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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39장 1-23절
말씀이 응할 때까지의 단련 ② -형통
창세기 37장에서 이어지는 내용은 창세기 39장입니다. 그 사이에 38장 유다와 다말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유다와 다말은 시아버지와 며느리 관계입니다. 그러나 다말의 계획으로 말미암아 유다는 며느리인 다말과 동침하게 되고 그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 중 한 명이 베레스인데, 유다와 베레스로 이어지는 족보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됩니다. 어떻게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족보 속에 오실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 일하십니다. 특히 이런 죄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리기 위해서 인간의 죄악까지도 사용하실 수 있다는 보여줍니다. 달리 표현하면 인간은 끊임없이 죄를 내놓지만 그런 죄가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죄에 죄를 더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죄 속에서도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하신 바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놀라운 일을 친히 행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죄보다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 때문에 죄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는 죄로 지적될 수밖에 없고, 성경이 친히 증거 하듯이 죄의 결과는 사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영원한 사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이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만큼 죄에 대하여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죄에 대하여 가볍게 생각할 수 없고, 오히려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본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게 되는 창세기 39장의 내용은 이런 점에서 우리가 교훈 받을만한 본을 보여주는데, 어떤 면에서는 창세기 38장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내용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의 경우는 다말과의 동침으로 말미암아 자녀를 낳았지만, 요셉은 종의 신분 속에서도 여주인의 유혹을 뿌리치고 오히려 고난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누가 고난을 좋아하겠습니까? 고난보다는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죄악 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결코 죄악을 저지르지 않으려는 모습을 가지는데, 이런 부분은 분명 우리가 본받을만한 모습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와서 1절을 보시면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37장 36절에서 이어지는 내용임을 알게 하는데, 한 마디로 지금 요셉은 애굽 왕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 속에서도 성경은 놀라운 사실을 기록하는데, 이어지는 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우리가 정의내리고 있는 형통은 무엇입니까? 형통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뜻은 ‘내 뜻대로’입니다. 특히 우리가 뜻하는 바는 우리에게 어려움이 없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사전적 의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잘 되어 가는 것, 이것을 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 요셉과 같은 상황에 있을 때 그것을 형통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형들에게 팔려 애굽의 종이 되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형통이라는 말과 연결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이런 요셉에 대하여 형통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2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형통이라는 말은 지금 우리의 상황에 따라 사용 유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아니면 함께 하시지 않느냐에 따라 사용 유무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형통의 사전적 의미에 대하여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 되어 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성경의 이해를 따라 생각해 보면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 된다고 할 때 그 뜻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입니다. 그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그러나 엄밀하게는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형통이라는 말은 그의 뜻 안에서 그가 함께 하실 때 그것을 성경은 형통이라고 정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의 모든 인생이 형통한 인생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망하고 불평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요셉과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을 형통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기준이 되고 있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보다는 고통과 고난 없이 잘 되는 것을 형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과 같은 처지에 이르게 되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교정해야 합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는 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계속해서 3절을 보시면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입니다.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인 형통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형통의 정의는 분명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하신다는 사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의 모든 자세는 여느 종들과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특히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는 것은 요셉의 자세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모든 일에 있어서 동일한 자세로써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성실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주인은 저가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범사에 형통하게 하시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주인은 요셉을 종으로 사 왔을 때 종의 신분에 맞는 일을 시켰을 것입니다. 곧바로 나타나지만 가정총무를 맡게 되는데, 처음부터 가정의 모든 것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작은 일을 맡겼을 것이고, 하찮은 일을 맡겼을 것입니다. 혹은 중요하지는 않지만 힘을 쓰는 일을 맡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작은 일, 하찮은 일 등을 맡겼을 때 다른 종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큰 일을 맡기면 그 일도 성실하게 잘 해내는 것을 보면서 그에 대한 신뢰가 쌓여간 것입니다. 심지어 그가 믿는다고 말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고 또한 그의 범사에 형통함을 주시는 것을 본 것입니다. 바로 이어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이 하는 일에 어떤 복을 주시기까지 하는데, 주인 입장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형통의 내용을 본 것입니다.
