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1] 왕도정치 / [2] 산림과 사림 / [3] 사대주의
[4] 조공 / [5] 조계지, 조차지
[1] 왕도정치
[질문] 이빛나 wrote: 국사 공부를 하던중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조선시대의 사림파는 도덕과 의리를 중심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하였다고 합니다. 왕도 정치라는 것은 민생 안정과 인간다운 삶 성취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왜 왕도정치를 하였는데..국력이 약화된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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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 국사편찬위 자료정보실 김용곤, 2001/04/24 (17:21)
16세기 조선왕조사회는 그동안 조선건국을 주도하여 정권을 독점해왔던 훈구세력의 양반지배체제가 여러 모순을 야기하였다. 과전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심화, 군역제도의 붕괴 등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국가재정은 고갈되었고 일반 민의 사회 경제적 처지는 열악해져 심지어 향촌에서 유리되어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사회와 국가가 불안한 상태였는데 이러한 불안한 상태를 지배층의 도덕에 근거한 왕도정치를 통해서 향촌의 안정과 국력의 신장을 도모한 것이 사림파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학생도 알다시피 사림파의 왕도정치 추진은 기존 훈구세력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여러 차례에 걸친 사화를 당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지배층의 갈등으로 국력은 더욱 소진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산림과 사림의 차이?
▲ 서민수 wrote: 사림의 거두는 김종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림의 시초는 정인홍이라고 알고있습니다. 사림과 산림은 둘다 명분을 중시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둘의 차이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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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작성자 : 자료정보실 김용곤 2001/04/06 (19:37)
조선초기에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을 가리켜 사류, 사족이라고 지칭하던 것이 16세기에 들어와 사림이란 용어로 불리어진 것은 그간 교육제도의 발달로 지배신분층의 저변인 재지중소지주층의 지식인화가 촉진된 결과였다.
사림은 현직의 관인보다 재야의 지식인들을 앞세우는 표현으로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에 나갔다가 퇴직한 부류도 포함되나, 소과 합격자인 생원과 진사의 비중이 컸다. 이들은 관학인 4부학당이나 향교보다도 사학인 서재나 서원에서 교육받았다. 소학과 대학은 성리학의 목표인 수기치인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시한 교과서였으며,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여러 노력은 이른바 사화라고하는 훈신과 척신들의 계속된 반발을 받았다.
산림이라는 용어는 16세기말 정인홍 등이 정치와 긴밀한 연결을 가지면서 하나의 역사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다. 과거를 거친 관료보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향촌에 은둔해 있던 학자가 더 존중되는 분위기가 조선후기에 형성된데는 사화를 거치면서 벼슬길에 매력을 잃고 향촌에서 학문에 몰두한 일부 사림들의 성향 변화가 큰 영향을 주었다.
유교사회의 상징적 존재로서의 산림은 특히 17세기에 큰 역할을 하였는데 당시의 대표적인 산림으로는 김장생, 장현광,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유림을 대표하면서 국왕에게는 정국의 안정과 유지를 위한 명분과 실리를 제공하였다.
[3] 사대주의와 사대정책의 차이점
☞ 국사편찬위원회 국사묻고답하기에서-
-"사대(事大)"란 외교 정책의 하나이다. "사대주의"란 "사대"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생긴 비하적인 표현일 뿐이다. 이것은 고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약소국들이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개발하고 발전시킨 정책이며 이론이다. "사대"의 개념이나 정신은 <<춘추(春秋)>>와 <<맹자(孟子)>> 같은 유교 경전에 그 긍정적인 면이 잘 기록되어 있어 전통시대의 유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었다.
<<맹자>>에 의하면 사대란 바로 약소국들이 강대국과 정면 대결하는 대신 일정한 예의를 갖추어 외교를 잘 함으로서 전쟁을 피하고 종묘사직을 보존하며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정책이다. 이른바 "이소사대(以小事大: 소국이 대국을 섬김)"라는 것이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이대사소("以大事小: 대국이 소국을 섬김)"라고 한다.
