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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간 문학세계 원문보기 글쓴이: (주)천우미디어그룹
선우미애의 다므기 여행(13회)
*다므기: ‘더불어, 함께’의 옛말
선우미애
월간『한맥문학』등단. 중앙일보시조백일장, 금호문화시조백일장, 신사임당주부백일장, 새한국문학상, 동포문학상, 국제펜문학 강원펜문학번역작품상, 춘천여성문학상, 노천명문학상 수상. 춘천여성문학회 사무국장, 강원한국수필문학회·국제펜클럽 강원지부 이사. 강원문인협회, 춘천문인협회, 춘천여성문학회, 강원여성문학회, 국제펜클럽 강원지부, 강원한국수필문학회 회원. 춘천여성문학회·강원한국 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역임. 시집『자연을 닮은 그대는』『섬 같은 사람』『까닭 없이 그대가 그리운 날에는』『산다는 것은』(전자 출판) 『봉선화 소녀』 anotherworld123@hanmail.net
인생은 여행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뭉클뭉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때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주르륵 눈물처럼 남아 있는 여행도 있고, 때로는 인생의 그 어디쯤에서 머물러 미소처럼 떠오르는 환희를 느끼기도 한다. 또한, 진정으로 남의 입장이 되어 보기도 하는 시간들도 온다. 그래서 나는 낯선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한다. 일상에서 떠나 낯선 곳으로부터 오는 적당한 객창감을 즐기는 것 또한 여행의 매력이다.
여행도 병이라 했던가? 그러나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걷지도 못하고 여행을 하기에 힘에 부치지 못할 때가 있나니, 권력이 있거나 없거나 돈이 많거나 없거나 그 누구에게도 올 것이고 보면, 몸이 허락하는 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또 하나의 큰 행운이다.
여행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느끼게 하고 자연스럽게 감동을 주고 잃어가는 마음을 찾아가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늘 여행을 꿈꾸고, 또 다른 곳을 향해 떠나는 일을 상상하며 살아간다.
봄빛이 창살 가득 들어오는 기분이다. 잠깐의 시간들이지만 내가 여행한 곳들을 순서대로 실을 계획이다. 저절로 오는 계절처럼 자연스럽게 여행지를 소개하며 그 마음 따라 함께 공유하고픈 마음에서이다.
생이 짧다는데 그 안에 있는 여행은 또한 얼마나 짧은 것이겠는가? 그 속의 일부를 보고서는 전체를 바라보고 온 듯 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운 마음이다. 단지, 우리는 산을 다 보지 않고도 산을 이야기할 수 있듯이 여행을 인생에 넣어 삶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인생 또한 여행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여행
―여행 속에서 본 친정아버지
길을 따라 그냥 걷는 게 인생이라 하던가? 봄이 피어나는 길목에서 강둑길을 걸었다. 인생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이 점점 깊어져 간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데 친정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결혼을 한 언니가 형부와 함께 시부모님을 모시고 베트남 여행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래전부터 홀로 팔순을 훌쩍 넘기신 친정아버지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언니의 여행길에 친정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동행했다.
그렇게 시작된 베트남 여행은 4박 5일의 일정으로 하늘을 날았다. 내가 어릴 적부터 여행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몸이 약했던 나를 차에 태우고 이곳저곳 시골길을 데리고 다니셨다. 그래서 지금 나는 여행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볼 때가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어느새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아버지와 나의 입장이 바뀌어 이제는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다녀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어쩌면 까마득하게 높았던 아버지라는 존재는 삶의 손끝에 닿는 무지개 같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아버지를 모시고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점심때가 다 되어서였다. 언니 가족의 도착 시간을 기다리는 시간에 공항 내 식당으로 갔다. ‘언제 또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멋지고 품격이 있는 식당으로 찾아들어갔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는 아버지의 바둑 무늬 주름진 모습이 유난히 깊고 두드러져 보였다. 그렇게 아버지 바라보기를 하다 보니 깊은 곳에서부터 찡한 울렁임이 촉촉하게 눈을 젖게 했다.
드디어 언니의 가족도 공항에 도착하게 되었고, 우리는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평소에 생생한 역사 속의 증언을 즐겨하시는 아버지는 베트남에 대한 이야기에 하실 말씀이 많으신가 보다. 그 숱한 세월을 지켜 오신 아버지의 목마름은 얼마나 갈증이 나셨던 것일까? 오래도록 잊지 못할 만큼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꺼내놓으시는 걸 보면서 그래도 아버지의 말씀에 손사래를 치고 싶지 않다. 소풍만 가도 밤잠을 설치는데, 여권을 들고 처음으로 출국하시는 아버지의 흥분 섞인 표정이 신선했다. 여행은 삶의 거대한 은유라는 말이 절로 실감이 났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5시간 반을 비행하여 베트남에 도착했다. 연로하신 어른들과 함께하는 해외여행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마음이 쓰였다. 음식은 입에 맞으시는지,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으신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어른들께서도 우리의 마음을 아셨던 탓인지 먼저 배려해주시고, 우리가 신경 쓰는 일이 없도록 애쓰시는 모습을 보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아침 일정으로 관광을 안내하기 위한 가이드가 호텔 로비에 대기하고 있었다. 날씨는 쾌청한 하늘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의 일기는 하루에도 수시로 바뀐다하니 그것도 맘 놓을 일은 아니었다.
