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언니는 늑대라고 했고 나는 여우라고 했다
한 말의 알곡에서 피를 골라내는 겨울 밤, 뚫린 창호지 구멍사이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두려움이 밤공기를 휘감는다 문래동 주물공장에서 흰 그림자로 돌아온 오빠가 함께 숨는 듯했다 적막 곳곳에서 환청 돋아난다 쇳물 튄다
입구만 있어 소멸과 재생을 반복하는 불안의 뒤
잠긴 문 속에는 왜 문이 없을까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올려다보며 말하지 못한 날들이 한 소쿠리 가득한데 수년 동안 구석만을 찾는 쾡한 눈을 한 당신은 어쩌면 주린 음성의 늑대, 끙끙거리는 소리 요동칠 때마다 창문 들썩거린다 허공이 깨어난다
축 처진 어깨는 매일 쑤시는 징후로 비를 맞는다
당신이 가지 못한 어디든 찾아갈 수 있다고 슬픔이 늑골을 첨벙거리며 물길을 낸다
단장(斷腸)의 개화, 묘지 앞 달맞이꽃 한아름 핀다 한아름은 어제를 기억하며 건너온 별들의 파랑이기도 하지 손가락 끝에서 넘실거리는 송이들
죽곡리 구판장 앞 강도수배전단지에서 붉은 향기 뿜을 때마다 차라리 갇혀서 갇히기 바라는 갈망처럼 깊어진 눈, 반음반양半陰半陽 회한의 족적 따라 당신을 잃는 일은 혹여 당신을 살리는 길
해질녘 둥근 산마루는 모든 일이 사라지는 유일한 휴식이다
대낮이면 우리는 동영상 화면을 켠 채 아무렇지 않게 태연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대화를 섞고 몸 반쯤 가린 쉼표로 숨을 쉬며
구름과 담쟁이 넝쿨에 걸린 병실 창문 바라보면서
늑대의 울음에 전력 다해 동조하지 않는
난 아직, 여섯 살이다
멈춰진 발자국을 또박또박 옮기는
2023년 김포문학상 우수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