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대간 [ 白頭大幹 ]
* 위 치 : 경북 상주 , 충북 영동
* 산행일시 : 2023년 12월 09일
* 교통편 : 안내산악회
* 회차 : 대간 74-13
* 산행코스 : 백학산(인증)~윗왕실~개터재~회룡재(인증)~큰재~국수봉~용문산(인증)~추풍령(약34.8km/14시간)
- 출발지점 : 경북 상주시 모서면 소정리 산 84-1
- 도착지점 :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추풍령리 203-5 도계공원 주변
* 산행시간 : 02:32~14:13 [11시간40분] (휴식시간: 1시간25분)
* 산행속도 : 3.57 km/h
* 산행거리 : 36.63km
* 날씨 : 맑음
* 기온 : 7~15℃
* 약수터 정보 : -
* 조망점 : 정상
* GPX 트랙 : 별도 첨부
* 산행 난이도 : 고도차: 보통 , 거리:보통
* 주요 볼거리 : 능선길. 정상 조망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 부근에서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에 이르러
우리나라 땅의 근골을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이나라 골격의 틀 중에서 장대하고 당당한 산줄기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길게 연결된 장대한 산줄기로 그 길이는 약 1,400km이나 남한에서 종주할 수 있는 거리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향로봉까지 약 684km이다.
그래도 장거리인데
겨울날 날씨가 제법 따뜻하여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행을 하였다.
저번까지만 해도 추워서 힘들었는데.
오늘은 반장갑에 여름옷을 입고서 산행을 하였다.
하지만
몸이 추운데 적응을 했다가 갑자기 더워지니 적응이 쉽지 않은 것 같다.
체력소모가 조금 더 빠른 것 같고.
또 물도 더 필요한 것 같다.
준비는 했지만 그래도 체력 소모가 더 큰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항상 겨울 산행은 기온을 잘 확인하여 산행 준비를 해야 하는 것 같다.
개머리재에서 산행이 시작된다.
개머리재에는 특징이 아무것도 없다.
그냥 지나치는 재정도이다.
양 옆으로 펼쳐진 포도밭이 개머리재이다.
오늘도 서울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인 경북 상주에서 시작을 한다.
이곳 개머리재는 청주상주 간 고속도로를 타고서 화서 IC에서 내려와 내서면 쪽으로 하여 안심산 동쪽으로 길을 잡아서 올라온다.
[개머리재(소정재)] 290m
모서면 소정동과 대표동(일명 함박골)을 잇는 도로로, 개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소정재라고도 부른다. 소정동은 산 중복에 위치하여 식수를 길어 올려야 했기 때문에 우물을 길어 올린다는 뜻의 소정(召井), 대표(大杓)동은 이곳 지세가 북두칠성의 자루인 두 병이 능히 될 수 있다는 뜻에서 부른 것이라 한다.
잠깐 포도밭을 지나서 좌측 산으로 백두대간 길로 접어든다.
처음 300M 고지에서 시작하여 백학산 617.7M까지 짧은 거리를 가파르게 오른다.
아마도 오늘 산행하는 중 2번째 가파른 등산 코스이다.
이곳 상주 괴산 쪽은 정상석이 참 아담하다.
이곳 백학산도 아담한 정상석이 있다.
[백학산] 615m
산 주위에 백학(白鶴)이 날아와 앉는 모습이 마치 설산처럼 하얗다 하여(산을 하얗게 덮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산행 대장은 뒤에서 조금 느린 산우님들과 같이 산행을 하고.
내가 제일 앞에서 선두로 길잡이를 하고 있다.
내 속도보다 30% 이상 속도를 줄여서 다 같이 산행을 한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 중 선두에는 10여 명만이 함께 한다.
속도를 줄여도 사람마다 페이스가 틀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선두와 뒤쪽과는 벌써 약 300M 이상 떨어진다.
이곳에서 첫 번째 인증을 하고서 또다시 출발을 하는데.
이곳 백두대간 등산로는 평탄한 둘레길 같은 길이라서 편하게 산행을 할 수 있다.