베트남의 첫 여행지 하롱베이로 갔다. 하롱베이는 바다에 떠 있는 계림으로 칭송받는 3천 개의 아름다운 섬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적인 관광지라며, 가이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을 해주었다. 그런 섬들을 유람선을 타고 즐겼다. 무수한 섬들 탓인지 바다에는 파도가 없었다. 고요한 풍경이 마치 아름다운 호수 같았다. 배를 타고 유람을 하며 멋진 풍광이 있는 곳에서는 쉬어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시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친정 언니와 형부는 시부모님을 위한 마음을 아끼지 않았다. 언제나 부모님께 정성을 다하는 언니의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언니의 시부모님들 역시 며느리를 사랑하시는 눈빛이 마음의 작용을 충분히 담고 계셨다. 고부간의 관계도 가꾸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서로 아껴주고 배려하시는 마음들이 아름다웠다.
친정아버지는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 드셨다. 그리고 이곳저곳 사진을 찍으시며 여행의 소소한 감정들을 사진에 담으셨다. 눈으로만 풍경을 담으시기가 아까우셨던 모양이셨다. 함께 같은 방향을 하며 바라다볼 수 있는 아내 없이 살아오신 세월, 한쪽으로는 얼마나 외로우실까? 별 하나 어둠 짙은 하늘에 박아놓으시고 보내는 세월 동안 아버지의 옆구리는 얼마나 시리셨을까? 하노이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처럼 인생무상을 느끼셨을 날은 얼마나 많으셨을까? 엄마가 돌아가셨을 그 나이에 나 또한 가까이오니 애잔한 마음과 그리움이 헛헛한 허공을 씨줄과 날줄 긋듯이 교차된다. 친정엄마가 하나님 곁으로 편히 가실 수 있도록 나는 엄마의 손을 놓아드렸었다. 그런 날이 얼추 20년이나 되었다.
선상에는 싱싱한 회와 해산물을 팔았다. 여행을 하는 즐거움 중의 하나로 먹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 가족은 회와 바닷가재, 그리고 해산물을 골고루 골라놓고 선상에서의 뷔페를 즐겼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식상한 말이 아니더라도 여행을 하며 먹는 음식은 그때마다 즐거움을 준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랐다. 건강한 모습으로 여행을 즐기시는 부모님들의 표정은 잠시 삶의 짐을 내려놓고 여행을 즐기고 계셨다. 음식을 드시는 것도 걸음을 걸으시는 것도 관광하는 일행의 속도에 맞게 따라주셨다. 언니의 시부모님 역시 눈을 마주칠 때마다 늘 반갑게 웃어주셨다. 시골의 흙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이지만, 그분들은 겸손함과 따뜻함으로 사물을 바라보시는 사랑을 가지신 분들이셨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여행을 통해서 서로 간의 정을 두툼하게 쌓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하노이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모든 새로움에 경이로움과 호기심이 많으신 아버지는 궁금하신 것도 많은 천진한 아이 같았다. 어느 곳에 가시든지 소박한 감동을 즐기셨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리듬을 타기에 딱 좋은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아버지에게 몸으로 부딪치는 흥이 나오기 시작하셨던 모양이다.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셨다. 나도 따라 춤을 추며 돌았다. 살아 숨 쉬는 아버지의 정이 리듬을 타고 어둠 속으로 번져갔다. 이런 아버지 세월의 나이가 벌써 팔십을 훨씬 넘기셨다. 오랫동안 공직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의 벽은 감히 내가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었다. 어쩌면 내 기억 저 밑에 아버지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남자였다.
다음 날, 가까운 곳에 있는 베트남 시장에 나갔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이며 과일이 즐비해 있다. 부채를 만들어 파는 사람과 고깔 형태의 베트남 모자(농)와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는 시간 또한 재미있었다. 가이드가 얘기해준 시장에서 물건 값을 깎는 법을 써먹으려고 하셨던 아버지께서 어디선가 부채를 잔뜩 사오셨다. 장사를 하는 아이가 부르는 가격에 반이나 뚝 잘라 깎으셨다고 아주 흐뭇하신 모습이셨지만, 사실 알고 보니 바가지를 쓰셨음에도 모르시고 그저 부르는 가격에 반을 잘라 사셨음을 기뻐하셨다. 그렇다! 세상사 모르는 게 약이 되는 것이다.
