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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 따름은 예수 의식하기>의 줄거리:
예수 따르기는 예수 의식하기입니다. 숨쉬기처럼 참 쉽게 여겨집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알면 예수 따르기처럼 쉬운 일이 없고 그러나 그 결과는 어마어마한 그런 일이 다시 없지요. 하지만 가장 대중적이고 기본적인 김치 맛있게 담기가 어려운 것처럼, 너무 간단해 보이는 예수님에 대해 의식하기도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따름은 예수 의식하기
(누가복음 9:61~62)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 따름은 예수 의식하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 따름은 예수 의식하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따르기는 의식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의식(意識)하다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것을 두드러지게 느끼거나 특별히 염두에 두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자다가 깨어나 사물을 인지하는 등의 감각적 의식과는 용례가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은 병석에 누워계시는 어머니를 의식하고 유산 싸움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목소리를 낮추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각적 의식이 아닌 심리적 의식을 드러내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 유산 싸움을 벌이게 된 상황에서 이 사람의 마음에는 유산보다 어머니가 두드러지게 느껴진 것입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어머니라는 존재가 가장 돌출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제목과 연관된 의식하기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의식하는 것은 예수님을 두드러지게 느끼거나 특별히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곧 가정이라는 상황보다도 예수님을 두드러지게 느끼고 예수님을 특별히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라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특별히 돌출한 분으로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의식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잘못된 예수 따름 즉 사이비 예수 따름의 세 번째 경우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보면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농부가 손에 쟁기를 잡은 상태에 비유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심을 한 사람이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고자 함에 대해서는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이 정면을 응시하는 대신에 뒤를 돌아보는 것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이 비유의 광경이 어렵잖게 상상이 됩니다. 쟁기를 잡은 농부는 곧게 뻗은 고랑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쟁기가 도착할 지점에 시선을 두어야만 합니다. 쟁기가 나아가는 동안에도 시선은 기준점에 붙박이가 되어 있어야 고랑이 똑바르게 됩니다. 그런데 쟁기를 잡은 사람이 뒤를 돌아본다거나 시선이 좌우로 흔들린다면 고랑은 똑바르게 만들어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사이비 예수 따름의 세 번째 경우가 됩니다. 이 경우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시선입니다. 예수 따름은 시선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사이비 예수 따름에 대해 지적하고 계신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에 앞서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고자 한 이유는 예수 따르기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대로 예수 따르기는 쟁기질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함입니다. 농부가 쟁기를 손에 든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제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켜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고자 한다면 시선은 예수님께 고정된 붙박이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러한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사적인 문제는 별도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전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지금 당장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수직상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별적으로 마음에 담고서 일단락 짓거나 마무리해야 하는 사적인 영역의 일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삶에서 예수님을 두드러지게 느끼지 못하고 예수님을 특별히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여전히 스스로 매듭짓고 마무리하려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경우와 우리의 삶의 경향을 비교해보자면 시작부터 예수를 따르지 못했다는 것을 진단할 수 있습니다.
쟁기를 잡은 사람이 뒤를 돌아보는 것의 문제는 시선입니다. 여기서 시선이란 예수님을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은 공생애 기간의 예수님을 실제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시선이 예수님을 향하고 있지 못함을 문제시하십니다. 쟁기를 잡은 사람이 뒤를 돌아보는 것과 같은 일이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문제시하시고 있는 것은 육체의 시선이 아닌 마음의 시선입니다. 우리는 이 마음의 시선을 의식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의식(意識)이란 “어떤 것을 두드러지게 느끼거나 특별히 염두에 두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께 적용해보면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서 돌출해 있는 분으로 느끼고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이러한 의식하기의 지속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상황을 대하더라도 마음에서는 예수님을 두드러지게 돌출된 분으로 느끼고 특별히 염두에 둘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중단된다면 그 상황에서 예수 따름도 중단됩니다. 이것이 “예수 따름은 예수 의식하기”라는 제목의 의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나서고자 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던 열두 제자나 추종자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상황보다 집에 있는 가족들을 두드러지게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가족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가족을 의식하게 되면 예수님 따르기는 중단되고 맙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풀어보자면 “너는 지금 나를 보고 있고 내 이름을 부르고 나와 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따르는 것은 중단되었다.”라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사람은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고 예수님과 대화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예수님보다 가족이 돌출되어 있었고 두드러지게 느끼고 있었기에 예수 따르기는 중단되고야 말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 따르기가 너무 빡빡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 따르기는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며 그로 인하여 주어지는 결과는 어마어마합니다. 