지점거리표
신의터재 4.4KM-지기재 2.6KM-개머리재 4.1KM-백학산-개터재 6.1KM-회룡재 1.5KM
개머리재.!
다음 개터재..!
개에 관련된 2개의 고개를 넘어간다.
이곳 등산로에는 이렇게 국가 지정번호가 많이 표시되어 있다.
이정표마다 이렇게 GPS 국가 지정번호가 표시되어 있다.
욋왕실재는 상주시 백학산 남동쪽으로 효곡리에서 소상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예전에는 마을과 마을을 넘는데 이렇게 가까운 산능선을 넘어가곤 했다.
지금은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이런 고갯길을 이용하지 않고서 도로를 이용하여 옆마을로 이동을 하게 되니
예전과 다르게 이런 재, 고개들이 발달하지 않고 이름만 남아 있다.
[윗왕실재] 400m
산세가 왕이 기거하는 왕궁과 같다 하여 '왕재'라 하였으나, 민초들이 함부로 왕을 입에 올리지 못하던 시절이라 뒤에 '실'자를 붙여 왕실재가 되었다 한다.
아마도 예전에는 이곳 고갯길에서 옆마을 사람들과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이런저런 소통과 잠깐은 간식을 먹기도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아래표를 확인하고 저의 카페에 가면 국가 지정번호에 대하여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누리사랑의 산이야기 | 국가지점번호를 다음지도(카카오맵)에 표시하기 : 2020-05-14 - Daum 카페
한 칸은 100Km X 100Km로 되어있습니다.
100km를 m로 환산하면 100,000m입니다. 이 단위를 10,000으로 나누어서 또 작은 칸들을 만듭니다.
즉 10m 간격으로 칸이 만들어져 가로, 세로로 각 4자리 번호를 부여하게 됩니다.
설악산대청봉 : 라아 8485 1333(기준점에서 동쪽 384.85km, 북쪽 713.33km지점)
개터재는 왓왕실재에서 약 3.7KM 지점에 있는 고갯마루이다.
개터재를 옛 고개라고도 하나보다.
[개터재] 380m
유용하게 식량을 제공한 날짐승들이 많아 개터재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과, 산세가 마치 개들이 모여 살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또한 부근의 봉산마을, 효곡마을, 왕실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라 해서 봉산재, 효곡재, 왕실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블랙야크 2번째 인증지인 회룡재에 도착을 했다.
회룡재 340M이다.
이곳은 욋왕실재에서 도로를 따라서 내려와서 저수지 상부에서 좌측으로 올라오면 이곳 회룡재에 쉽게 접근을 할 수 있다.
개터재까지는 1.7KM
큰재까지 3.9KM
공성봉산 600M
지점거리표
신의터재 4.4KM-지기재 2.6KM-개머리재 4.1KM-백학산 6.1KM -개터재 1.5KM -회룡재-큰재 3.9KM
[회룡재] 340m
마을 뒤의 회룡산이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마치 용이 뒤돌아보는 듯한 형상이라 하여 回龍 재라고 한다.
아직 큰재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다.
지금 시각이 06:54분 일출까지도 약 30분 정도 남아 있다.
동쪽으로 하늘이 밝아온다.
큰재에 도착을 했다.
이곳은 백두대간교육장이기도 하다.
이곳 쉼터에서 아침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서 산행을 했다.
일출이 시작되었는데.
숲에 가려서 깨끗한 일출을 오늘도 보지를 못했다.
백두대간 샏태교육장이다.
상주시 공성면 우하리에 있는 곳 큰재이다.
이곳 생태교육장은 백두대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제공하고 보호와 보전의 당휘성을 교육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고 한다.
큰재..!
백두대간은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인식체계이며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금강산,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는 한반도의 중심산줄기로서 총길이는 약 1,400KM에 이른다.
