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1)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는 미국의 「존 스타인벡」이 쓴 소설이다. 그는 「윌리엄 포크너」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계승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이 소설은 1939년도에 출간되었다. 작가는 그 자신이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 당시 경제 공황을 전후한 미국 사회의 시대상을 묘사한 일종의 고발소설이다. 한마디로 농장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출간이 되자마자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대지주와 은행 및 경찰의 반발을 사게 되어 금서(禁書)로 지정되었고 출간된 책은 모두 불태워졌다. 그러나 작가는 그 다음 해에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존 포드」 감독의 영화는 그의 대표작이자 역사상 최고의 영화목록에서도 빠지지 않는 작품이 되었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오클라호마」에 사는 가난한 농부 「톰 조드」 일가는 모래폭풍에 의한 피해와 대자본에 의한 농업 기계화로 경작지를 잃는다. 그들은 대지주들의 광고에 희망을 걸고 새로운 땅 「캘리포니아」로 길을 떠난다.
낡은 자동차에 모포와 취사도구만을 실은 채 산맥을 넘고 사막을 건너 2천 마일이 넘는 고난의 여정에 오른다. 이동 중에 조부모를 잃지만 매장할 여유도 없이 시체를 차에 싣고 가다 낯선 곳에 묻는다. 지친 형과 여동생의 남편은 일행을 떠나간다. 성경의 출애굽기처럼 고향을 떠나 희망의 「가나안 땅」인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지만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 신세가 된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지만 일거리가 충분한 희망의 땅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오키’(오클라호마 촌놈)라고 무시당한다. 판로가 막힌 채 과잉 생산된 농작물, 넘쳐나는 일꾼들로 임금을 깎고 또 깎는 불공정한 현실, 가격 유지를 위해 농작물을 강에 버리는 농장주들, 그것을 비호하는 세력가와 은행자본가들, 굶주린 노동자들의 분노의 눈동자가 포도 알처럼 커간다.
「케이시」 목사는 이 비참한 노동자들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케이시」 목사가 피살되자 「톰 조드」도 노동운동에 뛰어들기 위해 집을 떠난다. 가족들은 일거리를 찾아 옮겨 다니다 여동생 「로즈(애칭은 로자샨)」가 사산하는 아픔을 겪는다. 어머니와 「로즈」가 그 지역에 닥친 홍수를 피해 언덕에 있는 헛간에 들어갔다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노동자와 아이를 만났다. 「로즈」가 누워있는 노동자의 머리를 안고 자신의 젖을 꺼내 물린다. “드세요. 드셔야 살아요.”
이 마지막 장면은 「루벤스」의 그림인 『Simon & Pero(일명, 로마인의 자비)』를 연상시킨다. 감옥에서 굶주림에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젖을 물려주어 빨아 먹을 수 있게 하는 이야기를 그린 명화다. 누구나 그 깊은 사연을 알고 나면 숙연한 마음이 든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하며 모든 미움을 용서하고 한마음으로 공동체가 되는 그 첫 걸음이다. 힘든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길이 서로서로에게 유익하고 최선의 길임을 침묵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명장면인 것이다.
소설은 30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조드」 일가의 전반적인 생활상이 당시 전반적인 미국의 사회상과 함께 서술되어 있다. 비참하고 열악한 미국 소작농들의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미국사회의 움직임이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나타난다. 「로자샨」이 굶주린 노동자에게 젖을 먹임으로서 비유되는 공동체의 삶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는 우리가 서로 더 이해하고 더 아픈 사람을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이 주변사람은 물론이고 나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작품의 전 과정을 관통하는 굳건한 어머니의 상(像)은 위대하기만 하다. 항상 어려운 문제 혹은 상황에 처할 때마다 현명하게 조언하고 가족을 중시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강한 추진력을 보인다. 역시 어머니는 강인하고 가정의 정점이 되고 있음을 행동으로 보인다. 물론 시부모님이 사망하고, 큰 아들과 사위가 제 갈 길을 찾아 떠나는 쓰린 이별의 아픔을 겪기도 한다.
작가는 「살리나스」에서 태어나 교사 출신의 어머니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 하면서 성서를 탐독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스탠포드 대』를 중퇴하고 고단한 삶의 현장으로 내몰렸다. 별장지기와 벽돌운반, 마차수리 같은 잡일로 떠돌았다. 암울한 청년기였다. 그래서 그는 늘 사회 하층에서 소설의 줄거리와 주인공을 골라냈다. 미국자본주의의 모순이 노동자, 농민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투영되는 스타일이다.
작가는 젊은 시절에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로 여행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가뭄으로 말라버린 땅에서 이자를 내지 못해 자본가에게 농토를 빼앗기고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캘리포니아」로 희망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 때 작가는 이주민들과 긴 여정을 함께 했는데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대표작 『분노의 포도』는 바로 그들의 이야기다.
“개미같이 일하면서도 굶주리는 노동자의 마음속에 영글어가는 분노의 포도, 캘리포니아 농장의 포도는 농장주의 것이고 먹을 수 없는 분노만을 일으키는 포도였다.”
“사람들이 강에 버려진 감자를 건지려고 그물을 가지고 오면 경비들이 그들을 막는다. 사람들이 버려진 오렌지를 주우려고 덜컹거리는 자동차를 몰고 오지만, 오렌지에는 이미 등유가 뿌려져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만히 서서 물에 떠내려가는 감자를 바라본다. 도랑 속에서 죽임을 당해 생석회에 가려지는 돼지들의 비명에 귀를 기울인다. 산처럼 쌓인 오렌지가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지켜본다. 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 간다.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 간다.”
이러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때문에 『분노의 포도』는 출간되면서 법정에 제소되어 금서가 되었지만 오히려 베스트셀러를 만들어준 기폭제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도시의 산업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났던 계층 간의 갈등이 여러 작품으로 나온 바 있다. 그 시절에 ‘공순이’, ‘공돌이’라고 불리면서 갖은 착취를 이겨내고 길러낸 자식들은 오는 날 전혀 다른 측면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어느 시대나 사회를 막론하고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마저 희생시켜 마치 선지자처럼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 일제하의 독립운동과 한국전쟁 시의 희생자 혹은 민주화 과정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사실은 이들도 그냥 현실에 안주하여 일생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음에도 이를 과감히 뿌리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 대다수는 그럴만한 용기와 지혜도 없이 수수방관했으면서도 그들을 비난하고 압박한다. 그러다가 일정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런 노력과 희생 덕분에 국가와 사회가 발전하고 개선이 되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오늘 날에도 이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무언의 압박과 비난은 멈추지 않는다. 진실을 외면하다보면 이익에 따라 양심마저도 은폐한다. 그러다보니 황당하고 진실과는 거리가 먼 억지 주장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멀쩡한 인물도 그런 주장에 편승하여 그동안 구축한 인간으로서의 깊은 신뢰도를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다. 실로 안타까운 일인데 특별히 조언조차 할 수 없고 소통조차 어려운 처지이니 씁쓸한 연민을 자아낼 뿐이다. 보이지 않는 각 계층 간의 장벽이 무너져 내리길 바란다. 그 날이 오면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보리라.” (2023.7.25.작성/9.1.발표)
※ 그동안 독자여러분의 안부를 묻습니다. 더구나 맹위를 떨친 무더위에 많은 고생을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상당 기간의 휴식을 마치고, 가끔씩은 글로서 보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