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봉 시인을 보내며
「봄빛절벽」과 함께
신원철 시인*
지난겨울에 작고한 노혜봉 시인을 시와 함께 추억해 본다. 노시인은 누구보다 자신의 시에 철저한 분이었다. 작고한 다음 주변분들이 회고하는 그는 완벽주의자이면서 예술지상주의자였다. 같이 활동을 할 때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막상 가고 난 다음 빈자리는 새삼 크다. 그는 경기도 이천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인사동에서 있었던 동인 모임 때 지각하는 것을 보지를 못했다. 그리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전철 마지막 시간에 아쉽게 자리서 일어나는 모습을 늘 보고는 했다. 우리 동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의 시는 다음과 같다.
겨우 머릿속이 환해진다. 기다려 보자 캄캄해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보자. 캄캄해진다는 것은 사방이 어두운 벽으로 캄캄하게 눈을 감는 일, 내 어두운 눈길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일, 정신이 조금씩 한 곳으로만 조금씩 길을 어슴푸레 트는 일. 등을 꼿꼿이 세우고 눈을 조금은 아래로 뜬 채 그 아래 심중을 들여다보며, 혼신을 다해 나아가는 일. 캄캄절벽 그 아래를 무릎 후들거리며 떨며 나를 낮추어보는 일. 바로 등 뒤는 생각하지 말자. 섣불리 한 발짝 내디디리라 다짐도 하지 말자. 우두커니 캄캄절벽 눈을 감고 기다리자.
감감한 절벽 그 아래, 하늘하늘 거기 한 그루 진달래 환한 꽃송이 혼신을 다해 바람에 흔들리다, 그 분홍잎 오롯이 하늘 보다가, 나와 딱 눈 맞춤하는 눈짓하곤, 그 잎술하곤, 바로 수막새 떠오르는 달덩이 옛 신라인의 미소라니!
- 「봄빛절벽 그 아래엔」전문
시의 분위기는 상당히 절박하다. 아니 필사적이다. 시적 화자는 사방이 캄캄해질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 그 캄캄해진다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정의를 내리고 있다. “캄캄하게 눈을 감는 일, 내 어두운 눈길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일, 정신이 조금씩 한 곳으로만 조금씩 길을 어슴푸레 트는 일. 등을 꼿꼿이 세우고 눈을 조금은 아래로 뜬 채 그 아래 심중을 들여다보며, 혼신을 다해 나아가는 일. 캄캄절벽 그 아래를 무릎 후들거리며 떨며 나를 낮추어 보는 일”이 그것이다. 이토록 여러 종류의 캄캄해짐이 있는데 그것이 캄캄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기 위해서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 도대체 그 절벽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2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진달래 한 송이이다. 진달래 한 송이가 절벽 아래 “하늘하늘” 흔들리며 피어있다. 그런데 그 진달래 그냥 피어있는 것이 아니라 “혼신을 다해”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적 화자의 눈길과 “딱 눈 맞춤하는” 그 눈짓이
“옛 신라인의 미소”로 치환되고 있다.
시의 1연은 진달래 한 송이를 내려다보기까지의 온갖 노력이나 망설임이다. 그것을 캄캄함으로 표현하고 있다. 캄캄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기 위해서 나부터 캄캄해져야 한다. “섣불리 한 발짝 내디디리라 다짐도 하지 말자”라고 그는 스스로 경계하고 있다. 말하자면 1연에서 캄캄함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간절함이다. 시는 간절함과 거기에 호응하는 흔들리는 진달래 한 송이다. 풍경을 그려보자면 아슬아슬한 절벽에 붙어서 피어난 진달래, 그것을 보기 위해서 밤의 어두움을 뚫고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눈에 확 들어오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황홀경에 빠져드는 모습이다. 그 “수막새 떠오르는 달덩이”는 신라인의 미소에 연결되고 있다. 신라인들은 달을 좋아했다. 특히 가을 대보름에는 서라벌의 남녀 모두가 뛰쳐나와 놀기를 좋아했다. 진달래 꽃송이는 달덩이처럼 환하게 피어 마침내 보름달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이 진달래는 무엇일까? 이토록 정성을 다하여 그 진면모를 보고자 하는 절벽 아래 흔들리는 진달래, 그것은 막 탈고한 시가 아닐까. 한 편의 시를 건지기 위하여 캄캄한 밤길을 허위적대며 걷고 있는 한 노시인을 상상해 보자.
이 시는 노혜봉 시인을 마치 그의 자화상처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는 여기에 묘사된 주인공처럼 시를 추구했던 듯하다. 누가 알아주거나 말거나 그는 필사적이었고 온힘을 다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유별나게 거장들의 예술품을 시의 소재로 많이 사용하고는 했다. 그가 가고나니 그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작년 12월 그는 코로나 후유증으로 힘들어 하면서도 최금녀 회장댁의 동인지 출판기념회 모임에 끝까지 참여하였다. 그날이 마지막 만남일 줄이야 몇 발짝 떼고 숨을 몰아쉬던 그 모습을 생각하면 눈앞이 흐려진다.
* 신원철 : 시인, 강원대 명예교수, <시터> 동인, 2003 <미네르바> 등단, 시집<세상을 사랑하는 법>, <동양하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