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자비수관의 수행방법
제1장 수행의 시작
2. 자비손 체험
6) 선정과 지혜
자비손의 자비심은 5대의 질적 변화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또한 분노·폭력·긴장·갈등 등의 부정적인 마음을 녹이거나 억제하여 마음이 고요[禪定]해 지게 합니다. 반면 알아차림[正念]은 5대의 현상을 삼법인으로 통찰하여 지혜[반야]를 계발합니다.
수행 중에 나타나는 5대의 수행현상은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의 감각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 시각상으로 5대로부터 나오는 5색의 아름다운 빛과 영상입니다. 영상으로서는 불보살의 영상이 나타나기도 하며, 청각상에서는 미묘한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데, 이것을 마치 깨달음인양 또는 대단한 체험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영상은 특히 자비손의 자비심의 영향으로 마음이 형상으로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영상이 자비손의 자비심에 의해 억제되거나 사라지고 대신 자비심의 형상화로서, 불보살의 영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상이 부정적인 심리를 안정시키고 신심과 발심을 촉발 시킬 수는 있지만, 그러나 5대의 빛과 영상 그리고 소리 등은 무상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집착함은 도리어 마장(魔障)이 됩니다. 무엇보다 영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빛과 영상·소리·맛·촉감·생각들의 근원은 부처의 성품으로 빛과 영상·소리·맛·촉감·생각들이 사라질 때는 불성으로 돌아가고 고요해 집니다. 그래서 수행현상으로 선정과 지혜가 궁극이라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몸의 감각이 사라지면 몸의 감각을 통해 불보살의 영상이 사라지지만, 선정과 지혜를 통해 객관화 되는 불보살이 곧 자신의 불성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선정(禪定)이 주객이 사라진 상태라면, 지혜는 주객이 본래 없음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키고 수행을 시작할 때는 외부에 사람·사물이 존재함을 보고 느끼는 등 주객이 분명하지만, 선정과 지혜가 생기기 시작하면 몸과 외부의 존재란 마음의 현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마음 밖에 다른 어떤 것도 없음을 깨쳐가는 것입니다.
선정의 중요성은 주객이 하나 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선정은 본래 주객으로 나누어진 적이 없는 진리로 들어가는 최후의 문입니다. 땅이나 산·하늘에서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선정이라는 마음의 장이 진리가 나타나게 하는 유일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선정에서 신통과 모든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는 거울과 같은 지혜가 생기며 중생구제의 힘과 행[功德]도 생겨납니다.
몸을 통해 선정으로 가는 데는 욕계의 정(定), 색계의 4선(禪), 무색계의 4정(定)이 있습니다. 자비심의 자비손과 정념의 알아차림으로 몸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몸 사라짐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는 대상에 감정과 생각을 개입시켜보는 욕망의 세계인 욕계의 경지입니다. 이때는 마음의 고요함이 생기지만 아직 몸의 촉각이 일어나며 시각·청각·후각·미각의 감각이 일어나므로 감각을 통해 일어나는 갖가지 영상과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남으로 해서 진정한 마음의 고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욕계의 감각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갖가지 영상이 나타나면,특히 불보살의 영상은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고 마음의 고요한 선정을 일으킵니다. 뿐만 아니라 불보살과 합일하게 되면 이는 자비관음수관의 수행이 됩니다.
대상에 대해 욕심으로 의미부여하고 또는 다른 것과 결부시켜보는 마음이 없어져 청정하게 되며 이때 보여 지는 세계가 곧 물질의 청정하게 보게 되는 색계의 경지입니다. 색계 초선의 경지에 이르면 후각과 미각이 사라지고, 여기서 계속 정진해 가면 시각·청각·촉각마저 사라져서 고요한 마음이 오로지 의식에 머물러 있는 경지에 이릅니다. 촉각이 사라지면 촉각을 통해 일어나는 몸과 관련되는 이미지와 갖가지 생각들이 조용해집니다. 나아가 숨이 끊어진 듯 호흡이 없는 체험은 색계 3선의 선정 현상입니다.
