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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과거 여행
김 광 욱
1
보도에 수북히 쌓인 은행잎을 밟으며 저녁 여섯 시에 퇴근했다.
사무실 건물을 나오면 황야 같은 도시의 끝자락이 보이고 그 뒤에는 물감을 칠한 듯한 단풍산이 있다.
작년에도 이 길을 걸었고 재작년에도 그 산은 그대로였다. 어제도 그녀를 생각하고 오늘도 그녀가 뇌리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숫자와 씨름할 때도 담배연기 속에서 심각하게 회의를 할 때도 그 얼굴이 뇌리에서 불현듯 살아나곤 했다.
그녀와 나는 삼 년 전에 이 거리에서 헤어졌다. 그때도 저녁 어둠 사이로 은행잎이 펄펄 휘날리고 있었다. 이별의 언어 위로 은행잎이 떨어지고 눈물 젖은 눈동자 위로 한 잎 두 잎 천천히 굴러 떨어졌다. 재크나이프보다 예리한 하현달이 차갑게 두 그림자를 각각 비추고 있었다.
서로의 이상이 맞지 않단 걸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의 느낌은 어긋나기 시작했었다. 사사건건 비뚤어지고 꼬이기만 했었다. 아름다운 표피 뒤에는 쓰레기 같은 내면이 가면 속 얼굴처럼 내다보고 있었다. 따뜻한 정도 향기로운 대화도 없이 만나면 헤어질 구실만 찾았다.
오해, 갈등, 의견 충돌, 다툼, 이별, 화해-
그리고 또 결별 선언-
그런 단어로 점철되었던 나날들. 정착하지 못한 비합리적 시간들. 그렇게 우리 사이는 멀어지고 무너져 갔다.
언덕길 너머로 사라지는 너를 보내면서 네 어깨 위에 떨어지는 달빛이, 흩날리는 은행잎 사이로 납처럼 차게 빛남을 보았다. 그것을 네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후 삼 년 동안 난 얼마나 후회하고 나의 어리석음을 자책했던가. 나는 너를 붙잡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내가 조금만 이해했더라면 너를 그렇게 초라하게 만들지 않았으리라.
은행잎이 수북히 쌓인 길에서 나는 거기 달빛 아래 은행잎처럼 무수히 누워 있는 네 그리움을 눈물로 밟고 있다.
2
그녀가 음독자살했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에 달려갔을 땐 병원 뜰의 커다란 은행나무에서 노란 은행잎들이 저녁 어둠 사이로 숭숭숭 떨어져 꽂히고 있었다.
사층 병동의 창문까지 뻗어오른 해묵은 은행나무였다. 병실의 형광등 불빛에 반사되어, 노란 은행잎은 약간 푸른빛을 머금고 가을바람에 무차별적으로 마구 지고 있었다. 빽빽했던 잎들이 빠져나간 자리엔 헐렁한 공간이 생기고 그 때문에 줄기들은 춥고 외로워 보였다. 연인과 작별한 뒤의 쓰라린 아픔 자리처럼.
그녀는 사층 일반병실 침대에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얼굴을 창쪽으로 향한 채 잠들어 있었고, 거기에선 뜰에서 본 그 은행나무가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내가 노크하고 병실로 들어가자 그녀를 간병하고 있던 올케언니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올케언니는 초면이었지만 점잖은 태도로 보아 올케라고 추측되었고, 내게 전화한 사람도 올케였을 것이며, 나갈 때 환자를 깨워 줄 만큼 경과가 좋아 보여서 감사했다. 그녀는 왜 음독자살을 기도했을까? 그 답은 지금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먼 훗날에 밝혀지리라.
그녀와 내가 결별을 선언한 지 삼 년 후에 일어난 일이니까 내게도 그 책임이 있으리라. 그녀와 내가 침묵하는 동안 어색함을 메꾸려고 침대 위에 놓인 조그맣고 예쁜 수첩을 펼치자 첫 장에 내 이름과 전화번호가 눈에 띄었다. 다른 전화번호나 메모가 적히지 않은 빈 수첩.
좋은 의미에선 순수하고 나쁜 의미에선 단조롭던 그녀의 사고방식을 닮은 이 수첩도 결국 그녀 이상의 그 무엇을 입증할 건더기는 되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모든 걸 그녀 이하로만……
그것이 우리가 떨어지게 한 이유이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잘못했어. 우리 다시 시작하자.”
“이미 늦었어요.”
“늦지 않다. 시간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어. 우리가 마음먹기만 하면 더 멋있게 출발할 수도 있다구.”
“그렇게 새출발하기엔 너무 산산조각 나 버렸다니까요. 깨진 유리컵을 주워 모아 재생한다고 해도 너무 엉망이 돼 버려서 쓸모없을 거라구요.”