호치민의 생가를 향하여 갔다.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렸다. 호치민 생가는 특유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있다. 내부에는 호치민이 당시에 검소하게 살았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호치민의 소원은 민족 통일이었는데 1969년 79세의 나이에 죽었다. 그는 평생 베트남을 위해 살다가 죽은 인물이다. 그는 최고의 신분이었는데도 농민복을 입었고, 1식 3찬을 했다고 했다. 그가 죽은 후 6년 후, 베트남은 통일되었다고 했다. 여행 가이드는 좀 더 재미있게 열심히 설명을 빼놓지 않으려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나에게 설명을 덧붙여 주셨다. 호치민은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화장한 뒤, 베트남 북부와 남부, 중부에 뿌려달라고 했다지만 그의 시신은 지금도 썩지 못한 채 미이라가 되어 남아 있다. 사람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자연의 이치가 아니던가! 한편으로는 민족의 영웅인 그가 부러워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분명 함께했다.
베트남 호치민과 하롱베이의 땅값은 두 배 차이가 날 정도였다. 호치민은 한국의 아파트 시세와 다르지 않게 비쌌다. 부와 가난의 차이가 심했다. 베트남은 커피 생산국 2위에 선 나라이다. 베트남의 커피 맛을 볼 기회는 얼마든지 자주 있다. 상가가 줄지어선 길거리에서도 큰 솥에다 커피를 보글보글 끓이는 모습도 몰 수 있다. 코를 타고 들어오는 진한 커피향이 베트남의 향취를 전하는 매력이 있었다.
하노이의 바딘 광장에 갔다. 바딘의 ‘바’는 베트남어로 부인을 의미하고 ‘딘’은 사람 이름이다. 바딘은 베트남을 위해서 평생을 산 여인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무릎을 꿇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딘부인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이름 모를 꽃나무들이 갖가지 아름다운 모양으로 피어나 있는 이곳에도 죽이지 않으면 죽고 마는 전쟁의 공포가 있었다.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전쟁이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이데올로기를 위한 전쟁을 치렀던 것이었을까? 당시 베트남은 불교 국가이라 할 정도로 불교인이 많았다. 하지만 가톨릭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정권의 중심부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극한 탄압정책이 베트남 국민들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리가 없었다. 가톨릭 지주 세력의 비리와 횡포는 결국 베트남의 승려 틱광둑의 분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소식이 세계로 알려지면서 그 파장은 커져만 갔다. 그렇게 민심이 정부로부터 멀어져 가기 시작했던 베트남 전쟁의 역사를 더듬으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했다. 민심이 흔들리는 국가의 결말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민심이 천심이라 했다. 저마다 힘자랑을 하고 있는 정치권의 계산법은 정녕 나라를 위하는 것인가?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상의 삶으로 돌아와 보니 할 일도 많고 다양한 문제들과 맞서야 하는 일들이 늘어져 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며칠 동안의 여행을 하며 쉽게 버릴 수 없었던 무거운 몸과 마음을 비우고 왔으니 한결 가벼워졌다. 여행은 우리가 삶에서 필요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아버지가 내게 주셨던 그 사랑처럼….
아버지의 강(江)
아버지도 우시는가 보다
소리 내어 울지 않을 뿐
깊은 골
가슴팍 그 깊은 골에서
온몸으로 그렇게 우시는가 보다
삼천 겁
역풍의 세월을 딛고
옹이 박힌 가슴 짓이기는 소리를
가슴 치며 흐느끼는
아버지의 속울음 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나 보다
삼백예순 날
검고 두툼한 손바닥이
마른나무 껍질처럼 갈라지시었어도
가장으로서
가난한 세월을 홀로 겪은 아버지는
당신께서 갖고 계신 가장 좋은 것으로
당신께서 갖고 계신 가장 고운 것으로
말없이 자식에게 전해주시던
아버지의 마음을
그 어느 자식 하나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나 보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천근 무게의 짐을 어깨에 들쳐 메고
축 처진 허리 굽은 저녁 강이 되어
침묵으로 묵은 세월 지켜 오시다
이제는 온몸에 흰서리가 되시었어도
이제는 당신의 이름조차 가물가물 잊으시어도
여전히 헤아릴 수 없는 자식 걱정에
가슴으로 깊이 흐르는
강물 같은 울음을 우시는가 보다
아버지도 우시는가 보다
소리 내어 울지 않을 뿐
소리 내어 울지 않을 뿐
첫댓글 좋아요. 멋진 곳 다녀오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