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눈의 홍채는 각각의 고유성을 띠고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한 개인의 홍채와 같은 모양의 것을 가질 수 없다고 하죠.
그런데 만약에 어느 누군가와 동일한 모양의 홍채를 소유한 또 다른 인간이 출현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게다가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의 죽은 배우자라면요?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조명의 의도가 굳이 전형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환생 또는 윤회와 같은 개념을 증명하려는 형식으로 펼쳐지지는 않아요. 물론 영화에서는 홍채와 뇌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주장함으로써, 홍채가 동일한 이들은 같은 의식(또는 기억) 구조를 가질 수도 있다는 가설을 내세우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현재 드러난 현상에 대해, 특정한 가설에 경도된 임의적인 해석을 확정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 현상에 대해 접근하고자 합니다.
그건 곧 관객에게 제기하는 물음의 형식이기도 하죠. 이러한 현상이 우리에게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음으로써, 영화의 내적인 내러티브가 "오, 이것 봐, 환생이란 게 역시 있었어."라며 스스로 감동받는 자기완결적 구조를 지양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그 물음에 응답하기 위해 직접 움직일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영화 내에서도 환생의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은 모두 실패합니다. 통계적으로 전혀 유의미하지 않은 결과들로 묘사되죠. 영화에서 정말로 중요한 지점은, 실험이 실패로 끝난 후에 실험자였던 주인공과 피험자였던 소녀가, 그들의 고유한 개인성이 야기한 사건 속에서 조우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주인공과 소녀는, 주인공이 자신의 배우자를 잃게 되었던 외상적 사건 속에 다시금 '우연히' 참여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 다양한 관점의 언어들을 쏟아내던 영화는 여기에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사건을 통한 만남 속에서 그 둘이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듯이, 관객 또한 그저 이 만남의 장면을 말없이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을 뿐입니다.
그건 눈맞춤의 순간입니다. 이 지점에서 환생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와 같은 주제는 이제 조금도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소녀가 주인공의 죽은 배우자의 환생이라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 마음을 정확하게 만나 공유했으니까요.
거기에는 인간의 아픔과, 그 아픔을 있는 그대로 알아보는 시선이 존재했습니다. 그런 시선 두 개가 서로를 마주 보았습니다. 그러한 눈맞춤 속에서는 개인성이 야기한 고통의 원인이 사라집니다. 고통의 원인을 개인성과 연결지어 이해할 필요조차 없어지게 됩니다. 시간축 위에서 가정되는 개인성의 과거와 미래는 모두 소멸하고, 오직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마음만 남게 되니까요. 아니, '보편적인'이라는 표현도 사실 적절하지 않습니다. 개인성도, 보편성도 아닌, 단지 온전함만이 그 자리에 유일하게 존재합니다.
그렇게 그 둘은 온전한 존재로서 서로 손을 잡은 채 문을 열고 나섭니다. 그리고 관객은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은 더욱 구체화된 물음이었으며, 그 물음은 '환생은 정말로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는가?'였다는 것을요. 환생이어도 그들은 온전했고, 환생이 아니어도 그들은 온전했습니다.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또한 개인성의 모든 사태들과는 아무 상관없이,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바로 그 서로에게 눈맞출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