1 대간 (백두산-금강산 설악산 속리산 지리산)
1 정간 (정맥정간 (원산-서수리곶산)
13 정맥 청북, 청남, 해서, 임진북예상남, 한북, 한남, 한남금북, 금북, 금남, 금남호남, 호남, 낙동, 낙남,
정맥은 산이름으로 된 것 백두대간 장백정간 2개이고 지방이름으로 된 것은 호남정맥, 해서 정맥 2개가 있다.
10 대강으로 두만, 압록, 청천, 대동, 예성, 임진, 한강, 금강, 낙동, 섬진강이 있다.
[큰재] 320m
해발 300m가 겨우 되는 영동군 모동면에서 상주시 공성면으로 넘어가는 2차선 아스팔트 고갯길이다. 공성면의 3번 국도와 모동면의 977번 지방도로를 연결하는 920번 지방도로가 백두대간의 주능선을 가로지르는 곳이다. 예전에 고갯마루에는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었고 폐교(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와 민가 한 채가 마주보고 있었다.
지금은백두대간 숲생태원이 들어서 백두대간 생태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미 떠오른 아침 햇살을 담아본다.
가는 대간길은 이렇게 삭막하기만 하다.
봄, 여름을 거쳐서 초록의 나뭇잎들은 가을 단풍을 물들이고서 겨울로 가는 길에 낙엽을 다 떨어트리고
죽은 나무처럼 삭막한 길로 바뀐다.
온 길에 산아래에 공성면 쪽에 저렇게 안개가 드리운다.
멀리 큰재를 담아본다.
조망이 그리 잘 되지는 않지만 멀리 큰재에서부터 그 뒤로 백학산까지 잘 조망이 된다.
오늘 가는 길 중 가장 가파르고 높은 봉우리 국수봉 웅산이다.
큰재에서 가파르게 올라야만 한다.
민영봉이라 하고 683봉이라 하는데 지도에는 표시가 없는 봉우리이다.
저 앞이 국수봉인 듯하다.
몇 번을 가파르게 올랐다가 잠시 평지를 걸어서 다시 오르기를 여러 번 한다.
정상석에는 웅이산 795M으로 표기되어 있다.
힘들게 올라서 마지막 고래를 넘는다.
[국수봉] 763m
충북 영동, 경북 상주의 경계를 이루며 백두대간중 추풍령 - 큰재구간에 속해있으며 큰재에서 남쪽방향으로 약 4km 지점의 능선상에 솟은 산이다. 국수봉에 서면 상주의 너른 평야와 백학산. 서산, 기양산, 갑장산, 묘함산, 황악산, 민주지산등 주변의 산들이 전개되고 날씨가 좋은날이면 백두대간 상주, 문경, 김천구간과 소백산까지도 조망된다. 국수봉은 웅산(熊山), 용문산(龍文山), 웅이산(熊耳算) 또는 곰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 정상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이고 아울러 낙동. 금강의 분수령이므로 국수(菊水)라 한 듯 하고 웅신당(일명 용문당)이라는 대가 있어 천제와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의 웅이산과 같이 시초(蓍草)가 난다고 하여 웅이산이라고 하며, 상주의 젖줄인 남천(이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 掬水(움켜쥘 국)와 菊水(국화 국)가 정상에는 혼용되어 쓰이고 있으나, 의미상 정상석의 국수(掬水)가 맞는 듯함.
무좌골산으로 향하는데 청운봉을 거쳐간다.
국수봉에서 용문산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게 내려가야만 갈 수 있다.
오늘은 이곳 등산로 주변으로 벌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벌목은 아니고 죽은 나무 필요 없는 넝쿨등을 정리하시는 분들이 제법 많이 계신다.
저곳 높은 곳 뒤쪽으로 웅이산이다.
벌써 용문산 정상에다 도착을 했다.
용문산에 잠깐 오르막을 오르면 된다.
멀리 웅이산 조망이 잘 된다.
이곳 대간길도 조망이 거의 없는 곳이다.
오늘의 마지막 인증지은 용문산에 도착을 했다.
이곳에서 조금 처진 산우님들을 기다리며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장거리는 어떻게 쉬고 페이스 조절을 하느냐에 따라서 체력 소모가 많이 틀리다.