말씀으로만 들으면 도무지 예수 따르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해보면 이보다 더 쉬운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예수 따르기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이 아닌 삶의 상황들을 두드러지게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경향은 몸을 입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인지상정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서 두드러지게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 따르기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예수 따르기는 먼저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에서 “예수님!”하고 불러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디 계신가를 찾아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 통로의 입구에 서서 우리를 오라고 손짓하며 계십니다. 그리스도 통로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연쇄적 사건입니다. 이 그리스도 통로의 입구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어진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가정이든 회사든 학교든 몸이 존재하는 곳에서 마음은 물들게 됩니다. 마음이 세상에 먹히고 정복당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나를 세상에서 탈출시키시는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이 탈출을 위한 통로의 입구에서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계시다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만나주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만난 예수님을 어떻게 따를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결심했듯이 우리에게도 결심이 필요합니다. 이 결심이란 마음에서 예수님이 가장 두드러진 분으로 여기겠다는 결심입니다. 회사에서는 사장님 부장님 과장님이 두드러진 의식의 대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결심은 사장님 부장님 과장님보다 예수님을 두드러진 의식의 대상으로 삼고자 마음먹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통로를 따라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세상에서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 버림받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회사에서 사장님을 두드러지게 느끼는 나를 “이런 나는 안 된다!”라고 여기며 스스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에 비록 회사에서라도 사장님이나 업무가 우선적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또 동일시합니다. 세상을 두드러지게 느껴서 받아들이게 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며,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이 동일시는 예수님과 나를 동일한 존재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죄인이고 예수님은 의인이시기에 결코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구원을 받아야 할 자이고 예수님은 구원을 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동일시란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실 필요도 없으셨으며, 버림받으실 필요도 없으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도 없고, 부활하실 필요도 없고 승천하실 필요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셨고 나를 위해서 버림받으셨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하여 탈출의 통로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아버지께로 수직상승할 수 있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일시란 예수님이 만들어 놓으신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동일시를 통하여 예수님의 통로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부모로서 가정이라는 상황에 속해있습니다. 자녀의 문제가 마음에 두드러지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마음은 자녀 문제에 물들게 됩니다. 이러한 나의 마음이 잘못되었음을 진단하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이렇게 세상에 물든 나의 마음을 버릴 수 있는 준비를 이미 해두셨습니다. 버려지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그럴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자기 십자가 지기가 이루어집니다. 자녀의 문제가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기가 이루어지면 예수님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부활한 마음에서는 자녀가 더 이상 두드러지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이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상황이 됨으로써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승천하게 됩니다. 이것이 가정에서 예수 따름이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본문의 경우를 앞선 두 경우와 비교해봅니다. 앞선 두 경우에서는 미래에 대한 의식과 관계에 대한 의식이 문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경우에서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땅에 있는 것을 의식할 때에 예수 따름이 중단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앞선 두 경우를 포함하여 더 강화된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따름에 대한 세부사항을 치밀하고 확고하게 드러내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상황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도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마음에 담을 때에 예수 따름은 중단됩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에 의식될 때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부름으로 예수 따름은 시작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절대로 세상에 있는 어떤 대상도 돌출되고 두드러지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죄이고 이것을 묵인하는 것이 죄악이며 그로부터 나타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에서는 예수님만이 두드러진 대상이셔야만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두드러질 수 있는 상황은 실제로 우리에게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마음에서 두드러진 대상으로 인식할 때에 죄가 없어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셨습니다. 이러한 조건에 의해 우리의 마음에서는 예수님만이 두드러지게 느껴져야만 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마음에서 두드러지게 의식되었다면 이미 그 사람 앞에서 죄인이 된 것입니다. 나는 물론이고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죄적인 상태는 중지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위해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예수 따르기는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버림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연쇄적 사건의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때에 내 마음에서 그 사람보다 예수님을 더 두드러지게 느끼게 됩니다. 누군가와 말하는 중에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고,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 앞에서 주님과 함께 부활하고 승천하였음을 인정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은 사람 앞에 있지 않고 하늘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마음이 떠난 자리에는 하나님의 뜻과 주권이 내려오게 되고 그 결과 이 사람과의 만남의 자리가 하늘나라가 됩니다.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과 같이 이렇게 예수 따르기를 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소중하게 여겨지는 가족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전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버린다면 당연히 가족들은 크게 염려할 것입니다. 