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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철2 (觀徹)
[명사] 사물을 속속들이 꿰뚫어 봄.
관철되다 (貫徹--) [관ː철되다]
[동사] 어려움에도 꺾이지 않고 목적이 기어이 이루어지다.
관철하다1 (貫徹--) [관ː철하다]
[동사] 어려움을 뚫고 나아가 목적을 기어이 이루다.
관철하다2 (觀徹--) [관철하다]
[동사] 사물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다.
그것 외에 다른 것들은 모두 우연입니다. 아니 모든 게 다 우연입니다. 필요에 의해서
그 중에 내 필요에 의해서만 필연을 봅니다. 즉, 일관서을 찾고 패턴을 찾고 이유와 논리를
만들어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구현합니다. 이러면 원래 모든게 필연인데 나에게 필요한 필연만
보고 못 보거나 안 본 건 우연이라고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이 우연이냐 필연이냐고 묻는다면 세상이 우연도 필연도 아닙닏. 그건 우리 인간이 나누는 관점일
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설명하는건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이 필연이다. 또는 우연이다. 라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같은 사건을 가지고 우연으로도
볼 수 있고 필연으로도 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나느 것입니다.
한두 가지의 관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유연성 없음은 자천에 방해됩니다. 내가 나를 넘어 남과 세상에 나아가
려면 나를 바꾸고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관념과 신념도 바꿀 수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홍익을 위한다면서 자기주장만 한다면 이미 편협입니다.
편협 (偏狹/褊狹) [편협]
[명사]
1. 한쪽으로 치우쳐 도량이 좁고 너그럽지 못함.
2. 땅 따위가 좁음.
편협하다 (偏狹--/褊狹--) [편혀파다]
[형용사]
1. 한쪽으로 치우쳐 도량이 좁고 너그럽지 못하다.
2. 땅 따위가 좁다.
[유의어] 작다1, 좁다1
옳기 때문이 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무조건옳은 것은 없습니다.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다르게해야 하는 임의성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요? 홍익이 목적이지 자기주장이 목적이 아니기도 하지 않나요?
이 세사이 어떤 섭리와 이치로 굴러가는 듯하게 보인다면 그건 나보다 더 큰 범위에서 필연을
원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지구가 수십억년을 내구성을 가지며 살아간다면 그건 그런 필연을 만든 누군가의 의도겠지요.
그래서 필연은 내가 원하는 소망이 됩니다.
소망에 따라 이루어지길 바라는 견지함입니다. 즉 과거를 필연으로만드는 능력을
배워야 하고 또 미래를 그것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능력도 갖추어야 합니다. 정기신으로 말하면 정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 신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며 기의 우연적인 마주침 속에서 자유롭기도 합니다.
이런 정기신의 필연은 환명에 있고 환명은 원천에서 나옵니다.
경험한 것의 원인을 찾고 의미를 알아내면서 자기의 정을 축적해 가고 앞으로의
계획과 해야 할 일을 고려하면서 장래를 가늠하는 신의 안목을 가지며 현재에 사는, 삶의 순간은 새롭게
다가오는 신선함으로 보는기입니다. 하지만 이건 우연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하려고
노력하는것이기도 합니다. 우연이라서 필연이 되길 바라는 발버둥 일지도요.
세상은 무화되어 가고 혼돈되어 갑니다.
무화 (武火) [무ː화]
[명사] 활활 세게 타는 불.
그 무화되고 혼돈함 속에서 스스로를 버티려는 삶의 의지가 나입니다.
다만 언제가 무화되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려는 것이지만, 난 이것마저도 넘고 싶습니다.
그래서 진과 나 사이에서, 무화되는 것과 내가 되려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고
판단하고 의도를 가지며 삽니다. 하지만
남들이 우연이라고 하면 난 필연이라고 말하고 필연이라고 말하면 난 우연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건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말하면 연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감정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어떤 단어를 말할 때 그 단어의 정확한 뜻을 말하려고 하는 것보다 그 단어를 이용해 자기의 처한
상황을 어떻게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법으로 유도 할까를 생각하며 말합니다.
즉 언어를 말하지만 언어 외의 것을 바랍니다. 그때 얻으려는 이익이 꼭 돈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구너력이나 명예의 시선집중이나 주도권이나 잘난 척이나 상황모면이나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그 의도가 내가 봐서 상대의 성장에 도움이 안 되는 거거나 구태의연함이 있거나 상식적인
잡담으로 하는 거거나 응석이거나 하면 난 대답을 회피합니다.
구태의연하다 (舊態依然--) [구ː태의연하다]
[형용사] 조금도 변하거나 발전한 데 없이 예전 모습 그대로이다. ‘여전하다’로 순화.
구태의연 (舊態依然)
‘구태의연하다(조금도 변하거나 발전한 데 없이 예전 모습 그대로이다)’의 어근
필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우연과 필연에 대한 생각에 별로 깊은 관심은 없습니다.
따지고 대화하면 다들 자기의견을 전개하고 주장하지만 난 그런 말로 하는
주장은 별로 관심 없습니다. 다른 삶의 여러 행동과 관념들과 접하는 사건과 상황에서 그 주장을 일관성
있게 행동하는지 그걸 봅니다.
내가 생각하는 일관성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들이 있고 그런 것에 맞는지 보며 사람은 말도 하고,
행동도 하고, 말에도 다양한 주제가 있고, 행도도 다양한 원인으로 하고, 또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사건들을 만나는데, 그런 너무도 많은 것에서 일관적인 의미를 획득했는지를 봅니다.