[용문산] 710m
1800년 무렵 박생이란 유생이 산세를 보고 龍門山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1940년경 나운몽 목사가 입산하여 근처에 기도원(애향숙)을 세운 뒤, 일명 용문산 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곳이다. 서울과 부산 사이 바로 중간에 위치하고, 영남과 호남의 분계선이며, 서북쪽으로 낙동강이 흘러 남북 양대 강의 분수령이 되는 산의 특성으로, 남한 중신에 위치한 소위 "성산"으로 파악한 것이다.
초창기 애향숙은 신앙적인 목적보다 일제하의 설움에서 오는 계몽운동의 일환으로서 출발하였다가 이후 애향숙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기도원 운동으로 면모를 바꾼 것이라 한다. 현재 전국 3만여 명의 신도가 연중행사로 기도대집회를 열고 있다.
이제 추풍령을 향해서 간다.
저 앞으로 금산이 아닌가 한다.
아니 무좌골산인가.
무좌골산인 듯하다.
제법 높이 보이지만 정작 산은 항상 높은 것 높으면 오르면 되지 생각을 가지고 산행을 한다.
그래야 편하다.
어..! 높다. 언제 오르지 그렇게 생각하면 더 힘들어진다.
하지만 산이 있으면 오르면 되고 또 재가 있으면 넘으면 된다.
편하게 생각하면서 산행을 하게 되면 힘도 조금 덜 들고 나름 이런저런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무좌골산이다.
아직 봉우리 하나가 남아 있지만
그래도 오늘 산행이 거의 다 끝난 것 같다.
작점고개이다.
등산로 아래에 있는데.
이곳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팔각정이 있어서 잠깐의 휴식과 함께 사진을 담았다.
[작점고개] 능치재 340m
성황뎅이 고개, 여덟마지기 고개라는 별칭도 있다 하며, 김천 어모면에서 추풍령으로 넘어가는 한적한 고개다. 작점고개란,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에서 딴 것이며, 여덟마지기 고개란, 충북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여덟 마지기 농사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고갯마루 근처에 성황당이 있는 고개라 하여 성황뎅이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정작 고갯마루 약간 아래 김천시쪽 정자에는 '능치쉼터'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고갯마루 아래 능치마을의 이름을 딴 것이다.
대간 종주 자료에 대부분 작점고개라 적혀 있는 것은, 초창기 대간 종주 취재팀들이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작점리 마을은 충북 최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부터 유씨가 자리잡은 마을로 소백산 줄기이며 마을 뒷편에는 난함산 상단에 국영통신 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의 유래는 200여년전 전국에 제일가는 유기 생산 공장이 작점리 전 지역과 김천시 봉산면 태화동 일대까지 공장이 분포되어 있어 유기점포 판매상인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새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새'작'자의 "雀"과 유기점포가 많아 "店"자를 따서 작점이라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장수하는 마을로 손꼽혀 있다.
영동쪽의 작점 마을이 김천쪽의 능치 마을보다 가깝긴 하나 이 고개를 살뜰히 보살피는 곳은 영동이 아니라 김천 사람인 것 같다.
63기에서도 이곳에서 잠시 쉬고서 무좌골산으로 해서 올랐는데.
이곳 작점고개가 용문산에서 가깝다고 생각을 했는데 제법 멀었던 것 같다.
이 지도는 충청도의 등산로를 표시한 것이다.
작점고개에서 오르면 이렇게 임도가 나온다.
이곳 임도 좌측으로는 축사와 함께 분료처리장이 있어서 냄새가 정말 심하다.
이곳 임도는 등산로를 돌아서 올라가는 길이 있고 임도 구불길을 잘라서 직선으로 가는 길도 있다.
임도를 올라가면 이렇게 백두대간 등산로로 접어드는 길이 있다.
사기점 고개를 넘어간다.
산우님들이 힘들어하기도 하고
저녁에 잠을 거의 자지 못하였어서 잠깐 10분의 휴식을 취한다.
잠깐 눈을 붙이는 산우님도 있고 불나는 등산화를 벗고서 잠시 꿀 같은 휴식을 취한다.