실종되었다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은 결코 불필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화가 있는 이 시대에도 가족과 잠시 연락이 끊어지면 걱정을 하게 되는데 그 옛날에 예수님 말씀대로 매몰차게 행동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경우에서처럼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봉양하다가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과 작별만 하고 오겠다는데도 예수님께서 이를 강하게 비판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의식과 시선을 염두에 두고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이 문제시하신 것은 실제로 작별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닌 의식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예수님께 붙박이가 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의식 상태를 농부의 시선을 비유로 삼아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여도 세상에 남겨둔 문제가 마음에 걸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온전한 예수 따름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상태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가족과의 작별과 같은 문제들은 처리가 되어야만 합니다. 다만 내가 처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고 예수님을 의식하고자 하다면 그러한 문제들은 더 이상 나의 문제가 아닌 예수님의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나의 마음에서 의식하지 않게 된 문제는 예수님께서 처리하시는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 사적인 영역을 분리하고 가족의 문제를 매듭짓고자 했던 제자를 나무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만을 의식하기에 앞서 매듭짓고 싶은 일, 일단락 짓고 싶은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일단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면 이 세상의 일은 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일이 예수님과 하나님의 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과 하나님의 일로 변화하는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의식과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으로 채워지기 위한 마음 공백이 있습니다. 이 공백의 마음 상태가 바로 우리의 영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채워지고자 하는 욕구가 의식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이러한 의식을 예수님께 고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만드신 그리스도 통로를 통해 하늘로 올라가게 되고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 채워짐의 결과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식은 매순간마다 예수님의 연쇄사건을 따라 동일시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의식함을 통하여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졌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떠난 세상일들에 대해 뜻과 주권을 발휘하십니다. 본문에 나타난 사람이 작별인사를 하지 못한 가족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내려다보고 계시는 중이셨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의식할 수 있었다면 그로부터 나타나는 모습은 마치 하나님을 카메라 렌즈로 삼아 가족을 바라보는 형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마치 공중에서 촬영을 하는 드론처럼 하나님의 눈이 가족을 보고 계심을 땅에 있는 나의 의식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가족에게 느끼시는 바가 전달되며, 가족에 대해 취해야 될 입장과 태도와 행위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 됩니다.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마주하고 있을 때도 당연히 예수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두드러지게 느끼는 상황에 대해 안 된다고 느껴서 자기 부인을 하고, 예수님의 연쇄적 사건과 나를 동일시함을 통해 자기 십자가를 집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의 의식은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가신 예수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되고 기쁨과 만족과 평강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럴 때 내가 마주하는 사람을 보고 계신 하나님의 시선에 나의 의식이 달라붙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은 말로 설명하기가 참 난감합니다. 해봐야 알 수 있는 말씀이며 해보았기에 드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실제로 경험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따르기는 예수님을 의식하기를 반복함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연쇄적 사건을 나와 동일시할 수 있고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이르게 됩니다. 사도행전 7장 56절을 보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을 기록하며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예수님을 의식함을 통하여 예수 따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도 마음에 평강이 주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선이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에게도 임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용서의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돌로 치는 사람들을 원수가 아닌 불쌍한 자로 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이 스데반 집사님의 시선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예수님과는 별개로 매듭지어야 한다고 느껴지는 일들, 마음에 켕기는 일들, 찝찝함이 남은 일들, 만나서 담판을 지어야만 할 것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다 마친 후에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들을 남겨둔 채 우선 예수님을 의식하기에 몰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두드러지게 느끼기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세상을 두드러지게 느끼는 나를 부인하고,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함을 통해 자기 십자가를 집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참여할 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두드러지게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에 기쁨과 만족과 평강은 주어질 것이고 우리의 삶에서 문제로 느끼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 계시던 하나님의 시선에 나의 의식이 달라붙게 됨을 느끼게 되실 것입니다. 마음에 찝찝함을 남기고,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대로 놔두면 큰일 나겠다고 느꼈던 모든 일들에 대해 이미 하나님이 보고 계셨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시선에 나의 의식을 맡기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보시고 느끼시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놀랍고 기가 막히는 사실을 체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언제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의 통로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가장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누구 앞에서든지 어떤 상황에 대해서든지 기필코 예수 따름에 성공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