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戚
咸川君億載 墓誌銘[許穆]
公諱億載, 字大年, 我太宗諸王子益寧君袳之曾孫, 秀泉君之孫。 秀泉君賢事在秋江《師友傳》。 皇考, 靑杞君彪; 妣趙氏, 國子生員璟之女也。 明孝宗弘治十六年癸亥, 公生。 以宗室職初授咸川副守。 公能力學好書, 博雅爲高行。 恭僖三十年, 選試藝, 陞彰善, 爲正。 三十九年, 有恭僖之喪, 選直魂殿三年, 陞明善。 昭敬十五年, 以大耋加正義, 封咸川君。 後三年八月十三日, 公卒, 八十三。 其十月, 葬于衿川縣所下里南向之原靑杞君墓下。
先娶禹夫人, 無子。 後娶鄭夫人, 監察錙之女, 生二男一女: 長男元輔, 縣令; 次男元翼, 歷仕三朝, 位列三公, 任國家安危四十年, 諡文忠, 以恩例追封公純忠積德補祚功臣, 秩正一品顯祿大夫。 壻, 李澮。 有側室子元慶、元祉, 女二人: 爲韓應寅、朴胤福之妻者也。
公忠敬懿謹, 不苟不汚, 見不善若浼己。 一言可以畏人。 秀泉君有高世重名, 琴操簡而節, 廉而直, 君子稱之。 秀泉君子孫多傳其操, 而公獨得其絶響云。 每月夜, 群動旣息, 擊砂磬以自寓, 人無不出涕者。 今太樂傳砂磬, 其聲自公始也。 公善推五行之運,
常戒相國曰: “大國爲卿, 小國爲相。 晩途厄險。” 相國常言之, 蓋一一皆驗。
縣令生六男二女: 男性傳、心傳、一傳、仁傳、敬傳、忠傳。 性傳, 禮曹正郞; 心傳, 直長; 一傳, 縣監; 仁傳, 郡守, 以老職陞從二品; 敬傳, 縣監。 二壻: 參奉郭敞, 李廷賢。 相國生一男一女: 男義傳以治郡高第, 累爲大府。 上之十四年, 有狄亂, 從上於南漢, 事平, 進嘉善, 襲封完善君, 以壽至資憲。 壻郡守李廷稷。 側室子二人: 孝傳, 悌傳。 壻七人: 僉使金汝鉉, 朴允章, 尹誡, 宋興築, 李時行, 李喬, 尹鍈。 允章、誡、時行之妻三女子以節行聞。 李澮子德沂, 縣監。 公以貴戚厚德壽考, 又有子孫之報亦盛矣。 銘曰:
嗚呼介潔之操, 博雅之文。 德厚而樹惇, 篤生哲人。
함천군(咸川君) 묘지명
공의 휘는 억재(億載)이고, 자는 대년(大年)이니, 우리 태종의 여러 왕자 가운데 익녕군(益寧君) 치(
)의 증손이고 수천군(秀泉君)의 손자이다. 수천군은 현명하였으니, 사적이 추강(秋江)의 〈사우전(師友傳)〉에 실려 있다. 황고는 청기군(靑杞君) 표(彪)이고, 비 조씨(趙氏)는 국자 생원(國子生員) 조경(趙璟)의 딸이다.
명나라 효종(孝宗) 홍치 16년 계해년(1503, 연산군9)에 공은 태어났다. 종실의 직책으로 처음 함천부수(咸川副守)에 제수되었다. 공은 능히 학문에 힘쓰고 글을 좋아하였으며, 학문이 넓고 품성이 우아하여 행적이 고상하였다. 공희왕 30년(1535, 중종30)에 시예(試藝)에 선발되어 창선대부(彰善大夫)에 오르고 정(正)이 되었으며, 39년(1544) 공희왕의 국상(國喪)에 뽑혀 혼전(魂殿)을 3년 동안 수직하고 명선대부(明善大夫)에 올랐다. 소경왕 15년(1582, 선조15)에 나이 많은 노인이라 하여 정의대부(正義大夫)에 가자되고 함천군에 봉해졌다. 이로부터 3년 뒤 8월 13일에 공이 졸하니, 향년은 83세이다. 그해 10월에 금천현(衿川縣) 소하리(所下里) 남향의 언덕에 있는 청기군의 묘 아래에 장례 지냈다.