날씨가 더워서 이제껏 물 한 병으로 가능했는데 오늘은 750ML 2병을 가지고 왔는데.
산우님이 힘들어하여 한 병을 주고서 목마려운 것을 껌으로 대신해서 견뎌본다.
그래도 내 체력에 비하여 조금 천천히 가기 때문에 물이 많이 필요로 하지 않았고 날머리가 거의 다 왔기 때문에
어려움은 없다.
[사기점 고개] 390m
고개 남쪽의 김천시 봉산면 사기점리는 옛날 사기를 구워 팔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사기점고개다. 이 고개 북쪽 너머는 영동군 추풍령면의 작점리다.
마지막 봉우리에서 2번째 들기산이다.
이곳 들기산에서 하나 금산인가 넘으면 추풍령이 나온다.
금산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추풍령 저수지 부분의 풍경이다.
일부 산우님은 힘들어 작점고개에서 저수지길을 따라서 추풍령으로 하산하신 분도 계셨다.
아무래도 장거리가 힘든 분도 있으니 체력에 맞게 산행을 하는 것이 좋다.
추풍령면 쪽 풍경이다.
금산 384m 표지판이다.
이곳 금산은 북쪽으로 절개되어 있는데 석재 채취를 하기 위함이다.
드디어 오늘의 날머리 추풍령에 도착을 했다.
그래도 종료 시각인 오후 4시 30분에 2시간 15분 먼저 내려왔다.
추풍령면식당에서 산우님들은 올갱이국과 난 짜글이 찌개를 먹었고.
다들 일찍 내려와서 30분 정도 먼져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추풍령] 221m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 경부선 중의 최고점으로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자 한국의 중부와 남부의 경계를 이룸. 높이 221m. 낮고 완만한 고개지만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옛날부터 나라에 전쟁이 있을 때마다 이 고개에서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며, 예로부터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지금도 경부선 철도의 추풍령역이 있고, 4번 국도가 통하며,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점으로 추풍령휴게소가 있다. 추풍령에서 갈재구간 산행기점인 당마루 새마을 앞에 추풍령 표석이 있다. 추풍령 표석은 88올림픽 성화봉송로를 기념으로 88년 9월 5일 영동군에서 세운 것으로,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가수 남상규氏 노래 구절을 적어 놓았다.
그 옛날 남쪽지방 사람들은 한양으로 과거를 치르기 위해 또는 장사를 하려고 말을 타거나 걸어서, 또는 등짐을 짊어지고 달구지를 끌며 이 산등성이를 넘어 다녔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언 발을 절룩거리며 이 고개를 넘어 남으로 한 많은 피난길을 떠났을 것이다.
원래는 추풍령 일대가 분지이다 보니 인근의 지역보다 가을물이 일찍 들고, 고개치고는 발달한 분지 덕에 가을 걷이가 풍성하다 하여, 秋豊이라 했으나, 오늘날에는 대체로 秋風으로 불리고 있다.
- 군사적 요충지
임진왜란 때에는 군사적 요충이 되어, 의병장 장지현(張智賢)이 추풍령 오룡동에서 의병 2천명을 이끌고 왜장 구로다 나까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 2만 명을 맞아 분전 끝에 물리쳤고(1차 전투), 다시 밀려온 4만 명의 왜군에게 패하여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장지현은 영동의 매천리에서 태어나 한때 관서의 변방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왜군의 선봉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이미 한양의 성문을 열어젖히던 임진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 영남과 호서의 접경, 당마루
추풍령 면소재지가 있는 작은 산읍이다. 본래는 경상도의 금산군(김천)을 따르던 마을인데 1906년에 충북의 황간군이 되었다가 훗날 황금면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동군이 되었다. 오늘날엔 지방 자치가 되어 황금면보다는 추풍령면이 두루 소문을 얻기에 이롭다고 그렇게 바꾼 것이 이제 칠팔 년이 지났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이 으레 그렇듯 물이 적어 불편하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여 곡식보다는 과수가 잘 된다. 물이 적고 토지가 메마르던 옛날에는 그저 메밀 농사가 고작이었다. 고갯마루가 온통 새 하얀 메밀꽃이었으니 추풍령의 다른 이름 백령(白嶺)은 그리하여 생겨났다. 일제 시대 사기점 골짜기에 저수지를 파 겨우 논농사를 지었으나 이제는 너나없이 작파하고 밭이란 밭은 모두 포도가 주업이다.