그러나 자비수관(慈悲手觀)은 선정만을 닦는 사마타[止]수행이 아닙니다. 지혜를 일으키는 정념의 알아차림을 함께 쓰는 지관쌍수(止觀雙修)입니다. 사마타의 선정수행으로 갈 때 잘못하면 감각을 소멸시키려고 하는 망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감각의 변화를 살피는 것으로 변화하는 자체가 고정된 자아가 없는 무아이고 머무르는 실체가 없는 공입니다. 이렇게 꿰뚫어 가는 것이 지혜계발입니다. 즉 감각이 일어나든 사라지든 그 본질이 무아·공임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무아·공이 드러날 때 존재의 본성을 보는 것으로 그것이 자신의 마음 자성임을 체득해 가는 것이 위빠사나[觀]수행입니다. 그래서 자비수관은 지관쌍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비심의 자비손에 솜과 같이 부드러운 감정을 실어서[자비면화수] 몸을 관찰 하다가 부드러움이 몸에 나타나면 이 현상을 놓치지 않고 몸의 부드러움만을 주시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고요해지는 선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은 번뇌망상의 흐름을 붙들어 매어 그치게 하는 사마타[止]입니다. 반면에 나타나는 부드러움을 주시하되 다른 변화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그 변화들을 따라가면서 변화의 실체를 직접 파악하다보면 지혜가 생깁니다.
이 방법은 번뇌망상의 뿌리를 잘라 버리는 위빠사나[觀]입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서로 보완적으로 작용할 때 마치 선정은 벼를 잡아 움직이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이 번뇌를 그치게 하고, 지혜는 낫으로 벼를 베는 것과 같이 번뇌의 뿌리를 자릅니다.
이렇게 깨달음은 선정과 지혜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자비손을 따라 몸을 관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될 것입니다.
우루벨라의 네간자라 강가의 보리수 아래에 결가부좌 하신 채 7일간 해탈의 황홀감을 즐기신 후 선정에서 일어나 초저녁·자정·새벽녘에 각기 12연기법을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을 통하여 보시고 괴로움의 일어남과 없어짐의 이치를 노래하십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순간을 노래한 초야(初夜)의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실로 열심히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바라문에게 진리가 현현(顯現:pātubhavanti)하게 될 때, 그때 그의 모든 의심은 없어진다」라고 하는 것은 그 연기(緣起)의 법(法)을 깨달았기(pajānāti) 때문에”
이 우다나(Udana 優陀那)는 선정의 장을 통해 나타난 진리가 연기임을 말합니다. 이 선정의 장(場)을 통한 제법(諸法)이 연기함을 깨달은 것은 반야(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무엇인가? 이 경전을 통해 본다면 진리란 땅이나 하늘·산·바다·나무 등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만 나타나며 갖가지 마음의 작용 중에서도 마음의 고요함인 선정이라는 장을 통해서 연기라는 진리가 나타나게 되고 이와 동시에 마음의 깨어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곧 『화엄경』의 해인삼매와 같습니다. 즉, 깨달음의 바다에 삼세(三世)의 일체의 진리가 나타나는 것이 마치 끝이 없는 큰 바다 표면에 모든 사물이 도장을 찍듯이 선명하게 비치고 있는 것에 비유되고, 「유식(唯識)」에서는 깨달은 부처님의 마음을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대혜어록(大慧語錄)』에서는 “오랑캐나라사람이 오면 오랑캐나라 사람이 비춰지고, 한나라 사람이 오면 한나라사람이 나타난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깨끗한 거울[明鏡]에 사물이 비칠 때 대상의 모습에 따라 있는 그대로 뚜렷하게 그 그림자를 비추고, 조금도 왜곡시키거나 감추는 것이 없는 신령스럽게 밝은 마음의 작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경전에서의 귀중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깨달음을 나타내는 파자나티(pajānāti;그는 깨닫다)가 반야(般若)의 동사형, 현재 삼인칭 단수(現在 三人稱 單數)로서 반야지혜라는 점에 있습니다. 117) 몸의 물질을 통해 받은 정보와 마음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가 있습니다. 마음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란,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의식·말나식이 대상(형상과 색깔·말·생각)을 인식함으로 인해 대상의 이미지가 아뢰야식에 저장되는 것을 말합니다. 몸 또한 아뢰야식입니다. 물질정보는 부모 이전의 부모로부터 유전적으로 물려받습니다. 그래서 자비손의 자비심에 의해 몸의 잠금장치가 해체되면서 몸에 저장되어 있던 사람·동물·식물 등의 갖가지 정보가 형상화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 .
동두천 금강사
HP.010-3306-0661
(대원스님)
.
나무대비관세음.wma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