나는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왜 우리는 이렇게 됐을까. 이유는 상대방을 너무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 시간 다음에는 어떤 시간이 오리란 걸 이미 다 알고 있으므로 기대할 것도 예쁘게 포장할 것도 없었다.
그럴 때 현명한 연인들이라면 그 갈등을 타고 넘는 슬기를 발휘했겠지만 우리에겐 그런 기교가 없었던 것이다.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에게 없는 그 무엇이 되고자 하는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 다 똑같이-
3
왜 그렇게 미워했을까? 그 이유를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녀와 다섯 번째 맞은 크리스마스. 우리는 그날도 약속을 하고 난 또 예외 없이 지각을 했다. 지각하는 것이 나에겐 습성이 되어 자연스러웠다. 그것이 내 자존심이라고 생각한 못된 습성이었다.
불안한 성탄절 이브에 흰 눈이 소담스럽게 뿌리고 있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극장길 모퉁이에 가로등이 하얗게 웃고 있었다. 수천 개의 국화송이가 바람에 흩날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하얀 테이프 가루가 어둠 속에서 축하의 폭죽처럼 쏟아져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극장 앞 넓은 길에서 젊은이들이 눈싸움과 얼음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소리치고 떠들면서 넘어지고 뒹굴고-
시간이 흐를수록 숫자가 늘어나서 그곳은 장속같이 시끄러웠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를 만끽하려는 듯-
그 속에 그녀가 있기를 기대했으나 그녀는 새침하고 거만한 얼굴로 껌을 짝짝 씹으며 매표구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 분 늦은 것에 신경질부터 냈다. 그녀를 위해 화원에서 사 온 꽃다발이 의미 없어지고 말았다.
“난 그런 꽃 싫어. 국화꽃이 다 뭐야 이 겨울에. 누구 초상났나?”
나는 화가 나서 꽃다발을 길바닥에 힘껏 내던졌다.
“그래. 한 달 만에 만나서 첫인사가 고작 그거야? 그렇게 할 말이 없어?”
“난 원래 무식해서 그렇게밖에 표현 못해.”
이렇게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처음부터 빗나갔다. 그녀는 약속 시간 훨씬 전에 와서 늦게 오는 나를 야만인이라고 약올리고, 약올리는 데 환희를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약속 시간을 지키려고 직장 상사의 눈치 보며 하던 일 밀쳐두고 빠져나왔는데 매번 지각이었다. 그녀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옷을 벗을 때의 그녀는 불처럼 뜨겁다는 걸. 자존심도 이성도 필요없는 후덥지근한 상황이 그녀와 나를 기다린다는 걸.
우리가 오 년 동안 사랑을 이어온 것은 그 밤의 매력 때문일 게다. 성탄절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그녀는 북극의 백곰처럼 차갑게 변해서, 세수와 화장을 끝내기가 바쁘게 도망치듯 여관방에서 나갔다. 잠꾸러기인 내게 이런 쪽지를 남기고.
<날 정복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연희>
그 일은 이제 지나간 추억이 되었다. 우리들에게 그 시간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4
소설이 싫어 소설 속에서 떠난 사람이 소설가와 결혼했다. 그 사람은 지방 신문사 간부이자 자기 신문에 연재소설을 쓰는 운 좋은 작가였다. 나는 그의 소설을 본 적은 있지만 제대로 읽은 적은 없었다. 특정 신문에만 게재되고 내가 그 신문을 보지 않으므로.
우연히 그 신문에서 그들의 결혼 광고를 발견하고 그녀가 결혼한 사실을 알았으며, 나도 질세라 시골의 갑순이와 결혼을 서둘렀다. 갑순이는 고향에서 함께 자란 우리 호박의 별명.
결혼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녀도 불행했고 나도 불행했다. 신문사가 망하자 그녀의 남편은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쳐다녔고 그녀의 호화로운 집은 경매로 넘어가고 그녀는 아기들과 함께 항구로 이사해서 서점에 취직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이십 년 후에 그 항구 거리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한 아줌마가 돼 있었고 그녀 옆에는 다른 남자가 동행하고 있었다.
소설가와 이혼하고 새남자와 재혼한 것이었다. 그녀는 대담하게 새남편에게 나를 소개하고 나와 단둘이 걷는 용단을 보여 주었다. 남편은 ‘내 아내가 과거에 사랑했던 시인을 알게 돼서 반갑다’고 허풍을 떨며 둘이서 잘 놀고 집으로 꼭 모셔 오라고 아내에게 당부했다. 아내가 딴 남자와 붙어 있는 걸 너그럽게 이해한 것이다.
승용차 밖으로 손을 흔들 때 그의 붉은 대머리가 대리석처럼 햇빛에 반짝거렸다. 그것은 야유가 아니고 예의인 것 같았다. 예의를 깎듯이 따지는 사람. 그녀와 잘 어울리는 커플이길 바랬다.