명색이야 백두대간의 고개지만 추풍령은 그리 높지 않은 탓에 가다보면 어느 틈에 그만 평지처럼 슬그머니 재를 넘는다. 소문난 고개치고는 별 볼거리가 마뜩찮고 흔한 당집이나 당목 한 그루도 없는데 웬 일인지 마을의 이름만은 예로부터 당마루라 불렀다. 마을을 둘로 쪼개어 경상도와 충청도가 나뉘었으니 당마루 역시 경북의 당마루와 충북의 당마루가 서로 생겨났다. 반쪽은 김천 시민이요, 반쪽은 영동 군민이다.
고갯마루에 배나무를 심은 작은 언덕 밭이 옛날 주막이 있던 자리다. 배나무 밭이 끝나는 밭둑에 도계를 알리는 경계석이 서 있는데 그 기둥돌을 사이에 두고 한때는 경상도 주막과 충청도 주막이 나란히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밤이 아쉬운 경북의 술꾼들이 당마루에 올라와 경상도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자정이 되면 통행금지가 없는 충청도 주막으로 건너오곤 했다는 일화는 두루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추풍령은 언제나 그렇게 구름이 모여들고 바람이 술렁대는 고개였다. 조선 시대에는 역과 원으로 이어진 관로(官路)였으며 일제 시대에는 경부선을 오가는 기차가 으레 빠짐없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까닭이야 숨가쁘게 고갯길을 넘은 증기기관차가 물을 보충하기 위함이었지만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자고 가는 곳이니 기차인들 그 냥 갈 수 없었을 터이다. 마땅히 역은 번창하고 많은 일본인이 모여 살았던 탓에 유곽의 규모 또한 매우 컸다고 한다. 흙먼지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온 목탄차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도저히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바로 추풍령이었다.
- 내륙 한양길의 절반, 반고개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 편에 실린 조위(曹偉 1454-1503)의 글에는,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 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곳을 지나감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하였다. 오늘날에 이른바 영남대로라 부르는 문경 새재 길에 견줄 만큼 추풍령 길의 통행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위의 글은 그 목적이 금산군 동헌의 중수기였던 탓에 일정한 지역에 대한 부풀림의 한계를 안고 있다. 실제로 추풍령 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경 새재에 비하면 턱없이 한가로운 길이었다.
가령,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9개 국도는 모두 추풍령과는 무관하게 이어진다. 다만 문경 새재를 넘어 유곡역에서 제 4로(영남대로)와 갈려 상주를 지나 통영으로 가는 제 5로와, 천안, 공주로 이어지는 제 6로에서 각각 지로 (支路,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날의 지방도로이다)를 내어 추풍령을 다스렸다. 그것은 추풍령이 다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개였음을 의미한다. '청주를 경유할 때'라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추풍령은 결코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역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일본의 사신은 물론 영남과 한양을 오가는 나그네에게 있어 추풍령은 그저 하나의 사잇길에 불과하였고, 그것은 언제나 특별한 목적이나 형편에 따른 선택의 문제였다.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10리 남짓한 신안리에는 반고개란 이름의 고개가 있다. 추풍령에서 모동으로 넘는 고개인데 오랫동안 발길이 드물다가 최근에 포장길을 내어 두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부쩍 늘었다. 신안리 사람들은 지금도 반고개가 한양과 부산길의 절반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믿는다. 마을이란 으레 저마다의 유래와 신앙을 갖추기 마련이니 이는 반드시 깊이 따져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다. 또한, 지금이야 경부선을 중심으로 대전과 대구, 경주를 연결하는 4번 국도가 추풍령에서 황간과 영동을 지나 대전으로 통하지만, 옛길은 분명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반고개를 넘어 보은과 청주로 올라갔다. 어떤 경로이건 추풍령을 넘었다면 그 길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 경부고속도로의 으뜸 쉼터
추풍령을 두고 흔히 말하기를, 부산을 비롯한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라 하는 것은 다만 오늘날의 이야기다. 그 길이 그만한 대접을 받게 된 까닭은 올곧게 경부선 철길과 경부고속도로 덕택이다. 역마의 시대가 문명의 시대로 바뀌면서 전에는 볼품없던 고을이 번성하고, 전에는 번거롭던 고을이 그저 한적한 시골로 변하였다. 충주와 청주가 서로 그 운명을 바꾸었고 공주와 대전이 또한 그러하였다.
