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소리치고는 참으로 살벌하다. 새벽 단잠에 빠졌던 아파트주민들의 창문 여닫는 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그만 좀 하시라는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남자와 여자는 아파트 정원에서 언어의 난투극을 벌인다. 창과 칼이 난무한다. 뒤이어 개가 짖자 동네 개들이 덩달아 짖는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사람과 개가 구별되지 않는 난장판이다.
우리 아파트는 여섯 개 동이 정사각형으로 동간 거리 구십여 미터를 유지하며 둘러 서 있다. 가운데 2층 전체가 정원과 어린이 놀이터, 운동 시설로 꾸며져 있다. 이와 같은 구조로 인해 전 세대가 정원을 공유할 수 있지만 큰 소란이 일어나면 울림통 역할을 한다. 성능 좋은 대형 스피커를 장치해둔 셈이다. 지금은 덜 하지만 입주 초기만 하더라도 휴가철이면 목메어 우는 개 소리로 잠을 설쳤다. 주인이 개만 두고 휴가를 간 것인지 길게 울어대는 소리에 관리직 직원들이 찾아가면 주인이 없으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개 한 마리가 짖으면 다른 개들이 연이어 짖는 통에 소음공해로 고역이었다. 햇수를 더할수록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의식도 바뀌어 소란은 줄어들었는데 이런 일이 생겼다.
새벽 시간 아파트 정원에서는 새벽잠이 드문 어르신들이 산책하고 운동기구를 이용한다. 때마침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주민과 마주치면 불꽃 튀는 신경전이 벌어지다가 큰 싸움으로 번지곤 한다. 개를 키우지 않는 주민은 어린이가 놀고 주민이 산책하는 곳에 개가 용변 보는 게 못마땅하다. 용변 뒤처리를 어찌하나 하고 눈여겨보는 사람들 시선이 달갑지 않다. 개에게 쏟는 정성의 반이나 제 부모에게 쏟는지 모르겠다며 질책한다. 개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산책조차 눈치 보며 해야 하냐며 반려동물과 사는 사람 마음은 조금도 몰라주니 야속하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는 말을 내세운다. 팽팽하게 날 선소리에 새들도 놀라 자리를 뜬다.
몇 해 전, 수술 후 일주일간 입원해 있는 중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하냐는 질문에 병원에 있다고 대답했는데 친구는 흘려들었다. 그때 친구는 수년간 키우던 강아지와 영원한 이별을 했기에 고통이 심했다. 나 역시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기에 친구인 나보다 강아지 잃은 슬픔에만 빠진 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보다 짐승이 우선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서운했다. 아니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강아지를 안은 여자가 엘리베이터에 탄다. 나를 향해 원망 어린 목소리로 하소연을 한다. 이 아파트는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며칠 전 일어난 소란을 아느냐. 그 당사자 가운데 한 명이 나다. 이른 새벽 강아지랑 산책하다가 어르신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다. 분명 강아지 똥을 비닐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어르신은 정원은 아이들이 노는 곳이니 병균이 득실거리는 비닐 속 오물은 당신 집에 가져가서 변기에 버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사건 이후 엘리베이터 안 공지문에는 <동물을 사육하는 사람들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개나 고양이를 사육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분비물이나 짖음에 각별히 주의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글을 본 그녀는 분노했다. 반려동물은 가족인데 어떻게 감히 사육이란 단어를 쓸 수 있냐는 말이었다. 무슨 뜻인지를 몰라 머뭇대는 내게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재차 강조했다.
“가족이라고요.!”
‘아 ~ 가족요, 그럼 육아?’
육아가 맞기는 하다. 눈만 마주치면 어르고 달래고 안아주고 업어주며 키우는 자식이나 다름없다. 씻기고 입히고 머리 묶고 신발 신겨 키우는 애틋함을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각종 영양제에 고급 먹거리를 챙겨주고 장난감도 수시로 교체해 준다. 유모차에 태워 산책시키고 외톨이가 될까 봐 놀이방도 보낸다. 그래도 더 해 주고픈 심정을 사람들은 알기나 할까. 요즘은 반려동물 아닌 반려 가족에게 진짜 사람 가족이 밀리는 형국이다. 남편 아침밥은 못 챙겨도 반려동물의 아침밥을 잊는다는 것은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정치인들 역시 동물복지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육아에 버금가는 반려동물 복지공약 하나는 끼워야 선거판에 어울린다. 반려동물의 놀이터를 확충하겠다. 동물 등록제나 행동 교육 전문인력육성 및 지원센터를 설립하겠다. 공공 동물 화장실 건립이나 반려동물 장례지도사를 육성하겠다고 한다. 반려동물의 진료비나 치료비의 법제화와 더불어 헌법에 동물보호 조항을 명시하겠다는 후보도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의 수는 점점 늘어난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고령화 사회가 될수록, 삶이 팍팍해질수록 외로움을 달래고 위안을 받을 무언가를 원한다. 그것이 동물이든 사람이든 애착하는 물건이든 정을 주고받는 교감이 필요하다. 사회 분위기가 이런데도 일반 사람들과 반려동물 가족들의 평화로운 공존은 힘들다. 동물과의 동거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반드시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본다. 동물과의 동거를 불편해하는 사람도 즐겁고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도 눈치받지 않는 사회는 어디쯤 와 있을까.
반려동물을 데리고 나올 때는 에티켓이 필요하다. 목줄을 놓쳐 사람을 놀라게 하거나 다치게 한다면 곤란한 일이다. 산책했던 발을 닦지도 않고 남의 가게나 집을 방문하여 무의식적으로 소파에 올려놓는다면 반길 사람이 드물다. 사람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만 분비물을 치운다면 반감은 더할 것이다. 반려견이나 반려묘와의 동거에 불편한 시선을 주는 사람은 동물이 아니라 동물과 함께하는 사람의 의식 부족을 질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배려심과 책임의식,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만 가진다면 서로 상대의 입장을 인정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지 않을까.
오늘도 여자가 녀석을 안고 산책을나간다. 얌전히 품에 안긴 녀석이 예전 같지 않다. 심장병에 걸려 수술했다는 말을 굳이 한다. 동물병원에서 수의사가 더 이상 해줄 게 없다며 당기는 음식이나 잘 챙겨주라 했단다. 반려동물도 병이 나니 사람과 다를 바 없나 보다. 생기라곤 없는 눈빛에 윤기 잃은 털, 바짝 마른 녀석을 보니 병든 아이를 보는 듯 애처롭다. 내가 이러할 진데 그녀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싶다. 반려동물과 사는 것을 두고 ‘사육’이라고 해선 안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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