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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1: 13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 골 1: 14 그 아들 안에서
골 1: 13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
본 절은 앞 절에서 말한 '성도의 기업'이 어떠한 것인가를 밝히 말한다.
1]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여기서 우리는 말로만이 아니고 마음으로 믿어 순종의 행실로 나타내는 성도들을 말한다.
* 고후 4: 4 -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엡 2: 2 에 보면, 공중에 권세 잡은 자는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
* 요일 5: 19 -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죄와 죽음과 사탄은 마치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고 탄압하던 애굽의 바로 왕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
'흑암의 권세'는 앞 절의 '빛 가운데서'와 대조된다. 이러한 대조는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에 나오고 쿰란의 문서들에서도 발견되는 개념이다.
바울이 여기서 그들의 개념을 빌어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악한 세력'으로 상징되는 '흑암'과 '선한 세력'으로 상징되는 '빛'의 대조는 보편적인 인간 세계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흑암의 권세'는 일찍이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 직전에 체포되셨을 때 예수를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대해 언급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 눅 22: 53 -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그 세력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성도들을 탄압하고 오도하는 인간들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그들의 배후에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비가시적인 사단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권세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허용적 예정(許容的豫定) 밑에서 잠간 동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 마 4: 16 -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 눅 22: 53 -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 행 26: 18 -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 롬 13: 11-12 -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 엡 2: 1-3 -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헬, 세대)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엡 5: 8 -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엡 6: 12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흑암의 권세는 세상에 대해 악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탄의 파괴적인 힘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같은 사탄의 권세는 빛되신 그리스도의 권세로 말미암아 무력화되었다.
따라서 빛의 자녀 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
이것은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내심을 가리키는바, '흑암'은 비진리, 죄악, 사망을 상징한다.
2]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사랑의 아들'이란 말은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일 수도 있다.
* 마 3: 17 -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마 12: 18 - 보라(사 42:1 이하)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 마 17: 5 -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혹은 그가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보내신 아들이란 말일 수도 있다.
* 요일 4: 8, 16 -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라이트푸트는 이 둘째 해석을 지지한다.
'나라'(*, 바실레이안)는 종말론적이고 영토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골로새 교인들의 마음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 요 3: 3-5 -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2)거듭나지(혹 위에서)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장차 기업으로 받을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전혀 배제할 수도 없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이며 반드시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미래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미 현재에 도래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나라는 지금 성도들의 마음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Vaughan).
'그의 사랑의 아들의'(투 휘우 테스 아가페스 아우투)라는 말은 '그의 사랑의 표시로 주신 아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 요 3: 16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일 4: 9-10 -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롬 5: 8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나라'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심을 나타낸다.
다니엘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로마 나라 때에 초자연적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을 예언 하셨다.
그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 되었다.
예수님은 천국의 가까움을 선포하셨다.
* 마 4: 17 -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또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게 이미 제자들 가운데 임하셨음을 말씀하셨다.
* 눅 17: 20-21 -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참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 2: 9에서 성도들을 '거룩한 나라'라고 불렀다.
'옮기셨으니'는 한 나라의 정부에서 그 백성을 다른 지방으로 이민(移民)시킴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죄악과 사망의 세계에서 의(義)와 생명의 세계로 옮겨 놓으신 것이다.
동(東)이 서(西)에서 먼 것 같이. 우리가 내세(來世)에 있을 곳은 죄악과 사망에서 먼 곳이다.
'건져내사'라는 말(에루사토)과 '옮기셨으니'라는 말(메테스테센)은 단순과거시제로서 그 사실이 단번에 성취된 과거의 사실임을 나타내고 있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저내사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에 단번에 이루어졌고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구원이나 중생은 거듭되는 반복이 아니다. 예수님은 진실히 믿는 자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다.
* 요 5: 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혹, 정죄)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골 1: 14 그 아들 안에서 -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흑암의 권세에서 곧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은 그의 아들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우리의 죄 사함으로써 이다.
속량이라는 말은 죄값을 지불하고 속박에서 해방시켰다는 개념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죄책과 형벌로부터 해방 시키셨다.
복음은 사함의 길을 제시하는 소식이다.
1] 그 아들 안에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자이심을 말한다.
2]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속량'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뤼트로신'(*)은 '값을 지불하고 어떤 대상을 획득하는 것'(매수(買收)하여 구출(救出)함)을 의미한다.
남의 종 된 자를 자유자(自由者)로 복권(復權)시키시려고 그 주인에게 죄의 종 된 인간들을 해방시키기기 위한 목적이다.
* 요 8: 34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저희의 죄 값을 지불하셨다.
* 마 20: 28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막 10: 45 -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롬 3: 24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엡 1: 7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 딤전 2: 6 -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 히 9: 15 -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벧전 1: 19 -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따라서 그들의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영벌(永罰)에서 영생(永生)으로 구출되었다.(Warfield, Biblical Doctrines, pp. 370,372).
이것은 하나님께서 흑암의 권세에 매여 종노릇하던 우리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취하였음을 말해준다.
* 롬 3: 24-25 -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엡 1: 7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 히 9: 14-15 -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贖)하신 그 값이 얼마나 고가(高價)인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베드로의 증거에 의하면, 이 속죄는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벧전 1: 18-19)이다.
이 속죄의 효과는 '단번에 자기를' 영원한 제물로 드리신 데서 나온 것이다.
* 히 7: 27 -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따라서 성도의 구원은 그 만큼 영원하고 또 안전한 것이다.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얻는 사죄(赦罪)는 성도가 받을 모든 은혜와 복의 기본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대가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못 박혀 죽으셨으므로 우리의 죄는 사해지고 성령님은 강림하셨다.
사죄된 일이 없었다면 우리의 죄는 사해지고 성령님께서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 요 16: 8-11 -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행 13: 38 -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 행 26: 18 -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을 통하여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 성도는 우리의 구원을 확인하여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었는가? 우리는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한 자들이 되었는가?
우리는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나라로 옮겼는가? 우리는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는가?
둘째, 우리가 확실한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오직 믿음과 순종의 생활을 힘써야 한다.
믿음이 참 생명의 길이요 순종은 믿음의 증거임을 실천하여야 한다.
믿고 순종하는 것이 빛의 생활이며 구원을 받은 자다운 생활이요, 성도다운 생활이요, 천국 백성다운 생활이다.
셋째, 성도들은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흑암의 권세에서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이다. 이것은 감사와 찬송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며 영원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