이때 주인이 신뢰할 수 있는 자가 되기까지 단기간에 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시간을 두고서 본 것인데, 그런 시간 속에서 신뢰할만한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요셉에게 주인은 주인 집의 모든 것을 관리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하는데, 4절 이하 6절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여기서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겼다는 표현은 주인이 종에게 대하는 자세를 말하는데, 주인이기 때문에 종을 함부로 대하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비할 바는 되지 않겠지만 종으로서 잘하는 자에게는 선으로, 그러나 못한다고 해서 무조건 악하게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선한 자세를 유지하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든 선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지금 주인 보디발의 이런 자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일반은총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선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나아가 세상에 악이 만연하지 않도록 친히 역사하신다는 것을 증명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선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악이 만연하지 않도록 친히 역사하시는데, 그 대상이 누구에게까지 미치느냐? 믿지 않는 자들에게까지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이런 선에 대하여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안에서 행하지 않는 선은 선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선을 기뻐한다는 사실을 이런 방식으로 나타내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어쨌든 집 주인은 요셉의 자세와 결과들을 보면서 그를 믿음직한 사람으로 여겼는데, 그를 어디까지 높이는가 하면 자기 집안의 가정 총무의 자리까지 높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다 주관하게 하여 맡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은혜를 베푸시는 내용 속에서 어떤 결과가 있게 하시는가 하면 요셉이 맡은 일에 대하여 주인이 볼 때 좋은 쪽으로 결과 되는, 소위 복을 받는 일이 있게 하시더란 겁니다. 그것을 주인이 보고서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큰 일까지 맡기는, 결국 가정 총무의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하는 일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나타낸다고 할 때 무엇보다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그 자세를 나타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일을 맡겼다고 할 때 정직과 성실보다 더 좋은 자세는 없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정직하지 않고 거짓을 일삼으며, 성실하지 않고 게으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주인이 이런 자세를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거짓과 게으름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임을 기억한다면 이런 자세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세로 있는 요셉에게 은혜를 베푸사 주인의 가정이 복을 받게 하신 것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셨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로서 정직과 성실로 임했을 때 하나님께서 보디발의 집에 복을 더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의 경우 정직하고 성실하면 하나님께서 항상 복을 더하신다고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최소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로 정직과 성실로 임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종으로 팔려와 주인 집의 모든 것을 다 관리하는 자리까지 오르기까지 분명 쉬운 삶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종의 위치에 있지만 어느 정도 고난을 경감시켜주신 부분이 있습니다. 편안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편안하게만 놔두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편 105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할 목적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시105:19). 실제로 이후 내용을 보면 여주인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혹을 거부할 때 결국 옥에 갖히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지금 시편 105편의 내용을 이루어가는 과정으로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유혹의 배경에는 본문 6절 마지막에 기록된 요셉의 용모와 관련이 있습니다. 요셉의 용모는 빼어나고 아름다웠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겠지만 외모의 뛰어남은 그 사람에게 어느 정도 장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항상 장점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늘 본문과 같은 유혹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또한 이후 고난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7절을 보시면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처음에는 눈짓으로만 유혹했습니다. 아마도 요셉은 그런 주인의 아내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의 아내는 좀 더 노골적으로 동침할 것을 요구하는데, 여기에 대해 요셉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8절과 9절을 보시면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매튜 헨리 주석을 보면 유혹하는 사람이 그의 여주인이라는 것을 주지시킵니다. 그녀는 상류 사회에 속한 사람이었고, 그녀에게 복종하는 것이 요셉에게는 당연한 입장이었다는 겁니다. 