먼저 나를 알은 체한 쪽은 그녀였었다. 나는 까닭없이 심심하면 열차를 타고 항구에 와서 어슬렁거렸고 그녀가 옛날에 살았던 산동네를 배회했다. 그 언덕 위에 서면 다닥다닥 붙은 가옥들 아래로 시퍼런 바다가 이를 갈고 있는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갈매기떼들이 먹이 찾아 마을 뒷산까지 날아와서 배회하다 돌아갔다 마치 나처럼.
그녀와 나는 그 언덕길을 다시 걸었다. 초겨울 햇살이 눈부시게 등짝을 내리쬐고 바람도 불지 않고 봄날처럼 푸근했다. 옆구리가 따뜻하여 돌아보니 그녀가 내 옆에서 바짝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친구로 기댈 뿐이라고.
신간 편한 중년여성들이 그렇듯 외롬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고 친구들과 노닥거리고 먹고 즐기는 방법만 연구하게 됐다나.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 마음 다해 사랑할 사람도 없지만 ‘그때 그 추억’이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모든 일에 이기적이고 외골수이고 독단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던 우리들.
우리는 그 벌을 받는 것이다. 한번 만든 과거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과거는 지워지지 않고 뇌리를 맴돌며 그녀와 나를 괴롭혔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나보다도 더 많이 그녀가 괴로워하고 훨씬 더 아팠을 거라는 것을.
그녀는 나를 잊지 못해 음독자살을 기도하고 그 후유증으로 돼지처럼 살이 찌는 병에 걸려 고생했다. 지금도 고생하고 있다. 그녀가 얼마나 나를 깊이 사랑했는가를 깨달았을 땐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게 변해 있었다.
“남편은 저를 이해하려고 해요. 제 자유를 구속하지 않고 제가 가정에 충실한다는 전제 하에서 결혼했죠. 지금까지 충실하게 아내 역할을 다했지요. 아무 신념도 없이……”
“좋은 사람 같던데 잘해 줘요. 내게 한 것보다 더……”
남편에게 잘해 주란 내 말에 그녀는 흥미없는지 딴전만 보았다.
“당신에게 내가 뭘 잘해 줬나요? 괴롭히고 속만 썩혔죠. 그걸 사랑이라고……용서해 주세요.”
“용서를 빌 사람은 나야. 무릎 꿇고 사죄하고 싶어.”
그녀는 내 손을 꼭 쥐고 울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달라진 것은 세월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소설을 쓰고 있고 그녀는 주인공이었다. 아름다움도 슬픔도 기쁨도 그녀에게서 비롯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이제 새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었다. 더 아름답게 더 깨끗하게 더 성숙하게-
그 의미는 슬픔과 외로움도 동반할 것이다.
5
그녀의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다.
한창 업무에 바쁜 시간이었다. 탁자에 있는 두 대의 전화벨이 동시에 울렸는데, 나는 한 대의 전화 수화기를 탁자에 내려놓고 남편의 전화 수화기를 턱과 목 사이에 끼운 채, 두 손으로 보고서를 만들면서 통화했다.
통화하는 동안 다른 수화기에서 계속 여자의 목소리가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것은 민원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동료에게 민원 처리를 부탁하고 그녀의 남편 전화에 신경을 썼다. 다른 어떤 전화보다도, 내 밥줄이 달린 보고서보다도 그녀와 관계된 전화는 가장 긴급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아내가 이혼을 원하고 있어요.”
“왜요?”
“이제 헤어질 때가 됐다는 거예요. 이유를 말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헤어지자고 떼를 쓰잖아요 글쎄. 제가 썩 아내 마음에 드는 남편이 아니란 걸 잘 압니다. 난 인물도 못 났고 내세울 것도 없는 뱃놈이니까요. 일 년 중 열 달을 밖에서 생활하는 나 같은 놈을 좋아할 여편네가 없겠죠. 죽고 싶습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가슴이 답답해지며 담배가 생각났다. 담배는 옷장에 걸린 양복 호주머니 안에 있을 게다. 옆자리에 아가씨가 있어 담배를 최대한 참고 있는 나.
내가 할 말을 잊고 입맛을 쩝쩝 다시며 곤혹스러워 하자, 보기에 안 됐던지 아가씨가 담배를 꺼내다가 불을 붙여 준다.
아가씨에게 고맙다고 하고,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가려 애썼다. 이것은 장난이 아니다. 이 순진한 남자가, 거칠고 성미 급해 보이던 그녀의 남편이란 이 사내가 마음먹으면 무슨 일인들 못하랴. 아내를 살해하고 동반자살이라도 한다면……
나는 밤기차를 타고 항구로 달려갔다. 입에 바른 말을 백 번 전화로 하느니 등이라도 다둑이며 위로하고 싶어서.
