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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1장 17-27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1장은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금 살리시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해오던 사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요, 구약에서 예언해 오던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본래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살아 있었습니다. 살아 있을 당시 곧바로 출발했더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 심각한 병에 걸렸습니다. 심각한 병이기에 의사조차 손을 쓸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병든 자를 고치시는 등 놀라운 이적을 보이시는 예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곧바로 가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곧바로 가도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죽음의 확실함을 나타내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틀 후 출발하여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왔을 때는 17절이 증거 하는 것처럼 죽어서 무덤에 있은 지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죽음이 확인되는 즉시 무덤에 들어간 것으로 하면 나흘 길을 걸어오신 것이지만, 하루나 이틀 후에 무덤에 둔다면 그 이상 걸리는 길을 걸어오신 것입니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문하러 왔는데, 18절과 19절을 보시면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라고 기록합니다. 베다니 지역은 예루살렘으로부터 5리, 대략 2km정도 떨어진 곳이 있었습니다. 매우 가까운 거리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문하러 왔다고 할 때 예루살렘에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유하시고 나흘 길 혹은 그 이상 되는 길을 걸어오신 것은 한편으로는 죽음의 확실함을 나타내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를 살려 내었을 때 본래 죽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39절에서는 마르다의 말로 확증하십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그러나 이것만을 위해 이틀을 더 머무신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방금 읽은 17절 이하 19절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도착하셨을 때가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을 때이고, 그때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문하러 왔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저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을 친히 목격하는 자들로 있을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방문한 목적은 나사로의 일로 인하여 위문하기 위한 것으로 있지만,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 그것도 죽은 자조차 살리시는 이적을 친히 목격하는 자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유하신 이유가 많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예수께서 행하시는 이 놀라운 이적을 보이기 위해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놀라운 이적을 본 자들이 다 믿게 되었는가? 믿게 된 자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도 있습니다. 즉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 가운데 일부에게만 주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에서 밝히신 것처럼 ‘자기 백성’이라고 칭해지는 자들(마1:21), 그러나 유대인이라는 혈통이 아니라, 또한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도 아닌 오직 하나남께로부터 난 자들(요1:13), 그들이 그 대상으로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신 내용으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양 떼들, 그들이 그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라는 마을로 들어오시기 전에(요11:30)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0절을 보시면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지난주 살핀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근방으로 오시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위험을 무릅쓰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8절 제자들이 말한 것처럼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한 일이 있었고, 그 일은 아직까지 식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을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던 마르다와 마리아가 알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자신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어갈 때는 급히 예수님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의사조차 손 쓸 수 없다고 할 때 예수님이라면 의사조차 솔 쓸 수 없는 그를 낫게 하실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비록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감정이 적대적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살아 있는 동안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오셨는데, 30절에 의하면 마을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마을 밖에까지 오신 것입니다. 그 소식을 마르다가 들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위문하러 온 상황이고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감정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마르다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염려한 듯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다면 미리 알려 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마을 밖까지 오셨을 때 알 수 있었던 것이고, 마르다는 마을 밖으로까지 가서 예수님을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20절의 내용은 대조적으로 나열한 것입니다. 마르다는 곧 나가서 맞이했지만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였는가?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러 주석을 참고해 보면 아쉬움과 원망이 마르다보다 더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누가복음 10장에 나온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한 내용을 잠시 언급했지만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주신 은혜가 남달랐습니다. 그래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큰 만큼 신앙이 미성숙할 때는 소망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아쉬움과 원망도 큰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나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도 생각해 볼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감정은 적대적입니다.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르다, 마리아 두 사람 모두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가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란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문하기 위해 왔는데, 그들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언니인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 뵈러 나간 것이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오늘 본문의 나머지 부분은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먼저 마르다가 말합니다. 21절과 22절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많은 유대인들이 있어 좋지 못한 상황이긴 하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안타까움과 원망 섞인 말을 하게 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니이다”란 고백을 하게 됩니다. 언뜻 말 자체만 보면 굉장히 좋은 믿음의 말처럼 보이지만 이후 내용을 염두 해 둔다면 적어도 죽었지만 다시금 살리실 것에 대한 고백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특히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구하는 대로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일단 마르다가 말한 첫 부분은 마태복음 8장에 기록된 백부장의 고백과 비교해 보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더욱 뚜렷이 나타납니다. 거기 보면 가버나움에 한 백부장이 있는데, 자기 하인이 중풍병으로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을 찾아 고쳐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셨습니다(마8:7).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백부장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는 발견될 수 없는 기이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8:8-9)