종으로서 자기의 이익을 희생해야 하고, 다른 무엇보다 그녀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을 택해야 할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여주인의 노골적인 유혹을 거절하는데, 왜냐하면 집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다 맡겼지만 당신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다는 것 때문입니다. 내 소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대답은 여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남의 아내와 동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라는 것까지 분명히 말하는데,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주인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답변만 가지고 있다면 역으로 주인이 허락하면 괜찮다는 것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괜찮다고 해도 하나님의 법이 기준이 된다면 결코 괜찮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요셉은 자신이 동침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기 때문임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여 주인은 끊임없이 유혹하는데, 10절을 보시면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날마다 동침할 것을 청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노골적이었다는 겁니다. 유혹 혹은 협박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요셉에게 동침할 것을 청하였다는 겁니다. 그러나 요셉은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자신이 흔들려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함께 있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가 성적으로 매우 문란하다고 할 때 우리는 요셉의 이런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유혹이 없느냐?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여인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7계명과 관련된 유혹이 없는가? 없지 않습니다. 수없이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본을 통해 교훈하시는 바가 있다면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보지 않아야 합니다. 듣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보고 듣는 순간 함께 하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빨리 피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본문을 보시면 요셉의 이런 자세에도 불구하고 여주인은 좀 더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유혹하게 되는데, 11절과 12절입니다.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어쩌면 여주인이 의도적으로 그 집 사람들 모두를 내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여주인의 행동을 통해 보면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집에 다른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고, 그런 만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만 누군가 자신의 죄악을 알게 될까봐 두려움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누가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죄를 저지르는 것이 사람들의 본성인데, 어떤 면에서 지금의 상황이 인간의 본성을 자극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적극적으로 요셉에게 동침할 것을 요구하는데, 그녀의 행동을 보면 요셉의 옷을 잡고 조르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여기에 대해 요셉은 자기의 옷을 벗어두고 밖으로 나가게 되는데, 이것은 단순히 사람 앞에서만 죄를 짓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9절에서 분명히 나타난 것인데, 단지 말만 그럴싸하게 말하고 실제 행동은 그렇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칼빈은 이런 내용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말합니다. “요셉은 이미 고귀하고 중대한 절조의 본을 보였다... 그러나 이제 그 여인은 노골적으로 광란하며 그녀의 애욕은 광염으로 변한다. 그 투쟁이 열기를 더해 갈수록 이런 공격에도 굴하지 않는 그의 도량은 더욱 더 칭찬 받을만하다. 요셉은 자신의 신앙과 생명조차 잃어버릴 위험을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런 악을 저지르느니보다 차라리 자신의 명성을 희생시키기로 결심하고 삶 자체를 포기할 각오를 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한 젊은이의 그러한 귀감을 보여주시고 권면하신다. 그러므로 성숙한 나이의 남자와 여자들이 자진해서 범죄로 뛰어들거나 혹은 가벼운 시험으로 범죄에 빠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어떤 변명을 남겨 두실까? 따라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대한 존중심만으로 모든 세상적 애욕을 진압하고 온 세상의 박수갈채보다 선하고 정직한 양심을 더 높이 평가하도록 우리의 모든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주인 입장에서는 요셉의 자세에 대하여 매우 불쾌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칼빈의 주석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요셉은 자신의 신앙과 생명조차 잃어버릴 위험 부담을 가지고서 여주인의 유혹을 거부하였는데, 실제로 여주인은 요셉에게 누명을 씌워 다시금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놓이게 만듭니다.
우선 13절에서 18절을 보시면 여인의 누명을 씌우는 내용입니다.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앞 구절에서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자신을 거부했다는 것으로 이제는 나갔던 사람들을 불러 모아 요셉에게 누명을 씌웁니다. 어느 정도 거짓 증인을 세우고자 하는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을 남편에게까지 말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요셉은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19절과 20절을 보시면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평소 요셉의 자세를 염두 해 둔다면 주인 입장에서 좀 더 신중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와 관련된 일이기에 신중함보다는 경솔하게 대하게 되는데, 결국 아내의 말만 듣고 노하게 되고 곧바로 옥에 가두게 됩니다.