전처 우 부인(禹夫人)은 자식이 없고, 후처 정 부인(鄭夫人)은 감찰 정치(鄭錙)의 딸로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원보(元輔)는 현령이다. 차남 원익(元翼)은 세 조정에 두루 벼슬하여 지위가 삼공에 들었고, 국가의 안위를 40년 동안 담당하였으니,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추은의 예로 공을 순충적덕보조 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에 추봉(追封)하니, 관질(官秩)은 정1품 현록대부(顯祿大夫)이다. 사위는 이회(李澮)이다. 측실(側室)에 아들 원경(元慶)과 원지(元祉)가 있고, 딸 2인은 한응인(韓應寅)과 박윤복(朴胤福)의 처가 되었다.
공은 충성스럽고 공경스러우며 성실하고 신중한 한편 구차하지 않고 더럽지 않아 불선을 보면 마치 자신이 더럽혀진 듯이 여겼으니, 한 마디 말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었다. 수천군은 청고(淸高)하여 중한 명망이 있었고, 거문고 곡조는 간결하고 절조가 있으며 바르고 곧아 군자들이 칭송하였다. 수천군의 자손 중에 그 곡조를 전한 사람이 많았으나 공이 홀로 그 절향(絶響)을 터득했다고 한다. 매번 달 밝은 밤에 모든 움직임이 그치고 나면 사경(砂磬)을 연주하여 자신의 뜻을 부치곤 하였는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태악(太樂)에서 전하는 사경은 그 소리가 공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공은 오행(五行)의 운행을 잘 추산(推算)하였는데, 항상 상국(相國)을 경계하기를,
“대국(大國)에서는 경(卿)이 될 것이고, 소국(小國)에서는 재상이 될 것이나, 만년이 고생스럽고 험할 것이다.”
하였다. 상국은 항상 이 말을 하였으니, 대개 하나하나 모두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현령은 6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성전(性傳), 심전(心傳), 일전(一傳), 인전(仁傳), 경전(敬傳), 충전(忠傳)이다. 성전은 예조 정랑이고, 심전은 직장(直長)이고, 일전은 현감이고, 인전은 군수인데 노직(老職)으로 종2품에 올랐고, 경전은 현감이다. 두 사위는 참봉 곽창(郭敞)과 이정현(李廷賢)이다. 상국은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 의전(義傳)은 고을을 다스려 높은 고과를 받아 여러 차례 큰 부(府)를 맡아 다스렸고, 인조 14년(1636) 오랑캐의 난리가 있을 때에 상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으며, 난리가 평정되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완선군(完善君)에 습봉(襲封)되었다. 또 장수한 것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사위는 군수 이정직(李廷稷)이다. 측실에 아들은 2인이니 효전(孝傳)과 제전(悌傳)이고, 사위는 7인이니 첨사(僉使) 김여현(金汝鉉), 박윤장(朴允章), 윤계(尹誡), 송흥축(宋興築), 이시행(李時行), 이교(李喬), 윤영(尹鍈)이다. 박윤장, 윤계, 이시행의 처인 세 딸은 절행(節行)으로 유명하다. 사위 이회의 아들 이덕기(李德沂)는 현감이다.
공은 귀척(貴戚)으로서 후덕하고 장수한 데다가 자손의 보덕(報德)이 있으니, 너무나도 성대하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아 변함없고 깨끗한 지조와 / 嗚呼介潔之操
박학하고 우아한 문사를 지니셨도다 / 博雅之文
덕이 후하고 수립한 것이 도타워 / 德厚而樹惇
철인을 돈독히 낳으셨도다 / 篤生哲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