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범 교수의 이야기 가문사(家門史)(63)- 수촌공을 신원(伸寃)하다11
그러나 이 원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경종 (景宗)4년 재위 후에 영조(英祖)가 들어서게 되었는데 영조 14년(무오, 1738)에 상부 공의 아들 성운(星運; 수촌공의 손자) 공이 원정을 올렸다. 이 때 조정에서는 검토 후에 다음과 같은 회답(回答)이 내려왔다.
“처음 옥안을 다스린 때에 이미 갑,을(甲乙)의 논쟁이 있었고 또 선왕조의 명신, 석보(명석하게 보필하는 자)의 의논이 모두 빙거(憑據)할 만한 것이 많으니, 그 자손된 자의 원통함을 호소함이 진실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 세 임금의 조정을 거쳐 이미 50년 전의 일이오니, 그대로 버려 두는 것이 어떠하리이까? 했는데 하교하시기를, 아뢴대로 하라 하였다.”[i]
이러한 회답을 받은지 얼마 안됐지만 성운 공은 굴하지 않고 다시 영조 15년(기미, 1739) 에 격징과 함께 원정을 올렸다. 그러나 이 때 역시 긍정적인 답을 얻지 못하였다. 성운 공께서는 여기에 실망하여 거의 4년간을 침묵속에 계시다가 영조 19년(계해, 1743)에 세 번째의 원정을 올렸다. 그러나 여기서도 긍정적인 답을 얻지 못하였고 영조 때는 이후 약 30여년 간 다시 원정을 올리지도 못했다 (3차 원정 때 이미 성운 공은 연로해져서 신원운동에 나설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정조(正祖) 7년 (계묘, 1783) 1월 11일 임금께서 종묘의 춘향대제(春享大祭)를 지내려고 행차하실 때에 수촌공의 증손자 석명(錫溟: 星運공의 2자)공이 징을 쳐서 원정하였다. 임금께서는 바로 다음날 형조판서 엄숙(嚴璹)에게 형조의 초기(草記)에 의거하여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전교하였다.
이에 형조판서는 관련 기록이 의금부에 있으니 의금부에 넘겨 처리하게 하심이 가할 듯 하다고 아뢰었다. 이에 의금부가 상황을 정리하여 아뢰기를 “ 당초에 이 사건에는 갑을의 논란이 있었던 것이고 그러다 보니 후손들이 원통함을 주장하는 것에는 일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에도 그랬듯이 지금 와서 이것을 재론하여 번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했다.
다음날 정조 임금께서는 “사건의 전말을 모르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으니 경등은 문서를 찾아서 상고하고 의견을 갖추어 의논을 하나로 모아서 품처케 하라.” 했다.
[i] 동복오씨 문헌선양회(편), 『동복오씨 문헌록 1집』, 1983, 3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