여러분, 여기까지만 보면 요셉이 얼마나 억울한지 모릅니다. 형에 의해 종으로 팔렸습니다. 이것만 해도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말미암아 종으로써 정직하게 성실하게 일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인의 가정에 복을 주시면서 결국 주인의 가정의 모든 것을 도맡아 일할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종의 위치에 있지만 종의 위치 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던 겁니다. 이 모든 것을 지금 성경은 형통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여주인의 유혹과 그 유혹을 피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 결과는 더더욱 억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주인 가정에 행한 바는 종의 위치에 있었지만 분명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요셉 때문에 주인의 가정에 복을 더하셨던 겁니다. 그러나 결과된 것은 무엇이냐? 악을 선으로 갚은 것이 아니라 선을 악으로 갚는, 마치 형벌을 받는 것처럼 결과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가운데 놓이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지금 이런 과정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의 단련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으로 보이신 그 말씀을 응할 때까지 요셉을 단련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일에 선으로 대할 때 선으로 결과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악에 대하여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실제로 그렇게 행할 때 악이 변하여 선이 되고 우리에게 유익함으로 결과 된다면 그것보다 감사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반드시 그렇게만 결과 되지 않습니다. 요셉과 같은 경우도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를 단련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고통의 이유, 고난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때문에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참고 견뎌야 합니다. 인내의 열매를 맺도록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데 그 감옥이 어떤 감옥 이냐?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입니다. 요셉의 경우 왕의 죄수가 아닌데, 그곳에 갇힌 겁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왕의 죄수 두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 나중에 왕 앞에 설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 입장에서는 그런 과정까지는 다 알지 못합니다. 다만 종의 위치에서 죄수의 위치로 떨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도 그와 함께 하심을 나타내십니다. 21절에서 23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여기에도 과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105편에 보면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시105:17-18)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분명 그의 발이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종의 위치에 있을 때 행한 바와 죄수의 위치로 떨어졌을 때 행한 바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점차 간수장의 믿음을 사게 되었는데, 본문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인자를 더하신 결과라고 말씀합니다. 심지어 요셉이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인자를 더하신 결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어떤 자리로 가든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또 함께 하시면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들을 어떤 나아지는 것을 통해 보여주고 계시는 겁니다. 사람의 신뢰를 얻게 하고, 신뢰 속에서 자신이 행하는 일이 거짓됨 없이 성실하게 나타나게 하시고, 또 그것을 통해 은혜를 입게 하시는 일들이 있게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요셉에게 일어난 억울한 일은 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형에 의해 팔려 종으로 가게 되든, 종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죄수가 되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형통하다는 것은 결코 어려움이 없는 게 아닙니다.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믿는다고 해서 병에 들지 않습니까? 병에 듭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속상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를 형통케 하셨다고 한다면 우리 인생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배워야 할 실천적인 내용들이 있는데, 요셉은 자신의 정결함을 하나님 앞에서 유지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혹 그것 때문에 손해를 보고 피해를 본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기보다 고난 받는 것을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고난 받기보다는 한 번의 타협으로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을 바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그런 길을 가지 않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요셉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길 기뻐해야 하고 그 길을 걸어가길 소망해야 합니다.
요셉에게 어려움 속에서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상황을 만들어 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길을 걸어갈 때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때로는 요셉이 종에서 죄수가 된 것처럼 어떤 면에서 상황적으로 볼 때 더 나빠지게 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성취시키기 위한 과정으로 봐야 하고, 나아가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들이 우리를 단련하시는 과정으로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과할 때 욥기 23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는 말씀이 실제로 우리에게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 인생 가운데 여러 가지 시험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험은 야고보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는 목적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시험 자체를 무익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통해 분명히 밝히고 계시는 바가 있음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는 시험 앞에서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힘들어서 죽을 만큼의 시험을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혹 시험을 준다고 할지라도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도 예비하셔서 모든 시험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나 시험에서 넘어지는 일들이 있는데, 왜 그렇습니까? 고린도전서 10장 12절로 이해하자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다시 말해 조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같은 장 앞에서는 어떤 내용이 있느냐 하면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험을 당했을 때 넘어진 예들을 제시하는데, 그런 내용을 보면서 교훈을 받아야 하는데 교훈을 받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시험에 넘어지는 것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경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데, 조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탓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자세, 그리고 그가 취한 행동들은 우리가 깊이 새겨서 본으로 삼을만한 내용입니다. 무엇보다 7계명과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 혹 시험을 받을 때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나는 괜찮다는 식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유혹이 있다면 피하고 도망해야 합니다. 또 유혹꺼리들을 일부러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철저히 선을 긋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