그는 내가 성실한 가장이란 걸 알고 나를 의심하거나 미워하진 않았다. 나를 통해 내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했다.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 나여서가 아니라 그냥 그의 생각에 내게 매달릴 만하니까 매달리는 것이다.
“우린 사실 오래전부터 별거해 왔어요. 두 아이를 내가 낳은 자식처럼 사랑했고 애들도 나를 친애비처럼 좋아해요. 이젠 다 커서 날 동정할 줄도 알아요. 난 마누라 앞에서 촉도 못 쓰는 공처가라오. 그 여자 성미 아실 거예요. 그 성미는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거만하고 도도하고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죠. 걸핏하면 무식하다고 날 경멸하고 구박하고, 밥도 못 얻어먹고 굶은 적이 많아요. 내가 참는 거죠 가정을 지키려고……”
그는 나를 붙들고 아이처럼 훌쩍훌쩍 울었다. 그녀와 나의 관계를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고 질투하지도 않으며 다만 내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내가 나서서 그들의 부부 관계를 소설처럼 복원해 주기를……
그에겐 질투할 마음의 여유도 없어 보였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이다. 아내와 헤어지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겐 애정보다도 가정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술이 얼큰해지자 아내의 결점을 들추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혼하자고 하면 아내를 죽여 버리고 자기도 분신자살할 거라며 “나쁜 년, 더러운 년”하고 거침없이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퍽퍽 울면서 말이다.
그것은 내 모습이었다. 내가 그녀와 결혼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게다.
사랑하는구나.
사랑이 따로 있는가. 우리 나이에 애정과 결혼을 구별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애정의 피해자들이다. 좌절하지 않으려고 애정의 끄나풀을 말채찍처럼 들고 마차를 몰아야 한다. 그는 채찍을 놓지 않는다.
나는 마음이 놓였다. 나는 그들이 이혼하는 걸 방관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어쩜 그녀가 꾸민 연극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소설 속에서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가. 삶과 소설을 구별 못하는가 말이다.
그녀의 성격은 차갑고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이고 고집 세고 남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게 그녀의 장점이기도 했다. 그만큼 자기를 사랑한다. 상대방이 자기 곁에서 떠났음을 알았을 때 비로소 가슴 열고 진심을 보여주는 한발 늦은 사랑. 형광등 같은 여자. 그게 그녀의 사랑 방식이다.
나는 믿고 있었다. 그녀가 남편과 헤어지지 않으리란 것을.
그 나이에 또 다른 남자를 만나 재혼할 수도 없는 여자였다. 내가 옛날에 사랑한 그녀는 그렇게 마음이 모진 여자가 아니라고 기억한다.
이 폭풍이 무사히 지나가길 기도해야겠다. 나를 위해서라도……
6
옛날에 우리가 만났던 선창가 작은 술집. 바다가 보이던, 추억이 묻은 그 자리.
한창 미칠 듯 좋아했을 땐 밤기차를 타고 와서 비비고 시시덕거렸던 여관 겸 술집이었다. 물론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동물적 행위가 끝나면 무슨 이유에선지 싸늘히 돌아서서 티격태격 물어뜯고 싸우는 적이 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 술집은 없어지고 지금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서 부두의 높은 철책 담벽에 가려 바다도 보이지 않지만, 나는 생각나면 가끔 기차를 타고 그 부두에 간다. 옛날 술집 있던 건물 이층에 ‘카페’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선 부두 한쪽이 바라다보였다. 여객선 터미널에선 선박들이 들어오고 떠나고 커다란 화물선에서 분주히 하역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떠나는 배를 바라보면 괜히 눈물이 나고, 반대로 입항한 배에서 하역작업하는 광경은 신나고 마음 설레게 했다. 마치 그 많은 짐들이 다 나의 것이라도 되는 양……
맥주 한 병을 시켜 놓고 한나절 내내 마시며 그녀를 기다렸다. 약속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나타날 것 같았다. 어젯밤 그녀 남편과 만나 곤죽이 되도록 마셨고 아직도 술이 덜 깬 상태다.
그녀의 남편은 대주가였고 나는 마시는 흉내만 냈는데도 술이 빨리 취했다. 그러고 보니 그와 나는 저녁을 먹지 않고 술만 냅다 마셨던 것이다. 나는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가는 밤기차가 없을 뿐더러 돌아가고픈 마음이 일지 않았다. 새벽차가 있으나 나는 돌아가지 않고 아내에게 일이 있어 못 들어간다고 전화했다. 직장에는 몸이 아파서 쉰다고 해 두었다.
사실 나는 그녀 남편을 위로해 줄 의무가 있었고 그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었기에 거짓말한 건 아니다.