맹자는 "어진 통치자는 이대사소의 정책을 펴고 지혜 있는 통치자는 이소사대의 정책을 편다"고 하였다. 즉 "사소" 정책은 어진 외교정책이며, "사대" 정책이란 현명한 외교정책이라는 뜻이다. 예의를 갖추어 외교를 함으로서 전쟁을 예방하고 나라와 백성을 보존할 수 있으니까요. 또 그렇게 해야 국제 평화가 유지된다고 보았다.
맹자는 군대를 양성하고 군비를 확충하여 전쟁을 잘하는 일을 가장 혐오하였다. 그는 전쟁을 모든 죄악의 집합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맹자는 "<<춘추>> 기록 된 그 많은 전쟁들 중에서 정의로운 전쟁은 단 하나도 없었다"고 논평했다. 그래서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사대" 외교를 강조하였다. 또한 강대국이 약소국을 존중하는 "사소" 정책을 높이 평가하였다.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 이래 사대정책을 외교의 기본으로 하였다. 결국 여기에 충실하였던 신라는 살아남았지만, 무력으로 강대국에 대항하였던 고구려는 그 정신은 좋았지만 끝내 멸망했다. 어느 쪽이 더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고려는 문화국가였던 송(宋)에 대하여는 사대 정책을 폈지만, 거란 몽고 여진 등의 오랑캐 국가에는 무력으로 정면 대결하였다가 혹독한 피해를 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500여년 동안 완벽하게 사대 외교를 하여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원칙과 명분에 집착하여 사대를 포기함으로서 왜란과 호란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사대"가 전쟁을 예방하는데는 좋은 것이지만 무턱대고 명분과 원칙을 버리고 사대를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사대가 좋은 외교정책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해서라도 정의와 자유를 지켜야 하는 것이지요.
"사대"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비굴한 정책이 아니다. 국제 평화와 민족의 안보와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존하기 위한 현명한 외교정책의 일종이다. 강대국과 약소국은 어차피 평등할 수 없다. 강대국의 주도하는 국제정세 하에서 적절히 평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현실세계의 지혜이다. 그러나 강대국이 너무나 불의하고 무도한 요구를 계속할 때는 사생결단 정의를 위해 전쟁이라도 해야지요. 바로 맹자(孟子)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다. 유교 경전의 가르침이 꾀 타당하지요? ●
[4] 조공에 대해
◇ 작성자 : 국편연구편찬실 신명호
과거 동양의 외교질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관계, 또는 책봉관계였습니다. 지금과 같이 모두 대등한 주권을 가진 국가간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즉 중국은 천자국이 되고 그 이외 주변 국들은 천자의 책봉을 받는 제후국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 중국은 주변국들과 모두 이런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관계를 유지 한 것이 아니지요. 천자의 책봉을 받는 제후국은 정기적으로 중국에 조회하고 그 선물로서 조공을 받쳤습니다.
과거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편입된 모든 나라들은 이같은 국제관계를 갖었기 때문에 현재 이런 외교관계를 중국적 세계질서라 합니다. 중국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정립하지 못한 이유는 왜일까요? 사대주의 때문일까요?
과거 중국은 동양문명의 중심지로서, 문화, 경제, 국방 모든 면에서 사실 최고의 선진국이었습니다. 주변의 여러 나라들은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중국적 세계 질서에 참여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하겠습니다. 동양의 중국적 세계질서는 19세기 이후 서구의 동양침탈에 의해 이른바 근대적 외교관계, 국제관계로 재편되었습니다. 2001/04/02
[6] 조차지와 조계지의 차이는?
▲ 조계 : 19세기 후반 중국의 개항도시에 있었던 외국인 거주 지역으로 외국의 행정, 경찰권이 행사되었음.
▲ 조차 : 법률용어로 특별한 합의에 의해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영토의 일부를 빌려 일정 기간 동안 통치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