단순히 말도 보고 행동도 보는 게 아니라 그 과정과 세세한 의미와 결과들을 봅니다. 얼마나 깊이 얼마나 신중히
얼마나 정확히 얼마나 세세히 어느 가치기준에서 어떤 의미체계로서 보는지 그건 내 능력입니다.
난 생각보다 머리가 나쁘거나 이해력이 안좋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말을 할 때 어떤 문맥에서 말하는지 항상 헷갈립니다. 그래서 한참이 걸려야 무슨
말인지 대강 알겠고 그것을 알려고 집중을 지나치게 해서 체력소모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즉, 말 이면의 말하는 사람의 감정적인 혹은 생각해 오는 과정의 문맥을 이해해야 어떤 의도로서
말하는지 이해가 갑니다. 아마 사고유형이나 체계인데 그러한 내적인 형태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원론적이거나 가벼운 대화가 됩니다. 이럴 때 난 항상 좋게 말해
무심히 있었고 딴 생각 중이었고 멍 때리고 있었습니다. 외부로 방출하며 주위 것에 관심 가지기보다
마음이 항상 내면을 향하고 무의미함과 무화, 진의 세계로 바져 들어가고 있으며
약간의 여분의 힘으로 혼자딴 생각을 합니다. 이럴 때 자주 어딘가 땅이나 뭔가를 지그시 응시하듯이 합니다.
즉 한곳을 뚫어져라 보거나 멍하니 봅니다. 이렇게 감정이 가라앉아 있는데 대화를 요청하면 난감합니다. 다시 감정을
끌어오는데 심히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게 위와 같은 말의 문맥 찾기가 헷갈리게 되는 원인도 됩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필연을 요구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있을 땐 우연적인 진으로 들어가 삽니다.
그런데 하루일과 중 우연으로 있는게 대부분이고 이게 근저에서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이 당혹스럽고
황당하고 왜 그래야 하는지 모릅니다. 항상 새로움이 있는 것이고 어제의 이유로 지금을 요구한다면 의아스럽습니다.
이제건 잊었는데, 잊은게 아나라 우연인데 왜 그래야 하는지의 필연이 어제로 유효기간이 끝났는데
다시 이어가려 하니 그러면 다시 나에게 필연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일이 지나가고 사건이 끝나면 필연도 끝났습니다. 다음에 같은것을 다시 한다고
다시 필연이 되지 않습니다. 원래의 우연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는 내 필연으로
살기보다 남의 필연으로 살게 됩니다.
남들은 자기가 요구하는 것을 당연시 합니다. 그게 필연이고 다들 그렇고, 그게
평소에 일상에서 하는 것이니 별다른 생각 없이 합니다. 하지만 나에겐 그게 너무 의아스럽고 당혹스럽습니다.
난 이미 다른 사람이고 우연 속에서 새롭게 살고 있었는데 용이 승천하다가 사람 때문에 덜어지는 것처럼
난 자유롭다가 외부의 요구에 의해필연의 구렁텅이로 떨어집니다. 이렇게 난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
새로워야 하고 창조해야 하며 해체해야 하고 자기를 성찰해야 하고 자기를
관찰해야 하고 자천해야 하고 도로서 살아야 하고
이런 게 진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진여이며 열반이고 득도가 되지만 오히려 자천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지식을
쌓아 관념을 늘리려고 하며 틀을 만들고 자신을 단련한다며 습관들이는 뭔가를 찾습니다. 하다못해 수련법의 익숙함을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얽매이게 하고 습관들이려고 한고 익숙해지려고 하고 고정된 불변적인 법칙을 바라고 확고한 신념을 바라는데 이건 자천에 대한 오해입니다.
자천은 진에 들어가고 열반하며 확장해 가는 것이며 순수해져 가는 것인데 왜 반대로 가려고 하는가요? 우연으로 가야 합니다. 필연은 본의를 위한 의도입니다.의도가 훌륭해야 하지만 그것을 진리는 아닙니다. 모든 근거는 의도하는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기대고 의지할 존재는 없습니다. 일념삼천이고 기이며 순간을 영원처럼 살아야 하고 가을
건넜으면 배를 버리고 고기를 잡았으면 투망을 잊는다고다들 알지만 글쎄
다들 가진 걸 말하고 행동하는 걸 봤어도, 버리고 해체시키고 새로워진 걸 말하고 행동하는건 못 보았는데
난 사람 만나면 이런 거부터 찾아 보는데 혹시 아나요?
기, 우린 기로 살아야 합니다. 항상 우연이라 다가오는 사물과 사람과 삶이, 가족이, 익숙한 모든 것들이
이상한 것ㅇ비니다. 왜 어제의 익숙함을 오늘도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는 걸까요?
우주는 필연인데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 무던한 애씀이 있습닏.자기필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봅니다. 불규칙함이나 불안정함도 필연입니다. 불규칙함의 일관성을 가지는 것도 노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연도 혼돈도 무화나 진도 그런 혼돈이 되기 위해, 진이 되기 위해
필연적인 노력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뭐가 더 근원적인 것이냐 하는 질문은 필요 없습니다.
난 항상 우연과 필연 속을 왔다 갔다 하며 사는 것이지 애초에
정해진 우연도 필연도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쓴ㄴ 이 글의 내용이 필연일지는
모릅니다. 그래도 쓴 글이고 만들어낸 필연이니 필연일 겁니다. 언제까지 그리고 얼마나 그리고 어떤 의미의
필연일지는 음.....
역시 시간적인 유호기간과 강도의 크기와 의미의 애로점이 있구나.
글이 일관성은 있나?없나?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겠지만 횡설수설로 가면 그건 용납되어야 하나 아니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