추풍령은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이라는 이유와 경부고속도로가 넘는 가장 큰 고개(사실은 작은 언덕이라 해야 옳지만)라는 까닭이 뭉쳐 바야흐로 오늘날 가장 부산한 고갯마루가 되었다. 그 분수령은 변함없이 백두대간이다. 옛날엔 영남대로로 백두대간을 넘어가던 문경 새재가 조선 팔도 고개의 맏형이었다면, 오늘날엔 경부 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추풍령이 당연히 전국 고갯길의 으뜸이 되는 셈이다. 인물의 역사가 반드시 그 됨됨이의 깊이와 넓이만으로 전승되지 않듯, 고갯길의 역사 또한 꼭 그 높이와 크기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고갯길의 역사를 따질 적에 가장 중요한 잣대는 오로지 백두대간이다.
반도 이남의 동서가 만나는 고개, 추풍령 고갯마루는 그렇게 오늘도 인파로 출렁거린다. 한국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 그 고갯마루에 들러 쉬어가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온갖 종류의 교통 수단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온갖 차림의 나그네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불과 해발 200미터의 고개. 저 쟁쟁한 백두대간의 여느 고갯길에 견주면 그저 작은 구릉에나 불과하지만 추풍령은 이미 그 모 든 고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추풍령은 '국토의 대동맥'(경부고속도로)이 '국토의 척량'(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단 하나뿐인 고개이기 때문이다.
- 추풍령과 괘방령
옛날 과거길 보러갈 때 괘방령으로 넘어가면 장원급제 방이 내걸렸고 추풍령으로 넘어간 벼슬아치는 추풍낙엽처럼 벼슬자리 떨어졌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 괘방령과 추풍령.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추풍령으로 쳐들어갔다가 괘방령으로 쫓겨났고, 한국내전 때는 북한군이 추풍령으로 남진했다가 괘방령으로 퇴각했다는 역사가 전해져 오는 이 두 고개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순간에 수많은 차량들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가 하면 괘방령은 한적하다. 진군과 퇴각, 번다함과 적막함.
추풍령면 공원이다.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워을 뒤돌아 보는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 (남상규노래)
GPS 트랙
본 산행의 트랙
설명이 포함된 트랙
|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기온이 올라서 산행하기는 좋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날씨가 추웠다가 갑자기 더워지니 몸 적응이 쉽지 않네요.
생각보다 체력 소모도 크고 물도 더 먹고.
대처하여 가지고 가기는 했는데.
그래도 날씨 변화가 심하니 더 힘든 것 같더라구요.
그래도 즐겁게 잘 다녀왔습니다.
걷기 좋은 구간이 큰재 지기재 두번정도 다녀온 기억이나네요
지난주 낙남 다녀왔는데 날씨가 초가을처럼 따뜻하고 걷기 좋았네요
비온후 이제는 겨울날씨의 본심을 보여주겠지요
늘 안산 즐산 하시는 모습 넘 멋지네요~~
그러시군요..!
계절에 따라서 산 풍경이 틀린것 같아요..!
봄철에 철쭉이 이뻣던 기익이 있는데..
저희는 갑자기 더워져서 물이랑 그런것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이번주에 지인 백두대간 완등으로 마산봉가는대 폭설이라고 하여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