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테의 돈으로 세상 읽기 60
사형의 자비
연일 흉포한 살인사건이 보도되고 있다. 당황스러운 것은 범죄자들의 살인 동기다. 그들은 이해관계는커녕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표적으로 했다. 소위 ‘묻지마살인’이 백주에 벌어지자, 온라인 공간에 모방범죄를 암시하는 글들이 이어졌다. 사형집행 시설을 점검하라는 법무부 장관의 공포탄이 얼마나 실효가 있을지 모르지만, 사형수만을 따로 모아 시시포스의 바윗돌을 나눠주는 특별구치소 설치를 바란다.
방송에서는 건장한 청년이 외출을 자제하겠다는 인터뷰를 내보내고 있다. 하지만 흉악범죄와 같은 사회 문제를 과도하게 부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공포심을 유발하는 사회불안 조성은 사람들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소비 감소를 초래한다. 시민들에게 필요 이상 방호비용을 부담케 하며 불신의 벽을 쌓게도 한다. 더한 우려는 모방범죄를 부추기고 미성숙한 아이들에겐 가치관에 혼란을 줄 수 있다.
언론은 늘 국민의 알 권리를 내세운다. 알고 싶지 않거나 알 필요가 없는 데도 굳이 꼼지락거리는 구더기를 밥상 위에 올려놓는다. 한편으론 흉측한 범죄를 실감 나게 재구성하고 수사기법을 노출하기 일쑤다. 기자들의 국어 실력은 할 술 더 뜬다. 현행범에게까지 ‘씨’를 붙이고 행위를 물을 때도 왜 그렇게 하셨냐고 존댓말 한다. 인권을 항문으로 배운 탓이다.
우리에게 어제는 평화였다. 인정이 넘치고 법이 필요 없는 사람들만 모여 살았다. 중증 기억상실이다. 효와 대동을 으뜸으로 여기던 조선에도 존속살인과 연쇄살인은 벌어졌고 강도와 도둑이 들끓었다. 해방공간에서는 건달 주먹이 명치를 내리눌러도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일반의 생각과 달리 치안이 잘 유지되는 나라다. 부녀자가 밤길을 혼자 걸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가이고 지하철에 돈 가방을 두고 내려도 주인을 찾아주는 나라가 되었다. 광포한 집단에 의해 공권력이 훼손될 때가 있지만 안전만큼은 제법 나비넥타이가 어울리는 국가다.
흉악범죄가 줄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검찰청 자료에 따르면 살인의 경우 2012년 1,022건이던 것이 2021년에 692건으로 감소했고 강도 발생은 2,626건에서 511건으로 낮아졌다. 십 년 동안 우리 사회의 치안이 크게 개선된 셈이다. 문제는 인간이길 거부하는 변종들을 사회로부터 어떻게 격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사실상 사형폐지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26년째 사형을 집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물론 미국과 일본 등에서도 사형이 시행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인권이 하늘에 닿아 있다.
근대국가 성립 후 사형제에 대한 찬반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먼저 논쟁의 화덕에 불을 붙인 이는 형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Cesare Beccaria)다. 그가 1764년 스물여섯 청춘에 쓴 『범죄와 형벌』의 논변은 단두대를 녹여 괭이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형제를 반대하는 데는 나름의 논리가 있다. 형벌은 교화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사형수 최후의 날>에서 사형수의 독백은 그도 우리와 같은 심장을 가진 인간이며 범죄의 사회적 책임을 묻게 된다.
사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주장은 위하력(威嚇力)에 대한 의문이다. 그들은 죄인에게 본때를 보여줘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 오류라는 점을 강변하기 위해 유리한 통계를 골라내놓는다.
오판과 악용의 가능성도 거론한다. 법의 정의는 무결점을 요구하며 사형의 불가역성은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단 한 사람의 무고한 시민을 억울하게 만들지 말라'는 법언(法諺)에 맞닿아 있다.
생명권에 대한 다툼은 좀 더 철학적이다. 같은 인간이 타인의 생명권을 박탈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천부인권설에 기초한다. 많은 종교인이 사형제 폐지에 찬성하는 근본 이유이기도 하다. 사형수 스스로 천부인권을 부정하여 살인을 저질렀더라도 그건 하늘을 모른 소치임으로 구원의 대상일 뿐이다.
교도업무를 해본 다수의 사람은 사형제를 지지한다. 세상에는 교화되지 않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법조인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사형폐지론자였다가 사형제를 지지하는 저서를 내기도 했다.
일반 시민의 부유하는 여론은 늘 가변적이다. 누군가 누명을 쓰고 옥살이하다 진범이 잡혀 풀려났다는 뉴스를 보면 사형제를 반대하다가도 참혹한 살인사건을 접하면 왜 사형집행을 하지 않느냐고 열을 낸다.
사형수들은 대개 구치소에 수용한다. 그들에겐 당연히 노역이 없다. 사형이 집행되지 않는 한 미결수이기 때문이다. 치밀한 법 논리를 탓해봤자 소용없다. 밥때가 되면 인육을 먹은 사형수에게도 고깃국을 먹인다.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사형수 한 명당 한 해에 삼천만원 정도가 쓰인다.
베카리아의 논변을 빌리면 사형제는 폐지해야 옳다. 사형수도 인간의 외피를 썼기 때문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도 사형은 합당한 제도가 아니다. 어쩌면 사형집행이야말로 사람의 영혼이길 거부하는 종들에게 삶의 고통을 줄여주는 자비다. 따라서 스스로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존재라면 분별없는 자비는 거두어져야 한다.
‘인간의 정신은 극단적 고통일지라도 일시적이라면 비교적 견뎌낼 수 있다. … 잠시의 고통에 대해서는 전력을 다해 버텨내지만, 장기간 반복되는 지루함과 비참함을 이겨낼 만한 탄력성은 갖고 있지 않다.’ 『범죄와 형벌』에 있는 문장이다.
사형제 폐지에 찬성하는 조건이 명확해졌다. 먼저 참회란 단어를 모르는 사형수에겐 감형이 없어야 한다. 지금처럼 울타리에 마냥 가둬놔서도 안 된다. 악마의 악성은 좀체 교정되지 않으며 그들에겐 가죽이 탄력성을 잃을 때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함과 비참함을 겪도록 해야 한다. 시시포스의 바위를 굴리게 하는 것은 응보의 폭력을 위탁받은 국가의 책무다. 뼈가 녹는 고통만이 짐승의 머리를 가진 자에 대한 구원이라면 너무 잔인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