눈을 떠 보니 여관방에 누워 있었다. 그녀 남편은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도 나를 들쳐업고 이 여관방에 데리고 왔고 숙박비는 그가 계산했으며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부두 식당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을 때우고 선창가를 한 바퀴 구경하다가 이 카페에 들어왔다. 어젯밤에 그녀 남편과 마셨던 이층 카페였다.
그녀가 나타날 줄 알았으나 오후가 돼도 오지 않았다. 남편과 술 마신 사실을 몰랐든지, 그녀의 불안정한 가정생활이 부끄러워서 알고도 오지 않는지 모른다. 그녀의 옛날 습관대로라면 근처 어디쯤에 숨어서 내 동태를 감시함직도 하건만, 나는 그 기대를 싸늘히 비웃으며 찻시간을 알기 위해 기차역으로 전화를 했다.
올라가는 기차는 세 시에 있었다. 아직 두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내가 그녀에 대한 기대를 부정한 데는 그 나이에 부질없는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때문. 그녀는 이미 옛날의 철없던 아가씨가 아니고 대학생과 고교생 자녀를 둔 늙은 가정주부였다.
카페로 외부 전화가 몇 번 결려왔으나 내 전화는 아니었다. 그녀는 전화하지 않았다.
역 대합실 매표구에서 표를 사려고 지갑을 꺼냈을 때 누군가 내 옆으로 쓱 다가왔다. 그녀였다. 그녀는 미리 사 둔 기차표를 내게 내밀었다. 하마처럼 비대한 육체에서 바다냄새가 풍겨 왔다. 그 옛날의 그 냄새는 변함없었다.
기차가 도착할 때까지 그녀와 나는 역전 광장을 거닐었다. 양품점 앞을 지나가다가 국화꽃 무늬의 스카프를 하나 사 주었더니 “또 국화꽃!”하고 눈을 흘겼다. 겨울 국화는 장송곡 냄새가 나서 싫다고 한 그 말을 또 잊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스카프를 바꾸지 않고 목에 감았다. 목에 감긴 스카프 자락이 치렁한 머리카락과 함께 내 얼굴로 날아왔다. 거센 바닷바람에 우리 모두 날아갈 것 같았다. 내가 바람에 밀려온 그녀의 몸을 살짝 껴안아 주자 그녀는 내 손을 꼭 쥐어 주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술도 잘 하시지 못하면서 과음해서 어떡해요?”
“이혼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기차를 타고,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어.”
“알아요. 걱정해서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걸. 하지만 견딜 수가 없는 걸요. 기대일 가슴이 없어요 가슴이 아니었어요.”
“생각은 만들면 된다. 그 무엇을 남에게 요구하려 하지 말고 자기가 찾으려고 노력해 봐.”
“여전히 어려운 말만 하셔. 이젠 자유롭게 해방되고 싶어요. 나 자신으로부터. 난 아무 것도 만들 수 없는 여자란 걸 아시잖아요?”
“지금도 늦지 않아. 지금부터 시작하는 거야. 그 사람은 당신 없으면 죽는다. 자네도 죽고.”
“생각해 보겠어요. 이 상태로 계속할 수 있겠는지.”
“생각이 아니고 노력해야 해.”
내가 기차에 타지 않겠다고 고집하자 그녀는 그 육중한 체구로 나를 승강구에 밀어넣었다.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푸대접해서 미안해요. 날 찾아오셨는데.”
“그런 말은 하지도 마! 내 말 명심하라구!”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고 웃기만 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요. 그 누구도 남의 인생을 살아 줄 순 없지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옛날 고집쟁이 시절과 똑같이……
7
-친구.
이젠 친구라고 부르기로 하지. 결혼이란 말이야 아이들 장난이 아니라고. 하나의 인생을 만드는 과정이지. 그래서 결혼을 인생의 새출발이라고 하기도 하고 새로 태어난다고 하기도 하지.
연희는 두 번 결혼했으니까 두 번 태어난 셈이야. 이번이 마지막이 돼야 해. 두 번에서 끝나야 한다고.
연희의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더 이상 방황하지 말아요. 마음껏 비상했던 날개를 접고 지상의 보금자리에 안주해야 해.
연희의 보금자리는 지금 연희가 입고 있는 옷(가정주부라는). 연희의 집. 가족들. 연희가 가진 그 모든 것 속에 다 있어요. 그 옷을 벗으려 하거나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집을 훌쩍 떠나거나 가정 이외의 다른 어디에서 안식처를 찾을 생각을 해선 안 돼. 그건 또 한 번의 시련을 의미할 뿐이지.
이 세상에 만족한 부부가 얼마나 있을까? 그 부모들을 바라보고 자라는 아이들은 부모라는 그 자체에 만족하고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보려 하지 않는다. 불편하니까. 부부도 그래야 할 거야.
