하는 것, 효과적인 전도입니다.
연극이 끝난 다음에 모두 박수를 치며 치하를 하는데 그 외교관은 프랭클린에게 ‘저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구했습니까? 나는 이렇게 재미있는 것은 처음 봅니다’라고 했습니다.
프랭클린은 ‘이 이야기는 바로 당신이 며칠 전에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다고 한 성경에 있는 이야기이니 성경이 재미없다는 편견은 버리고 앞으로 성경을 열심히 읽기 바랍니다’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에스더서의 모든 사건들은 ‘유다인의 구원’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일어나고 진행됩니다
에스더서를 ‘구약성경의 로마서 8장 28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성경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에스더서의 여러 가지 사건들은 합력하여 ‘유다 민족의 구원’이라는 선을 이루었습니다.
역사가들에게는 ‘사관’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를 어떤 눈으로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사관에 따라 역사의 기술이 달라지고 강조하는 것도 달라집니다.
어떤 젊은 크리스천 역사가가 ‘나는 모자이크 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여러분, 모자이크가 무엇인지 잘 아시지요? 돌이나 나무, 유리 조각들을 붙여 나갑니다. 처음에는 무슨 장난 같습니다. 그러나 완성된 다음에 보면 아름답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무슨 형태가 드러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 하나 모아놓고 보면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섭리’ 이런 것이 은은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역사가는 이것을 깨닫고 모자이크 사관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매우 섬세합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계획한 일을 이루기 위해 잠이 안오게 하는 수도 있습니다.
왕의 내시 둘이 왕을 암살하는 음모를 꾸밉니다. 이것을 모르드개가 알고 에스더를 통해 왕에게 알립니다. 이 일이 왕실일지에 기록됩니다.
어느 날 왕이 잠이 오지 않아 왕실일지를 읽게 하다가 이 일을 알고 신하들에게 ‘모르드개에게 무슨 상과 벼슬을 주었느냐?’ 묻습니다.
신하들이 ‘아무 것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대답했는데 마침 하만이 들어왔습니다. 왕은 하만을 불러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고 왕관을 씌우고 왕이 타는 말에 태우고 하만은 그 앞에서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외치게 합니다.
이 일로 왕이 모르드개를 기억하게 되었고, 하만이 그렇게 충직한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알고 하만이 흉칙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그가 꾸민 유다인 몰살의 음모가 얼마나 나쁜 음모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8장 2절을 보면 왕은 하만에게 주었던 반지를 거둬 모르드개에게 주었습니다. 반지는 조서 에 찍는 것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직인입니다.
모르드개를 신뢰하고 전권을 모르드개에게 위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그 날 왕의 잠이 오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겪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필요해서, 여러분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그 일을 겪게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인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유다인들은 이 부림절에 큰 잔치를 베풉니다. 22절 뒷부분을 보세요.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그리고 에스더서는 부림절이 일시적인 축제가 아니고 후손들이 계속해서 지켜야 하는 절기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믿음의 후손인 우리도 오늘 부림절의 의미와 교훈을 새롭게 발견해야 합니다.
기도는 뜨겁게, 적극적으로 하고, 기도하고서는 믿고 나가 응답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소망 가운데 살아 변화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이 변하여 즐거움으로 변하기 바랍니다.
특별히 교회가 새로워져 교회의 위상이 변하게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인도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기를 바랍니다.
부림절은 한마디로 하면 승리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승리, 유다인의 승리, 믿음의 승리, 승리의 날입니다.
부림절의 의미와 교훈을 잘 깨닫고 오늘 믿음으로, 기도로, 소망으로 승리를 거두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