지금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말한 것은 무엇입니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것입니다. 반면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가 직접 오지 않아도 말씀 한 마디면 이루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마치 창조주 하나님께서 없는 것 가운데 있으라 하시매 있게 된 것처럼 그런 능력을 베푸실 수 있는 분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고 말씀하시면서 칭찬하셨는데,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는 마르다라 할지라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 곁에 계셔야지만 낫게 하실 수 있다는 제한된 믿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막9:23)고 말씀하신 주님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능력의 소유자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라고 할 때 참 하나님으로는 보지 못하고 참 사람으로,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그의 고백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안타까움과 원망이 섞인 말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나’로 연결이 됩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으로까지는 고백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 역시 여전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고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음의 내용으로 가지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이해하자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만 그 믿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신성의 모든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고,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신 까닭에, 자신의 권능으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으신 분이시지만, 그런 분으로 믿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극한 은총을 받고 계시는 분으로, 그러하기에 지금도 하나님께 간구하기만 하면 그가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인 겁니다. 그러나 이후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병든 자를 낫게 하실 것이라는 정도로 믿을 뿐이지,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의 말씀을 하십니다. 2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죽은 나사로가 조만간 살아날 것이라는 겁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게 된 창조의 역사처럼(창1:3) 그가 말씀만 하시면 죽은 자조차 다시금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21절과 22절에서 나타난 마르다의 믿음은 어떤 면에서는 불신앙이요, 어떤 면에서는 제한된 믿음이요, 그렇기 때문에 부족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그에게도 그가 고백하고 있는 이상의 내용을 그에게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복음 11장 4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이 이 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무엇이 나타납니까? 자기 백성들, 자기 양 떼들에 대한 긍휼하심이 나타납니다. 부족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런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좀 더 분명한 믿음을 가지도록 하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의 긍휼이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가 약속하고 계신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마르다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24절입니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실 때 일말이라도 지금 당장 살아나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병든 자가 낫는 것을 보고 죽어가는 오라비를 살려주십사 예수님을 찾아 데려오도록 요청했지만,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다만 당시 마지막 날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가르침 아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게 될 것임을 안다고 고백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유대 사회 안에서도 마지막 날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이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3장 8절에 의하면 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이 모든 것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은 신약에서 비로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구약을 통해서도 가르친바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욥기 19장 26절과 27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좀 더 분명하게는 다니엘서를 통해 나타납니다. 다니엘 12장 2절입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그러나 이런 내용이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나님의 뜻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죽은 자가 다시금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의 내용으로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히브리서 11장 19절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할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가 약속을 따라 낳은 하나 뿐인 이삭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바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죽은 자조차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 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 생각한다는 것은 마지막 날에 가서야 비로소 부활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이 지금 마르다에게는 있지 못한 것입니다. 마르다에게만 있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있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9장에서 나면서 맹인 된 자의 눈을 고치셨지만, 그리고 고침 받은 자를 통해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을 들으시는 줄 안다는 말을 들었지만(요9:31), 심지어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다는 말도 들었지만(요9:32),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대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마지막 날에는 부활이 있을 것이지만, 죽은 자가 지금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을 나타내보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될 것을 믿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시기에 앞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하십니다. 25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23절에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신 예수님은 이 약속이 나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될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부활이기 때문에 부활하는 자들의 원인자로 있으며, 내가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 있는 자의 원인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부활과 생명은 두 단어이지만 연속적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부활의 전제는 죽음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게 되고 부활 이후 생명을 가지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님은 부활의 근원이요, 생명 그것도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심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에서 부활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4-29) 성경은 누구도 예외 없이 부활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두 부류로 나눕니다. 한 부류는 생명의 부활이고, 다른 한 부류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그러니까 부활한다고 해서 다 생명, 다시 말해 영생으로 나아가는 게 아닙니다. 심판의 부활도 어떤 면에서는 영생이지만, 영원한 고통이라는 측면에서 영생이 아니라 영벌로 표현됩니다.