두 사람의 타인이 만나서 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걸 결혼이라고 할 때 이미 우리 임무는 끝난 게 아닐까 해. 다른 임무를 또 만들 필요 없어.
그 사람을 외롭게 만들지 말아요. 그 사람은 연희를 사랑하고 있다. 연희에게도 그 사람의 언덕이 필요하다. 더 욕심 부리지 말고 현실을 사랑해요.
자유는 생활 속에 있는 거지 생활 밖에서 찾으려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자유가 아닐 것이다.
옛날의 친구로부터-
나는 편지 봉투를 풀로 붙여 우체국에 가지고 가서 부쳤다. 한 달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편지를 받고 답장을 안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녀의 예쁜 필체에 반해서 그녀를 더 좋아했다.
이기적이고 편집광적인 성격만 빼고 나면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하고 애정에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녀가 이혼을 하건 말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녀가 이혼하는 것과 안 하는 것과는 내가 받는 충격이 사뭇 다를 것이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나이고 그녀를 불행하게 한 것도 나였다. 우리가 만나지 않았다면 이별도 없었을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할 리도 없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게 그녀의 인생을 빗나가게 했다. 내가 그녀를 이해하고 떠나지 못하게 막았더라면 우리는 좀더 멋진 부부가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가정이고, 현실은 과거를 뛰어넘으려고 한다. 나는 그녀가 비운의 주인공이 되기보다는 평범한 가정주부이길 바랬다. 소설 같은 삶은 그녀 인생을 슬프게 만들 뿐이다. 그리고 나를 더 큰 죄인으로 만든다.
연말이 가고 새해로 접어들 무렵에야 그녀의 딸로부터 엄마가 병원에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밤기차를 타고 그녀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렸다. 그녀는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 있었다.
병명은 뇌출혈.
대학생인 딸과 고등학생인 아들이 병상을 지키고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왜 아빠가 오시지 않았냐고 묻자 딸이 울먹거렸다. 딸은 엄마가 쓴 편지를 내게 보여 주었다. 크리스마스 무렵에 써 놓고 부치지 않은 편지였다.
-아, 홀가분하다. 족쇄를 풀고 해방된 기분이야. 그 사람에겐 안 됐지만 난 해낸 거야.
그 사람에게도 난 필요없는 존재였다. 남편은 신사답게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더 붙잡을 이유도 없었겠지.
이렇게라도 내 배신에 대한 죄값을 대신할 수 있다면 난 또 한 번 이혼하고 싶다. 물론 죄된 일인 줄 알지만……
그대에게 내 진심을 보여 주고 싶다. 사람들은 날 미쳤다고 비웃을 것이다. 비웃을 테면 비웃으라지. 누가 내 마음, 내 인생을 살아 줄 것인가.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리가 쥐어짜듯 아플까?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난 너무너무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내 모든 행복을 체내에서 꺼내어 바다에 던지는 순간 내 진심이 그대에게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랬는데 그대의 편지는 지극히 사무적이고 너무 현실적이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으련다. 내가 선택한 자유를 그 누가 침뱉더라도 울지 않으련다.-
‘그 사람’은 남편이고 ‘그대’는 나를 지칭한다. 그녀의 병은 다행히 중증은 아니어서 다음 다음날 깨어났다. 퇴원하고 나서도 약간씩 다리를 절었다.
그녀의 회복은 빨랐고, 나를 보자 힘이 난다고 그녀는 농담도 했다. 여전히 마음은 그날 그때였다.
지팡이를 짚고 되똑거리며 서점에서 나오는 그녀를 보면 눈물이 나온다. 한 남자(새남편)를 불행하게 한 대가였다.
서점들이 불경기여서 그녀는 서점을 치우고 꽃가게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얼른 가게를 치우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많은 책들 속에 내 소설책과 시집이 있어서 그걸 버리기 아까워서라고 했다.
8
수많은 책들이 진열된 책들의 숲을 지나 그 속에 하마처럼 둔한 거구를 비적이고 앉아 있는, 평범한 상인이자 사업가인 당신을 찾으면 또 쓰라린 헤어짐이 먼저 와서 기다린다.
우리는 철부지 아이들이 아니고 마음놓고 만나 정을 나눌 연인도 아니다. 우리는 각기 가정을 가진 늙은 옛추억.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내겐 소중한 추억이다. 소유할 수 없는 사랑.
당신 자신은 분명히 당신 소유다.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소유할 수 없다. 소유하지 못한다.
당신은 이 서점의 사장이다. 그런데도 이 책들은 당신을, 당신은 이 책들을 다 소유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수십만 권의 책이 사랑이고 거기에 당신이 묻혀 있다. 엄청난 사랑의 무게에 짓눌려 비대한 몸뚱이를 주체하지 못하면서 그 속박을 떠나려 하지 않는 여자.
그건 소유와는 또 다른 의미의 진실한 사랑이 아닐까.
양파같이 탱탱하던 육체에 주름살이 한 겹 두 겹 생기고 마음에도 주름살이 쌓인다. 황혼이 서서히 내린다.
나는 아프지 않는데 어쩐지 괴롭다. 당신도 아플 일이 없는데 괜히 몸져눕고 싶어한다.
너에게 죄스럽다. 나는 너무도 사치스런 병을 너에게 선사했나 보다. 아무도 널 가엾다고 동정하지 않는데 너는 그렇게 행복하지 못하다. 자신을 행복하다고 생각하길 두려워한다.
나는 네 시선을 감당할 수 없다. 사랑의 벼랑 끝에 서서 연 날리기 하던 그 시절보다도 더 어렵게 만들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차마 똑바로 바라본 적이 있는가.
항구에 황혼이 내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가기 위해 식은 찻잔을 비우고 일어서야 한다.
바다가 보이는 부두의 이층 카페. 밤 열차를 타고 와서 홀로 부둣가를 배회하다가 그녀에게 전화하면 그녀는 언제라도 달려와서 내 곁에 있어 주었다. 옛날처럼. 허나 오해도 에고이즘도 없이 살찐 양처럼 피동적으로 몸을 흔들며 내 옆에 걷고 있었다.
나는 장사하는 그녀에게 미안해서 전화하지 않고 돌아갈 때도 있었다. 그러면 다음에 만났을 때 그녀의 원망을 들어야 했다.
“우리가 부정한 관계인가요? 왜 그렇게 부정해지지 못해 안달이슈?”
하고 나를 책망했다.
책망해도 내 양심은 그녀처럼 떳떳치가 못한 게 사실이었다.
맥주나 차 한 잔 나누고 막차 시간까지 바닷가를 함께 걸었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방파제 축대 위에 앉아, 하얗게 달려와서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표백된 추억이 새 빛깔로 염색되지는 않았다. 현실이 예리한 시선으로 우리를 쏘아보는 한 어떤 물감으로도 염색은 어려웠다.
연희……
이젠 마주 잡은 손을 놓고 늙은 타인이 되어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자꾸나.
우리가 헤어지려고 축대에서 일어서자 두 개의 껍질이 우리 발 아래로 스르르 굴러 떨어진다. 우리 체표에 남은 추억의 껍질마저 굳이 버릴 필요 있겠는가만, 가질 수 없는 건 버리는 게 좋아. 현실이 우리 관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버릴 건 버려야 한다.
버린 다음 새로 만드는 거지. 우린 인생의 친구로 태어나는 거야. 그건 뼈를 깎는 아픔이겠지. 우린 그걸 감수해야 해. 속죄양처럼 울면서.
9
몇 년 만에 항구에 다시 찾아왔다. 거리도 집들도 간판들도 거의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그 이층 카페의 네온 간판은 거멓게 먼지가 낀 채 항구의 바닷바람에 퇴색해 있었지만 여전히 밤이면 손님을 부르고, 연인들의 밀회 장소로 성업 중이었다.
나는 거기에서 맥주 한 잔을 걸치고 방파제 둑길을 따라 한없이 걷다가 열차 시간을 한 시간가량 남겨 놓고 ‘양지서림’을 찾아갔다. 이 도시에선 제일 큰, 대도시의 서점 못지않게 모든 책들이 빠짐없이 구비된 서점이었다.
일층은 일반서적, 이층은 전문서적, 삼층은 휴게실 겸 자유 독서실. 번화가에 위치해서인지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서점엔 젊은 손님들이 제법 북적거렸다. 이 사층 건물이 그녀의 집이었다. 안집은 사층 꼭대기에 있었다. 큰거리에서 보면 창문이 열려 있고 바람에 커튼이 살랑살랑 나부끼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녀의 집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바라건대 나는 그런 방문을 할 자격도 없는 놈이지만 또 방문해서도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내 얼굴에 수십 장의 철판을 깔았다고 해도 나는 그녀의 가정에 손님이 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아들과 딸이 성장하여 분가하고 우리가 호호백발이 된다면 또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그녀도 이 장사를 하지 않을 것이고 나도 직장에서 은퇴하여 인생으로써 별 쓸모없는 존재로 변해 있을 게다. 그래도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은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밤 열 시가 되니 그 많던 책손님들이 떠나고 서점 안엔 여사장 혼자 남아 있었다. 두 명의 직원을 먼저 퇴근시키고 혼자 남아서 책상에 엎드려 뭔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끼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찍으면서.