그럼 누가 생명의 부활로 있으며, 누가 심판의 부활로 있는가? 24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가 영생을 받습니다. 그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망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라는 것이고, 거기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사망으로 가야 할 자들이었지만 생명으로 옮겨 영생으로 가는 자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듣고도 믿지 않으면, 그만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사망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특히 이 말씀에 앞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그리고 그런 관계 속에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만을 아들도 행한다. 21절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 심지어 22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23절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도록 하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 자요, 그런 자들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알리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수님은 그 스스로 자신을 믿고 자신을 공경하는 자들에게 부활과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제는 죽음이 전제되고 있다고 할 때 단순히 나사로처럼 육체적인 죽음만을 염두 해 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것까지를 염두 해 두고 있는 것입니다. 즉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다.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을 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죽을 자들로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심판의 부활을 거쳐 영원한 형벌 가운데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너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영생을 주기 위하여 내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절 나머지 부분과 26절을 보시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니까 지금 주님은 단순히 죽은 나사로와 관련해서만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부활과 생명의 의미가 무엇이고 그런 부활과 생명을 누가 줄 수 있는가에 대해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살게 될 줄 안다고 말하는 마르다에게 나에 대한 참된 믿음 없이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과, 오직 나를 믿는 자만이 죽어도 살아날 것이요,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육적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 믿으면 본래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지만 다시금 살아나는 첫째 부활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혹 육적으로 죽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육적으로 부활하는 둘째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본래는 영적으로 죽었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살아난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한번 주신 생명은 결코 상실할 수 없기에 영생까지 보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빌립보서 1장 6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말씀은 내가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느냐는 겁니다. 내가 부활의 근원이요, 생명, 그것도 영원한 생명의 원천임을 믿느냐는 겁니다. 나를 믿어야지만 영적 죽음에서 살아나는 첫째 부활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육적 죽음이 있다 할지라도 다시금 살아나는 둘째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나아가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될 줄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마르다는 27절로 답합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고백은 정확하게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사도들의 고백과 일치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세례 요한이요, 더러는 엘리야요,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한 것이지만 정확하게는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도들의 고백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그러니까 지금 주님께서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하실 때 자신의 믿음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는 사도들의 고백과 동일한 고백으로 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22절에서 말한 것처럼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구하는 대로 들어주실 수 있는 분으로만 여겼습니다. 병든 자를 낫게 하실 수는 있지만, 그것도 하나님께 구함으로 그렇게 하실 수 있지만, 백부장의 믿음처럼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8:8)라는 믿음까지는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제한된 믿음이요 부족한 믿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믿는 자는 첫째 부활뿐만 아니라 둘째 부활에도 참여할 수 있는 자로 있게 하시며, 나아가 영원한 생명까지 소유할 수 있게 만드시는 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가 이 고백을 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여러분, 동일한 내용을 듣는다고 해서 누구도 예외 없이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셔야 합니다. 깨닫게 하셔야 합니다. 믿음을 주셔야 합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과 친분이 있기 때문에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의 열심이 남달라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마르다는 예수님의 양 떼로 정하셨고, 때가 되어 믿음을 주시되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도록 만드시고자 요한복음 11장에서 이러한 믿음을 더하셨던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나사로의 죽음이 있었던 겁니다.
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시면서 예수님은 당시 바리새인들의 눈 먼 것을 드러내셨다면,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익을 누가 먼저 받고 있느냐? 마르다고 받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면 왜 예수님께서 죽어가는 나사로에 대한 소식을 들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틀을 더 유하셨는가? 좀 더 빨리 출발하지 않고 서둘러서 가지 않고 이틀을 머무신 이유가 무엇인가? 병든 자를 낫게 하심으로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기보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통해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더욱 판명하게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아직까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아닙니다. 살리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 가르침에 대하여 마르다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그 믿음의 확증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믿은 것이기 때문에 이적은 말씀을 더욱 굳건히 세우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있다고 할 때 이적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참된 믿음을 주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중에는 믿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때도 평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믿은 것이지, 듣지도 않았는데 이적 하나를 보고서 믿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믿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확증할 수 있도록 부활이 나타나지만,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해 보이시지만, 모두가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의 교회가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고 할 때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동일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택자라 할지라도 믿음이 주어지는 시기가 다릅니다. 그러나 택자라면 결국에는 주어질 것입니다. 택자이기에 그를 구원하기 위해 믿음이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시지 않는 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부활의 근원이요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담의 첫 범죄 이후 누구도 예외 없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 자가 영적으로 살아나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는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할지라도 누구도 예외 없이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이 있음을 확신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부활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결국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될 것인데, 그 이유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죽음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선한 것과 그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고난과 고통을 내 힘으로 이겨낼 수 있지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부활이시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고난과 고통의 연속일지라도, 시편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일지라도(시90:10), 부활과 생명에 대한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고 소망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마지막은 영생이요, 영광이기에 영생과 영광을 위하여 고난에 동참하면서 주의 뜻을 따르면서 살아가야 하는 자가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