그녀는 일기를 쓰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옛날에도 거의 빠짐없이 매일 일기를 쓰곤 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역사이고 재산이었다. 문장은 유연하고 표기법이 아주 정확하며 그녀의 성격처럼 대범했다. 특히 애정의 감정 묘사가 적나라했다.
나는 지금도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왜 그녀가 소설가인 남편을 붙잡지 않고 이혼했냐 하는 것이다. 아마 성격 차이였을 게다. 알고보면 쥐뿔도 없으면서 공주처럼 여왕처럼 도도하게 사내 위에 군림하길 좋아했으니, 그녀의 남편이나 나 같은 꽁생원이 그녀의 드높은 이상과 욕망을 감당할 재간이 없지. 그것이 그녀의 핸디캡이라면 핸디캡이었다.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그런 자신을 항상 후회하고 후회만 하다가 젊음도 꿈도 놓쳤을 거라는 걸.
그러나 그 죄도 나에게 있었다. 내가 그녀를 꽉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 관계는 더 비약적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일기책을 덮고 의자에서 일어선다. 실내 전등불을 끄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이층과 삼층의 전등이 차례로 꺼졌다. 그녀는 아래층 셔터문을 내리지 않고 사층 안집으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사층의 창문이 스르륵스르륵 닫히고 거기에서 쏟아지는 불빛이 내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녀의 건강한 모습을 확인하고 홀로 미소 지으며 역으로 향해 걸었다.
큰거리로 걸어오니 거센 바람이 옷자락을 휘감았다. 역사까지는 십 분쯤 걸어가야 한다.
등뒤에서 여자의 구두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그녀가 절룩거리며 날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놀라지 않았고 그녀도 서먹하지 않게 내 곁에 와서 살며시 내 팔짱을 끼어 주었다.
“오셨으면 우리 집에 들어오셔야지, 예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시면 어떡해요? 우리가 그럴 사인가요?”
“어떻게 내가 온 줄 알았지?”
“창문을 닫다가 당신이 걸어가는 걸 보았지요. 몇 년만이에요?”
“한 삼 년 된 것 같군. 그동안 별일 없었소?”
“네. 보시다시피 그런 대로 겨우 지탱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너무 책을 보지 않아서 걱정이에요. 이웃나라 일본은 찻간에서도 공원에서도 젊은이들이 손에서 책을 떼지 않는다는데 우리 나라 애들은 못된 것 흉내나 곧잘 내고……내가 책장사여서 하는 말이 아니고 국가 장래가 걱정돼서예요. 내 자식들부터……”
“당신 애들도 책을 안 읽나?”
“안 읽는 정도가 아니고 책과는 숫제 남이라니까요. 어떻게 대학 입시에 붙을 궁리나 하고, 학교에서 배운 교과서가 독서의 전부예요. 나를 닮지도 않았어요.”
그녀는 불평을 터뜨렸다. 내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걸음을 재촉하자 그녀가 좀 천천히 걷자고 했다. 열차를 놓치면 여관에서 자고 가라고. 나도 그러고 싶지만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결심을 굳게 하고 돌아가는 밤 열차를 꼭 타려고 했다.
그녀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전보다 더 비대해졌다. 그런데도 밉지가 않다. 시덥잖은 첫사랑의 추억 때문일까. 아니다. 진실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벌레처럼 전신으로 덤벼드는 사랑의 향수들을.
거리 저편으로 역사의 파란 불빛이 보였다. 나는 나를 전송하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고 헐떡거리며 기어이 따라오는 그녀.
나는 자꾸만 샘솟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뜨겁게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변한 모습이기도 했다. 비대해진 만큼 애정의 두께도 비대해진 것이었다. 그 밀물 같은 그리움을 우리는 봉쇄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빈 택시가 한 대 달려왔다. 나는 택시를 세우고, 싫다는 그녀를 억지로 택시 안에 밀어넣었다. 이번엔 내가 승리했다.
떠나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택시는 빠른 속도로 어둠 속으로 질주했다. 눈을 감았다 뜨니 그녀를 태운 택시는 내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거리가 더 어두워진 것 같았다. 나는 꿈을 꾼 건 아니고 정말 그녀와 만났다 헤어진 것이었다. 나는 나의 쓸쓸함보다도, 그녀가 필경 나 때문에 울리란 걸 생각하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몇 번이고 그녀가 사라진 어둠 속을 뒤돌아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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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들
나(48)……소설가, 옛사랑이 그리워 항구에 찾아온다
연희(47)……나의 첫사랑,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중심적
남편(50)……연희의 두 번째 남편
올케언니
두 자녀
<감사합니다>

첫댓글 늘 열심히 창작활동하신 김광욱소설가님 한국문인협회 강진지부 으뜸이 되주신 점 인정하오며 늘 건필하시고 가정에도 축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